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2

이병철 - -영화 ‘1987’을 보다



(14) 이병철 - -영화 ‘1987’을 보다/ 영화 ‘1987’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리면서 주변에선 내가 응당 이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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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을 보다/

영화 ‘1987’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리면서 주변에선 내가 응당 이 영화를 보았으리라 생각하고 또 정원도 이 영화를 보자고 했으나 나는 한동안 내키지 않았다. 보게 되더라도 나중에 그런 내 마음이 정리된 뒤에나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인 중에 한 분이 나를 만나고 싶은 분과 함께 찾아오려고 하는 데 그전에 내가 그 영화 ‘1987’을 꼭 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두 차례나 그렇게 부탁을 해왔다. 그래서 산에 가려던 일정을 영화관으로 돌렸다.
영화를 가능한 담담하게 보려고 했다. 30여 년 전의 그 1987년은 아직도 나에겐 불편한, 온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남아 있는 현재의 아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다 나갔지만 나는 쉬 일어설 수가 없어 한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가슴이 먹먹하고 아파왔다.
이 영화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지만 영화라는 그 속성 상 많은 부분이 픽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6월 민주항쟁’이라고 부르는 1987년의 한 단면의 기록을 영상의 문법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월항쟁은 40년에 이르는 오랜 군부독재로 억압된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4.13호헌 철폐를 위한 재야 민주민중운동체의 조직적 저항운동과 박종철군을 고문살해한 군부독재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총체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반독재 민주화국민항쟁인데 이 가운데서 이 영화는 박종철군 고문살해를 중심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월항쟁을 통해 저들의 항복선언인 6.29 직선제 개헌쟁취는 이러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을 조직적으로 엮어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반독재전선의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에 의한 성과이다. 영화에서 이 부분이 조금이라도 언급되었더라면 당시의 유월항쟁과 그 이후의 이한렬군의 죽음으로 국민적 투쟁을 다시 촉발해낸 역사적 상황 등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보다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6월10일,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조작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와 그 이후의 이한렬군 추모행사를 비롯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모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6.29 직선제 개헌을 쟁취 뒤엔 명칭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로 바꾸었다. 약칭으로는 국민운동본부, 국본)라는 전국적 단일조직의 지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화에선 6.10 대회 때의 국민행동지침을 모 신문사의 기사로만 다루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국본에서 6.10대회의 국민행동요령으로 발표한 것을 보도한 것이다.)
지난해는 유월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새로운 정부의 주관아래 열렸고 나도 그 행사에 초청 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유월항쟁이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나 또한 그 실패의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유월항쟁을 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월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유월항쟁의 근본 목표인 군부독재의 청산, 그 민주쟁취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40년간 지속되어온 그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 있는, 그래서 이 땅에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는 하늘이 준 잃어버릴 수 없는 그 기회를 반독재전선에 함께 섰던 정치권, 권력욕에 사로잡힌 양김과 이를 바르게 견인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편승한 재야 민주민중운동권의 분렬로 또다시 군부독재의 재집권을 허용함으로써 저 목숨을 바치며 피땀으로 쟁취한 유월항쟁의 성과를 스스로 짓밟는 역사적 과오를 자행한 까닭이다. 이것이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먼저 가신 민주영령들에 대한 나의 부끄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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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1987년은 내 지난 생에 있어 가장 뜨거운 열정으로 혼신을 다했던 해였고 그래서 가장 좌절하고 분노한 해였다. 그것이 내겐 아직도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당시, 나는 국민운동본부의 상집위원으로서 조직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나의 염원, 그 간절한 바람은 신간회 이후 이 땅에서 최대의 국민정치운동결사체였던 이 국본의 조직을 통해 새로 구성되는 민주정부의 국가적 정치테제를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논의 결정하는 국민의회, 국민공의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군부독재로 인해 수십년간 억압되고 유린 되었던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실현하는 핵심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적인 시군구조직 결성을 대부분 완료하고 그 마지막 단계인 읍면동위원회 결성에 착수하였다. 여기에 내가 가진 모든 역량, 그 에너지를 다 쏟았다.

 그러나 이 또한 양김을 중심으로한 야권의 분렬로 실패하고 말았다. 참담했다. (여기에 이와 관련한 비화들을 다 적시할 수는 없다.) 이 과정에서 내 몸과 마음은 병들지 않을 수 없었다. 

88년 초에 나는 공식회의에서 당시의 지도부에게 우리들의 분열과 잘못으로 군부독재의 재집권을 허용해서 유월항쟁을 실패로 만든 책임을 지고 대국민사과와 함께 민주화운동에서 물려날 것을 요구하고 나 자신 또한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운동에서 물러난다는 은퇴? 선언을 하고 집으로 내려와 일년이 넘도록 집밖에도 나가지 않는 칩거에 들어갔다. 

(당시 이 운동에 함께 했던, 그리고 특정세력의 지지를 선언해서 분열에 앞장섰던 이들 그 대부분은 그 이후에 정치판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 이후로 정치판에 관여한 이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은 이런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이른바 생명운동으로 운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87년의 항쟁과 그 30년 뒤인 광장의 촛불은 함께 이어져 있다. 내가 촛불을 여의도에서 들어야 한다고 수 차례 주장했던 것은 이른바 87체제라는 것은 이러한 자기 청산의 한계를 극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내 자신의 넋두리가 되었다. 영화 1987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폭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두 분, 당시 동아일보 해직기사였던 이부영선배님과 민주화운동의 기획자로 그려진,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웠던 김정남선배님은 나와도 잘 아는 사이라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두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부영선배님은 나도 함께 하는 지리산연찬의 멤버로, 지금도 동아시아평화운동을 이끌면서 한반도평화만들기은빛순례단으로도 앞서서 활동하시고 계시고 

김정남선배님은 민주화운동의 기록들을 정리하시면서 해마다 손수 연하장을 만들어 보내주신다. 지금 두 분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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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정남선배님이 써서 보내주신 연하장엔 

‘그래도 강물은 흐르고/ 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
신경림의 詩에서‘ 라고 적혀있다. 이 시 구절을 통해 내게 전하기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1987년 그 이후의 30년이 지난 지금, 그 체제를 넘어 우리가 새롭게 나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제대로 그 길을 준비하고 있고 그 방향은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가.
이 영화에서 우리가 다시 묻고 찾아야할 것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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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김영식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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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향 그래도 강물은 흐르고,
후배들이 보다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따뜻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는 것도 지금 역할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곧 생명운동이라고 여깁니다.
죄송합니다.
~ 장순향 모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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