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평전 - 항일무장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
김삼웅 (지은이)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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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0일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자 요람으로, 이회영과 그 형제들 그리고 동지들이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만들어 운영한 독립군기지다. 이회영은 여기서 배출된 전사들과 더불어 항일무장투쟁의 전위前衛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우당 이회영에 관한 '본격 평전'으로는 최초라 할 김삼웅의 <이회영 평전>은 우당 개인의 일대기에 국한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당시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심층적.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보재 이상설, 단재 신채호, 석오 이동녕, 백야 김좌진 등과의 관계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씨줄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회영은 "역사가 무엇인지를 묻지 말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데 대한 답을 온몸으로 실천한 행동가이다.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지나간 미래상'으로서의 우당의 생애를 탐구하고 조명한 이 책은 그대로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사'이기도 하다.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다.
책머리에_ 삼한갑족의 노블레스로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제1장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자유사상가이자 우국지사로 성장하다
봉건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사상을 키우다
청년 구국민족운동가로 성장하다
제2장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의 터전을 닦다
일가 60여 명을 이끌고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르다
독립군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다
제3장 혁명가의 투혼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외길을 걷다
국내에 잠입하여 고종황제 망명을 추진하다
임시‘정부’가 아니라 독립운동‘총본부’를 주창하다
제4장 ‘자유로운’ 정신으로 ‘뜨겁게’ 투쟁하다
아나키즘에서 독립운동과 미래사회의 길을 찾다
의열단에 바친 열정 그리고 이상촌의 꿈
아나키즘의 사상적 연원과 우당의 활동
다물단 지휘, 밀정 김달하 등을 처단하다
제5장 서울과 톈진 사이, 그리움과 간난의 세월을 겪어내다
아내를 서울로 보내고 톈진에서의 나날
‘동방연맹’ 결성 그리고 풍찬노숙의 일월
제6장 “당신들이 나를 두 번 처형한다 해도 내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도전정신
항일구국연맹과 흑색공포단을 지도하다
마지막 불꽃을 사르러 가는 길에 순국하다
부록
남편 영전에 바치는 이은숙의 조사
우관 이정규의 <추모 우당 이회영 선생>
닫는 글_ “무서운 깊이의 아름다운 표면”
“선생의 집안은 6형제로 번성한 가족이었다. 형제 모두가 화합하고 즐거워하여 그 우애가 마치 악기를 서로 맞춰 연주하듯 즐거웠고, 산앵두나무의 만개한 꽃과 같이 화사하였으니, 온 집안이 즐거운 기운이 가득 찼고 형제간의 우애의 소문이 온 서울 시내에서 으뜸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하여 사회 통념을 뛰어넘는 과감한 행동으로 그의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기도 했고, 더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도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 자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당치않은 짓’이었다.”
신민회 발족 한 해 뒤인 1908년 상동교회에서 이회영과 결혼한 이은숙의 자서전에도 신민회가 상동교회의 5인에 의해서 결성되었음을 증언한다. 명문 사대부가 태생인 이회영은 애초에 근왕주의자일 수밖에 없던 탓에, 양명학을 탐구하였으나 왕조를 국권과 동일체로 인식한 가운데 국권회복운동에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상동교회와 신민회에 몸담으면서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일부의 복벽復?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가 되고, 뒷날 이를 뛰어넘어 아나키스트가 되었으니 이회영은 자신의 말대로 ‘자유인’이었다.
이회영은 뒷날 한국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위치가 되는 등 독립운동진영에서 누구보다 인망이 높았지만, 천성이 워낙 감투를 싫어한 데다 아나키스트적인 기질 탓에 어떤 단체를 조직하고도 높은 자리에 앉은 적이 없었다. 일은 선도적으로 도모하되 윗자리는 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겸양이 몸에 밴 것이다. 이처럼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뿐더러 마음이 어질고 언행이 청결하니 화합의 리더십으로는 당대에 그를 넘을 자가 없었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으로 보아서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 동지들에게 공연한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북만주로 떠나는 길에, 이회영)
저자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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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
삼한갑족 부귀영화를 박차고 항일투쟁의 전사가 된
‘아나키스트’ 이회영의 파란만장한 ‘망국노’ 일대기
2011년 6월 10일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자 요람이었다. 독립투쟁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청산리·봉오동 대첩의 주역들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가 길러낸 전사들이었다. 1911년 설립하여 1920년 폐교하기까지 10년 동안 항일전사 3500여 명을 길러냈으니 가히 ‘독립군 사관학교’였다. 그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역이 바로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이고, 그 설립자금은 이회영 형제 일가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 원이었다. 현재 가치로 6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과 그 형제들 그리고 동지들이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만들어 운영한 독립군기지다. 이회영은 여기서 배출된 전사들과 더불어 항일무장투쟁의 ‘전위前衛’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당시 일제를 경악케 한 항일투쟁의 배후에는 대개 이회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회영은 어떤 ‘자리’나 ‘지위’에도 이름을 걸지 않고 그야말로 ‘백의白衣’로써 투쟁의 전위에서 종군하였다. 당시 내로라하는 아나키스트 독립투사들은 대개 신흥무관학교를 거쳤으며,《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은 최연소(15세) 입학생이었다.
우당에 관한 ‘본격 평전’으로는 최초라 할 김삼웅의《이회영 평전》은 우당 개인의 일대기에 국한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당시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심층적·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보재 이상설, 단재 신채호, 석오 이동녕, 백야 김좌진 등과의 관계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씨줄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노블레스들은 권리만 있고 책임과 의무는 없었다. 그래서 왕권의 그늘에서 온갖 이권과 호사를 누리던 자들이 막상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 빌붙어 일왕이 주는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받고 조국과 겨레를 배신했다. 이런 축에도 못 끼는 자들은 친일파가 되고 부일협력자가 되어 일제에 충성하면서 호의호식했다.” 그런 참담한 역사 가운데서도 이회영 일가와 같은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한 노블레스가 있어 오늘날 우리가 반이나마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진 않을까.
이회영은 “역사가 무엇인지를 묻지 말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데 대한 답을 온몸으로 실천한 행동가이다.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지나간 미래상’으로서의 우당의 생애를 탐구하고 조명한 이 책은 그대로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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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4편
자유로운, 그리고 진실한 영혼을 위하여 saint236 ㅣ 2016-12-19 ㅣ 공감(3) ㅣ 댓글 (0)
우리나라는 아직 친일이 청산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이 주장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라는 것이,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민족주의 사관을 살펴보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해보았지만 놀랍게도 이회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약산 김원봉의 경우도 암살이라는 영화를 통하여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까지 한국의 양반들은 일제에 부역했던 존재들이었으며, 몇몇 사람 정도만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자살했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우당 이회영과 그의 일족의 삶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양반으로 태어나서 아나키스트라는 특이한 길을 걸어간 그의 이력은 내게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좌도 우도 아닌 아나키스트의 삶을 살아갔기 때문에 그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것에 비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일제와의 투쟁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자유주의 진영,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진영! 사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공산주의 진영에 투신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주의 진영에 투신하였다. 아니다 자유주의 진영에 투신하였다기 보다는 공산주의 진영에 투신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유주의 진영에 투신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회영처럼 제 3의 길을 걸은 사람이 있다. 물론 약산 김원봉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순수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원했다. 이들은 힘도 없으면서 외교적인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며, 설령 독립이 된다고 할지라도 일제에서 미국으로, 혹은 소련으로 지배의 주체만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시간을 보내면서 독립을 준비하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일제에게 맞서서 지금 할 수 있는 있는 일은 무엇인가? 무장 행동이다. 다만 무장 행동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수단이지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 민족은 물론 당시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본과의 투쟁을 위해서 그어느 단체와도 사심 없이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이회영과 같은 거목이 중심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로이면서도 아랫 사람들을 다스리지 않고, 강압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오해를 사서 자신이 지도했던 단체에 의해 암살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의 신념을 한번도 꺾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달려갔다. 대접받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절대로 책임자의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순수한, 그리고 진실한 독립 운동가의 대명사, 그가 우당 이회영이다. 자신의 재산을 다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바쳤고, 그 결과 형제들과 그 가족들 가운데 아사자가 있었고, 병으로 죽고, 투옥당하고, 살해당하고. 부인과 생이별하고, 자녀들을 무장투쟁의 길로 인도하고. 개인적으로 그가 겪었을 그의 아픔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글의 행간에서 읽힌다. 그렇지만 이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오늘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라 걱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진실하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회영 선생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분.... bookholic ㅣ 2016-06-20 ㅣ 공감(11) ㅣ 댓글 (0)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다시 이회영]
예전에 이회영이란 분을 처음 알게 되고, 그 분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어서 찾아보다가 역사학자 이덕일이 쓴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란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내가 좋아하는 김삼웅이 이회영 평전을 내셔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랬다가 책을 낸 지 한참이 지난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이회영이란 분에 대한 이야기는 텔레비전을 통해 제법 많이 소개되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여섯 명의 형제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우애 좋기로 소문났다고 한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여섯 형제.
그들을 행동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못 했을 텐데 말이다. 비록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 이회영 집안처럼 삼한갑족이라고 부를 만큼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면 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런 자신의 안위는 삶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의 넷째이지만,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주도적이었다. 그래서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간도 땅으로 가자고,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단 한 명도 반대가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하인들 사오십 명이 한겨울에 그 추운 간도 땅으로 갔다고 한다. 하인들도 억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다. 이미 스무 살 때 이회영은 자신의 노비들에게 존댓말을 쓰면서,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런 선각자였다. 이회영 가족과 같이 간 하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간 것이다. 여섯 형제 중에 이석영은 친척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 양아버지가 영의정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자였다고 한다. 이석영도 동생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서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급하게 재산을 처분해야 했기에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도 오늘날로 치면 60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겨울 모진 밤바람을 맞고 사오십 명이 북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생각해보니, 찡하다. 그 일행 중에는 갓난아이도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민족주의자]
기억에 가장 남는 부분부터 급히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우리나라를 떠나 간도로 가는 장면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전에도 이회영은 국내에서 잘못된 나라 꼴을 제대로 돌리려고 노력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회영은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을 몰래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일을 하나 기획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독립을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참석하게 되는데, 이 일은 유명한 일로 학교에서도 배웠다. 그런데, 이 일을 기획한 사람이 이회영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준이 할복자살했다는 것만 기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준은 그곳에서 분함에 병을 얻어 병사를 하신 것이다. 암튼, 이회영이 기획한 이 일에 고종도 동의하고, 옥새까지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헤이그에 온 것을 알고, 못 들어오게 조치를 취했지만,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서 우리나라 상황을 전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약소국의 현실만 확인하고 큰 효과는 얻을 수 없었다. 이 사건에 고종도 연루된 것을 알게 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순종을 왕위에 세웠다.
그 이후 이회영은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교육기관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거사를 꾸미기도 했지만, 실패를 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직접 중국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섰고, 그래서 찾은 곳이 간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10년 12월30일, 한겨울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간도에 도착했다. 그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전부터 생각해온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메카가 되었고, 3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게 된다. 지청천, 이범석 등 많은 사람들이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회영은 군자금을 모으려고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가 그는 또 다른 큰 일을 계획했다. 그것은 바로 고종을 망명시키는 일이다. 고종을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만들면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친일파가 독살한 죽음으로 이루지 못했다.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다시 중국으로 갔다.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 이회영.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 해석하는데, 아나키스트를 말을 일본에 어떤 사람이 맨 처음에 무정부주의자로 해석을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를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무강권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맞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유럽에서 처음 생긴 이후 아나키즘의 흐름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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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배와 권위를 거부하고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은 그리스어 ‘an archor’에서 유래한다. 모든 정치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의 강제수단을 철폐하여 자주, 자유,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려는 이데올로기다. ‘아나키(anarchy)’는 미하일 바쿠닌이 처음 쓴 말로 알려졌다. “그는 ‘재산은 절도’라는 말로 유명한 프루동의 제자로, ‘아나키’는 그가 조합한 단어다. ‘계급구조’를 의미하는 하이어아키(hierarchy)의 반대개념으로 ‘무정부’를 뜻하지만, ‘혼돈’이나 ‘무질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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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만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가 아나키스트가 된 이유는 그것이 우리나라 독립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가 그 시대 또 하나의 조류였던 공산주의를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도 소련에서 이미 변질되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시대를 읽는 통찰력 또한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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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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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과 만나게 되는 이회영. 그들을 후원하게 된다. 의열단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원봉이 이끌고 있었다. 예전에 이원규의<약산 김원봉 평전>을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김삼웅도 <김원봉 평전>을 쓰셨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김원봉은 작년에 크게 인기를 끈 영화 <암살>에서 나와서 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활약은 일본 경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보다 더 활약이 많았고, 일본이 김구보다 훨씬 무서워했던 이가 바로 김원봉. 그가 해방 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북한으로 넘어간 이후 우리 나라의 역사책에서 사라진 것이 끝내 아쉽다. 꼭 그래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친일파들은 버젓이 실려 있는데 말이다. 김원봉이 우리나라 역사책에 더 크게 부각되었다면, 이회영 선생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약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약산 김원봉 평전>을 추천한다.
[독립운동가의 가족]
그 이후에도 이회영은 베이징, 텐진, 상하이를 오가면서 ‘다물단’, ‘무련’ 등 무장 독립 단체를 만들면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어. 간도로 오면서 가지고 온 돈은 이미 독립자금으로 다 쓴 이후다.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 가족들은 빈곤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회영은 아내 이은숙에게 독립자금을 마련해 보라고 국내로 다시 보냈다. 당시 임신한 몸이었던 아내 이은숙은 국내로 들어왔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바느질까지 해서 돈을 마련하여 중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이 분 또한 투철한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중국의 먼 땅에서 남편을 찾아오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까지 다 해주었다고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내로 자금 마련을 오는데도 한치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그 길이 이회영과 마지막 길이었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이은숙은 자서전을 통해 이회영의 독립 운동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아 역사적으로 귀한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혹시 책을 살 수 있나 싶어 검색해봤더니 이미 수십 년 전에 절판이 되었다. 이런 소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도 출판사들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튼, 아내를 국내를 보내고 나서 이회영은 텐진을 기점으로 운동을 하다가 상해로 거사를 위해 이동하게 되는데,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갈 수 없어서 구제원에 맡기고, 아들만 데리고 상하이로 갔다. 구제원은 오늘날 고아원이다. 하지만, 가는 길에 계속 두 딸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성공적인 거사 소식을 듣고, 경비도 삼엄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텐진으로 돌아왔다. 두 딸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첫딸 규숙이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평소 이회영을 존경하는 젊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다. 이회영은 규숙 부부에게 아직 어린 둘째딸을 보살피게 했다. 그래서 자유로운 몸이 된 그는 다시 무력 투쟁에 온 힘을 쏟게 된다. 국제 아나키스트의 연맹인 동방연맹을 조직하기도 했고, 남화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백범 김구와 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유력 인사가 북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흔 가까이의 나이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위험한 일은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한다면서 북만주행 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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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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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은 끊겼다. 그리고 얼마 뒤 뤼순 감옥에서 그가 죽었다는 사망통지서가 국내에 있는 아내 이은숙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거꾸로 상해에 있는 이회영의 아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뤼순 감옥은 예전에 안중근 의사가 죽은 곳이고, 신채호 선생도 투옥 중 사망하신 그 곳이다. 뤼순 감옥은 우리나라 아픈 현대사를 가득 담고 있는 곳이다. 일본은 이회영이 자살했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그는 모진 고문으로 삶을 잃었다고 밝혀졌다. 그리고 이회영이 일본경찰에 잡히게 된 것은 바로 이회영의 조카가 발설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해방을 하고 나서 여섯 형제 중에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또한 정말 가슴 아프다.
[이회영]
누군가 이회영이 어떤 분이 물어본다면,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이회영이란 어떻게 짧고도 강렬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를 많이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지은이가 이 책의 ‘닫는 글’에서 그 답을 주셨다. 짧고도 강렬하게 이회영을 정리해 주었다. 그 글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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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유학에 탐닉하지 않는 개신유학 찾는 열린 사상,
왕조체제와 공화주의 교체기의 개명사상,
벼슬이나 감투보다 분방하게 살고자 한 자유혼,
형식논리의 주자학보다 실천논리의 양명사상,
현실안주와 저항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기득권 포기,
‘상놈’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서 결혼식 올린 파격,
청상이 된 누이 장례 치르고 재혼시킨 여성주의,
머슴들 해방시키고 존댓말 쓴 평등사상,
황실과 가까우면서도 신민회 창설한 탈근대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파견을 주도한 국제주의,
고종황제 앞세워 망명정부 세우려던 통 큰 고구려인,
일가 재산 모두 팔아 망명한 ‘인민의 전위’,
윗자리 사양하고 위험한 곳 먼저 찾은 비범한 범인,
굴욕과 억압보다 자존과 저항을 택한 자유주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세운 무장투쟁의 원조,
목적과 수단을 일체화하는 리얼리스트,
일의 성패를 문제 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을 중히 여긴 양명학자,
시작과 끝을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파,
대원군 난초 쳐서 독립자금 만든 예술혼,
지위나 물욕보다 명예와 가치를 높이 산 아나키스트,
광복운동 과정에서 ‘자유협동체론’을 제시한 경륜,
“독립한국은 4민 평등한 만인의 자유평등과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사회”를 꿈꾼 민주공화주의,
“나의 소망은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되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네.”
존 레논을 닮은 ‘목마른 영혼의 외침’의 소프라노,
다물단, 흑색공포단 지휘한 조선의 체 게바라,
온갖 고문 악형에도 입을 다문 사육신의 화신,
처자보다 동지, 동지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 순혈 조선인,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을 함께한 선비,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한 겨레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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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로 이회영이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독립을 염원하던 진정한 아나키스트, 우당 이회영 모카프라푸치노 ㅣ 2015-09-13 ㅣ 공감(3) ㅣ 댓글 (0)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먹고 살겠다고 옛 선조들의 은덕과 그 정신을 멀리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마음에서 책을 듭니다. 조선말 상당한 부유한 집안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잃은 설움과 되찾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현재 시세로 약 600억 상당의 재산을 몽땅 정리해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식솔 60 여 명을 이끌고 춥디 추운 만주로 도망치듯 떠나간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지는 않을지언정 조용히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감에도 누가 욕을 할 사람은 없지만, 당시 주어질 수 있었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양반의 가문임에도 노비를 해방시켰고 형제들을 설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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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제일 앞장서서 나서는 자리를 싫어했기때문에 그가 쌓아온 명예는 보이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고귀했습니다. 재산을 정리한 돈으로 만주에 땅을 구해 독립투사들의 산실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희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잔악한 손길이 만주까지 미쳐서 중국 내 현지인들과 함께 조선에서 탈출해온 사람들을 몹시 괴롭히던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무장투쟁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본국과 해외동포들로부터 마련하기 어려웠고, 선생은 직접 구하기 위해 귀국까지 하는 동 노력했지만, 모금은 커녕 사흘 간 죽 한 두그릇만 먹을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까지 처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중국으로 몰려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으나 많은 파벌들의 운동노선으로 인해 쉽사리 굴러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분란을 조정하기 위해 하나의 정부기구로 가는 것보다는 여러 노선과 사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연합할 수 있는 독립연합 총본부 형식을 주장하였으나, 위원직 선출에서 분규가 일어나게 되고, 민족진영, 자유진영, 공산진영 등의 분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이회영 선생으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떠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노선은 다를지언정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연합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던 혜안을 지녔습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선생의 고난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자금줄이 막혀 아내는 고국으로 돌아가 생활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선생은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겨 음식을 구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여러 운동가들과 고류를 하면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는 어감으로 해석이 되었는데 마치 정부를 부인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의미로 오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정부의 권위과 명령, 복종의 요구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침해를 입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부라도 개인의 자유를 억누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자유를 지닌 개인들이 정부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하면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는 제 3의 대안이 가능한 사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치적 이웃 국가인 미국도 여러 자치적인 연방정부가 뭉쳐서 한 나라를 이룬 것도 노선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해 가능한 케이스입니다.
이는 선생이 아나키스트의 선봉장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선생은 전통의 성리학 대신 실용적인 양명학을 수학하고 한 명의 엘리트로써의 영웅론을 배격했었고 일반 개인 하나하나의 의지를 소중하는 차원에서 아동교육에 관심을 갖고 무관학교 설립등을 통해 청년의 교육에 대해서 우선 시 한 것에서 그 의지가 드러납니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는 엄연히 다르고 혁신적인 사상임을 이 책을 통해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또한 하나의 권위를 강요하는 사상이 될 수 있고, 민족주의 또한 타 민족의 자유를 훼손할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 자체는 또다른 나라를 만들어 국민들을 복종시키는 목적이 아닌 자유를 탈환하는 민중의 의지를 보여주는 운동으로써 해석하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알려진 '의열단'을 이끄는 약산 김원봉의 무장투쟁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김원봉 또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아나키스트로써 의열단을 창단하는 것에 많은 공로를 이회영 선생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에 선생은 아나키즘의 현실 적용을 위해 이상촌 건설등을 노력했으나, 결국 자금과 현실의 벽에 가로 막쳐 좌절되었던 상황에 점차 나이를 들어갑니다. 다만 '무련' 을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의열단을 통해 무장투쟁을 감행하였습니다. 생애 말년에 만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지속하려고 했으나, 사상적 동지였던 김종진이 만주에서 암살당하며 또 계획이 무산되고 맙니다. 여러 등지를 다니며 고생하다가 만주로 돌아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려고 할 찰나 어이없이 일경에게 붙잡혀 옥사를 당합니다.
선생은 끝내 광복을 목도하지 못하고 별세하였지만,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 그 조국에 있는 우리들은 영원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수준을 넘어 선생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일깨워줬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아나키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받고 자율성을 정부에 의해 또는 타인의 의해 침해 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기에 우당 선생의 가르침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사색을 많이 해야 하겠죠.
이회영 평전 Wannabe-Womad ㅣ 2014-11-28 ㅣ 공감(0) ㅣ 댓글 (0)
2014.2.27. 목. `이회영 평전` (김상웅 지음)
지나간 세월 속 인물의 삶에 이렇게 감동받고 가슴이 뛴 것은.. 참으로 오랫만인듯.
우당 이회영..일제강점기에 신민회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한 정도만 알고있었는데...
뼛속까지, 영혼 깊은 곳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자체였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삼한갑족의 귀족 집안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옳다고 믿는 정의를 위해 치열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
정말이지, `지나간 미래상`이라고 할 만한 그의 활약상이 눈부시다..
그런 한편,
부와 명예,권력 모두 버리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고행 길로 향했던 그와 그 일가가...
모두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후손마저 설 곳 없이 사그라져 갔다는 것이..
이를 나라가 모른 척 했다는 것이
씁쓸하고 부끄럽다...
자유로운 정신으로 뜨겁게 투쟁했던
그,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뒤늦게라도 더 많이 찾아보고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야겠다.
역사는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똑같은 얼굴로 다시 찾아와 다시금 큰 상처를 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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