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코리아 페스티벌 실행 위원장 鄭甲 히사시 (정 카뿌스) *
문책은 HP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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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주최자로부터 "원 코리아의 관점에서 납치 문제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을 주셨습니다. 도저히가 아니지만, 1 시간 정도는 말할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인 전제를 정중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어떻게 든 이야기 해 주었으면합니다. 지금 교육 현장에서 힘든 상황이라는 이야기가있었습니다 만, 아이들에서 "라시, 라치 '나'김정일 '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상황이되어 있습니다. 선생님들도 힘들다고 생각 합니다만, 이것은 언론의 영향이 큰 것입니다. 이 언론의 배경에있는 것은 일본 사회이며, 그것을 만들고있다 대입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문제되고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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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 코리아와 동아시아 공동체
먼저 원 코리아 관점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원 코리아 페스티벌이라는 것은 20 년 전에 오사카에서 시작했지만, 그 이후로 내걸고있는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일 한국인은 일본에 38 선이 없다. 이 38 선이없는 곳에서 먼저 재일 동포가 하나가되자 않을까. 우리는 관혼상제에서 만날 수있다. 축제라면 만날 수있는 거 잖아요. 그 하나로 모이는 장소를 만들자. 그런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 의미는 재일 한국인 이야말로 하나가되어 주체적으로 조국 남북의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 이군요. 그때까지 민단은 한국을지지하고 총련은 북한을지지한다는 입장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것입니다 만, 나는 그것이 이제 슬슬 다른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재일이 하나가되어야 해요, 그것은 진정한 남북 통일로 이어질거야. 어느 한쪽으로 만 쏠리는은 그야말로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질 않을까. 그래서 재일 한국인에서 먼저 하나되는 노력을 시도, 그리고 해외 동포도 연결 하자는 비전이었습니다. 1990 년부터는 게다가, 냉전 붕괴 전후의 세계를보고, 나는 앞으로의 세계는 세계화, 자유주의, 인본주의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고, 또 한편으로 그 이전부터의 EC의 움직임 유럽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하게되어가는이 움직임이 반드시 미국 세계에 파급하는이다 깔때기 예측해서, 그럼 아시아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거기에서 '아시아 공동체를 목표로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말했다 처음에는 몹시 비난 활활이었습니다. 왜 대동아 공영권 같은 것을 말하는인가, 여러 가지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만, 이것이 반드시 이렇게되는구나, 이렇게해야한다,라고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될 수밖에없는 라는 식으로 말하고있었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이제 옛 제국주의 시대 같은 대동아 모두 주홍 권 같은 것을 할 수있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역시 국가 간의 대등 한 관계가 전제되어 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이 때 모든 반론에 대한 답변 덕분에 그에 대한 백 가지 정도의 답변을 할 수있다 있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론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백 가지 답변 중에서 대답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그렇게 우리의 비전은 크게는 먼저 재일이 하나가되자, 그리고 궁극적에서는 세계 시민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공동체를 목표로하자라는 것입니다. 이 아시아 공동체라는 것은 즉 아시아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경제 통합이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단입니다. 우리가 목표로하는 것은 아시아 시민, 즉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편적 실현 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에 향해 우리는 힘을 맞춘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아무래도 클리어해야한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코리아의 분단 상황의 극복입니다. 이것은없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은 없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 청산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일본은 아시아의 신뢰를 절대받을 수 없다. 아시아의 신뢰를받지 못하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책임을 가진 리더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든 극복해야한다. 이것은 내가 비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에게는 통일하는 것으로 자기 통치 능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신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통일 할 수 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 일본에 대해서 너희는 자정 능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람에게 말씀 하셨다하지 않을까 자신들이 정말 과거의 역사에 마주보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일본의 여러분 너희가 추궁 당하고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너희가 대답을 낼 것이고, 나는 이렇게해야한다고 비판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의 자정 능력이 요구되고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 이군요.
먼저 원 코리아 관점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원 코리아 페스티벌이라는 것은 20 년 전에 오사카에서 시작했지만, 그 이후로 내걸고있는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일 한국인은 일본에 38 선이 없다. 이 38 선이없는 곳에서 먼저 재일 동포가 하나가되자 않을까. 우리는 관혼상제에서 만날 수있다. 축제라면 만날 수있는 거 잖아요. 그 하나로 모이는 장소를 만들자. 그런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 의미는 재일 한국인 이야말로 하나가되어 주체적으로 조국 남북의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 이군요. 그때까지 민단은 한국을지지하고 총련은 북한을지지한다는 입장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것입니다 만, 나는 그것이 이제 슬슬 다른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재일이 하나가되어야 해요, 그것은 진정한 남북 통일로 이어질거야. 어느 한쪽으로 만 쏠리는은 그야말로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질 않을까. 그래서 재일 한국인에서 먼저 하나되는 노력을 시도, 그리고 해외 동포도 연결 하자는 비전이었습니다. 1990 년부터는 게다가, 냉전 붕괴 전후의 세계를보고, 나는 앞으로의 세계는 세계화, 자유주의, 인본주의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고, 또 한편으로 그 이전부터의 EC의 움직임 유럽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하게되어가는이 움직임이 반드시 미국 세계에 파급하는이다 깔때기 예측해서, 그럼 아시아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거기에서 '아시아 공동체를 목표로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말했다 처음에는 몹시 비난 활활이었습니다. 왜 대동아 공영권 같은 것을 말하는인가, 여러 가지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만, 이것이 반드시 이렇게되는구나, 이렇게해야한다,라고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될 수밖에없는 라는 식으로 말하고있었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이제 옛 제국주의 시대 같은 대동아 모두 주홍 권 같은 것을 할 수있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역시 국가 간의 대등 한 관계가 전제되어 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이 때 모든 반론에 대한 답변 덕분에 그에 대한 백 가지 정도의 답변을 할 수있다 있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론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백 가지 답변 중에서 대답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그렇게 우리의 비전은 크게는 먼저 재일이 하나가되자, 그리고 궁극적에서는 세계 시민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공동체를 목표로하자라는 것입니다. 이 아시아 공동체라는 것은 즉 아시아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경제 통합이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단입니다. 우리가 목표로하는 것은 아시아 시민, 즉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편적 실현 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에 향해 우리는 힘을 맞춘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아무래도 클리어해야한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코리아의 분단 상황의 극복입니다. 이것은없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은 없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 청산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일본은 아시아의 신뢰를 절대받을 수 없다. 아시아의 신뢰를받지 못하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책임을 가진 리더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든 극복해야한다. 이것은 내가 비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에게는 통일하는 것으로 자기 통치 능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신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통일 할 수 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 일본에 대해서 너희는 자정 능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람에게 말씀 하셨다하지 않을까 자신들이 정말 과거의 역사에 마주보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일본의 여러분 너희가 추궁 당하고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너희가 대답을 낼 것이고, 나는 이렇게해야한다고 비판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의 자정 능력이 요구되고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 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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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납치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그 전제 납북자 가족의 서민 감각
- 박경남 씨의 책에서 그래서 이런 비전에서 납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것입니다.지난주 도쿄에 갔을 때, 맥 · 경남 (박경남) 씨를 만났다입니다. 이 분은 수필가로 유명하다고 생각 합니다만, 그 그녀가 가장 최근에 낸 책이 "내가 이상도 아니고, 나는 이하도 아니다 나는"(이와 나미 서점)이라는 책입니다. 이것을 받아, 귀가의 신간선으로 읽고 있으면 매우 감동했습니다. 여러가지 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납북자와 만나고있다 네요. 그 때의 에피소드가 적혀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이번 이야기를하기로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이야기를위한 좋은 참고서 수 있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
浜本 오 사치 씨라는 地村 富貴恵 씨의 오빠와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장소는 오바마 (오바마) 이군요 일본해 우리는 동해라고하는데, 거기에 접한 후쿠이 현의 오바마입니다. 약 백년 전, 1900 년에 조선 북부 항굔풋토 (成鏡 북도)에서 출항 한 선박이 난파하여 표류하고 오바마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94 번째 승무원이있었습니다 당시 오바마의 그 마을에는 100 명 정도 밖에 살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도움을 준 것입니다. 당시는 청일 전쟁에서 다음과 러일 전쟁, 조선 지배로 향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서민 인 오바마의 사람들이 94 명의 조선인을 도와 준 것입니다. 배불리 밥을 먹이고, 8 일 있었던 합니다만, 8 일 지나고 헤어질 때 정말 가족과 헤어지 같은 괴로운 이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기록한 문서가 그냥 백 년이지나 우연히 현지 사학자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비를 건설했다. 그것은 수 있고, 2 년 후 행사에 박 · 경남 씨라고도 바이올리니스트 丁讃宇 (정 쟈누) 씨도 거기에 초대되고, 그러한 역사에 경의를 표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2002 년 8 월에 그 행사가있었습니다. ==
그 행사를 한 멤버 중에, 浜本 씨는이 납치 피해자의 오빠가있는 것입니다.浜本 씨는이 납치 문제가 밝혀진다 전에 운동의 중심이되어 학교의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그 선생님은 경남 씨에게 "사실이 분들의 여동생은 20 년 전에 납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빠는 매일 같이 바다를 향해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고합니다. 그 오빠가이 비석을 세우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직후, 그녀는 납치 사건이라는 그녀에게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보도를 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일전 만나 온지 얼마 안된 오바마에 다녀온 직후였다입니다. ==
그 후, 그녀는 자신이 아무래도 만나고 싶어 2003 년 4 월에 浜本 씨를 방문합니다. 이 浜本 씨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가 엄청난 감동 한 곳입니다. == 여러분은 꼭 사서 읽어 주셨으면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힌트가 담겨있다. 나라와 나라와이 싸우고 있어도, 또한 방금 같은 조선 침략의 시대 배경 속에서 서민과 서민은 연결되어 온 전통이 이상하게 오바마의 浜本에게까지 이어지고있어 그 여동생 씨가 납치되어있다. 그것이 밝혀졌다. 반면 그가 무슨 말을하거나 네요. == 浜本 씨는 만나고 싶다고하면 만나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정성껏 조선인 표류민을 도운 자신도 피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인정이 풍부한 만남이있다 거죠」 「박의 사건은 서민끼리의 교류이며, 마음 따뜻한 정을 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
그 후, 그녀는 자신이 아무래도 만나고 싶어 2003 년 4 월에 浜本 씨를 방문합니다. 이 浜本 씨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가 엄청난 감동 한 곳입니다. == 여러분은 꼭 사서 읽어 주셨으면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힌트가 담겨있다. 나라와 나라와이 싸우고 있어도, 또한 방금 같은 조선 침략의 시대 배경 속에서 서민과 서민은 연결되어 온 전통이 이상하게 오바마의 浜本에게까지 이어지고있어 그 여동생 씨가 납치되어있다. 그것이 밝혀졌다. 반면 그가 무슨 말을하거나 네요. == 浜本 씨는 만나고 싶다고하면 만나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정성껏 조선인 표류민을 도운 자신도 피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인정이 풍부한 만남이있다 거죠」 「박의 사건은 서민끼리의 교류이며, 마음 따뜻한 정을 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
이렇게 浜本 씨는 말씀 하셨다. == 오바마는 2000 년에 비석을 건립 한 행사가있었습니다. 그때는 한국의 학자가 제안하여 지역 주민들이 거기에 동참하여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와서 인사를했다고합니다. 그 인사말을 당시 浜本 씨는 일기에 쓰고 있었다. == "2000 년 1 월 8 일, 후쿠이 현 오바마시 숙박 지역에서 한국 선박 조난 구호 백 주년 기념 정 체기루 (정 재 길) 교수의 제창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한국 서울에서 리 쵸루슨 (리哲承) 선생님이 来村 인사를 주셨습니다. 한국 반도 국민을 대표하고 도마리 촌 여러분 백 년 전의 답례를 말씀에갔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 하고 정중 더 인사 마음에 육박 가슴 뜨거운 감동의 소용돌이는 장내에 가득 찬 어느덧 보통있는 사람 감격의 눈물에 숨 막혀. 선린 우호의 유대와 하물며이 사람 이야말로 국경을 넘어 세계의 평화를 희구 하고 추구하는 열정의 투사 たらんや 일본에 이씨와 같은 나라를 생각 사람을 생각 섬세한 정치인이 있을까. "==
浜本 씨는이 같은 인식과 감성을 가지고 계신 분군요 저도 이제 처음 알게 되었어요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여러가지 예를 들어, "일본과 조선은 인간으로 바다를 통해 미워 서로 것은 아니다. 서민끼리 사이 좋게 해 나갈 사람들입니다. 서민끼리의 평화 교류를하고 가야 지요. 일본 정부는 국교 정상화 교섭을하고 북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한다. 일본의 서민은 인정미를 가지고 세계의 평화를 희망하는 사람 만이라고. "== 이렇게, 맥 · 경남 씨에게 말씀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여동생의 에피소드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조선어로 할머니를 할머니이라고합니까. 富貴恵은 향후 부드러운 할머니가 곁에있어 그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살아 올 수 있었던 말을했습니다. 도마리 촌의 사람들이 북한을 고향에 있는 조난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준 것처럼 북한에도 힘든 상황에 놓인 富貴恵 님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있었다. "이런 말을 할 사람이 납치 가족에 계신 것이군요. 비록 현재 일본의 상황은 이런 것을 보도하는 것입니까? 전혀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있는 것입니다. 이렇게되기 위해서는 어떤 의사가 일하고있는 것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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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문제의 배경 - 일본과 공화국과의 관계 납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면이있어서, 나는 여러분과 많이 다르다 파악하는 방법을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들어도 매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 많지요. 하지만 다르다. 나는 예측하고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측할뿐만 아니라, 아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납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왜 그런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그것은 북쪽이 나쁘다는 같은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냉정하게 세계의 흐름을 보면 알만한 일입니다 만. 예를 들어, 마유미 사건, 김현희 (김현희) 사건이 있습니다, 북한이 한국의 대한 항공기를 마유미를 사용하여 폭파했다고한다. 백 수십 명의 한국 노동자가 죽었다. 중동에서 돌아이었습니다. 이 사건도 수수께끼가 많은 사건입니다. 아직까지 난 정말 북한이 한 여부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완전히 북한이 한 것으로되어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의심 하는가? 내가 보는 신문뿐입니다 만, 정성껏 읽으면 당시 이상한 일이 가득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잡혀 당시 일본 공산당 신문 "적기"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을 게재 한 것입니다. 인사에게 꽃다발을 들고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사진을, 이것이 마유미의 어린 시절 사진이라고내는 것입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반면 마유미 김현희 씨는 저예요 고 말했다. 궁금했다. 왜인가하면 귀가 전혀 다르다. 얼굴 중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은 귀 모양입니다. 소녀 시대의 사진과 그녀의 귀가 완전히 다르다. 일본의 공안도 그 정도 알고있을 것입니다. 반면 북쪽에서 평양에 살고있는 여성에서,이 날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 그녀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귀는 같은 것입니다. 난 분명이 분 것이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있는 총련 간부에 말한 것입니다 만, 여러분은 왜 평양에서 기자 회견 할 것인가. 왜 한국에서하지 않는 것인지, 한국에 신청하는지, 어느 쪽이 진짜인지 대결하려고 아닐까. 그러면 국제 사회의 미디어가 얼마나 오는지라는 것이군요. 그것이 무리라면 도쿄에서해야할 것이다.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도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일했기 때문에 아무런 주목도 된 다 끝났다. 아직이 사건은 나에게 미스테리입니다. ==
이것은 나의 것의 견해, 성격을 알기 원하기 때문에 지금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단 할 때 깊은 생각과 감정 이입 이라든지을 최대한 배제한다 물론 코리아를 사랑하는 마음과 감정은 여러가지 있어요,하지만 사물을 판단 할 때 사실에 근거해서 만 결정하는 것이 나의 신조로하고있는 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사실에 근거해서 만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납치를 북한이 한 생각하거나하는 것입니다 만, 그 납치 문제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하면, 다섯 명의 생존자 여덟 명의 죽은 분들의 납치 된 연대는 총 1977 년부터 1983 년까지이시기가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집중하고있는 것은 1980 년까지 것입니다. 이후 1983 년 같은 사람은 모두 유럽에서 무엇 이죠 아리 모토 씨 라든지 이시오 카 씨 라든지는군요. 유럽에서 이끌려 또는 속았다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소위 납치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유럽에서 설득되어 있거나, 속고있는 것입니다. 그것 1980 년 까지와는 다르다. ===
1980 년까지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가하면 한국이 민주화를 향해 다시 혼란하고있는시기입니다. 1979 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됩니다. 부하에게 사살되는 것입니다. 1980 년에는 광주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2, 3 년은 한국 사회의 힘든 혼란기입니다. ==
나는이 혼란기에 역시 좋은 나쁜 제외하고, 통일을 위해 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치범 구원 운동을했던 당시 1970 년대 중반이지만,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정치범 구원 운동을하는 중 조사하면 말이죠, 실제로 북쪽으로 가고있는 사람도 있고했습니다. 깎고 말한다 것은 그 당시는 전혀 말할 수 없었더라도. 그러나 그것도 통일을위한 것이었다. 야망과 사리 사욕에서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시 통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청춘을 걸어 준 것입니다. 그것을 이용한 국가 권력을 제외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나는 아직도 존경하고있다. 그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남북 관계도 미국과의 관계도 한국 전쟁 이후 줄곧 휴전 이군요. 준 전시 상태, 撃ち方 멈추고 만 아직 완전한 평화 조약 등은 없어요. 그런 준 전시 체제로 서로 백만의 군대가 대치하고있는 것입니다. ==
저기 그토록 미군이 있고, 일본에도 가득 미군 기지가있는 것입니다. 북쪽에서 보면 당연히 적국군요. 적의 군대가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를 조사하러 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미국 등은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성 등으로 조사 할 수 있습니다 만, 저쪽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만큼의 차이이며, 국가가하고있는 것은 모두 함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러한 전제에서 나는 9 월 17 일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
그 상당히 전에있는 알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납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북일 국교 교섭이 절대로 할 수 없다. 일본이 가지고있는 유일한 카드는이 납치 문제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한이 가지고있는 카드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식민지 청산이라는 큰 문제가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은 양보하고 싶지 않다. 경제 협력 방식으로, 한국과 같은 방식으로 어떻게 든하고 싶다고 생각하고있다. 그것은 북쪽으로 のます위한 카드는 일본에는 없다. 그러나 오직있는 것이이 납치 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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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북쪽 당국자라면이 상대의 카드를 다루는 데 인정한다. 인정 한번 완전히 사과해야한다, 그것은 명백한 국가 범죄이기 때문에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그 위에서 과거 청산을 위지 일본시켜야한다. 그렇게 생각하고있어 방식을 보면, 5 명 생존 8 명이 사망하는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의외에도 아무 것도 없었다. 5 명이 살아 있던 사람은 모두 평양에 있던 사람입니다. 8 명의 죽은 사람은 연탄 중독이다, 교통 사고, 해수욕 사고, 여러가지있었습니다 만, 전부 지방에서 죽었어요. 이게 당을 말해 준다. 평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고 지방에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내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납치는 1977 년부터 1983 년까지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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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말하면, 요코타 메구미 씨가 1977 년입니다. 불과 14 세의 그녀가 1977 년에 납치됐다. 그 몇 달 전에 구메 유타카 씨라는 사람이 납치되어있다. 이 사람은 납북자로 인정이되고있다 그러나 북한이 인정하지 않은 입력입니다. 이 사건으로 신기한 것은 범인이 잡혀 있어요.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경찰에 신고되어 실행 범은 잡혀있다. 쿠메 씨를 보냈다라고 인정하고있다. 게다가 일본은이 범인을 무죄로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 주권을 침해 인권 침해에도 불구하고이 실행 범 한 사람은 재일 조선인 한 사람은 북쪽 공작원 것 같습니다만,이 두 사람을 석방하고있다 네요. 쿠메 씨라는 사람은 자신의 의사로 가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경찰은 말하는 것입니다. 확인할 수있는 할 수없는 관계 없을 것입니다. 원래 여권없이 외국에 가면 불법 잖아요.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있었다 거지요 요코다 메구미의 납치 직전. 이것은 터무니없는 사인을 보내고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행범으로 잡혀도 처벌되지 않는 같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도 눌러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
(4) 납치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한 그 본질 공화국이 납치를 인정한 날 ==
9 월 17 일 그 날 많은 언론에서 취재를 받았습니다. 우연히 가족 불고기를 먹으러 있으면, 거기에 쉴새없이 전화가 걸려 온다입니다. 신문사 나 통신사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것이 었습니다. 제 쪽에서는 "그것은 국가 범죄로 용서하기 어렵다. 진상 규명해야한다.하지만 사과하고있다. 북파 제대로 사과하고있다. 사과를 한 후 앞으로 사이 좋게합니다 하자는 말이죠 그러므로 납치 문제는 정말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이를 극복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과 국교 정상화해야한다. "그런 코멘트뿐이었습니다. 덕분에 불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
내가 납치 문제를 그러한 형태로보고있었습니다 만, 당연히 진상 규명은해야한다. 그러나 이 진상 규명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있다. ==
최근 한국에서 한국의 납북자라는 사람이 일본에 세 왔어요 한국에 2000 년에 돌아 왔다고합니다 그러나 일본 국회가 그 세 사람을 불러 민주당이 중심이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사히 방송의 낮 방송에서 방영되고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심각한 발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1971 년에서 1972 년 사이에 그 사람은 평양에서 많은 일본인을보고했다. 그래서 납치 백명은 내리지 않는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을하네요. 71 년부터 72 년이에요 관광객 또는 방문단 라든지 정해져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도 당당히 평양을 걷고 있으니까. 분명히 일본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납치 해 오면 일본의 복장을 한 것인지 할 것은 없을 것이다. 호텔에서 일본인이 20 명 정도 당구를하고 있었다. 그러한 것을 모두 납치하다 납북자라고 거죠. 웃기는 것이에요. 과연 다른 증언자는 그것을 부정하고있었습니다 만하네요. 하지만 그 방송은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정하고, 거기가 문제예요. 말 떠나지 그 방송이됩니다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두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다는 팔로우이 전혀 없다. 같은 한국의 납치 피해자 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클로즈업하고있다. 게다가 언론의 인간도 다 알고 있어요, 71 년에서 72 년으로 본 일본인이라는 것이 납북자가 아니라 어떤 방문단이나 관광객임을 정도. 하지만 그 발언 만 퍼져가는, 그런 일본 사회의 상황 인 셈입니다. ===
문제의 본질 일 조일 국교 정상화 교섭 ==
납치가 발각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조일 국교 정상화 교섭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본질이다. 납치 문제는 큰 문제로 피해자 가족의 심정은 짐작도 남음이 있고, 국가 범죄로 용서할 수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과거의 문제가 동공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도 많은 분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나 여전히 아사히 국교 정상화 교섭은 절대해야한다는 뜻입니다. ==
왜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에 갔을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싶지입니다. 왜 갔는지. 나는이 외교는 드물게 일본의 주체적 인 외교 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외무성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엇? ==
그 배경은 동아시아의 큰 변화예요. 동아시아는 지금 경제적으로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중국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그런 가운데, 중국의 부상을보고있는 것입니다. 미국도 명확하게 일본보다 중국을보고 동아시아 정책을하고있다. 일본 외무성도 그것은 생각하고있다. 외무성의 다나카 히토시하는 사람은, 외무성, 일통 산성 경단련의 동아시아 포럼에서 분명히 동아시아 공동체를 목표로 연구회를하고있다. 이익은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을 총명한 사람들뿐입니다. 국제 사회를 알고있는 사람들뿐입니다. 그것의 단장을하고 있던 다나카 히토시라는 사람입니다. 그로부터하면 절대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은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아시아에서 일본의 입지는 않는다. 이니셔티브는 없게된다. 알고 있구요. 그래서 갈 수 밖에 없었다. ==
이런 배경도 일본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
방금 견해 중에서도 다나카 히토시 씨에 대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의 발언이 거론되고있었습니다. 언론도 비판했습니다. 테러를 용인 할 것인가라는. 이런 비판만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니 달콤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나카 균일 인 외교있는 것은 아니다 거에요 일본 정부 들어주고있는 일입니다. 테러 다나카 히토시로해도 좋다,라고한다면, 고이즈미에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책임자는 고이즈미 총리입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최종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외무성 다나카 히토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것을 일본 언론은 제대로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띄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테러를 용인 할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일반론은 누구나 할 수있는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거기가 아니다. 일본 정부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각이하고있다. 그리고 다나카 라인에 연결되어있는 것이 후쿠다입니다. 후쿠다 관방 장관, 그는 약간은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있다. 이에 대해 아베라는 사람은 미일 동맹 시종 일관 이군요. 아시아보다 미국하다는 우익적인 미일 동맹. 이런 두 세력에 지금 일본 정부도 엇갈리고있다 네요. 그래서 고이즈미 씨도 일부러 아베를 데려 간 것입니다 반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납치 문제에서 아베 씨는 또 다시 부활하여 지금 그 캠페인에서 인기를 얻었다. ==
이제 잠시 동안 아시아 중시과 미일 동맹 중시의 갈등이 일본에서 계속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아니, 점점 그렇게되어 간다. 동아시아가 점점 발전하고 중국이 점점 대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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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일 국교 정상화해야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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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 월 동남아 정상 회의라는 것이있었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3라는 것으로, 중국과 한국과 일본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지난해 처음 인도도 참가했다. 그래서 무엇이 정해진 냐고하면 동남아는 아세안 (ASEAN) 10 개국이 있군요이 동남아 국가 연합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결속하여 왔습니다. 거기에는 베트남도 들어있다. 사회주의 국가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지금부터 3 년 전에 이미 중국과 2007 년까지 자유 무역 협정 (FTA)을 맺는 합의를하고있다. 이에 따라 일본도 이들 국가와 2010 년대에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겠다는 약속을했습니다. 인도도 질 세라 우리도 2010 년대에 FTA를 맺는거야라고 말했다. 이렇게되면 물론 한국도 맺을 것이기 때문에, 무려 32 억의 인구가된다. 전세계 32 억 인구의 자유 무역 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충격이 곧 대단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 년이 채 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이분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것입니다. ==
일본은 물론 경제력이 우선이긴하지만, 그 경제력에 걸 맞는 자신의 담당 구역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 또 다른 상징적 인 것은이 때 동남아 우호 조약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아세안 10 개국 만이 들어 있던 것을, 아무쪼록 중국도 일본도 인도도 들어가십시오,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 중국과 인도는 들어가면 답했다. 일본은 들어 가지 않는다 넣어 않았다. 왜? 그 우호 조약은 불가침 조약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일 동맹과 충돌한다. 미일 안보 조약과 모순이 생기므로 일본은 넣지 않았다. 그래서 동남아, 또 다시 큰 실망을 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힘들다고하니, 여러분도 기억에 새롭다 고 생각 합니다만, 작년 12 월에 도쿄에서 동남아시아 일본 정상 회의가있었습니다. 아세안은 동남아 이외에서하는 첫 회의였다. 일본이 지금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상상에 너무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힘들다는 것이다라고 생각 합니다만, 여기에 부른 것입니다. 나는 그 기사를 볼 전부터 주위에 말한 것은 동남아도 만만치이야 일본에서 가지고 만 가지고 일본의 요구는 듣지 않을거야,라는 것이 었습니다. 실제로 그대로되었다. ==
무슨 일이 있었 냐면,이 회의에서 일본 측 외무성 다만 넣고 싶었던 것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동남아시아와 일본이 주축이되어 목표라는 문구였다. 그것이 동남아시아에서 쫓겨했다. 중축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 일본이 중축 등과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도 중국도 있기 때문에,라고하는 것으로 거절 당하고 말았다. 비록 동남아 쪽에서의 200 프로젝트를 다 먹게되었다. 몽땅 다 들고 돌아됐다. 회의는 이곳에서 할만큼. 이런 것을 일본의 정치, 외교는하고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때 일본은 중국도 인도 들어갈 말을하는 동남아 우호 조약에 일본도 들어간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도쿄에 와서주지 않으니까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제 들어가는는 말하지 않는다. 일본은 들어갈 그렇다고하더라도, 언제 들어가는는 말하지 않았다. 동남아 또한 어이없는 것이군요. 이런 방식이 언제라도 계속 생각하면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
과거 일본 제국주의였다 시대와 세계와 아시아는 이미 완전히 바뀌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1990 년 아시아 공동체라고 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이제 한국도 중국도 동남아도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하여 국제적으로 합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향후 관계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한 세계가 나간다는 비전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이 "견해"의 마지막 결론에있는 곳에는 매우 공감합니다. ==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본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 ==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본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 ==
다시 조일 국교 교섭을 되돌아 보면 원래 북한, 오늘은 북한라고하지만, 나는 공식적으로 반드시 공화국이라고합니다 공화국은 1955 년에 이미 일본에 공화국의 측면에서 호소하고있는 것입니다. 나무이루 (남일) 성명이라는 것을 내놓고있다. 이 분은 귀국 운동시에도 나오는 외상이지만 일본에 국교 정상화 하자고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응하지 않았다. 1970 년대 중반까지 북한은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기회있을 때마다 국교 정상화 노력 하자고 북. 1965 년 한일 조약에 반대이긴하지만, 그래도 노력 하자고왔다. 그러나 1976 년부터는 완전히 바뀝니다. ==
1976 년부터 크로스 승인 단점이라는 것이 나온다. 또 일본과 국교 정상화 협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과 국교 정상화 교섭하는 것은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게된다. 그 중 크로스 승인 반대하는 논의가 나온다. 나는 냉전 시대는 그것이 옳았다 고 생각합니다. 크로스 승인에 반대하지 않으면 확실히 분단 고착화로 이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이 후 것입니다. 1988 년 서울 올림픽 전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하더라도 공화국 그것을 불행하게도 대응하지 못했다. 당시 내가 만약 북한 당국자라면, 크로스 외교를 제안하는 크로스 승인 반대는 또 押し通せ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냉전 시대가 변해가는 보이지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올림픽은 중국과 소련이 참가하는 것이 정해져있다. 이것은 또 수교하는 흐름입니다. 이것을 거침없는 이상은 선수를 돌면 안돼 생각군요. ==
북의 입장에서 선수를 돌면 안돼라고하는 것은, 재미 네요, 나는 북의 입장에서는 아니니까. 그러나 통일을 위해 균형을 잡아 주었으면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말했다뿐입니다. 크로스 승인, 승인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가 승인 해주는, 괜찮 잖아요. 미국과 일본을 공화국의 승인을 준다. 대신 그쪽도 승인하라고. 한국은 소련과 중국을 승인 해 준다. 이처럼 주체적으로 주면 아무것도 자존심이 상처를 입기도 없다. 냉전이 끝난 후 통일은 곧 むつかしい. 당면은 평화 공존 할 수밖에 없다. 그 쪽이 현실적이다. 오히려 한쪽 만이 외교적으로 승인을 받아 우위에서는 것은 불안정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 말해도, 당시는 알고주지 않았다. ==
그 공화국은 1990 년에 자민당과 사회당을 불러 조선 로동당과 3 당 합의라는 것을하고 국교 정상화 교섭을 하자고을 정당간에 합의했다. 그 후 일본과 정부 차원에서도 정식 국교 정상화 교섭을했습니다. 그것이 10 회 정도 계속 했습니다만, 그것도지지 부진하고, 결국 핵 문제와 당시 파칭코 의혹에서 가네마루 신 씨의 사무실에서 공화국의 금괴가 나왔다 든가, 여러가지 스캔들도 말 부수에서 가네마루 씨도 몰락하고 협상은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고이즈미 씨가 갈 때까지 전혀 공백이 이어졌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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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 국교 정상화와 동아시아 공동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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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역사적으로 사물을보고 해야한다 식민지 시대부터 전후 분단, 냉전 시대, 그리고 냉전의 붕괴, 역시 세계의 흐름과 아시아의 흐름을 동시에 보지 않으면이 문제는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것을 전해 학교의 선생님이 이런 말을 경청 해 도움이되는지 여부 모릅니다 만, 아이들에 일조 국교 교섭을 미래 북일 국교 교섭이 왜 필요한가 아시아의 미래의 꿈 더 말하고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아시아에서 다른 비자없이 교류하게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일부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본도 그 인정합니다. 아마 이것은 5 년도 지나지 않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무비자 교류하게되면, 특히 젊은이들은 점점 교류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연간 1000 만명이 해외로 가고있는 것이지요 일본 사람은. 앞으로 아시아 점점가요. 아시아에서도 오게됩니다. 한국에 유학하는 일본 학생들도 많이 있습니다. 중국에 유학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가는 학생의 숫자도 엄청 늘고있다. 그런 것이 국경을 넘어가는 움직임과 함께 퍼져 나간다. 동아시아 세계가 점점 퍼져 나간다. 그와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묶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동아시아는 점점 교류를 늘린다고 해도 중국이나 한국도 과거를 물에 흘리는 것은있을 수 없다. 야스쿠니 참배는 중국은 여러 세대 지나도 용서 없어요. 식민지 청산을하지 않는 한 침략 전쟁의 책임을 취하지 않았다면 어딘가에서 벽에 얼룩 맞는군요 일본은.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일본 사정의 동아시아 공동체가되어 버립니다. 지금 일본은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것은 공해입니다. 점점 변해 간다. 일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 뿐입니다. 저도 일본 밖에 없는데 왜 보는가? 역시 다양한 인적 교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도, 일당 독재라는 비해서는 얼마나 시민 운동이 활발 해지고, NGO가 활발 해지고 있는가? 일본의 NGO도 무색 할 정도가있는 것이 아닐까요. 정부가 할 수없는 것을 적극적으로하고있다. NGO끼리의 연대가 앞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NGO끼리 시민끼리의 국경을 넘은 연대 운동이라는 것이 앞으로의 아시아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경제와 국가가 추진하는 공동체만으로는 안되어서, 그럼 그냥 격차를 낳을뿐입니다.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모니터링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것을 확실히 말해가는 시민 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국경을 넘은 시민 운동, 국경을 초월한 NGO의 연대, 이런 것이 지금부터 자꾸 자꾸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여러분과 일본의 선생님을 포함 해 일본의 시민 운동과 좀더 연대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한국의 시민 운동, NGO와 연결해 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재일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화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추진하고 싶다. 공화국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만, 여유가 나오면 또 다른 형태의 교류가된다고 생각합니다. ==
중국도, 일당 독재라는 비해서는 얼마나 시민 운동이 활발 해지고, NGO가 활발 해지고 있는가? 일본의 NGO도 무색 할 정도가있는 것이 아닐까요. 정부가 할 수없는 것을 적극적으로하고있다. NGO끼리의 연대가 앞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NGO끼리 시민끼리의 국경을 넘은 연대 운동이라는 것이 앞으로의 아시아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경제와 국가가 추진하는 공동체만으로는 안되어서, 그럼 그냥 격차를 낳을뿐입니다.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모니터링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것을 확실히 말해가는 시민 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국경을 넘은 시민 운동, 국경을 초월한 NGO의 연대, 이런 것이 지금부터 자꾸 자꾸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여러분과 일본의 선생님을 포함 해 일본의 시민 운동과 좀더 연대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한국의 시민 운동, NGO와 연결해 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재일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화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추진하고 싶다. 공화국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만, 여유가 나오면 또 다른 형태의 교류가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라는 큰 눈이 납치 문제도 파악하고 북일 · 조일 국교 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운동 해 나가자는 없습니까.
이상입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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ワンコリアの視点から拉致問題を考える
176号目次
ワンコリアの視点から拉致問題を考える
「ワンコリアの視点から拉致問題を考える」
ワンコリアフェスティバル実行委員長 鄭甲壽(チョン・カプス)
*文責はHP編集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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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はじめに
アンニョンハシムニカ。こんばんは。
主催者の方から「ワンコリアの視点から拉致問題を考える」という題を与えられました。とてもじゃないが、1時間くらいでは話せる内容じゃないと思います。政治的、歴史的、社会的な前提をていねいに話さないと、きちんと説明することは難しい。けれども、与えられた時間の中でなんとかお話しさせてもらいたいと思います。
今、教育現場の中で、大変な状況だというお話がありましたが、子どもたちの中で「ラチ、ラチ」や「キムジョンイル」という言葉が飛び交う状況になっています。先生方も大変だと思いますが、これは、マスコミの影響が大きいわけです。このマスコミの背景にあるのは、日本社会であって、それを作っている大入がどう対応するかが問わ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そのことに、少しでも参考になるお話ができればと思ってお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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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ワンコリアと東アジア共同体
まず、ワンコリアの視点というのをお話ししたいと思います。ワンコリアフェスティバルというのは20年前に大阪で始めましたが、それ以来掲げているビジョンがあります。
一つは、在日コリアンは、日本にいて38度線がない。この、38度線がないところで、まず、在日コリアンが一つになろうじゃないか。われわれは冠婚葬祭で会うことができる。お祭りならば会うことができるのじゃないか。その一つに集まる場を作ろう。そういうことで始めましたが、そのことの意味は、在日コリアンこそ一つになって主体的に祖国南北の統一に寄与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考えなんですね。
それまでは、民団は韓国を支持し、総連は北を支持するという立場で統一をめざすという事だったわけですが、私は、それはもうそろそろ違うのではないかと思って始めたわけです。まず在日が一つになるべきなんだと、それが本当の南北統一につながるんだ。どちらか一方にだけ傾くのは、それこそ分断の固定化につながるんじゃないか。
そこで、在日コリアンからまず一つになる努力をしよう、そして海外のコリアンともつながっていこうというビジョンでした。1990年からは、それに加えて、冷戦崩壊前後の世界を見て、私は、これからの世界はグローバリズム、リベラリズム、ヒューマニズムの方向に行くであろうというふうに考えました。それがソ連や東欧社会主義の崩壊につながっていますし、また、一方でそれ以前からのECの動き、ヨーロッパ統合の動きが活発になっていく、この動きが必ずやアメリカ・世界に波及するであろうと予測しまして、それじゃアジアはどうするのか、ということを考え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ね。そこから「アジア共同体をめざそう」というスローガンを掲げ始めたのです。
これを言った当初は、大変に非難ごうごうでした。なぜ大東亜共栄圏のようなことを言うのかとか、色んな事を言われましたが、私は、これは必ずこうなるんだ、こ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よりは、こうならざるを得ない、というふうに言っておりました。その中身としては、もう昔の帝国主義時代のような、大東亜共朱圏のようなものができる時代ではない。今は、やはり国家間の対等な関係が前提になっていると、そのようなお話をさせていただいて、この時にあらゆる反論に答えたおかげで、それに対する百通りくらいの回答を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ですから、反論がある方はいつでもおっしゃって下さい。百通りの回答の中からお答えすることができると思います。(笑い)
そういう風に、私たちのビジョンは、大きくはまず、在日が一つになろう、そして究極においては、世界市民につながるアジア共同体をめざそ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このアジア共同体ということは、言い換えれば、アジア市民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何も、経済統合というものが目的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手段です。私たちがめざすのは、アジア市民、すなわち、アジアにおける人権と民主主義の普遍的実現にほかなりません。これ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力を合わせる。
そのためには二つ、どうしてもクリア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あるということを、私はずっと強調しておりました。
一つは、わがコリアの南北分断状況の克服です。これなしに東アジアの平和と安定はない。
そして、もう一つは、日本の過去の植民地清算です。これがない限り、日本はアジアの信頼を絶対に受けることができない。アジアの信頼を受けられなければ、日本はこの東アジアの平和と安定に責任を持ったリーダーとして認められない。これをなんとか克服すべきである。
これは、私は、批判として言っているのではなくて、わがコリアンに対しては、統一ということで自己統治能力を証明しなくてはならないだろう、自分たちが自分たちの力で統一できるということを証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これが言いたかったことの一つ。
日本に対しては、あなたがたは、自浄能力を証明しなくてはならないだろう、人に言われたからやるんじゃない、自分たちが本当に過去の歴史に向き合って、それをどうするのか、それは、日本のみなさまあなたがたが問われているのです。あなたがたが考え、あなたがたが答えを出すことであって、私は、こうすべきだと批判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あなたがたの自浄能力が問わ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問いかけなん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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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拉致問題をどう見るか、その前提
拉致被害者家族の中の庶民感覚-朴慶南さんの本から
そこで、こういうビジョンの中で、拉致問題をどう見るかということなのです。
先週東京に行ったときに、バク・キョンナム(朴慶南)さんに会ったのです。この方はエッセイストとして有名だと思いますが、その彼女が一番最近出した本が、この『私以上でもなく、私以下でもない私』(岩波書店)という本です。これをもらって、帰りの新幹線で読んでいましたら、非常に感動しました。色々書いてあるのですけれども、拉致被害者と会っているんですね。その時のエピソードが書かれているのです。僕はもう今回のお話を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ので、今日のお話のためのいい参考書ができたなあと思いました。それを紹介させていただきたい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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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本雄幸さんという、地村富貴恵さんのお兄さんと会うところがあります。場所は小浜(おばま)なんですね、日本海われわれは東海と言いますが、それに面した福井県の小浜です。約百年前、1900年に朝鮮北部のハンギョンプット(成鏡北道)から出港した漁船が難破して漂流し、小浜に着きました。そこに九十四人の乗組員がいまして、当時、小浜のその村には百人くらいしか住んでいなかったのに、その人たちが必死に助けてくれたわけです。当時は、日清戦争から、次の日露戦争、朝鮮支配へと向かう時代の流れの中にありました。しかし、一庶民である小浜の人たちは、この94人の朝鮮人を助けてくれたわけです。腹一杯ご飯を食べさせ、8日間居たそうですが、8日経って別れるときには、本当に身内と別れるようなつらい別れ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ういう事を記録した文書が、ちょうど百年経って偶然地元の歴史家によって発見されまして、その地元に碑を造った。それができて、2年後の催しに、バク・キョンナムさんも呼ばれて、バイオリニストの丁讃宇(チョン・ジャヌ)さんもそこに招かれて、そういう歴史に敬意を表してバイオリンを演奏しました。2002年8月にその催しがあ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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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催しをしたメンバーの中に、浜本さんという、この拉致被害者のお兄さんがいるのです。浜本さんは、この拉致問題が明らかになる前に、運動の中心になっていた学校の先生と一緒に活動されていた。その先生はキョンナムさんに「実は、この方の妹さんは20年前に拉致されたかも知れない」と言っていた。お兄さんは毎日のように海に向かって妹の名前を呼んでいたそうです。そのお兄さんが、この碑を建てる運動に積極的に関わっていた。そのすぐ後に、彼女は、拉致事件という彼女にとって大変な衝撃を受けた報道に接するわけです。ついこの前、会ってきたばかり、小浜へ行って来たばかりだ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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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後、彼女は自分でどうしても会いたくなって、2003年4月に浜本さんを訪ねます。この浜本さんを訪ねたときの話が、ものすごい感動したとこ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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みなさんには、ぜひ買って読んでいただきたいと思います。この中には、たくさんのヒントがつまっている。国と国とが争っていても、また、先ほどのような朝鮮侵略の時代背景の中でも、庶民と庶民はつながってきた伝統が、不思議なことに小浜の浜本さんにまで続いていて、その妹さんが拉致されている。それが明らかになった。それに対して、彼が何と言っているか、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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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本さんは、会いたいというと、会ってくれた。
「村の人たちが命がけで、親身になって、朝鮮人の漂流民を助けた、自分たちもその血を受け継いでいます」「海に住んでいる人たちは、人情味豊かなふれあいができるのですよ」「泊での出来事は、庶民どうしでの交流であり、心暖かく、情を通じる物語だ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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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ように浜本さんはおっしゃ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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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浜では2000年に碑を建立した式典がありました。その時は、韓国の学者が提案して、地元の人々がそれに賛同して、韓国から国会議員が来てあいさつをしたそうです。そのあいさつのことを、当時浜本さんは日記に書いていた。
==
「2000年1月8日、福井県小浜市泊地区において、韓国船遭難救護百周年記念式典がチョン・チェギル(鄭在吉)教授の提唱によって行われました。韓国ソウルよりイ・チョルスン(李哲承)先生が来村、あいさつをしてくださいました。韓国半島、国民を代表し、泊村のみなさんに百年前のお礼を申し上げに参りました。一言一句、涙を流し、声を詰まらせて丁重なるごあいさつ、心に迫り、胸熱く、感動の渦は場内に満ちあふれ、いつしか並みいる者感涙にむせぶ。善隣友好の絆といわんや。この人こそ国境を超え、世界の平和を希求し、追求する情熱の闘士たらんや。日本に、李氏のような国を思い民を思うきめ細やかな政治家がいるだろうか。」
==
浜本さんは、このような認識と感性をお持ちの方なんですね、私もこれで初めて知ったわけですけれども。その他にも、色々と、例えば、
「日本と朝鮮は、人間として海を通じて憎みあうことはない。庶民同士は仲良くしていける人たちです。庶民同士の平和の交流をやっていくべきですよね。日本政府は国交正常化交渉をして北朝鮮の人たちに話をしてほしい。日本の庶民は人情味を持っていて、世界の平和を願っている人ばかりだと。」
==
こう、バク・キョンナムさんに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北朝鮮での妹さんのエピソードも紹介されています。
「朝鮮語でおばあさんのことをハルモニというんですか。富貴恵は、向こうで優しいハルモニがそばにいて、そのハルモニがいたから生きてこれたと言っていました。
泊村の人たちが北朝鮮を故郷に持つ遭難者を温かい心で包んでくれたように、北朝鮮にもつらい状況に置かれた富貴恵さんを慈しむ存在があった。」
このようなことを言える人が拉致家族の中におられるわけですね。にもかかわらず、現在の日本の状況は、こういうことを報道するでしょうか。全くしていないのです。そこに問題があるわけです。こうなるには、何かの意思が働い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
拉致問題の背景-日本と共和国との関係
拉致問題のことを話すのは、非常に難しい面がありまして、私はみなさんと非常に違うとらえ方をしております。この違いということですが、みなさん誰に聞いても、非常にショックを受けたという方が多いですよね。しかし、私は違うのです。私は予測しておりました。しかも、予測するだけではなくて、多分そうするだろうと思っていました。拉致を認めるだろうと。なぜそうなのか、ということを、どう説明すればいいのかなと考えました。なにもこれは、北が悪いというようなことを言いたいのではない。冷静に世界の流れを見たら分かるだけのことなのですが。
例えば、真由美事件、キム・ヒョンヒ(金賢姫)事件があります、北が韓国の大韓航空機を真由美を使って爆破したという。百何十人の韓国の労働者が死んだ。中東からの帰りでした。この事件も、謎の多い事件です。いまだに僕は、本当に北がやったのかどうか確信が持てません。しかし、世間では、完全に北がやったことになっている。しかし、なぜ私は疑うのか。
私が見るのは新聞だけですが、丹念に読めば、当時、不思議なことがいっぱいあったのです。たとえば彼女が捕まって、当時日本共産党の新聞「赤旗」が彼女の子ども時代の写真を掲載したのです。要人に花束をあげている写真でした。その少女の写真を、これが真由美の子ども時代の写真だと言って出すのです。なぜか知りませんが。それに対して、真由美、金賢姫さんは、これは私ですと言った。私は不思議だった。なぜかというと、耳が全く違う。顔の中で一番変わらないのは耳の形です。少女時代の写真と、彼女の耳が完全に違うのです。日本の公安だってそのくらい分かっているはずです。それに対して、北から、ピョンヤンに住んでいる女性から、これは私だ、という声が出た。その彼女の写真や映像を見ると、耳は同じなのです。僕は、きっとこの方やなあと思いました。だけど、これはある総連の幹部に言ったのですけれど、あなた方は、なぜそれを、ピョンヤンで記者会見やるのか。なぜ韓国でやらないのか、韓国に申し込まないのか、どっちが本物か対決しようじゃないかと。そうすれば、国際社会のメディアがどれだけ来るかということですよね。それが無理だったら、東京でやるべきだ。そう言ったのですが、それもしなかった。ピョンヤンでやったために、何の注目もされすに終わった。いまだにこの事件は僕には謎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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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ことは僕の物の見方、性格を知ってほしいので今言っているのです。僕は事実に基づいてしか判断していないつもりです。判断するときには思い入れや、感情移入とかをできるだけ排する、もちろんコリアを愛する気持ちや、感情は色々ありますよ、しかし、物事を判断するときには、事実に基づいてのみ判断することを私の信条としているのです。どんな場合にあっても、事実に基づいてのみ判断するということです。
なぜ、私が、拉致を北がやったと思ったか、ということですが、その拉致問題が一体いつから始まっているかというと、五人の生存者、八人の死んだ方たちの拉致された年代は、全部1977年から1983年まで、この時期がポイントなのです。そして、もう一つ、もっと集中しているのは、1980年までなのです。後の1983年などの人は、皆ヨーロッパでなんですよね、有本さんとか石岡さんとかはね。ヨーロッパで、誘われて、あるいは騙されたかもしれませんが、それは、いわゆる拉致とはちょっと性格が違うのです。ヨーロッパで説得されている、あるいは、騙されているのです。それと1980年までとは違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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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までの背景に何があるかというと、韓国が民主化に向かってもう大混乱している時期なのです。1979年には朴正煕大統領が暗殺されます。部下に射殺されるのです。1980年には光州事件が起こります。この2、3年は韓国社会の大変な混乱期な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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僕は、この混乱期に、やはり、いい悪いは別として、統一のためにやった可能性はあると思っていた。僕は、政治犯救援運動をやった当時に、1970年代半ばですが、そういうことを感じたことがございます。政治犯救援運動をやる中で調べたらですね、実際に北に行っている人もおりました。そいいうことはその当時は一切言えませんでしたけれども。しかしそれも統一のためだった。野心や私利私欲でやった者は誰もいない。やはり統一のために、自分の生命と青春をかけてやったわけです。それを利用した国家権力は別として、そういう人々を僕はいまだに尊敬している。
その時期に、そういうことがあった。みなさんもご存じのように、南北の関係も、アメリカとの関係も、朝鮮戦争以後ずっと休戦なんですね。準戦時体制、撃ち方やめ、だけ、まだ完全な平和条約などはないんです。そういう準戦時体制で、互いに百万の軍隊が対峙し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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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そこにあれだけ米軍がいて、日本にもいっぱい米軍基地があるわけです。北から見れば、当然それは敵国ですよね。敵の軍隊がいるわけですから。ここを調べに来るのは当然なんです。アメリカなどは、ハイテクを持っているから、衛星などで調べられますけど、向こうは持っていないから、自分で行くしかない。それだけの違いであって、国家がやっていることは皆一緒だと僕は思ってお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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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ういう前提で、私は9月17日を迎える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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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だいぶ前に、ある知り合いに話したことがあります。拉致を認めないと朝日の国交交渉が絶対にできない。日本が持っている唯一のカードはこの拉致問題しかない。しかし北が持っているカードはたくさんある。特に、植民地清算という大きな問題がある。この問題に対して、日本は譲りたくない。経済協力方式で、韓国と同じ方式で、なんとかやりたいと思っている。それを北にのますためのカードは日本にはない。しかし、唯一あるのがこの拉致カード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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だから、私が北の当局者であれば、この相手のカードを取り上げるために認める。認めて、一回は完全に謝罪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は明白な国家犯罪ですからちゃんと認めて謝罪する、その上で過去の清算をきちっと日本にさせるべきだ。そう思っていて、やり方を見ると、5人生存8人死亡という結果でした。それは、僕にとっては意外でも何でもなかった。5人生きていた人は全部ピョンヤンにいた人です。8人死んだ人は、練炭中毒だ、交通事故、海水浴事故、色々ありましたけど、全部地方で死んでいる。これは何ごとかを物語っている。ピョンヤンにいた人は全員生きていて、地方にいた人は全員死んだということなのです。このことの意味は、私は明らかだと思います。そこまでは認めるしかない。しかし、それ以上は無理です。なぜならば、拉致は1977年から1983年までのことな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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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っと言えば、横田めぐみさんが1977年です。わずか14歳の彼女が1977年に拉致された。その何か月か前に、久米裕さんという人が拉致されている。この人は、拉致被害者として認定はされているけれども、北が認めていない入です。この事件で不思議なことは、犯人が捕まっているんです。不審な動きが警察に通報されて、実行犯は捕まっている。久米さんを送ったと言って認めている。しかも日本はこの犯人を無罪放免にした。なぜでしょう。国家主権を侵し、人権を侵し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この実行犯、一人は在日朝鮮人、一人は北の工作員みたいですが、この二人を釈放しているんですね。久米さんという人については、自分の意思で行ったかどうか確認できなかったからだと警察は言うのです。確認できるできないは関係ないでしょう。そもそもパスポートもなく外国へ行けば違法じゃないですか。こういうバカなことがあったわけですよ、横田めぐみさんの拉致の直前に。これは、とんでもないサインを送っ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現行犯で捕まっても処罰されないような国がどこにありますか。このことも押さえて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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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拉致問題をどう見るか一その本質
共和国が拉致を認めた日
9月17日のその日、たくさんのマスコミから取材を受けました。たまたま家族で焼肉を食べに行っていたら、そこにじゃんじゃん電話がかかってくるのです。新聞社や通信社から「どう思いますか」ということでした。私の方からは、「それは国家犯罪として許し難い。真相解明すべきである。しかし、謝罪している。北はちゃんと謝罪している。謝罪をした上で、これから仲よくしましようという話でしょう。ですから、拉致問題は本当に悲惨なことだけれども、これを乗り越えて、アジアの平和のために、日本と国交正常化すべきである。」そういうコメントばかりでした。おかげで焼肉が食べられ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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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拉致問題をそういう形で見ていましたけれども、当然真相解明はしなければならない。しかしこの真相解明についても、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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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近韓国から韓国の拉致被害者という人が日本に三人来まして、韓国に2000年に帰ってきたそうですけれども、日本の国会がその三人を呼んで、民主党が中心になっていましたが、その様子が朝日放送の昼の番組で放映されていました。その番組で重大発言があるというのです。1971年から1972年の間にその人はピョンヤンでたくさんの日本人を見たという。だから、拉致は百人は下らない。そんなバカなことを言っているんですね。71年から72年ですよ、観光客、あるいは訪問団とかに決まっているんです。彼の言葉を聞いても、堂々とピョンヤンを歩いているのですから。明らかに日本の服装をした人々がいた。拉致してきたら、日本の服装をして歩かすわけないだろう。あるホテルで、日本人が20人くらいビリヤードをやっていた。そういうのを、皆拉致だ、拉致被害者だと言うのですよ。笑わせるわけですよ。さすがに他の証言者はそれを否定していましたけれどもね。でも、その放送では、していないのです。否定していない、そこが問題なんです。言いっ放し、その放送はされっぱなしなのです。後で二人がそれを否定したというフォローが全然ない。同じ韓国からの拉致被害者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この部分だけをクローズアップしている。しかも、マスコミの人間もみな分かっていますよ、71年から72年に見た日本人というのが拉致被害者ではなく、何らかの訪問団、あるいは観光客であることぐらい。でも、その発言だけが広がっていく、そういう日本社会の状況である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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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題の本質一朝日国交正常化交渉
拉致が発覚する問題よりも大事なことは、朝日国交正常化交渉の問題なのです。それが本質です。拉致問題は大変な問題で、被害者家族の心情は察するに余りあるし、国家犯罪として許せないものだと思います。逆に過去の問題がどうこう、というつもりもありません。そのことも多くの方が言われています。私が今強調したいのは、しかし、それでも、朝日国交正常化交渉は絶対し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なぜ小泉さんがピョンヤンへ行ったかということをもう一度考えてほしいのです。なぜ行ったのか。私は、この外交は、めずらしく日本の主体的な外交であったと判断しています。外務省もそうせざるを得なかった。それは何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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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背景は、東アジアの大きな変化なんです。東アジアは今経済的にどれだけ発展しているか。中国がどれだけ発展しているか。そういう中で、中国の台頭を見ているわけです。アメリカも、明確に、日本よりも中国を見て東アジア政策をやっている。日本の外務省もそれは考えている。外務省の田中均という人は、外務省、旧通産省、経団連の東アジアフォーラムで、明らかに東アジア共同体をめざす研究会をやっている。利益はどこにあるかということに聡い人たちばかりです。国際社会を知っている人たちばかりです。それの座長をやっていたのが田中均という人なのです。彼からすれば、絶対、朝日国交正常化交渉はしなくてはいけない。そうしないと、アジアにおける日本のプレゼンスはない。イニシャティブはなくなる。わかっているんです。ですから、行かざるを得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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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ういう背景も、日本ではなかなかわかりにくいのですけれど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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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ほどの見解の中でも、田中均さんに対する石原慎太郎東京都知事の発言が取り上げられていました。マスコミも批判していました。テロを容認するのか、という。こんな批判だけじゃだめだと思うのです。なんて甘い批判だと思う。なぜなら、田中均一人で外交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ですよ、日本の政府挙げてやっていることなんです。テロを田中均にやってもいい、と言うのならば、小泉にやってもいいと言わなくてはならない。最高責任者は小泉首相なのです。小泉首相が最終決断しているのです。それがなければ外務省、田中均は何もできない。こういうことを、日本のマスコミはきちんと批判しなければいけない。ここをつかなくてはいけないと思います。テロを容認するのはけしからん、という一般論は誰でも言えることです。問題の本質はそこではない。日本の政府がやっ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内閣がやっている。そして、田中のラインにつながっているのが、福田です。福田官房長官、彼は、少しは東アジアに目を向けていかなければいけないと思っている。これに対して、安倍という人は、日米同盟一点張りなんですね。アジアよりもアメリカだ、という右翼的な日米同盟。こういう二つの勢力に、今日本の政府も分かれているんですね。だから、小泉さんも、わざわざ安倍を連れていったわけです、反対させないために。しかし、あの拉致問題で、安倍さんはまたまた復活して、今そのキャンペーンで人気を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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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からは、しばらくの間、アジア重視と日米同盟重視の葛藤が日本の中で続くと思います。しかし、小泉さんがピョンヤンへ行かざるを得なかった事情は、根本的には変わっていない。いや、ますますそうなっていく。東アジアがどんどん発展し、中国がますます台頭してい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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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朝日国交正常化が必要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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去年の10月、東南アジア首脳会議というのがあったのです。それには、プラス3、ということで、中国と韓国と日本も行くのです。そこに、去年は初めてインドも加わった。そこで、何が決まったかと言いますと、東南アジアにはアセアン(ASEAN)10か国がありますね、この東南アジア諸国連合というので長い間結束してきました。そこにはベトナムも入っている。社会主義国も入っているのです。それらの国々が今から3年前に、既に、中国と2007年までに自由貿易協定(FTA)を結ぶという合意をしている。これにあわせて、日本も、これらの国と2010年代には自由貿易協定を結ぶという約束をしました。インドも負けじと、われわれも2010年代にFTAを結ぶぞと言った。こうなると、もちろん韓国も結ぶわけですから、なんと32億の人口になる。世界の中で32億の人口の自由貿易圏ができ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この衝撃が、やがてすごい影響をおよぼすことになる。20年もかからないかも知れません。その中で、日本のおる場所はどこかということな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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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は確かに経済力はありまずけれども、その経済力に見合う自分の持ち場があるかという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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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う一つ象徴的なことは、この時に東南アジア友好条約というのを、これまでアセアン10か国だけが入っていたのを、どうぞ中国も日本もインドも入って下さい、という申し出があった。中国とインドは、入りますと回答した。日本は入らない、入れなかった。なぜか。その友好条約には、不可侵条約の性格があります。だから日米同盟と抵触する。日米安保条約と矛盾が生じるので日本は入れなかった。そこで東南アジアの、またまた大失望を買ってしまった。しかし、これでは大変だというので、みなさまも記憶に新しいと思いますが、昨年12月に東京で東南アジア日本首脳会議があったのです。アセアンが、東南アジア以外でやる初めての会議だった。日本がこれにどれだけの金を使ったか、想像に余りあります。とにかく、これは大変だ、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が、ここに呼んだわけです。私は、その記事を見る前から、まわりにも言っていたのは、東南アジアもしたたかだよ、日本から取るだけ取って日本の要求は聞かないよ、ということでした。実際にその通り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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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ういうことが起こったかというと、この会議の中で、日本側、外務省がどうしても入れたかったことは、東アジア共同体を東南アジアと日本が中軸となってめざす、という文句だった。それが東南アジアからは蹴られた。中軸という言葉は使えない。日本が中軸などとは誰も思っていませんから。韓国も中国もありますから、ということで断られてしまった。にもかかわらず、東南アジア側からの200のプロジェクトを全部飲まされた。ごっそり全部持って帰られた。会議はこちらでやるだけ。こういうことを、日本の政治、外交はやっているのです。しかも、この時に、日本は、中国もインドも入ると言っている東南アジア友好条約に日本も入るということを初めて言った。こう言わないと東京に来てくれないから、入ると言った。しかし、いつ入るとは言わない。日本は、入るとは言ったけれども、いつ入るとは言わなかった。東南アジアはまたあきれるわけですね。
こんなやり方がいつまででも続けられると思ったら大間違いだ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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かつて、日本が帝国主義であった時代と、世界とアジアはもうすっかり変わ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私が1990年にアジア共同体と言ったのは、そういうことだった。今、韓国も中国も東南アジアも、東アジア共同体をめざすと、国際的に合意しているわけです。ここでどういう役割を果たすかが、今後問われていく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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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ういう世界になっていくというビジョンを持って、子どもたちに何を伝えるかが大事だと思うのです。そういう意味で、この『見解』の最後の結論にあるところには、非常に共感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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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から見た朝日国交正常化交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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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う一度、朝日国交交渉を振り返ると、もともと北朝鮮、今日は北朝鮮と言っていますが、私は正式には必ず共和国と言います、共和国は、1955年に既に日本に共和国の側から呼びかけているのです。ナムイル(南日)声明というのを出している。この方は帰国運動の時にも出てくる外相ですが、日本に対して、国交正常化しようと言ったのです。しかし、日本は応じなかった。1970年代半ばまでは、北は非常に積極的だったのです。折に触れて、国交正常化しようしようと言ったきた。1965年の韓日条約には反対したけれども、それでも、しようしようと言ってきた。しかし1976年からは完全に変わ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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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年からクロス承認反対論というのが出てくる。もう日本と国交正常化交渉しない。それは、アメリカと日本と国交正常化交渉するのは罠であると考えるのです。まずアメリカとの関係改善が第一だと考えるようになる。その中で、クロス承認反対という議論が出てくる。僕は、冷戦時代はそれは正しかったと思います。クロス承認に反対しないと、確かに分断固定化につながったと思います。しかし、問題はこの後なのです。1988年のソウルオリンピック前後から、状況が変わったにもかかわらず、共和国はそれに残念ながら対応できなかった。当時私がもし北の当局者だったら、クロス外交を提案する、クロス承認反対はもう押し通せない、と言いました。なぜなら、冷戦時代が変わっていくのは目に見えているからです。ソウルオリンピックには中国とソ連が参加することが決まっている。これはもう、国交正常化するという流れなのです。これを止められない以上は、後手に回ったらいかんと思ったの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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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の立場で後手に回ったらいかんというのは、おかしいですよね、私は北の立場ではないのだから。しかし、統一のためには、バランスをとってほしいのです。そういう立場で言っただけなのです。クロス承認、承認されると思うのがおかしい。こっちが承認してあげる、でいいじゃないですか。アメリカと日本を共和国が承認してあげる。その代わりにそちらも承認しろと。韓国はソ連と中国を承認してあげる。このように主体的にやれば、何もプライドが傷つくこともない。冷戦が終わった後、統一はすぐにはむつかしい。当面は平和共存するしかない。それの方が現実的だ。むしろ一方だけが外交的に承認を受けて優位に立つのは不安定で非常に危険だ、こう言っても、当時はわかってもらえ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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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後共和国は1990年に自民党と社会党を呼んで、朝鮮労働党と三党合意というものをやって、国交正常化交渉をやろうというのを政党間で合意した。その後、日本と政府レベルでも正式の国交正常化交渉をしました。それが10回ほど続いたのですが、それも遅々として進まず、結局、核問題と当時のパチンコ疑惑で、金丸信さんの事務所から共和国の金塊が出てきたとか、いろいろスキャンダルも言われる中で、金丸さんも失脚して交渉は頓挫してしまいました。それから今日まで、小泉さんが行くまで、全くの空白が続い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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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国交正常化と東アジア共同体の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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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すから、こういう問題を考える時に、歴史的にものごとを見なければならない、植民地時代から、戦後の分断、冷戦時代、そして冷戦の崩壊、やはり世界の流れとアジアの流れを同時に見ないと、この問題は十分には見えてこないということを、今日は言いたかったのです。このことを伝えて、学校の先生方がこういう話を聞かれて役に立つのかどうかわかりませんが、子どもたちに、日朝国交交渉をする未来、日朝国交交渉がなぜ必要なのか、アジアの未来の夢をもっと語ってほしいと思います。これからアジアでは、もうビザなしで交流するようになるのは時間の問題です。一部はもうそうなっています。日本もそのうち認めます。おそらくこれは五年も経たないでそうなるでしょう。ビザなしで交流するようになれば、特に、若者たちはどんどん交流するようになります。今でも、年間1000万人が海外に行っているのですね、日本の人は。これからアジアにどんどん行きますよ。アジアからも来るようになります。韓国に留学する日本の学生もたくさんいます。中国へ留学する学生もたくさんいます。中国から韓国へ行く学生の数もものすごく増えている。そういうことが、国境を越えていく動きと共に、広がっていく。東アジアの世界がどんどん広がっていく。そのことと、日本の過去の問題をきちんと結びつける必要がある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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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東アジアはどんどん交流を増やすといっても、中国も韓国も、過去を水に流すことはありえない。靖国参拝は、中国は何世代経っても許しませんよ。植民地の清算をしない限り、侵略戦争の責任をとらない限り、どこかで壁にぶち当たるのですね、日本は。するとどうなるか。日本抜きの東アジア共同体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今は日本は経済力があるから、そんなことはないと思っているかも知れません。しかし、世の中の変化というものは恐るべしです。どんどん変わっていく。日本にいると見えないだけなんです。私も日本にしかいないのになぜ見えるか。やはりいろいろな人的交流があるからです。中国だって、一党独裁という割には、どれだけ市民運動が盛んになって、NGOが活発になっているか。日本のNGOも顔負けなくらいになっ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政府ができないことを、積極的にやっている。NGO同士の連帯がこれからいっぱい起こってきます。NGO同士、市民同士の国境を越えた連帯運動というのがこれからのアジア共同体に絶対に必要なのです。経済と国家が進める共同体だけではだめなので、それではただ格差を生むだけです。そこに積極的に関わり、監視し、人権や民主主義ということをしっかり言っていく市民運動が絶対に必要なのです。国境を越えた市民運動、国境を越えたNGOの連帯、こういうものがこれからどんどん出てくると思います。ですから、私は日本の皆さんと、日本の先生を含めて、日本の市民運動ともっともっと連帯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し、韓国の市民運動、NGOとつなげ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それが在日の役割だと思っています。そして、共和国に対しての人道支援を進めていきたい。共和国もどうなるかわかりませんけれども、余裕が出てくれば、また別な形の交流になる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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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ういう意味で、東アジアという大きな目でこの拉致問題も捉えて、日朝・朝日国交正常化を実現するために運動していこうではありませんか。
以上です。どう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むくげ176号(2004.4.8発行)目次 |
「むくげ開くとき」 法蔵美智子(大阪市教組副委員長) 全朝教大阪(考える会)シンポジウム報告 「拉致問題に見られる日本社会の状況と私たちの教育実践」 1.見解「教育実践をどう前進させるか」 宮木謙吉(事務局長) 2.お話「ワンコリアの視点から拉致問題を考える」鄭甲壽(ワンコリアフェスティバル実行委員長) 3.報告「民族学級・民族交流会実践の今」 ~拉致問題報道から見えてきたもの、だからこそ必要な事~ 辰野仁美(依羅<よさみ>小学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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