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2
(19) Kim SungHoon -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19) Kim SungHoon -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Kim SungHoon
12 August 2016 ·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박노자 해제, 푸른 역사)
1. 이 글은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책에 대한 독후감이라기 보다 예전의(혹은 현재의) '나'(의 인식과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복하여 가시지 않았던 질문은 '나는 무엇을 읽(었)는가', '그 무엇을 어떻게 읽(었)는가', '왜 그렇게 읽(었)는가'였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신산한 삶과 고통을 무시하고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결과(책을 읽고 독후감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관련 태도를 표현한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결과)는 개인적으로도 가볍지 않다.1)
2. 박유하교수의 <화해를 위해서>를 읽고 쓴 독후감에서 나는 정대협과 나눔의 집의, 박유하교수가 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쟁송에 유감을 표현했다. 그 이유로 토론과 논쟁을 통해 다가가야 할 역사적 진실을 사법적 판단에 맡겼다는 점, 박유하교수의 화해와 정대협 및 나눔의 집의 화해 간에 차이보다 겹치는 부분이 많음을 들었다. 박유하교수의 접근 방식이 선악의 이분법,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결과론,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서 벗어난, 객관적이고 다원적이라고도 했다.2)
3. 이 가운데 여전히 견지하는 것은 하나다. '역사적 진실은 토론과 논쟁을 통해 다가가야 하지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관한 한 반드시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보편적인 언론, 출판의 자유의 인간적 기반에 대한 것이다. 언론, 출판 등 표현의 자유는 인간 존엄성의 본질적인 부분이기에 보호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표현이, 역사의 피해자를 포함하여 그 표현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을 무시한다면 스스로 자유의 본질을 훼손하는 자기모순일 뿐이다.3)
4. 그 외의 생각들을 거두게 된 것은 이 책의 제목에서 비롯한다.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바라기 위해서는 그 화해가 어떤 화해인지 그래서 결국 누구를 위한 화해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하지만 예전의(혹은 현재의) '나'는 화해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선행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았다. 그러니 저자가 발견한 박유하교수의 반역사성이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제국의 위안부>의 사실 왜곡, 사료 해석의 오류, 일본판과 한국판의 차이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다.
5. 또한 부실하고 허술한 역사적 사실 이해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사회에서 왜 절찬받는지를 묻는다. 이는 일본 내셔널리즘과의 친화성4)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시민파 리버럴'의 '퇴락'현상이기도 하다.5) 저자에 따르면 <제국의 위안부>는 "증언이나 소설의 해석, 허위의 이항대립 설정, '동원' '노예' '식민지'와 같은 개념의 내용 바꾸기도 그다지 정교하지 않아" 그 오류를 쉽게 간파할 수 있어서 비판정신을 가지고 진지하기 마주하면 박유하의 '진심'은 이해할 수 있다."(p.179)
6. 지금도 아직 <제국의 위안부>를 읽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은 무의미하게 되는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을 탄압으로 여기는 입장에서라면 말이다. 그들에 따르면 비판자들은 <제국의 위안부>를 제대로 읽지 않고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반비판이 아니다. 이 책 저자의 차고 넘치는 근거를 온전히 반박하지 못한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반대가 섬세하지 못하면 '민족', '국가'의 강화를 결과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1) 나는 공적인 책임을 반성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럴 능력도 없는 말그대로 일개 시민이다. 하지만 일개 시민으로서 (개, 돼지가 아닌 이상)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시민적 책임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표명된 말과 글은 오로지 사적일 수 없다. 주체들이 아무리 사적인 방식으로 생각과 태도를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엄연히 그 밖의 실재 세계의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가상 세계가 실재 세계를 압도하며 오히려 그 경계가 무너지고 급기야 실제 주체의 붕괴를 야기하기도 한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앞으로는 ?
2) http://m.blog.naver.com/azips/220431643614
3) "그러나 이 문제는 일본 지식인들의 <항의성명>이 말한 것처럼 검찰에 의한 '학문이나 언론의 자유'의 봉쇄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처럼 국가권력이 국가적, 사회적 법익 보호의 관점에서 특정 역사관이나 주장을 단속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해자 여성들의 명예, 즉 개인적 법익이 침해당했다는 호소를 출발점으로 한다는 점에 충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항의성명>의 찬동인이기도 한 오에 겐자부로는 예전에 유미리의 <바위를 헤엄치는 물고기>출판금지 사건 당시 '발표로 인해 고통을 입는 인간의 이의제기가 어디까지나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의 인간적 기반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박유화의 명예훼손 문제도 마찬가지의 관점이 필요하다." (p.177)
4)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전후 일본'의 긍정을 바라는 '리버럴'한 지식인들의 내셔널리즘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 일본 사회에 던진 것은, '위안부'제도를 창출한 대일본 제국의 책임이면서 동시에 그것과 마주하지 않은 채 한일조약에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해버린 '전후 일본의 책임이기도 했다. '국민기금'은 '위안부' 제도가 전쟁범죄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나아가 한일조약의 논리도 부정하지 않은 채 전후 일본국가의 연속성 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미봉적 대응이었던 탓에 많은 당사자들에게 거부되었다, <화해>나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인 여성의 입장에서 이 거부를 한국의 '반일 내셔널리즘'으로 일괄해서 비판하고, '전후 일본'을 긍정했기 때문에 환영받은 것이 아닌가. <제국의 위안부> 사태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에는 이러한 '전후 일본'의 긍정을 바라는 내셔널리즘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p.178)
5)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한국의 '반일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예전에 서경식이 지적한 바 있는 일본의 '시민파 리버럴'의 '퇴락'현상이다. 서경식은 2002년에 '퇴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진지하고 솔직한 말, 정직하고 순수한 태도, 정의에 대한 순수한 희구, 타자에 대한 동정과 공감, 성실한 반성과 자기비판-이러한 것들을 많은 지식인이나 언론인들이 야유하고 냉소하는 사이에 퇴락은 가속화되어버렸다. '내셔널리즘이다'라든가 '규탄이다, 심문이다'라고 하면서 타자로부터의 비판이나 호소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이에 퇴락에서 벗어날 기회조차 붙잡지 못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예찬한 사람들은 서경식의 이 지적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문장이 쓰였을 당시 서경식이 상정한 것은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에 대한 열광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래 '시민파 리버럴 세력의 자기붕괴 내지 변절' 현상이었다. 일본 우파의 공격과 탄압으로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증언의 시대'가 요구한 응답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퇴폐하고 전락하는 '시민파 리버럴'들-<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바로 서경식이 말하는 일존 언론계의 '퇴락'의 종착점이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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