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개정판
김성칠 (지은이) | 정병준 | 창비 | 200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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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서> 개정판. 한국현대사 전공자이자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의 자세한 해제와 본문 교주(校註)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두툼한 해제에서 정 교수는 김성칠 삶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면서, 일기에 대한 문헌비판적 검토와 정리뿐 아니라 그의 일기에 그려진 격동하던 해방 후 모습과 급박하던 한국전쟁 초기 1년여의 실체를 객관적·역사적으로 파헤친다.
50여년 전 한반도에서 펼쳐진 미소(美蘇)·남북(南北)·좌우(左右)의 갈등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한 지식인의 ‘진실한’ 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9년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념투쟁’과 ‘편가르기’ 같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과 마주하게 된다.
개정판을 펴내며
김성칠 선생의 일기에 부쳐/신경림
일러두기
제1부
1945년 12월
1946년 1월-4월
1950년 1월
제2부
1950년 6월
1950년 7월
1950년 8월
제3부
1950년 9월
1950년 10월
1950년 11월
1950년 12월
1951년 3-4월
김성칠을 기억하며
사람답게 사는 길/강신항
조국 수난의 동반자/이남덕
군계일학의 외삼촌/정기돈
동양사연구실과 김성칠 선생/고병익
해제 김성칠의 삶과 한국정쟁/정병준
주
김성칠 선생 연보
김성칠 저작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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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의 김씨도 좌익과 연락을 갖는 것 같고, 이렇듯 모든 정직한 동무들이 지향하는 그 길은 과연 오늘날의 조선을 바로잡는 최선의 길일까. 일반 민심의 동향과 아울러 생각할 때 동포들끼리 서로 분열 항쟁함에나 이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부에서는 일부러 그러기를 바라는 소아병의 무리가 많음으로 보아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22)
- SJ
이번 차에 꼭 타지 않으면 무슨 큰 낭패라도 있을 듯한, 모두 그러한 표정들이다. 타고 내릴 때 붐비고 떠다밀고 하는 것보다도 전차가 가까이 갔을 때 창문을 향하여 오는 그 표정들이 너무 심각하여 거의 필사적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오래 굶주리던 동물이 먹이를 바라볼 때 이러할 것이거니 하고 상상하면 마음이 사뭇 괴롭다. 사소한 일에 심각한 표정을 갖는 민족은 지극히 불행한 환경 속에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고, 또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불행한 현재의 표상이며, 또 앞으로 불행을 빚어내는 기틀이 될 것이다. (44)
- SJ
그야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말다툼이나 하고 천애고독의 안타까운 심경에 놓일 때 그 뒤끓는 가슴속을 문자로 표현함으로 해서 다소 후련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가슴이 후련해질 수 있다고 우리들의 생활을 파멸에로 이끌언허는 어리석음을 감행하지 않으리라. 나는 아무리 살아가는 것이 괴롭더라도 술에 도취하지 않고 아편에 마비되지 않으련다. 나는 아무리 괴로운 순간에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그러진 얼굴을 사진박지 않으리라. (59)
-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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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출판평론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발행인)
: '격랑'에 휩쓸린 한 사학자의 고뇌?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09년 6월 27일 잠깐 독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 고등학교 국어(하)(교육과학기술부 刊) 中 '함께 하는 언어 생활'
저자 : 김성칠
최근작 : <역사 앞에서>,<역사 앞에서> … 총 4종 (모두보기)
소개 :
191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중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복역했다. 1932년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현상모집에 당선됐고 1934년 큐슈 토요쿠니 중학을 졸업했다. 19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1941년까지 조선금융조합 연합회에서 근무했다.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강제 징용됐다. 1946년 경성대학을 졸업하고 1947년 서울대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1951년(39세)영천 고향집에서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조선역사>(1946) <국사통론>(1951)> <동양사 개설>(공저, 1950)등과
역서로 펄 벅의 <대지>, 강용흘의 <초당(草堂)>, 박지원의 <열하일기>(전5권), <용비어천가>(상.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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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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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쟁점 한국사 : 현대편>,<쟁점 한국사 세트 - 전3권>,<GHQ시대 한일관계의 재조명> … 총 18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몽양 여운형 평전』 『우남 이승만 연구』 『한국전쟁』 『광복 직전 독립운동 세력의 동향』 『독도 1947』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한국 농지개혁 재검토」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한국 조항’의 작성 과정」 등이 있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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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민들레 피리>,<100℃>,<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중1 수필 (전면개정판)>등 총 2,293종
대표분야 : 국내창작동화 1위 (브랜드 지수 1,438,135점), 청소년 소설 1위 (브랜드 지수 539,193점), 여성학/젠더 1위 (브랜드 지수 94,347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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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분야 : 국내창작동화 1위 (브랜드 지수 1,438,135점), 청소년 소설 1위 (브랜드 지수 539,193점), 여성학/젠더 1위 (브랜드 지수 94,347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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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초판이 발행된 후 스테디쎌러로 꾸준히 읽혀온 『역사 앞에서』가, 한국현대사 전공자이자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의 자세한 해제와 본문 교주(校註)가 새롭게 추가돼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두툼한 해제에서 정 교수는 김성칠 삶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면서, 일기에 대한 문헌비판적 검토와 정리뿐 아니라 그의 일기에 그려진 격동하던 해방 후 모습과 급박하던 한국전쟁 초기 1년여의 실체를 객관적·역사적으로 파헤친다. 50여년 전 한반도에서 펼쳐진 미소(美蘇)·남북(南北)·좌우(左右)의 갈등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한 지식인의 ‘진실한’ 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9년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념투쟁’과 ‘편가르기’ 같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과 마주하게 된다.
김성칠의 삶과 한국 현대사의 굴곡
해제자는 김성칠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삶과 한국 현대사를 추적·재구성해나간다. 191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성칠은 식민지기인 1928년 대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민족적 현실을 자각하고 좌익독서회의 세례를 받는다. 이후 대구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사건으로 1년간 미결수로 구금된 생활을 한 후,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한다. 이때 당대 지식인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신문의 논문 현상공모(1932년 7월 동아일보 주최)에서 1등에 당선된다. 이후 늦은 나이에 일본 토요꾸니(豊國)중학을 졸업하고 식민지시대 조선 엘리뜨들의 양성소이던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 식민지하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가 선택가능한 최고 직업이던 조선금융조합연합에 입사해 조합이사가 된다. 당시 이 직종은 농촌지역 3대 기관장으로 꼽힐 정도로 식민지 엘리뜨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을 뿐 아니라 일제의 지배체제와 포섭되기 쉬운 위치였다고 정 교수는 평가한다.
김성칠은 1942년 경성제대 사학과에 입학해 직업적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때쯤 그는 『조선역사』라는 역사 대중서를 한달여 만에 써낸다. 당시 이 책은 6만 6000여부가 판매된 해방 후 최초의 베스트쎌러였다. 책 자체가 대중적 통사로 쉽고 잘 읽히는 문장으로 구성된 데다 해방된 한국에서 한국역사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 요구, 지방에 수많은 판매처를 가진 금융조합 조직망이 잘 결합된 결과였다. 이후 금융조합연합회를 그만둔 김성칠은 서울대 동양사 합동연구분실에 들어가 연행사(燕行使)와 북학파, 고전번역과 한글연구 등에 매진했다. 1946년 경성대학을 졸업하고 1947년 서울대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후, 1951년 한국전쟁을 피해 온 영천 고향집에서 괴한의 저격으로 서른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일기 속 한국전쟁
해방 후 서울의 모습과 한국전쟁의 발발, 북한점령 시기의 서울생활, 남한의 서울수복이라는 일기 속 한반도에 대한 저자의 섬세하면서도 ‘진실한’ 묘사는 정부측 공식문서와 학계의 역사논문으로 밝히기 어려운 내밀한 진실을 담고 있다. 특히 북한점령기 식량부족 문제와 광범한 의용군 강제모집, 화급히 시행된 토지개혁의 문제점, 규율이 잘 갖춰진 인민군에 대한 인상, 짜인 각본대로 연출된 거수투표식 인민위원회선거, 6월 30일 발생한 서울대병원 국군 학살사건 등을 통찰력있게 담아낸 글은 당대의 역사적 소용돌이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특히 북한점령기 서울대의 문리대의 변화는 매우 자세하고 흥미롭다. 서울대는 일제하 경성제국대학으로 출발해 20여년 동안 불과 300여명의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해방 후 경성대학·서울대학으로 바뀌면서 좌우·남북의 갈등 속에서 표류했다. 김성칠 일기에는 북한점령 후와 남한정부의 수복 후의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북한에 점령됐을 때는 좌익교수와 학생들이 이력서와 자서전 작성·심사 같은 검열과 통제를 일상적으로 주도했으며, 남한정부의 서울 수복 후에는 북한에 대한 부역혐의 심사가 또한 펼쳐졌다. 그 결과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미처 피란 가지 못한 서울대 학자들은 북한이 북쪽으로 밀려가면서 월북하거나 납북됐으며 남아 있는 교수들은 부역혐의로 처벌받아야 했다. 결국 한국전쟁을 거치고 제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불행한 역사와 모멸의 시대가 한국의 미래 인적 자원을 모욕하고 빼앗아 갔다. 이처럼 이 일기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동안의 한국 최고학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넘어서
매듭짓지 못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50여년 전 한반도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김성칠의 일기 속 내용은 지금 여기의 우리들 문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우선 김성칠이 올바른 일기쓰기를 거론하면서 언급한 올바른 신문보도행위는 지금의 언론권력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신문기사의 허위보도라고 하면 반드시 어떠한 사실을 날조한 경우에만 한하지 않고 어떠한 사건의 연속 중에서 일부분을 고의로 묵살해버린다거나 그와 반대로 강조해서 표현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을 어긋나게 함에 있어서 허위보도와 조곰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일기 1946년 4월 22일)
이와 더불어, 해방 후 한반도 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처참한 전쟁을 겪었고 남북관계가 북한 핵문제 등의 문제 때문에 난항을 거듭하는 현 시점에서 묘사된 북한군에 대한 김성칠의 언급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북한군)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유독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적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어제 본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다르다면 그들의 복장이 약간 이색질 뿐, 왜 그 하나만이 우리 편이고 그 하나는 적으로 돌려야 한단 말이냐. 언제부터 그들의 사이에 그렇듯 풀지 못할 원수가 맺히어 총검을 들고 죽음의 마당에서 서로 대하여야 하는 것이냐. 서로 얼싸안고 형이야 아우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그들이 오늘날 누굴 위하여 무엇 때문에 싸우는 것이냐.”
(일기 1950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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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를 중도파라고 하는가 ? 일제가 제공하는 제도 속의 엘리트 길을 걸었고, 일제가 제공하는 직위를 충실히 누렸던 사람이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서 선발되어 일본까지 가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다. 그 시간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과 상대도 되지않는 싸움으로 피흘린던전사
choimos ㅣ 2015-07-15 l 공감(1) ㅣ 댓글(1)
겨레에 대한 합리적 사랑과 준절한 증언. 잃어버린 양심 품위 여유에 대한 갈망. 사후출판을 염두에 뒀어도 멋부림 하나 없는 문체. 부록에선 아내의 글이 감동을 준다: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났고, 한국인의 대표와 같은 남자를 만나 ... 조국이 겪는 수난의 시대를 함께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SJ ㅣ 2015-03-25 l 공감(1) ㅣ 댓글(0)
독서모임에서 읽고 모두 감동했다. 이데올러기의 허와 실을 자세히 들여다 볼수 있다
sh219291203 ㅣ 2010-01-10 l 공감(12) ㅣ 댓글(0)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한가운데에서 겪은 역사학자의 냉철한 시선.
비로자나 ㅣ 2009-11-27 l 공감(3)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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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4편
책갈피 SJ ㅣ 2015-03-24 ㅣ 공감(0) ㅣ 댓글 (0)
병중의 김씨도 좌익과 연락을 갖는 것 같고, 이렇듯 모든 정직한 동무들이 지향하는 그 길은 과연 오늘날의 조선을 바로잡는 최선의 길일까. 일반 민심의 동향과 아울러 생각할 때 동포들끼리 서로 분열 항쟁함에나 이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부에서는 일부러 그러기를 바라는 소아병의 무리가 많음으로 보아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22)
이번 차에 꼭 타지 않으면 무슨 큰 낭패라도 있을 듯한, 모두 그러한 표정들이다. 타고 내릴 때 붐비고 떠다밀고 하는 것보다도 전차가 가까이 갔을 때 창문을 향하여 오는 그 표정들이 너무 심각하여 거의 필사적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오래 굶주리던 동물이 먹이를 바라볼 때 이러할 것이거니 하고 상상하면 마음이 사뭇 괴롭다. 사소한 일에 심각한 표정을 갖는 민족은 지극히 불행한 환경 속에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고, 또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불행한 현재의 표상이며, 또 앞으로 불행을 빚어내는 기틀이 될 것이다. (44)
그야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말다툼이나 하고 천애고독의 안타까운 심경에 놓일 때 그 뒤끓는 가슴속을 문자로 표현함으로 해서 다소 후련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가슴이 후련해질 수 있다고 우리들의 생활을 파멸에로 이끌언허는 어리석음을 감행하지 않으리라. 나는 아무리 살아가는 것이 괴롭더라도 술에 도취하지 않고 아편에 마비되지 않으련다. 나는 아무리 괴로운 순간에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그러진 얼굴을 사진박지 않으리라. (59)
지명연구회에서 쓰려고 내어다 둔 5만분지 1지도는 많인 수세미로 도어 있고 연구회에서 애써 조사해놓은 귀중한 많은 자료들은 휴지로 쓰이었다. 지난 한해 동안 이를 위하여 가진 애를 쓰고 다니던 일을 생각하니 떡심이 풀린다. 전쟁이란 이런 것인가? 이민족도 아닌 동족끼리,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이다지도 몰라주는 것일까. 카드가 없어진 일과 아울러 생각하니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싶다. (127)
이것이 바로 인민공화국의 장기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 생명을 유지하려면 당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지 않을 수 없고...... 누구나 얼마쯤의 공포증에 사로잡혀 정부의 하는 일에 무조건 백지위임장을 써 바치지 아니할 수 없는......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 정치기술로서 만점일는지도 모른다. (179)
˝선생님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기에 ˝첫째는 동족상잔함이 슬프고, 둘째는 미군과 조선 사람이 겨루어 방금 피를 흘리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군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많게끔 되었으니 이 사실이 더욱 슬프다˝ 하였다. (202)
인민공화국의 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전용이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건 한글을 전용함녀서도 한문에서 나온 문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새 문자들을 만들어서까지 쓴다. `독보회`라는 건 늘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밖에 ˝창발성을 제고하여서˝라든가 ˝견결히 반대한다˝라든가 ˝경각성을 높여서˝라든가 ˝청소한 우리 인민공화국˝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쓴다. 모두 귀에 생소한 말들이다.
......
˝이것은 필시 모스끄바에 토박이로 있는 조선 사람들의 손으로 번역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현대 조선어의 세련미와는 오랫동안 절연되다시피 해 있으니 자연히 한두 세대씩 묵은 조선어를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평양은 모스끄바의 문화를 직수입하고 또 이를 신성시하여 아무런 비판도 개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 없을는지? (219-220)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십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 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다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246)
하여튼 이번 경험을 통해서 내가 절실히 느껴지는 점은, 난리가 났을 때 교묘히 숨느니보다도 평소에 마을 사람들과 좋게 지내고 또 세상에 아무와도 원수를 맺지 않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살아남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281)
1950년 11월 7일
차에서 보니 길가의 마을은 집들이 모두 파괴되고 불살렸으나 길에서 얼마쯤 들어가 있는 마을과 집들은 비교적 안전하다.
우리나라는 이를 비유하면 세계의 길갓집이 아닐까. (290)
오늘날 이 세상에선 `3만지`라야만 살 수 있단느 것이다. 무슨 소린고 했더니 (1) 밖에서 보아 있는지 만지 한 마을에 (2) 집인지 만지 한 집을 지니고 (3) 사람인지 만지 할 정도로 처신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좌우의 항쟁이 남긴 시골 사람에의 교훈이다. (307)
삼우러 삼짇날.
거센 항구의 바람 속에서 꽃은 피고지고.
피란꾼이 고달픈 살림살이 속에서 봄을 맞이하였다.
아내와 더불어 앞으로 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힘써 아이들에 관한 책을 읽고 번역하고 그러는 중에 우리도 붓을 들어서 적어도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 비길 만한 하나는 후세에 남겨두자고. (333)
위에 쓴 넋두리는 말은 분명히 못했지만 자유와 평화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슬픈 마음을 노래 흉내라도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라고 생각되었다. 가장 비참한 지경에서 감상적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고통을 씻어주는 위로가 된다는 것. (366)
한 지식인의 진실한 기록 신흥동 ㅣ 2011-08-02 ㅣ 공감(3) ㅣ 댓글 (0)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중도파 지식인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남긴 진실한 기록 서울의 주인이 하룻밤 사이 바뀌는 파천황의 시기에 공격자와 방어자에 대해 느끼고 판단한 대로 평가하는 용기와 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진실을 기록한 김성칠의 용기와, 한세대가 지난후 잊혀진 그의 일기를 공개한 가족들의 용기도 높이 평가한다.
한 역사학자의 6.25일기 유토피아 ㅣ 2010-06-30 ㅣ 공감(3) ㅣ 댓글 (0)
올해가 한국전쟁발발60주년이 되는 해이다.최근 드라마,영화로도 한국전쟁관련작품들이 많이제작되고 있다.특히나 올해는 "천안함"사고가 나서 우리가 분단상태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는 해이다.
이책은 서울대 사학과 교수로 있던 김성칠이라는 사람의 일기를 바탕으로 쓰여졌다.이분은 내가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밖에서본 한국사"의 저자 김기협의 아버지이다.일기을 바탕으로 쓰여졌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일들을 나열해 놓은것이 아니고,역사학자로서 의무감을 가지고 써 내려간 기록이다.
저자인 김성칠은 대구고보시절 독서회사건으로 감옥생활도 했고,나름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이다.하지만 일제시대를 살아가자면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창씨개명도 했고,일제의 충실한 하수인 노릇을 한 금융조합에서의 이사로서 삶을 영위했다.주변친구들중엔 좌익계열사람들이 많았고 대다수 전쟁중 월북했지만 저자의 사상은 중도정도로 보면 되겠다.어쩌면 중도적인 시각에서 좌,우의 모습을 객관적 시각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잘 보여준것 같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대부분 논문형식의 글을 통해서 객관적인 사실들을 보았다면,이책은 전쟁의 와중에 사람이 직접겪은 생생한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어서 그당시 어려운 상황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가장으로서,엘리트 교수로서,시대의 아픔을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 겪은 생생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나자신은 그당시 어떻게 행동했을까"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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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라. 글 배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neoedu10 ㅣ 2010-06-07 ㅣ 공감(2) ㅣ 댓글 (0)
6월이다. 이 달은. 울수도 웃을수도 없는 달인가.
6월이다. 일년에 365일이 있고 열두 달이 있지만 그 연속적인 시간들 가운에 6월이라는 공간은 우리와 유난히 많은 인연을 지녔는가 보다. 굳이 민족적으로 따지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이 선 후 6월은 유난히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피붙이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었고, 또 80년대로 내려오면 6월의 피맺힌 항쟁이 있었고, 그 20년 후엔 한 쪽에선 둥근 공으로 세계의 정상에 섰지만 한 쪽 바닷가에선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질을 한 달이었다.
이제 다시 6월이 왔다. 이 6월을 겨냥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선거를 앞두고 한바탕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이 땅을 휩쓸고 갔고, 그 빈자리엔 검고도 흰 축구공이 킥오프를 기다리고 있다.
북으로 갈 지, 남으로 갈 지.. 나침반이 있어도 갈 곳은 모르겠구나.
"... 이때까지의 경향으로 보아 이북의 양심적인 분자들은 많이 대한민국을 그리워 남하하였고 이남의 이상주의자들은 인민공화국에 절대의 기대를 가지고 많이들 월북하였는데 이들이 다같이 커다란 실망을 품고 있지나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갈곳은 없고 해서, 말하자면 정신적인 진퇴유곡에 빠져 있지나 않을까요. 이들에게 무슨 길을 열어줄 방책이라도 있다면 나는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일해보겠습니다마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으신지? 이북의 사람들은 자유로운 남쪽을 그리고, 각종 부정부패에 질린 이남 사람들은 공평한 북쪽을 그린다는 말. 전후 남한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 한 가운데서 새로운 60년대를 힘차게 열어젖히며 우리 전후소설에 한 획을 그은 최인훈의 <광장>에 와서야 비로소 언급되었다는 양비론. 남한도 x같고 북한도 x같다는 이 말. 이 말은 당시엔 - 지금의 우리로서는 흔히 접할 수 없지만 -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하고 오늘에서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 3 국어교과서에도 일부가 실려 있는 역사학자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읽으면서 말이다.
지은이 김성칠은 누구인가?
이 책의 지은이 김성칠은, 1913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나이 열다섯에 독서회 사건으로 일제에 구속되었는데, 담당 판사로부터 "나이 열다섯의 사상범을 만들어주는 것은 대일본 제국의 명예에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 방면 되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신동에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에도 민족 독립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하며 절치부심하면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공부에도 힘써서, 19세 때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전국 농촌구제책 현상모집에 당선하기도 했고(19살에!!!!) 경성제대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워낙 일찍이 요절했기 때문에 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해방되자마자 경성대학(서울대학의 전신)에서 교수직을 맡았는데 그 당시 함께 교수직에 있던 사람들이 이병도, 이희승, 김상기(물론 이 사람들이 선배였지만 망년지기로 교류했다하니..) 등이었으니 이 사람의 레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한 역사학자의 작은 일기장이 의미있는 이유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전국이 좌익 아니면 우익으로 갈라져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을 때도, 이 사람은 학자적 풍모를 견지하면서 중도를 꿋꿋이 지켜갔다는 사실. 흔히 우리는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좌익'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좋은 것, 후자는 나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실상은 직접 그 시대를 살아온 분들에게 듣거나, 아니면 그 당시를 기록한 수많은 기록물들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 지금의 권위를 빌어 과거를 거꾸로 만들어가는 자들의 말을 통해서 볼 것은 아니다. 지금의 그 양반들이건, 과거에 이름난 어떤 양반들이건 간에 시국과 사회를 바라봄에 있어서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편향된 시선을 통해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혼란한 시대 속에서 과감히 중도를 취한 한 양심적인 역사학자의 일기를 통해서 보는 이 일기집이 그 당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가치있는 사료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오도된 채로 가져왔던 선입관들을 몇 가지 깨트릴 수 있다. 많은 영화나 매체, 심지어는 문학적인 글들까지도 가지고 있던 이분법적인 시각을 상당부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남아 서울을 사수하리라던 정부에 속아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총든 인민군들을 도왔다가 서울이 수복한 이후 도망갔던 자들에게 오히려 핍박받는 힘없는 민중들의 솔직한 시선은 오히려 새롭지 않지만, 이성을 상실한 살인마같이만 비춰졌던 인민군들이 대부분은 굉장히 훈련이 잘되고 젠틀한 사람들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실제로 가정집에서 빌려간 조그만 톱 하나까지 쓰고나서 굳이 찾아와 돌려주었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우리가 생각했던 것이 과연 진실이었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한다.
이 양반이 추구하던 세상은..
서로를 죽고 죽이던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이 책의 지은이 김성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추구하던 것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같다. "민족의 자존과 해방과 평화와 번영...." 하지만 그 행동방식은 모두 달랐다. 사용하는 수단이 달랐던 것이다. 양국 정부는 폭력으로 일관했지만 한 역사학자는 지금 당장이 아닌 후대를 바라보며 학문의 연구를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는가.
폭력을 선택했던 자들은 이제 신뢰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로 위신이 추락해버렸지만, 평화적으로 좀 더 먼 곳을 바라보았던 한 역사학자의 양심과 삶의 태도는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도 후학들의 칭송과 우러름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한 사학자의 6. 25 일기'라는 부제처럼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엿볼 수 있는 사료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이 책이 더 가치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역사의 격랑기에 배운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 종류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2010. 6. 4.
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역사 앞에서' 는 6.25전쟁때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씨가
6.25전쟁 당시에 직접 보고 겪은 생생한 기록을 일기 형식으로 저술한 책입니다.
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 는
1993년에 초판이 처음으로 발행이 되었으며,
그 후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다가
한국현대사 전공자이자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의
자세한 해제와 함께 본문 교주(校註)가 새롭게 추가되어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 앞에서'는 일기 형식이라는 사적 기록의 형태를 가졌지만,
저자인 김성칠씨의 역사가로서 소명의식을 담았으며,
역사가로서의 뛰어난 통찰력으로 완성이 된 사설(史設)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부터 다음해 4월, 1950년 1월 그리고,
1950년 6월부터 다음해 4월 8일까지의 체험기이자 관찰기라고 합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뛰어난 통찰력과 문화의식은 글 읽는 재미와 보람을 맛볼수 있습니다.
'역사 앞에서' 는 해방 후 서울의 모습과 한국전쟁의 발발,
북한점령 시기의 서울생활, 남한의 서울수복이라는 일기 속 한반도에 대한
저자의 섬세하면서도 ‘진실한’ 묘사는
정부측 공식문서와 학계의 역사논문으로 밝히기 어려운
내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느끼게 해주며,
전쟁이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더 되새길 수 있는
유익한 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월이다. 이 달은. 울수도 웃을수도 없는 달인가.
6월이다. 일년에 365일이 있고 열두 달이 있지만 그 연속적인 시간들 가운에 6월이라는 공간은 우리와 유난히 많은 인연을 지녔는가 보다. 굳이 민족적으로 따지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이 선 후 6월은 유난히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피붙이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었고, 또 80년대로 내려오면 6월의 피맺힌 항쟁이 있었고, 그 20년 후엔 한 쪽에선 둥근 공으로 세계의 정상에 섰지만 한 쪽 바닷가에선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질을 한 달이었다.
이제 다시 6월이 왔다. 이 6월을 겨냥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선거를 앞두고 한바탕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이 땅을 휩쓸고 갔고, 그 빈자리엔 검고도 흰 축구공이 킥오프를 기다리고 있다.
북으로 갈 지, 남으로 갈 지.. 나침반이 있어도 갈 곳은 모르겠구나.
"... 이때까지의 경향으로 보아 이북의 양심적인 분자들은 많이 대한민국을 그리워 남하하였고 이남의 이상주의자들은 인민공화국에 절대의 기대를 가지고 많이들 월북하였는데 이들이 다같이 커다란 실망을 품고 있지나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갈곳은 없고 해서, 말하자면 정신적인 진퇴유곡에 빠져 있지나 않을까요. 이들에게 무슨 길을 열어줄 방책이라도 있다면 나는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일해보겠습니다마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으신지? 이북의 사람들은 자유로운 남쪽을 그리고, 각종 부정부패에 질린 이남 사람들은 공평한 북쪽을 그린다는 말. 전후 남한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 한 가운데서 새로운 60년대를 힘차게 열어젖히며 우리 전후소설에 한 획을 그은 최인훈의 <광장>에 와서야 비로소 언급되었다는 양비론. 남한도 x같고 북한도 x같다는 이 말. 이 말은 당시엔 - 지금의 우리로서는 흔히 접할 수 없지만 -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하고 오늘에서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 3 국어교과서에도 일부가 실려 있는 역사학자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읽으면서 말이다.
지은이 김성칠은 누구인가?
이 책의 지은이 김성칠은, 1913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나이 열다섯에 독서회 사건으로 일제에 구속되었는데, 담당 판사로부터 "나이 열다섯의 사상범을 만들어주는 것은 대일본 제국의 명예에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 방면 되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신동에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에도 민족 독립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하며 절치부심하면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공부에도 힘써서, 19세 때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전국 농촌구제책 현상모집에 당선하기도 했고(19살에!!!!) 경성제대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워낙 일찍이 요절했기 때문에 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해방되자마자 경성대학(서울대학의 전신)에서 교수직을 맡았는데 그 당시 함께 교수직에 있던 사람들이 이병도, 이희승, 김상기(물론 이 사람들이 선배였지만 망년지기로 교류했다하니..) 등이었으니 이 사람의 레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한 역사학자의 작은 일기장이 의미있는 이유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전국이 좌익 아니면 우익으로 갈라져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을 때도, 이 사람은 학자적 풍모를 견지하면서 중도를 꿋꿋이 지켜갔다는 사실. 흔히 우리는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좌익'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좋은 것, 후자는 나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실상은 직접 그 시대를 살아온 분들에게 듣거나, 아니면 그 당시를 기록한 수많은 기록물들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 지금의 권위를 빌어 과거를 거꾸로 만들어가는 자들의 말을 통해서 볼 것은 아니다. 지금의 그 양반들이건, 과거에 이름난 어떤 양반들이건 간에 시국과 사회를 바라봄에 있어서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편향된 시선을 통해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혼란한 시대 속에서 과감히 중도를 취한 한 양심적인 역사학자의 일기를 통해서 보는 이 일기집이 그 당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가치있는 사료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오도된 채로 가져왔던 선입관들을 몇 가지 깨트릴 수 있다. 많은 영화나 매체, 심지어는 문학적인 글들까지도 가지고 있던 이분법적인 시각을 상당부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남아 서울을 사수하리라던 정부에 속아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총든 인민군들을 도왔다가 서울이 수복한 이후 도망갔던 자들에게 오히려 핍박받는 힘없는 민중들의 솔직한 시선은 오히려 새롭지 않지만, 이성을 상실한 살인마같이만 비춰졌던 인민군들이 대부분은 굉장히 훈련이 잘되고 젠틀한 사람들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실제로 가정집에서 빌려간 조그만 톱 하나까지 쓰고나서 굳이 찾아와 돌려주었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우리가 생각했던 것이 과연 진실이었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한다.
이 양반이 추구하던 세상은..
서로를 죽고 죽이던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이 책의 지은이 김성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추구하던 것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같다. "민족의 자존과 해방과 평화와 번영...." 하지만 그 행동방식은 모두 달랐다. 사용하는 수단이 달랐던 것이다. 양국 정부는 폭력으로 일관했지만 한 역사학자는 지금 당장이 아닌 후대를 바라보며 학문의 연구를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는가.
폭력을 선택했던 자들은 이제 신뢰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로 위신이 추락해버렸지만, 평화적으로 좀 더 먼 곳을 바라보았던 한 역사학자의 양심과 삶의 태도는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도 후학들의 칭송과 우러름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한 사학자의 6. 25 일기'라는 부제처럼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엿볼 수 있는 사료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이 책이 더 가치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역사의 격랑기에 배운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 종류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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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2010. 6. 4.
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역사 앞에서' 는 6.25전쟁때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씨가
6.25전쟁 당시에 직접 보고 겪은 생생한 기록을 일기 형식으로 저술한 책입니다.
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 는
1993년에 초판이 처음으로 발행이 되었으며,
그 후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다가
한국현대사 전공자이자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의
자세한 해제와 함께 본문 교주(校註)가 새롭게 추가되어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 앞에서'는 일기 형식이라는 사적 기록의 형태를 가졌지만,
저자인 김성칠씨의 역사가로서 소명의식을 담았으며,
역사가로서의 뛰어난 통찰력으로 완성이 된 사설(史設)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부터 다음해 4월, 1950년 1월 그리고,
1950년 6월부터 다음해 4월 8일까지의 체험기이자 관찰기라고 합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뛰어난 통찰력과 문화의식은 글 읽는 재미와 보람을 맛볼수 있습니다.
'역사 앞에서' 는 해방 후 서울의 모습과 한국전쟁의 발발,
북한점령 시기의 서울생활, 남한의 서울수복이라는 일기 속 한반도에 대한
저자의 섬세하면서도 ‘진실한’ 묘사는
정부측 공식문서와 학계의 역사논문으로 밝히기 어려운
내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느끼게 해주며,
전쟁이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더 되새길 수 있는
유익한 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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