2017-11-18
[법적증언⑨] 통일 대박'위해서는 반북·종북아닌 '친북'이어야
[법적증언⑨] 통일 대박'위해서는 반북·종북아닌 '친북'이어야
내가 '친북'인 이유
나는 '친북'이다. 법정의 판검사들과 강의실의 학생들에게 권유해온 대로, 남한의 온 국민에게도 호소한다. 친북적으로 되어달라고. 전쟁을 원치 않고 평화를 바란다면. 또는 무력통일을 추진하지 않고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면. 그렇다고 '빨갱이'가 될 필요는 없다. 물론 '종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여기서 '친북'이란 북한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뜻하고,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며, '종북'은 북한의 이념이나 체제 또는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친북'이나 '종북'이란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고 있기에 내 나름대로 한자를 풀어본 것이다. 참고로, 공산주의는 혁명을 통해 이루어지고 혁명은 피를 보기 마련이라, 피의 색깔 빨간색 또는 적색 (赤色)은 혁명이나 공산주의를 상징하게 되어, 공산주의자들이 속되게 영어로는 'Red', 우리말로는 '빨갱이' 또는 '적색분자(赤色分子)'로 불리게 되었다.
내가 친북이 된 것은 폭력을 거부하며 특히 전쟁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요, 온 국민에게 친북적으로 되어달라고 호소하는 이유는 바람직한 국가정책을 따르며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다. 1980년대부터 우리 남한의 공식적 통일정책은 북한과 화해협력을 통해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증언하게 되면 북한의 통일정책을 거의 빠짐없이 다루게 되고, 그와 연결해 남한의 통일정책도 건드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판검사들에게도 친북을 권유하게 되기에, 남한의 통일정책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 남한 통일정책의 변화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무력 북진통일'을 내세웠다. 북한과 전쟁을 치렀던 터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야당 지도자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선 건설 후 통일'을 내세우며 궁극적으로 '승공통일'을 추구했다. 그 무렵 남한의 국력이 북한보다 뒤지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먼저 경제성장에 치중하여 힘을 기르고 나중에 '공산주의를 무찔러 승리하는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1982년 전두환 정부는 통일헌법을 만들고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민주공화국을 세운다는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발표하였다. 남북 대표들이 '민족통일 협의회의'를 구성하여 거기서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확정된 통일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보완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원칙 아래 공존공영, 남북연합, 단일민족국가의 3단계를 거쳐 통일을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1994년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흔히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라고 불리는데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화해협력, 남북연합, 완전통일이라는 3단계를 거쳐 통일을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통일방안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받아들였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내세웠던 '햇볕정책'은 통일정책이 아니라 대북정책이었다. 북한과 관계 개선을 이룬 뒤에 통일을 준비해야지, 적대 관계도 풀지 못하면서 통일정책을 마련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취지였다.
남한의 공식적 통일정책은 전두환 정부가 형식적이나마 틀을 짜고, 노태우 정부가 체계적으로 다듬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살짝 고친 것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1단계가 북한과 함께 살아가며 같이 번영하자는 '공존공영(共存共榮)' 또는 화해협력이라는 점. '진보 정부' 또는 '좌파 정부'로도 불리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부와 김영삼 보수 정부 때 만들어지고 다듬어졌으며, 이명박-박근혜 극우 정부에서도 받아들인 통일정책의 첫 단계가 북한과 더불어 살며 화해와 협력을 이루자는 것이란 말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치며, 북한과 더불어 사는 가운데 화해와 협력을 이루겠다는 1단계 목표를 세워놓고,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삼으며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승만 시대처럼 전쟁을 통해 통일하거나 박정희 시대처럼 공산주의를 쳐부수고 통일하는 게 목표라면 북한에 증오심을 지니고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진정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통일을 이루겠다면, 설사 북한이 원수 같이 굴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식량이라도 보내주면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겠는가. 적으로 삼으며 어떻게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고 무슨 수로 협력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거든 통일정책을 폐기하든지 바꿔야 한다. 선량한 국민 특히 통일운동가들 헷갈리게 하지 말고. 내가 '친북'을 자처하며 법정에서든 강의실에서든 이를 권유하고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호소하는 이유다.
1950~70년대 남한의 통일정책이 무력 북진통일이었을 때 반공반북은 애국이 되었고, 평화통일을 호소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갔다. 1990년대부터 통일정책이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통일로 바뀌었으니, 이젠 친북 평화를 애국애족 행위로 간주하고 반북을 조장하면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2. 친북 통일은 대박, 반북 통일은 쪽박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통일은 대박"이란 말을 썼는데, 이 말 자체가 대박이 되었다. 통일에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이 말이 통일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셈이다.
▲ 지난 1월 6일 청와대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사실 이 말은 신창민 중앙대 경영학 교수 겸 한우리 통일연구원 이사장이 2012년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책을 펴내면서 처음으로 썼던 말인 것 같다. 그는 통일을 빨리 이루되 통일비용을 최소화하고 통일편익을 극대화하면 매년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록할 수 있다며, "통일은 진정 대박"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단일화해야 하고, 북한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이 가장 효율적이며, '김씨 왕조' 체제의 허구성을 알리기 위해 북쪽에 전단을 날려 보내는 게 좋다는 등의 위험한 극우적 주장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통일 대박론'을 펼친 듯하다. 그 무렵 국가정보원장이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의 조국 통일"을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통일이 대박'이라는 데는 분명히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어떠한 통일이냐가 문제다. 통일의 방법이나 과정에 따라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고 쪽박을 찰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을 실현할 때만 대박이고, 전쟁이나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 통일이 이루어질 때는 쪽박이리라 확신한다. 친북 통일이라야 대박이고 반북 통일이면 쪽박이란 말이다.
만에 하나 전쟁을 하면 결국엔 남한이 이겨 북한을 흡수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이 최첨단 무기를 무수하게 가진 터에 전쟁이 터지면 남쪽이든 북쪽이든 불바다가 되고 잿더미가 될 게 뻔한데 최후의 승리를 거둔들 뭘 하겠는가. 끔찍한 쪽박이지. 전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북한 붕괴에 관해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가능성도 낮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이 무너질 것 같지 않고, 붕괴되더라도 남한에 흡수될 가능성이 크지 않으며, 흡수통일 되더라도 대박보다 쪽박이 되기 쉬우리라 예상하는 것이다. 가능성이 왜 낮은지 제대로 짚어보려면 누가 언제부터 왜 ‘북한 붕괴론’을 제기하고 퍼뜨려왔으며 왜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는지 자세히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다음 글에서 별도로 다루겠다. 여기서는 왜 바람직하지 않고 쪽박이 되기 쉽다고 예상하는지만 간단히 밝힌다.
만약 북한이 붕괴되면 남한에 고이 흡수되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통일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던 김영삼 대통령,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고 했던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친 박근혜 대통령 등. 물론 동독이 무너져 서독에 흡수 통일되었듯, 북한이 붕괴되어 남한에 흡수 통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다른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첫째, 중국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안보와 경제를 이유로 북한에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다. 북한 사람들의 정서도 이미 남한보다는 중국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둘째, 미국은 북한 핵무기의 안전한 관리나 폐기를 구실로 유엔을 앞세워 개입할 것이다. 셋째, 북한 군부가 남침할 가능성은 없을까. 중국으로의 집단 망명이나 남쪽으로의 집단 투항이 여의치 않다면, 자포자기 또는 최후의 발악으로 전쟁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넷째, 아무 탈 없이 남한에 흡수되더라도 북쪽 인민을 기꺼이 따스하게 껴안을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남쪽 국민이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남쪽에 들어와 있는 탈북자 2만 명 남짓도 제대로 감싸지 못하고 냉대하면서. 그러기에 흡수통일 역시 대박보다는 쪽박이 될 가능성이 크다.
3. 반북을 조장하는 사람들
우리 사회엔 정부의 통일정책이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로 바뀌었지만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반북 감정을 신념처럼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력 충돌은 남북 양쪽에 불바다와 잿더미를 안겨줄 게 뻔한 데도 '전쟁 불사'를 외치며 북한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통일을 추구하되 북한과의 화해 협력은커녕 북한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며 쳐부숴야 한다는 집단이다. 북한을 적으로 삼되 북한이 사라지는 것은 원치 않는 이른바 '적대적 공존'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단 구조를 선호하며 통일을 반대하는 진짜 '반통일 세력'이다. 이들 때문에 세상이 변하고 정책이 바뀌어도 친북은 불온하고 범죄시되며 반북은 건전하고 애국적으로 치부되는 사회 풍조가 여전히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들을 크게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보고 싶다. 첫째, 해방 이전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파. 둘째, 북쪽의 토지개혁으로 쫓겨온 지주들과 종교탄압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1940년대 탈북자들. 셋째, 한국전쟁 중 북한 인민군에게 목숨이나 재산을 빼앗기는 등 피해를 당한 사람들. 넷째, 냉전 시대 반공교육에 철저히 세뇌당한 사람들. 이 가운데서도 북한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심 또는 적대감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집단일까.
첫째, 친일파들이다. 분단 이후 남쪽에서는 이들이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지배 세력이 되었다. 해방 직후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간 실시되었던 미 군정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남쪽을 점령했지만 행정에 미숙했던 미군들이 일제 아래서 행정을 맡았던 친일파를 내세워 통치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심지어 일본 헌병 및 경찰조차 이용했다.
예를 들어, 1945년 9월 9일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군들이 9월 8일 인천항에 도착할 때 그들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에게 일본 헌병이 총을 쏴 2명이 죽고 10여명이 부상당했다. 질서 유지를 위한 미군사령관의 조치였다. 이런 식으로,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이 해방되었어도, 남쪽에서는 미군 도착 이후 며칠 동안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인 수십 명이 죽었다. 일본인은 조선인들에 의해 한 명도 죽지 않았고. 미군들이 질서를 유지한답시고 일본 군인이나 경찰까지 이렇게 보호하고 이용했다면, 통치를 위해 행정 경험이 있는 조선인들은 얼마나 우대하며 활용했겠는가.
친일파는 이후 변신의 귀재들이 되었다. 전광용이 1962년 발표한 단편소설 <꺼삐딴 리>가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일제 하에서는 잠꼬대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완벽한 황국 신민으로 살다가, 소련군이 진주한 뒤엔 북쪽에서 잠시 감옥 생활을 하지만 풀려나 친소파로 돌변해 영화를 누리고, 남쪽에 내려와서는 미국인들에게 아부하며 친미주의자가 되는 주인공 같은 사람이 한둘이었겠는가. 그들이 나중엔 국가권력까지 장악해 이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반공을 이용해왔으니, 에둘러 소설을 인용할 필요 없이 남한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간주되는 사람도 있다. 해방 이전엔 일본군 장교로 지내다, 미군정 때는 남쪽 군대에 몸담고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살아남아 나중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반공을 내세웠던 박정희.
이에 남정현은 1965년 발표한 단편소설 <분지>를 통해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부르짖다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라고 남한 사회를 묘사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61년 7월 제정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래서 1990년 언론인이나 역사학자로 활동하던 김삼웅, 이헌종, 정운현 등은 <친일파>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면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친일 세력은 민족통일보다 분단을, 민족자주보다 사대예속을, 민주주의보다 독재지배를 택했다. 이런 비정상에서만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고, 기득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친일을 한 친일파는 물론 그들의 2세, 3세 또 그 잔당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 걸쳐 실세로서 행세하고 있다."
둘째, 북쪽에서 1946년 3월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남쪽으로 쫓겨온 지주들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에 따라 땅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북한에 대한 원한을 품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직까지 옛 토지문서를 소중하게 간직한 채 땅 찾을 꿈에 젖어 있을 테니 북한 체제가 하루라도 빨리 무너지길 기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북한이 붕괴되더라도 이들이 옛 땅을 쉽게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북한 당국이 1998년부터 식량난 타개책의 일환으로 농지를 확충하기 위한 토지정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대자연 개조사업'이란 기치 아래 "뚝이나 몇 개 없애는 식으로 쬐쬐하게 하지 말고 지금 하는 것과 같이 10년, 50년 앞을 내다보며 대담하고 통이 크게" 하라고 지시했다. 2000년 4월 18일 <로동신문>에 실린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니 참고하기 바란다.
"광복 후 토지개혁을 하여 지주의 소유로 되어 있던 토지를 농민의 소유로 만들었지만 토지의 면모와 구조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봉건시대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뙈기논밭들을 큰 규모의 규격포전으로 만드는 것은 농촌에서 봉건적 토지소유의 잔재를 흔적도 없이 완전히 청산하고 이 땅을 진정한 사회주의 조선의 땅답게 면모를 일신하기 위한 하나의 혁명입니다..... 이제는 옛날 지주가 토지문서를 가지고 한드레벌에 와서 자기 땅을 찾자고 하여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조선은 벌이 많은 곡창지대이지만 토지가 개인소유로 되여 있기 때문에 우리처럼 토지정리를 할 수 없습니다."
셋째, 북쪽 당국의 종교 탄압을 못 이기고 쫓겨온 기독교인들이다. 김일성은 사실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을 지니고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 계통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항일 민족운동 조직인 <조선국민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외할아버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은 평양 근교 교회의 장로를 지냈고, 어머니 강반석은 집사로 일하며 어린 그를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 그가 해방 이전 일제 감옥에 갇혔을 때는 아버지의 친구 손정도 목사가 7개월 동안 옥바라지하며 석방에 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며 기독교에 부정적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이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 수 있다"면서, "찬송가나 불러가지고서는 적의 화구 앞으로 돌진할 수 없으니,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 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다.
나아가 해방 이후 북쪽에서 이른바 혁명 과업을 수행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먼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통해 일제와 지주들이 갖고 있던 땅을 공짜로 빼앗아 농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는데, 이때 기독교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다. 이에 김일성은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46년 11월 북쪽 전역에서 실시된 인민위원회 선거를 앞두고 선거일을 일요일로 잡은 데 대해 기독교인들이 '주일선거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 무렵 북쪽엔 약 2,000개의 교회에 30만 명 안팎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데, 이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김일성은 그들을 사대주의자나 매국노로 몰아붙이며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남쪽으로 쫓겨온 기독교 지도자들과 그 후예들이 반공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으니, 이전엔 군사독재자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주고 요즘은 3·1절이나 광복절에 서울시청 광장에서 북한 국기나 김정일의 허수아비를 찢거나 불태우는 보수 교회 목사들이다. 이들의 가르침에 따라 신도들은 반북 투사가 되고.
물론 믿기 어려울 만큼 진짜 예수 같은 목사도 적지 않다. 세 분만 소개한다. 첫째, 손양원 목사.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로 널리 알려진 분인데, 1948년 10월 이른바 '여수·순천 반란사건'에서 자신의 두 아들을 '빨갱이'한테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그 빨갱이 살인자를 사형 집행 전 구출해 아들로 삼았던 분이니, 한마디로 말해 인간이 아니라 신 같은 목사였다.
둘째, 김상근 목사. 노무현 정부에서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지낸 분으로, "아버님은 6·25 전쟁 때 북에 의해 총살을 당하셨다. 주검은 그 이상으로 비참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아버님이 '북괴군'에게 비참하게 총살을 당했으니 그 '원수'에 대한 분노와 원한 또는 증오와 적대감이 엄청 컸을 것 같은데, 오히려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해오고 있다.
셋째, 서광선 교수 겸 목사. 1960년대부터 이화여대에서 기도교학을 가르치다 1990년대엔 세계 YMCA 회장을 지낸 분이다. 내가 2008년 <두 눈으로 보는 북한>이란 책을 펴냈을 때 그분이 썼던 서평 한 대목을 요약해 옮긴다. "한국전쟁 때 개신교 목사 아버지가 북한군에게 반공목사라는 이유로 총살당한 비참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해군으로 북한에 총을 겨누고 싸운 사람으로서, 내 굳어진 가슴을 풀기가 너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머리로는 이재봉 교수의 책을 이해하고 북한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나의 상한 마음은 풀어 지지 않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대북 지원에 앞장서고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내가 외부 강연을 가장 많이 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가 교회인데, 살인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아버지나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포용하는 게 진정한 기독교인인가, 악을 제거하거나 마귀를 몰아내듯 형제 동포마저 원수로 삼아 북한의 국기나 지도자를 불태우는 게 바람직한 기독교인인가 생각해볼 때가 많다. 저마다 주어진 환경과 시각 그리고 가치관이나 신앙관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종'을 자처하는 목사들이라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지키고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정면으로 거역하지는 않는 게 기본적 도리가 아닐까. 우리 사회 도시에든 시골에든 거리마다 골목마다 십자가를 보게 되는데, 개신교 지도자들만이라도 친북까진 하지 않고 반북을 자제한다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훨씬 앞당겨지리라 확신한다. 바로 어제 교황이 남한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를 주문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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