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8

[법정증언④]주체사상은 대남 혁명 전략인가?

[법정증언④]주체사상은 대남 혁명 전략인가?
글쓴이 : 날짜 : 15-07-08 15:55 조회 : 525

지난 6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의 이석기 의원 항소심 재판에서 변호사가 물었다. 주체사상이 대남 혁명 전략이냐고. 주체사상은 헌법보다 중시되는 통치이념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남한을 적화하기 위한 전략은 아니라고 답했다.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부탁엔 대략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주체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당과 국가 활동의 지도적 지침'이다. 사상, 경제, 국방, 정치,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자립과 자위 그리고 자주를 내세우며 말 그대로 주체적으로 살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물질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등 철학적으로는 본받을 점도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면서 이른바 '수령론'을 통해 독재정치를 정당화하고 '후계자론'을 통해 부자간 정권세습을 합리화하는 등 변질되고 악용된 부분은 비판받아야 할 점이다."


이 부분이 다음날 일부 신문에 고약하게 둔갑되었다. "한반도를 공산화시키려는 북한의 대남 혁명 전략은 철학적 측면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는 등의 언급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이에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아직도 북한 옹호 발언이 활개 치는 사실이 가히 충격적"이라고. 그의 말은 다음날 그 신문들에 재생되었다.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해 유행어가 된 '쓰레기 같은 기자'가 악의적으로 왜곡한 기사에 개념 없는 정치인이 제멋대로 충격 받은 일을 다시 기사화한 것이다. 몰지각한 그들에게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갖게 된다. 그들 때문에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기에.


주체사상과 관련해 날 실소하게 만든 것은 이뿐만 아니다. 2008년 3월 비슷하면서도 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1999년 8월부터 매월 <남이랑북이랑> 소식지를 만들어오면서 2006년 3월호에 "김대중 방북과 연방제 통일"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언제나 그랬듯, 이 글도 여기저기 퍼지는 가운데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홈페이지 자료실에도 실린 모양이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은 북녘의 긍정적 부분에 대해서는 애써 감추어왔고 부정적 측면에 관해서는 턱없이 강조해왔다. 우리는 김일성이 해방 이전에 진짜로 목숨 걸고 항일 독립투쟁을 벌였지만 '가짜'로만 배워왔고, 주체사상은 말 그대로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살자는 훌륭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불온한' 사상으로만 들어왔으며, 연방제 통일방안은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측면도 크지만 '적화통일'을 위한 계략으로만 알아왔다. 워낙 오랫동안 철저하게 '세뇌'당해 왔기에 아직까지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칭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이라는 <프리존 뉴스>가 2008년 3월 6일 "사제단, '김일성 주체사상' 찬양 논란: '연방제 통일은 합리적이고 바람직' 글 메인화면에 게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삼성 떡값 명단' 폭로로 주목받고 있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내용의 글을 최근 수년간 인터넷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배치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사제단 공식 홈페이지의 메인화면에는 '이재봉'이라는 필명의 네티즌이 지난 2006년 6월 작성한 "김대중 방북과 연방제 통일"이라는 제목의 글이 현재까지 걸려 있다. 북한식 연방제 통일을 두둔하는 뉘앙스의 이 글에서 필자는 "주체사상은 말 그대로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살자는 훌륭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불온한 사상으로만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6.25 남침 전범이자 수백만의 인명을 학살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공식적으로 찬양한 것이다.....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지난 2006년 3월에 작성된 글로, 사제단은 현재까지 2년간 문제의 글을 메인페이지에 걸어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틀 후인 3월 8일엔 "정의구현 사제단, 국보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해: '주체사상은 자주적으로 살자는 훌륭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가 추가되었다.


"'삼성 떡값 명단' 폭로를 주도하고 있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당했다. 문제가 된 것은 인터넷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올려 있는 주체사상을 비호하고 연방제를 주장하는 친북 게시물. 사제단의 이 같은 행태는 최근 <프리존 뉴스>에 보도됐고, 이후 시민 김모 씨는 사제단을 경찰에 고발해 수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수구꼴통'들이 전형적으로 써먹는 치졸한 수법이다. 아무리 천박한 재벌이라도 비호해야 하는 그들은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꼬투리를 찾기 위해 홈페이지를 뒤져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내 글에서 김일성과 주체사상 그리고 연방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을 발견하고 이를 논란거리로 만들기 위해 기사 제목에 '찬양 논란'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떳떳하게 이름도 밝히지 못할 사람을 내세워 고발하도록 해놓고 그것을 다시 기사화한 것이다.


그때 사제단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화면 중앙의 '칼럼'란에 실제로 "김대중 방북과 연방제 통일"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칼럼'란에 실려 있는 20편의 글 가운데 내 글이 6편이나 되었고, '문제의 글'은 2년 동안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화면 중앙을 차지해왔으니 나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온 셈이다. 2007년 여름 사제단의 초청을 받아 강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이런 사연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늦게나마 담당자에게 감사드린다.


여기서 주체사상을 '불온한 사상'으로만 여기는 보수 세력이 놓치는 게 있다. 그들이 위인이나 영웅처럼 떠받들던 '최고위 탈북자' 황장엽의 주장이다. 남한에서 자타가 인정했던 "주체사상의 이론적 창시자"인 그도 이 사상이 "조선로동당의 지도 사상"이며 철학적 측면은 훌륭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관리하는 사업을 주관"했던 그가 남한으로 망명해 와서 이 사상은 대남 혁명 전략이 아니고 본받을 점도 있다는 점을 나보다 먼저 말했던 것이다.

황장엽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 북한에서 1960년대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국회의장에 해당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조선로동당 비서 등을 지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가이자 철학자로서 주체사상을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1997년 남한으로 건너와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다 201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고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그가 남한으로 망명하자 '주체사상의 대부'이자 '김정일의 개인교사'가 북한을 탈출했으니 김정일 체제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며 '북한 붕괴론'이 힘을 얻었고, 그의 영향력은 남한에서도 꽤 커졌다. 주체사상을 따르는 '주사파'에 맞서 황장엽을 추종하며 '북한 민주화'를 내걸고 '김정일 정권 타도'를 외치는 이른바 '황파'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그가 1997년 2월 중국에서 망명을 신청할 때부터 가장 먼저, 그리고 2010년 죽을 때까지 줄기차게 그를 비판했다는 점을 밝힌다.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한 사건이 터지자 남북관계가 험악해졌는데, 이를 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보다 학자들이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는 유럽 평화학자의 제안과 미국 정치학자의 주선으로 황장엽을 비롯한 북한학자 2명과 나를 포함한 남한학자 2명이 1997년 봄 스웨덴에서 '민간 평화회담'을 갖기로 했다. 그런 터에 그가 1997년 2월 중국에서 남한으로의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다.


"가족과 동지들의 희생까지 각오하며 남북 화해 및 평화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어 망명을 신청했다는데, 선생의 망명으로 남북 사이에 화해와 평화보다는 갈등과 긴장이 더 커질 것이다.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평화와 통일을 추구한다면 북한에서 선생을 따르는 유능한 후배와 제자들을 모아 김정일이 진정한 개혁 개방으로 나가도록 이끄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1997년 4월 그가 서울에 도착해 7월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이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으니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거나 군비 경쟁을 통해 북한 체제를 조기에 몰락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주장을 펴기에, 나는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월간 <말> 7월호에 실었다.


그리고 1998년 5월 국가정보원 주선으로 '안가 (安家)'에서 그를 만나 무산된 스웨덴 회담 및 그의 망명과 기자회견에 대한 나의 비판 등에 관해 의견을 물었다. 내가 북한 체제를 잘 모르는 것 같다며 후배나 제자들을 모아 북한의 개혁 개방을 이끄는 게 불가능해서 망명했노라고 대꾸했다. 김정일 체제는 무너뜨려야 하지만 북한에 식량은 지속적으로 많이 보내는 게 좋다는 의견도 덧붙이면서. 그리고 김일성은 훌륭하고 나라를 잘 이끌었는데 김정일이 문제이며, 주체사상도 처음엔 훌륭했는데 나중에 변질된 게 문제라는 의견을 나중에 공개적으로 내놓았다.


황장엽과의 인연을 털어놓느라 주제에서 좀 벗어났는데, 이제 김일성이 창시하고 황장엽이 이론화했으며 김정일이 수정했다는 주체사상에 대해 더 깊이 소개한다.


1. 주체사상의 의의와 내용


주체사상은 "당과 국가 활동의 지도적 지침"이다.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는 당 규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는 국가 헌법이 규정하듯, 당과 국가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통치 방침인 것이다.





▲ 대동강 남쪽에 위치한 주체사상탑 ⓒ연합뉴스


이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모든 분야에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자기 실정에 맞게 혁명과 건설을 이루어 나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므로 모든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적으로는 정치와 외교에서 자주성을 지니고, 경제에서 자립적으로 민족경제를 이루며, 국방에서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나라를 지키자는 것이다.


2. 주체사상이 태어난 시기와 배경


북한 당국은 김일성이 1930년 6월 만주 카륜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면서 처음으로 '주체'를 제시했는데, 그때는 사상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지 않았지만 주체사상의 시원 (始原)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한의 대다수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1955년 12월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주체'를 처음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고 추정한다.


아무튼 김일성은 그 연설에서 조선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조선인민의 풍속을 알아야 하며, 아이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대외정책이나 정치 사업에서 소련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조선식으로 하자면서, "쏘련에서 나온 사람들"과 "중국에서 나온 사람들"을 비판했는데, 바로 이 대목을 통해 주체사상이 태어난 배경을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부터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북한이 난처해졌다. 소련은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1948년 북한 정부가 세워질 때 결정적 도움을 주었고, 중국은 1950-53년 6·25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북한을 구해주었는데, 두 우방국들이 서로 다투고 있으니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 곤란해진 것이다.


둘째, 이 무렵 북한 안에서는 권력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북한 정부를 세운 주도세력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경성파, 김일성을 대표로 한 빨치산파, 김두봉이 중심이 된 중국파, 그리고 허가이를 대표로 한 소련파였는데, 이들 4개 계파가 처음에는 힘을 합쳐 나라를 세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권력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속된 말로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에 김일성은 소련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조선식으로 혁명을 성취하자면서 소련파와 중국파를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여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이른바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주체와 자주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주체사상의 태생적 배경은 안에서의 권력투쟁과 밖에서의 중·소 분쟁이란 말이다.


3. 주체사상의 발전 과정과 변질


북한은 1955년 '사상에서의 주체'를 앞세우고, 1956년 '경제에서의 자립'을 내세웠다. 1962년엔 '국방에서의 자위'를 발표하고, 1966년엔 '정치와 외교에서의 자주'를 선언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 조선로동당 규약에 주체사상을 당의 이념으로 명시했으며, 1972년엔 헌법을 개정하면서 주체사상을 공식적인 통치방침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주체사상은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면서 크게 변질되었다. 특히 그가 "당 안에는 오직 하나의 사상, 수령의 사상만이 지배해야 하고 수령을 중심으로 전 당이 굳게 통일 단결되어야 하며, 수령의 유일적 령도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유일사상체계 (唯一思想體系)'를 확립하면서부터다. 1960년대까지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바탕을 두고 북한의 현실에 맞게 발전해왔다고 주장했지만, 1970년대부터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우월하고 독창적인 혁명사상이라고 주장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주체사상만 따르라고 한 것이다.


변질된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수령론'으로, "사회변혁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참다운 정치지도자, 수령을 옳게 추대하는 것"인데, 사람이 자주성과 창조성 그리고 의식성을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자신의 운명을 자주적이고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없고 반드시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 역사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으로, 사람이 크게 머리와 몸통 그리고 팔다리로 이루어져 있듯이, 사회 역시 하나의 생명체처럼 이루어져 있는데, 수령이 머리이고 당이 몸통이며 인민대중이 팔다리라는 내용이다. 여기엔 사람이 진짜 부모로부터 타고난 육체적 생명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갖게 되는데,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는 육체적 생명을 초개와 같이 바칠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셋째는 '후계자론'으로, 김일성의 혁명 과업은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하는데, "수령의 직접적 계승자 후계자는 오직 수령의 혁명사상을 가장 완벽하게 체현하고 그것을 옹호 관철하기 위하여 한 목숨 바쳐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탁월한 령도력과 천재적 예지를 가진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4. 주체사상에 대한 평가와 교훈


나는 주체사상의 가장 긍정적 측면으로 북한이 소련의 지배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중국의 대국주의를 피하며 자주성을 추구하고 강화한 점을 꼽고 싶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요즘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과 경쟁에서 어떠한 길을 걷는 게 바람직할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체사상의 가장 부정적 측면으로는 수령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면서 인민의 무조건 복종과 수령 독재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부자간의 권력승계까지 합리화한 점을 들고 싶다. 우리는 이를 비난하는 데 머무를 게 아니라 과거 군사독재가 승계된 것을 반성하면서 재벌이나 교회 등의 세습 운영도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 1990년대 남한에서 이른바 '주사파' 논쟁이 불거졌는데, 우리 사회에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면 나는 크게 두 가지 배경에서 형성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첫째, 남한 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 풍조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주체사상에 빠져들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람 목숨까지 빼앗는 황금만능과 인명경시 풍조 속에서 물질보다 사람을 중시한다는 주체사상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내정간섭이나 부당한 압력에 굴종하는 남한의 종속적 현실에서, 자주외교를 내세우며 미국에 당당하게 맞서는 북한의 모습이 멋있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함으로써 오히려 주체사상을 확산시키거나 '주사파'를 만들어냈으리라고 믿는다. 주체사상에 대해 제대로 알리거나 건전하게 토론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고 정보를 통제하며 왜곡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체사상에 빠지도록 이끌었을 것이란 뜻이다. 주체사상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며 비난하는 보수 극우 학자와 언론인의 말과 글만 허용해왔으니, 젊은이들이 반발심과 호기심을 갖고 '지하로 들어가' 과장된 북한의 선전물을 그대로 접하며 주체사상의 긍정적 측면만 보고 짜릿한 쾌감을 맛보지 않았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국가정보원과 법정의 검사들에게 여러 차례 호소해왔다. 북한의 신문 잡지나 방송 등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면 김일성을 흠모하거나 주체사상을 추종하기보다 북한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리라 확신한다고. 예를 들어, <로동신문>이 자유롭게 유통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처음 하루 이틀 동안엔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읽어보겠지만, 기껏 3~4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재미없고 짜증나기 때문에. 매일 1면에서 6면까지 온통 선전선동으로 가득 찬 신문을 무슨 재미로 읽겠는가. 남북 사이의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대통령이 공개 선언한 지 20년이나 흘렀는데, 한편으로는 북한의 사상이나 체제에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국민의 지적 수준을 얼마나 경시하기에 아직도 <로동신문>조차 공개하지 못하는지 안타깝고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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