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2
보도연맹 학살사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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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학살사건
최근 수정 시각: 2017-11-21 02: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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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보도연맹이란 어떤 조직인가?3. 전쟁 발발과 학살
3.1. 전쟁발발 무렵 보도연맹원들 동향3.2. 정권의 보도연맹원 대량 학살4. 은폐와 진상 조사
4.1. 제2공화국 정부의 진상조사 노력4.2. 연좌제, 유족들의 고통4.3. 2000년대 참여정부의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4.4.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영상5. 현대의 평가와 해석
5.1. 학살 사건의 성격6. 참고 영상7. 관련 작품/관련 문서
1. 개요[편집]
6.25 전쟁 중 대한민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6.25 전쟁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게 함락된 지역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이적 행위(군경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밀고 및 체포, 살해 등)를 하자, 여순사건의 트라우마에 걸린 상태이던 대한민국 정부가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리'를 명령했고, 이 과정에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이 헌병, 경찰, 특히 서북청년단 등에게 비인간적으로 대량 학살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정부가 죄 없는 민간인까지 단순히 보도연맹이란 집단 내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인, 한국전쟁 당시에 발생한 끔찍한 학살이자 전쟁 범죄다. 연구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최소 약 5만 명에서 최대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1]된다.[2]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58년 만에 최초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에 희생된 국민들의 유가족들에게 공식 사죄하였다. 참여정부 이전의 정권들은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다. 심지어 민간인 처형자 명단을 3급 기밀로 분류해 학자들과 유족들의 진상 규명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2. 보도연맹이란 어떤 조직인가?[편집]
국민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 약칭은 보련)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이다. 보도연맹 산하에는 정치범 전향 교화 시설인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쿠)이라는 게 존재했는데, 모방해서 이런 걸 만들자고 한 사람은 오제도이고 그의 아이디어로 임의로 설치된 단체다.[3]
국민보도연맹은 실제 남로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공무원들의 건수 올리기 실적주의 때문에 가입에 강제수단이 포함되어 있었고, 경미한 단순 동조자나 진짜 좌익 경력자가 아닌 사람들이 다수 포함된 것이 문제였다.[4]
여기에 문학가, 예술가들도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양주동, 황순원, 정지용 등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무렵에 접어들면서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된 사람들 가운데는 심지어 우파 계열인 한국독립당 계열 성향과 가까운 사람까지 있었다(ex:정지용).
그러나 아직도 수구 + 극우 세력들은 '보도연맹 가입자들 대부분이 위장 전향한 공산주의자일 뿐이며, 무고한 양민이 가입한 것은 근거가 없는 소리다![5]'라면서 '보도연맹 학살은 당연히 죽여야 할 새끼들 심판한 거니 잘한 것이다!'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놈들이 참 우파 망신 다 시킨다. 사실 걔들은 우파가 아니라 매국노다 또한 학술 논문 중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끔찍한 학살이나, 이 사건이 전후 대한민국의 사회,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 이라는 스탠스를 취하는 논문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잊지 말자. 그 어떠한 이유가 있더라도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최악의 비인간적 범죄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보도연맹원들 중 다수가 무고한 양민이었다. 전쟁통이어서 혼란스러워 그랬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게 친다면 북한군과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도 옹호할 수 있는 이상한 공식이 나온다.
애초에 당시 신문을 보면 지식인과 일반인들의 전향 선언서가 광고면을 뒤덮었다. 박명림이 지적한 대로 남한이 이념적으로 취약했거나 아니면 억울한 전향자가 많았거나의 둘 중 하나다.
10대인 중·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보도연맹 가입은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반 강제적 가입'으로 인해 생겨난 경우가 있음이 밝혀졌다. #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이장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도장을 걷어다가 보도연맹 가입 문서에 한꺼번에 도장을 찍기도 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은 지역마다 경찰서별로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리해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는데, 일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이나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당시 정부는 보도연맹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되면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공표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요시찰대상'으로 취급하였다. 특히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으로 감시대상이 된 사람들은 여순반란 등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체제 하에서 정치․사회적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6] 이들에 대한 폭력 행사도 빈발하였다.
그리고 이들 전부다 남로당원 출신으로 전향자라고 생각할수도 있을 텐데, 남로당원과는 무관한 양민들이 상당수였다. 특히 시골로 내려가면 갈수록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서 가족들 가운데 공산당 당원이 있었으면 전부 다 반강제적으로 가입당했다거나, 김원봉의 사례처럼 월북한 주요 인사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강제로 가입한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공산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우익 청년단 단원이 경찰이 마을 당산나무를 베어 파는 것을 막았다가 미움을 사 보도연맹 학살 와중에 잡혀가서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7]
여기서 재밌는 건 전후 남한에서 꽤 유명한 인사들도 보도연맹에 들어있었다. 코주부 삼국지로 유명한 일러스트가 김용환 선생이나 '삼대'의 작가 염상섭, '카인의 후예'의 작가 황순원도 보도연맹원으로서 활약한다. 그들은 전후 남한에서도 대단한 지위에 오른다. 보도연맹에 소속되었다가 북에 생포돼서 재전향한 정현웅이나 이쾌대는 월북 후 북한 예술계의 거두가 된다.
그런데 보도연맹이 효과를 발휘하여 남로당의 세가 확연히 축소되는 것으로 보이는 시점에서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이들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 우려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의 성격 때문이었다.
3. 전쟁 발발과 학살[편집]
3.1. 전쟁발발 무렵 보도연맹원들 동향[편집]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보도연맹은 본래 공산당으로부터 전향한 조직이므로, 명백한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8]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점령할 경우 이들의 배신 행위에 대한 처벌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전쟁이 터진 후 말 그대로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당했을 당시에 북한군의 처벌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앞장서서 인민재판과 남한 정부인사 및 군경 패잔병 색출에 나섰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백. 정백은 공산당 최고참격 간부 출신으로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을 맡았던 핵심간부였다. 그러나, 정백 역시 북한군에 의해 '기회주의자의 표본'으로 몰려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한다. 이를 근거로 오늘날 수꼴들은 '보도연맹은 두말할 거 없이 위장으로 가입한 좌빨들, 다 때려 죽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다.[9] 하지만 이는 일면적인 주장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진 숙군 등에서 대한민국 지역 내 공산당 조직들은 속속히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무렵. 대부분의 보도연맹원들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고 한다.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이자 주요 간부였던 사상검사 오제도와 사상검사 정희택[10]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6월 28일 정부가 피난 가기까지 서울지방 보도연맹원들 상당수는 예비검속된 후 담당 검사의 통제를 받았다. 서울 지역은 각 구(區) 보도연맹원은 검찰 지휘 하에 소집되어 반공 활동을 하였고, 보도연맹 의무실(전 공산당에서 전향한 의사, 간호원으로 편성)에는 비상구호반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란민 안내와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 등의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희택은 "시민이 피란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 6천 8백명의 보련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11]
"1950년 3월 철도보도연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6.25 때 후퇴하는 가운데 철도 수송에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정부에 충성했었다. 6.25 사변이 돌발하자 25일에는 타공전시체제(打共戰時體制) 강화를 했고, 26일과 27일 양일은 특히 보련 의무실이 청량리 밖 문이과대학 교정터에 이동의무실을 가설하고 2백여 명의 피난민을 무료로 구호했던 것이다." -오제도, 공산주의 ABC, 삼훈출판사, 1984.- p131-
이어, 이 보도연맹 입안 추진자였던 당시 사상검사 오제도氏는 6.25 전쟁 개전 초기 서울에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군경과 가족이 의외로 많이 살아 남은 데는 보련원들의 도움이 컸다면서, 수원 이남에서 무차별 학살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어 오제도는 '보도연맹 학살은 정부의 커다란 과오'라고 시인까지 했고, '이제라도 보도연맹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치뤄줘야 한다'고 말했다. #
"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12]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대채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서울 함락 전야에는 일부 소요가 있었긴 있었다)."[13]
이처럼 북괴 점령 하의 서울에서도 보도연맹원들 동향은 일부는 인민군에 협력해도 남은 인원들 가운데서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 했다는 기록과 증언도 있다.
다만 인민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던 지역에선 전쟁 발발 이후 군, 경이 후퇴하자 다수 지역에서 일부가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행동을 한 사실이 있다. 전쟁 개시 당일부터 개성 등의 '적에게 점령된 곳'(즉 공산당의 통치가 이뤄진 곳)에서는 일부 보도연맹회원들의 반역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된다. 다시 말하지만 보도연맹원 중에서는 국군, 경찰을 보호해준 분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아래의 배신 행위는 일부의 행위임을 볼 수 있다.
아래의 회고록들을 읽어보자.
"1950년 6월 25일 당시 38선 바로 이남에 있었던 개성에서는 인민군이 내려오자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인민군측과 협력하여 우익인사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서울이나 강화 등 경기 북부지방의 경우 워낙 갑작스럽게 인민군이 남하하여 미처 보도연맹원을 구금하거나 수감된 보도연맹원을 어떻게 할 수 없었으나 평택 이남 지역에서는 강화 등 북한 점령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곧바로 구금하여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전쟁과 사회> p220-221
"남침 5시간 만인 오전 9시 개성이 그들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자들이 오히려 반공인사와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그 같은 만행은 대한민국에 전향했던 사실만으로도 공산군에게 살해될 충분한 이유가 되므로 두렵고 불안하여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황급히 그들의 앞장에 서서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사실 그날 아침 공산군은 그들을 모아놓고 전향한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앞장설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개성보도연맹원들의 잔인한 행동이 정부로 하여금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들의 행동을 경계하도록 조치시킨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 <한국학생건국운동사> p517
"6월 28일 새벽 1시 20분경 서울 역전에 도달해보니 여러 대의 전차(電車)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붉은 완장을 팔에 두른 2명의 청년이 피난민들 틈에 끼어서 이제 서울이 영용한 인민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니 피난가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며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 지프차 라이트 속에 보였다. 나는 즉시 한호 상사에게 공산분자를 색출하여 처치할 것을 지시했다. 한상사는 광복 직후 함경도에서 월남하여 서북청년단에서 반공활동을 하다가 제 18연대 창설과 함께 입대한 청년이었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가서 두 명의 적색분자를 처치하고 돌아왔다. 삼각지 진지를 출발한 중대는 용산구청 앞과 공덕동 뒷산을 거쳐서 마포형무소 앞을 통과하다가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형무소에서 뛰쳐나온 한 무리의 죄수들이 수의를 입은 채 북한군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중대 대열이 접근하자 저항하려는 태도(돌팔매질과 작대기를 휘두르는)를 취하고 나왔다. 적개심에 불타있는 장병들이 그런 꼴을 보고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중대장님! 저 놈들은 빨갱이 운동을 하다가 징역을 살고 있던 놈들인데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처치해 버려야 합니다." "좋다. 그러나 주동자들만 색출해서 처치하라." 나의 승락이 있자 대원들은 그들을 포위하고 주동자 15명을 색출하여 즉결처분하고 나머지는 훈방했다. - 18연대 3중대장 김상덕 중위 <7일간의 한강방어> p33,45-46
"6월 28일 남산 남쪽 해방촌으로 내려와 주민들에게 아군의 행방을 물었더니 (한강교 폭파로) 서빙고에 집결하여 도하하는 중이라 한다. 서빙고로 가려고 해방촌 한 모퉁이에 서서 내려다보니 길목마다 행인들의 신분을 조사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었다. 50대 부인과 한 주민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조사하는 청년들은 보도연맹원들이며 붙잡히면 인민군에 인도된다고 한다." -2사단 병기중대 부관 길관우 <노병들의 증언> p381
"6.25가 터진지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았기고 뒤쳐진 국군 패잔병들을 잡는 대로 총살하여 강뚝에서 뒹굴러 버리는 광경을 보고 또 어린 학생들을 불러 모아 소년군을 조직하여 집집마다 숨어있는 청장년을 고발하여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리 저리 피해 다니지 않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더욱이 보도연맹원 출신 동리 빨갱이들은 보광동 양민들(주로 통반장 가족)을 젖먹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30여명을 한강백사장(공영사 근방)에 끌어다가 구덩이를 파게하고 무차별 총살시켰다." - 이희태 전 S고 학생주임 <6.25비사> p48
"6월 28일 이문동에서 광나루를 목표로 정하고 분산철수가 시작되었다. 낮 1시 하산하는데 벌써 북괴군은 밀어 닥친다. 순식간에 수명이 달려들어 생포하려 한다. 나는 돌아서서 소리쳤다. " 거기 서! 오면 쏘겠다!" 서로 총질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보도연맹원들이 떼를 지어 작대기를 짚고 산으로 올라오면서 잡으려 한다. 나는 권총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거기 서! 오면 쏜다!" 두세 번의 위기를 모면하고 이문동 뒷산을 간신히 빠져 나왔다." - 8연대 8중대 2소대장 강영활 중위 <노병들의 증언> p754
"6월 28일 흑석동에서 적정을 수집하던 중 김포지구에 적 전차 40여대가 침입했다는 제보가 있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밤중에 현지로 떠났다. 가는 도중 보도연맹원을 만나는 것이 적보다 더 두려웠다." - 육군본부 정보장교 최명재 <노병들의 증언> p616
"적 전차포의 사격을 피해 급히 골목길로 차를 몰아 적의 관측에서 벗어났다. 다시 큰 길로 빠져나왔을 때 안양 읍사무소 건물이 눈에 띄었고 어느새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에 인공기를 보기도 하고 탈취하기도 했지만 아직 국군이 있는 지역 안의 건물에 인공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저 기를 게양한 자가 건물 안에 지금도 있을 것인지, 기를 내려 찢어 버릴 것인지 나는 망설였다. 전차의 캐터필라 소리가 들려왔다. 5분의 시간이 아쉬웠다. 5분만 허용된다면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 광경을 통해서 불리한 전황이 반역자나 그의 동조자들에게 실제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나를 목격할 수 있었고 국가의 전쟁지도방침과 행정기능 치안유지 및 주민통제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 18연대 부관 이병형 대위 <대대장> p51
"7월 4일 저녁 무렵 안성군의 한 마을에 도달했다. 약 60호 정도의 촌락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20여명의 청년들이 인공기를 들고 도로를 막고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인공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도적놈 피하면 강도 만난다고 하더니..." 일제히 임전태세를 취했다. 천천히 다가가 살펴보니 그 청년들은 비무장이었다. 그쪽에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하다는 듯 웅성거렸다. 우리 일행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환영 나온 사람들이었다. "인민군 동무 환영합니다." 우리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청년들은 어떤 사람들이요?"하고 이북출신 장교가 나서서 물어보니 그들은 서슴없이 "인민군 환영준비위원"이라 했다. 우리는 계속 인민군 행세를 하면서 주동자를 가려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밤 저 산 계곡 아래서 숙영할 테니 환영위원들은 나와서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소." 손관도 소령이 이북 사투리를 써가며 그들에게 당부했다. 손 소령은 이북출신인데다 달변가였기에 그들은 깜빡 속고 있었다. 그들 핵심 빨갱이를 유인한 우리들은 그 계곡 쪽으로 갔다. 얼마 후 그 계곡에서는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 육사 생도2기 주성노 <어머니와의 약속> p32
"평택역 근방에는 동원된 많은 제대군인이 화차에 실려와 있었으며 전방에서 후퇴하는 병력까지 합쳐 역구내와 광장은 크게 붐비고 있었다. 이때 쌕쌔기가 날아와 기총 공격을 하여 평택역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팔 다리가 끊어지고 목이 떨어진 사체가 역 광장엔 물론 부근 논두렁에 즐비했고 붉은 피가 흥건했다.(평택역 오폭사건) 밤이 되니 부대는 다시 후퇴를 개시했다. 얼마쯤 걸어가는데 이곳저곳에서 요란하게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고함이 들린다. 알고 보니 창고 속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들이 후퇴하는 우리를 인민군으로 잘못 알고 소리치고 있었다." - 육군본부 직속 독립대대 화기중대 소대장 정규화 <노병들의 증언> p354
"7월 초순경 한밤중에 필사적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오근장을 통과할 무렵 날은 밝았다. 이 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은 간악했다. 우리에 의해 창고에 갇혔던 빨갱이 보도연맹원들은 창고를 부수고 나와 곳곳에서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는가 하면 결사적으로 대항해 와 후퇴하는데 2중 3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 1연대 소대장 이본령 중위 <노병들의 증언> p516
"진천전투에 참가했으나 세가 불리하여 야간에 청주로 이동하는 도중 지명을 알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할 무렵 난데없이 "인민군 만세"를 외치며 북괴를 찬양하는 함성이 들려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총성과 수류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도로변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창고 속에 수용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아군을 인민군 선발대로 잘못 알고 성급하게 환영했다는 것이다." - 18연대 소대장 김용건 중위 <노병들의 증언> p 707
"문안산을 철수한 연대는 미호천변에서 잠깐 싸우고 청주 입구의 오창리를 통과할 때 어느 창고 건물에 보도연맹원을 모아 사살했다는 말을 들으며 (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아군의 후퇴병력을 북한군이 들어오는 줄 알고 만세를 부르며 떡과 과일을 내놓고 환영했다는 것) 청주를 통과하였다." - 기갑연대 병사 안용현 <한 노병의 잡화> p60
"본교에서는 6.25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부녀동맹 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좌익활동을 해왔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수들의 행적을 학생들 앞에서 낱낱이 열거하여 즉석비판에 붙인 다음 파면신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7월 24일 경에는 120명의 교수 중 7,8명만 남기고 모두 축출되었으며 7월 31일이 되자 총궐기대회가 있다고 교수들을 강권하여 모이게 하고는 강제 납북을 기도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교수들은 출근하지 않고 피신했으나 형편을 잘 모르고 나왔던 교수들은 납북되었다." - <이화100년사> p321-322
"사변이 난 3일 후인 28일 서울은 지하의 빨갱이들로 구성된 맹원을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이 미쳐 피난을 못간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눈치 빠른 '보도연맹원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아직 아군지역인 한수 이남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사상범으로 몰려 모두 체포되는 지경이 되었다." - 장군(張群) <남기고 싶은 이야기> p139-142
"전쟁 초반 국군과 경찰조직이 와해되면서 후퇴하자 곳곳에서는 치안공백 상태가 되었다. 무법천지에서 제 세상을 만난 보도연맹원들이 경찰, 군인 가족, 우익인사를 공격해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대전까지 후퇴하면서 한숨 돌린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저지른 만행을 전해 들었다. 이들을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대대적인 검색을 통해 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하여 처단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도 다수 학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 당시 경기도 파주지역에 있던 초등학교 소사(경비 청소 등의 일을 하는 비전문 기능직)가 빨갱이(북한군)들이 오자 완장을 차고 설쳐대며 학교장을 포함하여 지역사회유지들을 죽이고 자신이 교장 노릇을 하다가 국군이 들어오자 살해된 일이 있었다. 오늘날 이 사람의 아들이 유사한 짓을 한 사람들의 자식들과 함께 역사 재조명작업을 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자금협조까지 받아 위령탑을 세우고 있다. 이들의 조상에게 피살된 지역유지의 자녀들은 이들의 행위를 구경하는 처지가 되는 등 민족정통성과 민족정의를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 전재혁 <회색시대> p 60,270
위와 같이 적의 손에 떨어지거나 전선 부근에서 후퇴하던 경찰, 공무원, 국군 장병들은 밀고나 체포를 비롯한 수많은 배신 행위들을 직접 겪었고, 이러한 반역 행위들은 당시 대전에 있던 정부에 보고되어 여순 반란 당시의 경찰, 군, 공무원 가족들이 학살되었던 사례에 더해져서 정부의 극단적인 명령에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당시 정부 인사들의 회고록에 의하면 정부 인사들은 보고되는 반역과 학살 행위에 공포로 몸을 떨어야 했다면서, 그러한 이유로 이런 '처리' 명령이 내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학살 사건을 정당화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민간인들만 학살한 일방적인 정부의 절대악'으로 한 측으로 쏠린 인식을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학살이 정당화 되서도 안된다. 본문을 그냥 이런 이유로 일어났다라고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또한 이들을 일사분란하게 소집, 연행, 구금한 이후 극히 형식적인 심사와 분류 절차를 거쳐 집단학살을 감행한 것은 이들의 '구체적인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개전 초기에 급격히 후퇴해야 했던 상황, 그리고 이들이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통제를 당해온 존재였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감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100명 가운데 단 1명이라도 이상한 짓을 했다면, 그 100명을 죽여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기가 막힌 논리가 당시 정부의 입장이라는 것.[14]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나 단지 적에게 협력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것은 국제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잔혹 행위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는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만든 자수, 전향자 조직의 반공단체였다는 것이다.
3.2. 정권의 보도연맹원 대량 학살[편집]
한국 전쟁 중에서 수도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이승만 대통령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그 빨갱이 놈들은 역시 배신자였어!!!"를 외치며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크리를 벌이게 되는데, 여기서 가장 주동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김창룡이다.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상부에서 처단 명령이 하달되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15]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하였다.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 일부 인원은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하기도 했으며, 일부 인원은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이씨 종친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16]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인원은 군경이 유치장이나 마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차례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총살하였다.
1950년 7월 3일, 예비검속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보도연맹원.[17] 충청남도 논산시 (당시 논산읍) 소속 트럭이 보인다.[18]
첫번째 학살 지역은 이천이었다. 이후 6월 하순부터 전국적으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후방이었던 삼남 지역의 보도연맹 학살은 매우 심각했다.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 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지역은 형무소가 있었는데, 여러 지역에서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1950년 7월 3일 대전광역시 (구 대덕군 산내면)에서 애버트 소령이 촬영한 사진.[19] 이곳에서 최소 700여 명이 희생되었다.[20] 자세한 사항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참조.[21]
보도연맹 학살과 북한군의 학살이 맞물리면서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은 내걸린 국기가 바뀔 때마다 좌우가 서로 번갈아가며 보복 학살을 벌였다.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대구 이남 지역)과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너무 끔찍하고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일례를 들어, 부산의 경우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학살 당했다. 부산 전역에서 1만 5천명 이상이 학살되었다는 말이 있었으나, 이는 당시의 인구와 사회체계를 무시한 단정으로 실제로 그랬으면 사회가 붕괴될 정도의 사태다. 40만이던 부산에서 2만 가까이가 죽었으면 얼마나 큰 사태인가. 군대에 징집되어 행방을 모르는 사람 일부가 포함된 걸로 추측이 된다.
대구광역시 가창 근교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
경북에서는 대구 가창골 일대에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경산 지역에 코발트 광산에 약 3천 5백여명 모아두고 코발트 광산 내에서 집단 학살한 뒤에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사건 은폐까지 했다. 자세한 것은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을 참조하라.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22] #, #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경남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 총으로 학살한 다음 학살당한 이들 손과 발을 묶어서 바다에 수장시켰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경남 거제도 시골 일대에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말씀에 따르면, 거제 지심도 앞바다가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심도 앞바다에서 집단으로 총살되거나 수장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23] 경남 남해군에서는 강진만 앞바다에 30여 명을 선상 위에서 총살하여 바다에 빠뜨렸는데, 일부 희생자는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24]
제주 지역에서는 전쟁 발발 이후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오름, 해안가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이때 학살된 사람들의 시신을 가려내지 못해서 한꺼번에 매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백조일손지묘이다.
이들을 위한 합장묘소도 일본에 안장 돼있음이 확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자모 가운데 부패한 시체 타살인가? 어선이 건져
야마구치현 고시가하마의 선장 스에다케 토라마쓰氏 소유인 마에마루(7명승선)가 9일 오후 4시께 츠츠무라 아자모와 고토의 중간에 위치한 아자모 서쪽 근해 35마일 부근에서 주낙 조업 중 해상에 표류중인 시체를 발견하여 어선에 올려, 10일 이즈하라에 입항하여 이즈하라마치 경찰서에 신고했다. 검시에 의하면 죽은지 1개월이 경과한 흉부와 복부에 걸쳐 부패하고, 인상은 판별하기 어렵지만, 신장 5척 5촌이고, 연령 추정은 30~40대 남자로 흉부를 굵은 새끼줄로 묶여 있었으며 양손에도 같은 흔적이 있었으므로 타살이 아닌가 하는 이즈하라 경찰서는 보고 있다.
전시나 특수상황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그것이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아도 사회 문제가 된다. 베트남이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이 대표적인 예이고, 6.25 전쟁만 해도 즉결처분은 엄연히 군대 내에서 법적인 명령을 받고 행해졌음에도 전후 사회 문제가 되었다. 보도연맹 살해는 사실상 그런 법적인 처형 명령도 없이 벌어진 일로서 국가 차원의 사과가 필요한 사항이다.[25] 북진 중에 발생한 보복성 학살에도 보도연맹원들이 대량으로 희생되긴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학살은 보도연맹원을 잡기보다는 적극적인 부역자를 색출,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 보도연맹원이 포함되었을 뿐이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보도연맹원은 일단 죽이고 보자는 식의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특정 집단에 대한 학살이지만, 그 구체적인 명령체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빨갱이들이라고 얼버무렸으나, 일부에선 상부에서 내려온 일명 빨갱이 퇴치 퀘스트 숫자를 무슨 수단으로든 채우고 보고해 상부의 포상을 노리거나 재산 몰수를 위해서 살상하기도 했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목표가 무엇이 됐든 상급자의 눈에 잘 들려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고. 원균이 조선백성을 죽여 왜군 수급이라고 허위보고를 올린 것처럼
비단 보도연맹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광기는 현대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마경. 예를 들어, 한 마을에 인민군 복장을 한 무리가 북을 치면서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를 외치면 전부 학살. 이때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끌어내어 "김일성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한다. 강압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하면 또 즉시 처형. 결국 목에 총이 들어와도 "이승만 만세!"라고 외쳐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나? 순간의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 김일성 만세라고 외쳤는데 알고 보니 서북청년단원들이었다면 그냥 그렇게 빨갱이가 되어 살해당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죽이기 위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소문의 벽'에서는 야간에 군인들이 나타나서 총을 겨누며 "이승만 지지자인가? 아니면 김일성 지지자인가?" 하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야간이라 잘 보이지도 않고 위에서 나온 일화처럼 인민군 복장을 갖추고 나타난 피에 굶주린 우익 단체들일 수가 있으니 그저 세금 제때 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민초라고 말하며 덜덜 떨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미국이 1999년에 기밀해제한 사진 자료.
1999년에는 미국이 몇몇 보도연맹 학살 사진을 기밀 해제했는데, 모두 미 극동부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소속인 애버트 소령이 촬영한 사진이다. 보도연맹에 관한 사진은 거의 이 미군 소령이 찍은 사진들이 유일하다.
과거사 규명 차원에서 몇 년간 발굴하고 있지만, 무수히 많은 유골들이 아직도 발굴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그제서야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지금도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이은주가 연기한 영신이 보리쌀 한 됫박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결국 6.25 전쟁 통에 배우 김수로가 연기한 반공청년단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다만 1.4 후퇴 직후의 서울에서 학살된 것으로 나와서 약간 부자연스럽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연구자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활동한 한성훈 교수와 김동춘 교수가 있다. 한성훈 교수의 대표 저서 '가면 권력'과 김동춘 교수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는 보도연맹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위키러들은 참고바람.
4. 은폐와 진상 조사[편집]
4.1. 제2공화국 정부의 진상조사 노력[편집]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 당한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 여론이 들끓어오르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제2공화국)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등 학살 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1961년 5.16 군사정변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정변의 주축인 군부세력은 '소급법'(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혈육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유족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처벌시켰다.[26][27]
4.2. 연좌제, 유족들의 고통[편집]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유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 규정하여 항시 감시하고 이들 유족들을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유족들을 옥죄었다.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고, 이후 정부는 이 자료를 관련자 신원조회에 활용하였다. 이처럼 정보기관은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왔다. 연좌제는 유족들까지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국가의 피해 유족들에 대한 감시와 신원조회에 따른 각종 불이익은 경제적 곤궁으로 이어졌다. 국가기관의 보도연맹원과 그 유가족에 대한 관리는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특히 1960년 5.16 군사정부는 유족회 활동을 금지시키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유족들에게 또 한 번의 자기부정을 강요하였다.
또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을 철저히 은폐해,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는 철저하게 금기시해버렸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에 진상조사 시도가 있긴 했는데 5.16으로 묻혀버렸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 '과거사 진상 규명' 등 활동하면서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당대 많은 작가들의 한국전 회고담이나 소설에도 '어떤 단체' 내지는 'B연맹' 정도로 표시되기도 한다.
4.3. 2000년대 참여정부의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편집]
결국 군사정권이 6월 항쟁으로 종결된 후인 1990년대 들어서 이 사건은 다시 밝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에 의한 유해발굴 정도였지만, 국가 주도가 된 것은 2007년 5월부터였다.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겼다. 이들은 2007년 5월부터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충북 청주시에서 110여명의 민간인 유해들이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발굴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간 조사결과 확인된 것만 들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0년 즈음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사망자 수는 가히 충공깽 수준. [28]
현재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 #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이다. ##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전술한 것과 같이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면서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또한 2006년 12월 6.25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전국 154곳의 지표조사와 유해 발굴 가능성 조사 등을 실시해 59곳의 매장 추정지에서 유해 발굴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역별로 보면 경기·인천 21곳, 강원 1곳, 충북 19곳, 충남 9곳, 경북 28곳, 경남 41곳, 전남 27곳, 전북 6곳, 제주 2곳 등이었으며, 진실화해위는 2010년 14곳의 매장 추정지를 추가해 모두 168곳에 민간인 학살자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사료 조사, 주민 증언 등을 종합해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했지만, 실제 발굴이 이뤄진 것은 2007~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쳤다. 당시 발굴을 통해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로 밝힌 168곳의 7.7%, 우선 발굴 대상지 39곳의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은 멈췄다.
발굴된 유해는 2007~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유해발굴단장이었던 박선주 전 교수가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재직했던 인연으로 충북대의 전산원 건물 2~3층을 새단장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을 만들어 임시 안치되어있다.
2011년 6월 30일, 이 사건에 대한 의미 있는 대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는데,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것. 그러나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이었다. #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왔다. #
2014년 3월, 한국전쟁 유족회를 비롯한 민간 시민단체들 주관하에 경남 진주에서 1차로 유해발굴을 착수하였으며, 2015년 2월에 대전 동구 산내(낭월동)에서 2차 유해발굴에 착수했다. ## 2017년 2월에도 진주 보도연맹원 희생자가 드러나기도 했다. #
20세기 한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비극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4.4.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영상[편집]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였다.
5. 현대의 평가와 해석[편집]
이 사건과 관련한 의미 깊은 판결로, 유족들이 국가에 제기한 소송에 대한 대법원 2011.6.30 2009다72599 판결이 있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전문.
1. 본질적으로 국가는 그 성립 요소인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는 없다.
2.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개인에 대하여 국가기관이 조직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자행한, 또는 국가권력의 비호나 묵인하에 조직적으로 자행된 기본권 침해(이다).
3. 여태까지 생사 확인을 구하는 유족들에게 처형자 명부 등을 3급 비밀로 지정함으로써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이제 와서 뒤늦게 유족들이 위 집단 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취지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여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해당 대법원 판결문 중 일부 발췌
우선,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 어떠한 이념적, 사회적 이유라도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추악하고 끔찍한 범죄행위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하였듯,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한 반헌법적, 비인간적 학살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확인을 구하는 유족들에게 처형자 명부 등을 3급 비밀로 지정함으로써 약 60년간 진상을 은폐했다. 이와 같은 슬픈 역사는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그 역사를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치우치지 않게 직시해야 한다.
5.1. 학살 사건의 성격[편집]
2000년대 역사학계에서도 본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정의할지, 학살로 정의할지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오갔다. 제노사이드(genocide) 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제노사이드의 정의를 넓게 보았을 때, 본 사건은 '보도연맹'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학살이었기에 제노사이드의 구성 요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한다. 학살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보도연맹 자체가 특정 정치적 집단이라기보다는 민간인(구 용어로 양민)의 비율이 높은 집단이었기에 학살(massacre)로 정의한다. 또한, 본 사건은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학살이기에, 일반적인 학살과 구분을 두기 위하여 정치적 학살(Politicide)로 정의하자는 의견도 있다.
국제법적 관점에 의하면 보도연맹의 학살은 국제법에서도 최악의 범죄로 꼽히는, "민간인 주민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부로서 그 공격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범해진 위해"로서의 인도에 반하는 죄(crime against humanity)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들이 민간인을 향한 학살을 한다고 분명히 인식하면서 공격했다는 의미.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협정인 로마 규정(Rome Statute) 27조 2항에 의하면 이러한 범죄에 대해서는 심지어 대통령이라도 공적 지위에 의한 면제를 주장할 수 없다.
6. 참고 영상[편집]
7. 관련 작품/관련 문서[편집]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소설 태백산맥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9]
100℃ - 최규석 그림
밤의 눈
어느 물푸레 나무의 기억 - 박건웅의 작품
레드툼
제노사이드(부제: 학살과 은폐의 역사) - 최호근 지음
그것이 알고 싶다 - 956회, 뼈동굴의 진실
그것이 알고 싶다 - 1089회, 도둑골의 붉은 유령 - 여양리 뼈 무덤의 비밀
[1] 심지어 5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보는 연구도 존재한다.[2] 참고로 당시는 대한민국의 인구가 약 2000만 명이던 시절이다.[3] 오제도는 사상검사로 당시 선우종원과 함께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였다. 뒷날 1999년에 오제도는 '보도연맹 사건은 정부의 커다란 과오'라고 시인하고, '범국가적 차원에서 보도연맹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제를 치러줘야 한다'라고 밝혔다.[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청산 위원장 지냈던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보도연맹원들 가운데 일제강점기 시기 독립운동했던 분들도 많이 반강제적으로 가입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제 때 야학운동 및 농민, 노동조합 운동하다 해방정국 시기 반정부 노선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공산당로 몰려 보도연맹에 가입된 경우라고 밝혔다. 하나의 사례.[5] 애초에 이 말이 맞다고 해도 이들을 학살해도 되는 것인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이들에게 만약 그렇다면 이분은?[6] 1949년부터 발급되기 시작한 도민증조차도 이들에게는 발급되지 않았고, 대신 맹원증이 발급되어 사실상 비국민 취급을 공식화했다.[7] 관련 기록 문서에 따르면, 경남 김해 일대에 민족청년단 단원 출신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어있는 경우가 있었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8] 실제로 북한에서는 이들 보련원들을 '반동분자'로 규정한 문서기록이 있다. 북한은 점령지마다 보도연맹원으로 보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의용군에 대규모 강제징집하거나 자위대에 동원하였다. 북한은 남한 체제에 전향한 보도연맹원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전쟁 당시 인민군은 생존한 보도연맹원을 징집하고 각종 사업에 동원하였으나, 그들은 북한 당국으로부터도 사사건건 의심을 받았다. 특히 점령 지역에서 이들에게는 어떠한 책임부서 일은 주어지지 않았으며, 열성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사업에 협조하는 정도의 일을 시켰다. 이들은 북한 정권으로부터도 신뢰를 잃고 감시와 통제를 당하였다.[9] 실제로 이런 부류 사람들이 주로 내세우는 얘기가 "박헌영이 전쟁을 일으키면 '남한 내 주민 100만여 명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실제로는 전쟁이 터지자 조용했다. 이는 보도연맹원들을 사전에 예비검속 차원에서 학살한 것이 주된 효과였다"고 강변한다.[10] 정희택은 제1공화국 시기 초창기 오제도, 선우종원과 함께 사상 검사로서 보도연맹 창설과 운용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오제도와 더불어 오늘날 공안 검찰의 '대부'의 위치격에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6.25 전쟁 시기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지내다 9.28 수복 후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으로서 부역자를 심사했었던 인물이다. 훗날 1980년대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11] 정희택은 "6.25가 터지자 나는 보련맹원들을 각 구별로 집합시켜 그들의 동태를 장악했고, 이들을 시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란민 안내,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 등의 일을 했다. 서소문동 본부에서 자신과 맹원 간부들이 지휘를 했으며, 시민이 피란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 6천8백 명의 보련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어, 정희택은 '(북한군 점령기에)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좌익범' 중 부역을 한 사람이 적었다'고 증언했다. 정희택 증언,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3◆, 1983, 132쪽.[12]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13]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14] 즉, 이승만 정부가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는(실제로도 일부는 그러했던) 보도연맹원 등 남한의 좌익 세력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것이 가해 이유라는 것이다.[15]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어떤 상황에 대비해 사람들을 구속하는 행위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생겼다.[16] 진실화해위원회 2009 하반기 조사보고서, 752쪽.[17]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18] 이들이 논산 소속 보도연맹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으며, 논산 지역의 보도연맹원의 일부를 대전형무소로 이송하여 구 대덕군 산내면에서 이들을 모두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Ⅱ, 528쪽.[19]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20]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Ⅱ, 482쪽.[21]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 대전ᆞ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220쪽.[22] 경상도 말에 "골로 간다(죽는다)"는 표현이 보도연맹 학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골로 간다"는 말 자체는 전쟁 전에도 존재했다. 일설에 의하면 한양 서쪽에 "고태골"이라는 처형장이 있었던 데서 골로 간다는 말이 죽으러 간다는 뜻이 되었다.[23] 진실화해위원회 2009 하반기 조사보고서: 통영, 거제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희생 사건, 216쪽.[24] 진실화해위원회 2009 하반기 조사보고서: 경남 고성, 남해, 하동 국민보도연맹 사건, 754쪽.[25] 형무소 재소자를 사형 집행할 때에도 명부를 기록하고 절차에 따라 이뤄지는데, 보도연맹원들은 어떠한 기록도 없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따라서 정치적인 학살이라고 할 수 있겠다.[26] 이 '혁명재판'에서 유족들 처벌할 때 군사재판의 논리가 대단히 놀라웠다. '이렇게 군인에 의해서 학살된 일이 비록 불법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것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라는 것. # 즉, 군사 쿠테타 세력들도 불법적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는 얘기다.[27] 당시 재판을 보면, 피고인석에 있었던 유족들은 너무 억울했는지 법정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자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 이분들은 뒷날 2010년, 2011년 무렵이 되서야 재심해서 무죄, 복권되었다. #[28] 제주도에서만 10만명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 수치는 4.3 사건 당시의 피해자 수(보고된 숫자는 1만 4천이고 실제 피해자 수는 그 이상으로 추정)와 합쳐서 추산하더라도 다소 높게 잡은 감이 있다. 해방 이후 제주도 인구가 30만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죽었으면 인구의 절반은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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