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 나무위키
임종석
최근 수정 시각: 2017-12-31 15:21:11
상위 문서: 정치인/목록, 가톨릭/인물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 기관장
대통령비서실장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제5대
한광옥
→
제6대
임종석
→
현직
이름
임종석 (任鍾晳)
출생일
1966년 4월 24일 (51세)
출생지
전라남도 장흥군
본관
장흥 임씨
최종 학력
한양대학교 무기재료공학 학사
종교
천주교(세례명: 프란치스코)
소속 정당
더불어민주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6, 17
현직
대통령비서실장
약력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열린우리당 원내 대변인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링크
페이스북
1. 개요2. 학생운동가
3. 정치활동
3.1. 문재인 정부 비서실장
3.1. 문재인 정부 비서실장
5. 선거 이력6.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해 오다가 이명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밑에서 정무부시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문재인 당시 민주당 전 대표의 손을 잡고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2. 학생운동가[편집]
1966년 4월 24일 생으로 전라남도 장흥군이 고향이다. 이후 상경하여 서울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 1학년 때, 노래패에 가담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고,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되어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으면서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그가 주도한 것이 바로 임수경의 방북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으면서 도피하다가 결국 1989년 말 체포, 3년 반 정도 실형을 살았다. 당시 임종석은 1년 가까이 도피생활을 했고,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사진이 붙었으며, 임종석 담당 형사(청량리 경찰서 신중현)가 과로로 사망했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 4학년에 복학하였고, 1995년 8월 대학교 입학 10년 만에 졸업한다. 의외의 수상인데, 졸업식에서 총동문회장상과 공로상도 받았다.
3. 정치활동[편집]
1994년 말부터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직을 맡아 시민운동 쪽에서 활동하였는데 가까운 동료들과 만든 청년활동단체였다.
1999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되면서 출마 자격을 얻었다.
이미 1995년, 모래시계 세대 정계진출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오던 때부터 정계진출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지만 1996년 총선에는 출마하지 못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386 운동권 출신 영입이 활발할 때 새천년민주당을 택하면서 입당, 서울 성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4선의 이세기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다만, 임종석 자신은 의외로 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원은 되지 못했는데,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다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정계 입문 후 임 실장의 의정활동은 국보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대북 교류사업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초선 의원 시절인 2000년 7월 임종석 실장은 국보법 관련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이 같은 발언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보완책으로 간첩죄에 대해 형법상 처벌을 강화하면서 대북 접촉, 통신교류에 대해선 남북교류협력법을 통해 규제하면 된다.” 또 2004년 7월에는 의원실 주최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고, 같은해 8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국보법 폐지 입법추진위원모임에서는 “국가보안법은 위헌적이며 반(反)민주악법의 상징이기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4년 12월에는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의원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임 실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수사에도 적극 반대했다. 대북송금 사건은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달러를 불법송금한 사건을 말한다. 2003년 3월, 임 실장 등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이 주축이 된 모임인 ‘정치를 바꾸는 젊은 희망’은 대북송금 특검수사 반대성명을 냈다. 같은해 6월에는 민주당·개혁당(대표 유시민) 소속 의원 61명과 함께 대북송금 특검수사 마무리를 촉구하는 성명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2014년 '(사)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해당 재단은 남측 방송을 대리하여 대한민국 내 북한 저작물 이용의 저작권료를 북한에 지불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
201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 "중도전향"을 사실상 인정했다. 임종석 실장은 당신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있다"며 "과도하게 사회,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지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가결을 저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위 영상은 당시 YTN 돌발영상의 장면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열풍에 밀리면서 한나라당 김동성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당내에서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이 당시 임종석이 정치자금법 문제로 재판에 걸려 있었다는 점. 결국 19대 총선 직전 나온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면서 총선 출마가 좌절되었다. 사실 출마 자체는 할 수도 있었지만, 재판 문제로 인해 공격을 받을 것 같자 결국 포기한 것. 한명숙 당시 대표가 끝까지 만류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는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천권과 관련하여 소위 노이사 공천(친노-이대-486 위주 공천)을 주도했다는 공세도 한 몫 했다. 성동구 을 지역구는 그의 친구인 홍익표 교수에게 넘어갔고, 그는 사무총장직도 내놓게 되었다. 그의 사퇴 원인이 된 정치자금법 문제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면서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가 났다.
그리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15년까지 재직하였고, 때문에 박원순계의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 직을 내려놓은 후, 은평구 을 출마를 선언한다.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의 거물인 이재오와 겨뤄서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하였는데, 그만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신인이지만 은평구 내에서 기반을 착실하게 만들었던 강병원 후보에게 패하면서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10년 넘게 원외에 남게 되었다. 임종석과 함께 국회의원 자리에 도전한 다른 박원순계 정치인들도 기동민을 제외하면 경선과 본선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물 간 정치인으로 잊혀지는 줄 알았는데...
3.1. 문재인 정부 비서실장[편집]
2017년 문재인 캠프의 비서실을 이끌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삼고초려 끝에 영입을 했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박원순 시장이 문재인 상대로 극단적인 공세를 퍼붓는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다만 유시민 작가는 썰전에서 임종석을 박원순계로 분류하는 이같은 시선에 대해서는 꼭 그런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면서 '편견이다'라고 비판했다.
2017년 5월 들어서는 문재인 정부 초대 비서실장이 되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극한직업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거의 모든 일정에 참가하며(심지어 주말에도) 매번 같은 수트에 같은 넥타이 차림인것을 보고 네티즌들은 대체 퇴근은 하는 거냐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임플란트 예약이요 일명 청와대 감금설. 이 때문에 한 때 '임마루'라는 별명도 붙었다. 마루는 문재인 대통령이 사저 시절부터 키우는 반려견의 이름인데, 임종석이 고생하는게 마치 청와대에 묶여 있는 마루 꼴 같다고. 회의 도중 몸에 부항 자국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래서 대중들 사이에선 임플란트 하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퍼지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장면에서 유독 환하게 웃으면서 보내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고 각종 사이트에서 그렇게 좋냐며 신나게 놀려먹고 있다. 7월 5일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독일로 출국하는 장면에서도 또 환하게 웃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임명 이후 '비서실장' 이라는 이름처럼 대통령 보좌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듣는 자리이고 전 정부가 '왕실장' 이라는 소수 측근들의 과도한 권력 행사로 비판 받았던 만큼 적절한 역할 수행을 해내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당청 불화설이 일자 추미애 대표를 찾아 장미꽃을 선물하며 불화설을 일축하고, 추경 통과를 위해 당대표의 사과를 요구한 국민의당 박주선 비대위원장에게 대통령 대리인으로서 사과하면서 막힌 정국을 해결해 청와대 2인자의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수석보좌관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대통령 비서실의 간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장하성 정책실장, 정의룡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인수위 기간 없이 시작된 문재인 정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던 점 역시 고평가 받는 요인 중 하나이다.
이번 정부 첫 국회 업무보고에서는 사과 할 일에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야당의 공격을 적절히 방어해 청와대와 야당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지 않는 노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의원 시절에도 친화력 있는 성품으로 유명했던 만큼 업무 보고 중에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가 충북 지역도 신경 써달라며 서로 농을 던지기도 하는 등 훈훈한 광경이 나타났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의 탈 권위 행보에 발 맞쳐서 소탈한 모습이 자주 비춰지기 때문에 임종석 비서실장이 '고통받는 비서실장'이라는 밈 화가 될정도로 인기가 좋다.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자 내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당의 박지원 의원이나 주승용 의원같이 존재감 있는 인물들에게서 전남 지사를 수성하기 위해 임종석 실장이 나서야 하는것 아니냐는 전남 지사 차출론이 솔솔 나오고 있다. 그런데 비서실장 얼마나 했다고 차출인가....
공식적으로 지방선거 차출은 없다고 청와대가 입장을 밝혔다.
11일 6일, 청와대를 대상으로 진행된 국정 감사에서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청와대가 반미, 친북적인 강령을 가졌던 주사파와 전대협에게 장악 당한 정부의 외교를 믿지 못하겠다고 비판하자, 격앙된 목소리로 "그게 질의입니까? (국민을 대표해서 묻는데 그렇게 말하냐는 말에 대해) 국민의 대표 답게 질의하지 않으니깐 그렇죠!" 라며 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임 실장은 전 의원의 비판에 "제가 5공화국, 6공화국 때, 저는 전희경 의원님 말씀에 매우 모욕감을 느끼고, 아주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5, 6공화국 때 정치 군인들이 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제가 의원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진 않았습니다.[2] 그러나 지금 의원님께서 거론하신 대부분의 그 사람들이 인생을 걸고 삶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의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습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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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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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주사파 출신 논란 및 관련된 사실들[편집]
12 과거 대학 재학 시절, 전대협 의장으로서 임수경 방북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여 지명수배가 되어 크게 논란이 됐었다. 지명수배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나와 각종 운동에 참가하는가 하면, 기습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덕분에 당시 임종석의 포상으로 2계급 특진과 1000만 원의 보상금이 걸려 있을 정도였으며, 임종석을 잡기 위해 12만 명의 경찰이 동원됐었다. 국보법·집시법 위반 외 10여 개의 볍률 위반 혐의와 임수경의 방북을 도와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 하였고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특별 사면 되었다. 여담으로 임수경은 탈북자들에게 변절자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
또한 김정일의 사망 당시 임종석은 북한에 조문을 써 보냈고, 북한에게 답신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임종석은 그 조문에 대한 답신을 박정근의 구속 사유를 비꼬기 위해 트위터에 올리게 되었는데, 그가 문재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자 각종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통일부의 허가를 받고 통일부에 활동내역 신고를 한 상태에서 진행된 남북교류라서 실정법을 위배하는 사안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추가바람 * 트윗 아카이브, 사진 아카이브
위에 서술된 각종 논란들이 더해 하태경 등 NL 노선 출신 인사는 공식적으로 전향을 한 바 있으나 임종석은 전혀 그런 발언 및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강성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유로 전향발언의 의무를 갖는 건 아니지만 주사파는 그 이념부터가 논란의 중심이므로 주사파 출신임에도 전향을 확실시하지 않은 인물을 청와대에 들이는 것은 경솔하다 할 수 있다.
덕분에 자유한국당에서는 비서실장 임명에 대해 과거 행적을 들어, 이런 주사파 출신으로 알려진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는 게 합당하냐며 반발하였다. 하지만 바른정당에서는 임종석에 대해서는 딱히 논평을 내지 않았다. 하태경이 있어서?[3]
4.1.1. 임종석 본인의 입장[편집]
1989년 언론과 갖은 인터뷰에서 임종석 당시 전대협 의장은 전대협의 핵심 간부들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주사파라는 지적에 대해 “전대협이 지향하는 이념은 자주 민주 통일이며 북한의 주체 사상은 결코 전대협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임종석 당시 의장은 “전대협이 북한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해서 찬양을 한 적도 없었다”며 “전대협이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나 정부가 주장하듯 북한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이적단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4.2. 임종석 UAE 특사 파견 논란[편집]
해당 문서 참조.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새천년민주당
68,481 (48.4%)
당선 (1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을)
열린우리당
36,467 (49.6%)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을)
통합민주당
26,718 (46.7%)
낙선 (2위)
6. 여담[편집]
전국에 지명수배된 상황에서도 공권력의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전국을 누비면서, 임길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임길동이라는 별명 뒤에는 그와 비슷한 체구의 학생들이 클론 처럼 돌아다니면서 추적을 피하도록 했다. 호감형 외모와 투사의 이미지 그리고 신출귀몰한 행적, 전대협 의장이라는 카리스마 등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 심지어 여고생들이 주로 보는 하이틴 잡지에서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여성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2017년 청와대 입성 이후에도 "꽃보다 청와대" 멤버로 불릴 만큼 외모가 화제이다.
1996년 결혼했고, 결혼식 기사가 경향신문에 났다. 부인은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 편지를 주고받으며 알게 되었다고 한다. 슬하에 딸 1명 있다
한총련이 2003년 미군 훈련장 난입 사건 때 과격했다고 한총련을 깠다. 임종석은 위에서 봤듯이 임수경 방북 사건과 각종 사회운동을 주도한 전대협 제 3기 의장이었다. 한총련의 문제를 최소한 인식은 하고 있을 뿐 아니라, 80년대 전대협의 통일운동과 90년대 이후 한총련 주사파는 성향에 큰 차이가 있다.
2005년에 디시인사이드에서 정사갤러들과 간담회를 가진 이후 '본인의 요청'으로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임종석 갤러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7년대의 디시 갤러리들은 우후죽순 마구 만들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만두 조공을 바치고 리플로 찬성 여론을 만들어도 겨우될까말까한 갤러리 개설이 김유식과 임종석의 이해관계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잆이 손쉽게 그것도 정치인의 갤러리가 개설된 것에 대한 반발이 매우 심했다. 예를 들면 당시에 매우 인기있던 문근영, 이나영등의 여배우들은 관련 팬덤들이 만두 조공도 바치고 각종 팬카페 및 디시 갤러리에서 이용자들의 동의 리플을 부탁하는 이른바 '화력 지원'을 거쳐 갤러리가 생기는게 관례였는데 임종석은 이러한 과정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딱히 거물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갤러리 관리 또한 다른 곳과는 다르게 본인이 직접 했었는데 과도한 글 삭제와 필터링 때문에 말이 많았으며 나중엔 본인의 이름까지 금지어로 설정해 '금지어 갤러리'라고 조롱당하기도 했다 관련이미지 이를 비꼬는 의미에서 "종석이 얼굴만 보면 고추가 커져요."같은(...) 뻘글성 꾸준글이 생기기도 하며 명맥을 잇기도 하였고 후에 찌질열전을 통해 이런 일화들이 알려지게 되기도 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성덕선이 동생 성노을을 보호하려고 성노을의 여자친구와 여친의 친구들과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갔을 때 동생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벽에 붙은 수배전단에 등장한 것. 단순 소품이 아니라 작가가 일부러 옛날 자료를 구해서 재현하여 붙인 것이라고 한다. 지인의 제보로 임종석 본인도 찾아보고 크게 웃었는데 키를 170cm로 표기해서 섭섭하다고 트위터에 올렸고 이에 작가진은 옛날 자료라 인쇄상태가 나빠 176을 170으로 잘못 보고 적었다고 답글을 보냈다.
2014년에는 "지금 야당은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 있다"면서 "중도를 지향해야"고 밝혔다.인터뷰 기사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성향에서 보이듯 종북이라고 낙인을 찍을 수도 없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후에도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고 해서 '미스터 함박'이라는 별명이 붙혀졌다. 또한 회사생활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 '청와대 회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예를 들어 부장님의 해외 출장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나 회사 회의에 부장님보다 늦게 오는 모습을 보이는 등 국민들이 공감하는 등 청와대가 친근한 장소가 되었다는 걸 한몫한 셈이 됐다.
최근 친문성향 커뮤니티에서 널리 알려진 다른 별명은 바로 '임마루'. 문재인 대통령이 기르는 그 개 마루 맞다(...).
문 대통령이 초청하는 만찬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오면 국무총리가 가서 인사를 나누고 임 실장이 곁에서 지킨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한 문재인 정부이지만 대통령이 귀빈 여러 사람들을 영접해야 하다보니 위안부 할머니를 세심히 챙길 수 없어서 대통령비서실장이 곁에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듣고 알려달라고 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
[1] 그러나 북한은 국가간 저작권을 존중하는 베른 협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저작권물 이용에 관해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2] 굳이 설명하자면, 전희경은 1975년생이니까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때 겨우 5살이고 제6공화국의 시작인 1987년에도 고작 12살 밖에 되지않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살피고 할 나이는 아니다(...). 물론, 임종석 본인도 1966년 생으로 5.18 당시 겨우 15살 중학생이었다. 그도 5.18 때 민주화운동에 깊게 참여했다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전라도에 살던 그는 당연히 들려오는 얘기로라도 알았을 것이고 당시 전남에선 어린 학생들의 참여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또한, 6월 항쟁때는 운동권에서 앞장선 대학생이었다.[3] 하태경 역시 전대협 출신이기 때문. 당시 임종석, 임수경 등과 같이 활동했었다.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해 오다가 이명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밑에서 정무부시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문재인 당시 민주당 전 대표의 손을 잡고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2. 학생운동가[편집]
1966년 4월 24일 생으로 전라남도 장흥군이 고향이다. 이후 상경하여 서울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 1학년 때, 노래패에 가담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고,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되어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으면서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그가 주도한 것이 바로 임수경의 방북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으면서 도피하다가 결국 1989년 말 체포, 3년 반 정도 실형을 살았다. 당시 임종석은 1년 가까이 도피생활을 했고,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사진이 붙었으며, 임종석 담당 형사(청량리 경찰서 신중현)가 과로로 사망했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 4학년에 복학하였고, 1995년 8월 대학교 입학 10년 만에 졸업한다. 의외의 수상인데, 졸업식에서 총동문회장상과 공로상도 받았다.
3. 정치활동[편집]
1994년 말부터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직을 맡아 시민운동 쪽에서 활동하였는데 가까운 동료들과 만든 청년활동단체였다.
1999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되면서 출마 자격을 얻었다.
이미 1995년, 모래시계 세대 정계진출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오던 때부터 정계진출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지만 1996년 총선에는 출마하지 못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386 운동권 출신 영입이 활발할 때 새천년민주당을 택하면서 입당, 서울 성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4선의 이세기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다만, 임종석 자신은 의외로 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원은 되지 못했는데,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다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정계 입문 후 임 실장의 의정활동은 국보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대북 교류사업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초선 의원 시절인 2000년 7월 임종석 실장은 국보법 관련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이 같은 발언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보완책으로 간첩죄에 대해 형법상 처벌을 강화하면서 대북 접촉, 통신교류에 대해선 남북교류협력법을 통해 규제하면 된다.” 또 2004년 7월에는 의원실 주최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고, 같은해 8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국보법 폐지 입법추진위원모임에서는 “국가보안법은 위헌적이며 반(反)민주악법의 상징이기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4년 12월에는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의원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임 실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수사에도 적극 반대했다. 대북송금 사건은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달러를 불법송금한 사건을 말한다. 2003년 3월, 임 실장 등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이 주축이 된 모임인 ‘정치를 바꾸는 젊은 희망’은 대북송금 특검수사 반대성명을 냈다. 같은해 6월에는 민주당·개혁당(대표 유시민) 소속 의원 61명과 함께 대북송금 특검수사 마무리를 촉구하는 성명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2014년 '(사)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해당 재단은 남측 방송을 대리하여 대한민국 내 북한 저작물 이용의 저작권료를 북한에 지불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
201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 "중도전향"을 사실상 인정했다. 임종석 실장은 당신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있다"며 "과도하게 사회,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지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가결을 저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위 영상은 당시 YTN 돌발영상의 장면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열풍에 밀리면서 한나라당 김동성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당내에서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이 당시 임종석이 정치자금법 문제로 재판에 걸려 있었다는 점. 결국 19대 총선 직전 나온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면서 총선 출마가 좌절되었다. 사실 출마 자체는 할 수도 있었지만, 재판 문제로 인해 공격을 받을 것 같자 결국 포기한 것. 한명숙 당시 대표가 끝까지 만류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는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천권과 관련하여 소위 노이사 공천(친노-이대-486 위주 공천)을 주도했다는 공세도 한 몫 했다. 성동구 을 지역구는 그의 친구인 홍익표 교수에게 넘어갔고, 그는 사무총장직도 내놓게 되었다. 그의 사퇴 원인이 된 정치자금법 문제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면서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가 났다.
그리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15년까지 재직하였고, 때문에 박원순계의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 직을 내려놓은 후, 은평구 을 출마를 선언한다.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의 거물인 이재오와 겨뤄서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하였는데, 그만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신인이지만 은평구 내에서 기반을 착실하게 만들었던 강병원 후보에게 패하면서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10년 넘게 원외에 남게 되었다. 임종석과 함께 국회의원 자리에 도전한 다른 박원순계 정치인들도 기동민을 제외하면 경선과 본선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물 간 정치인으로 잊혀지는 줄 알았는데...
3.1. 문재인 정부 비서실장[편집]
2017년 문재인 캠프의 비서실을 이끌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삼고초려 끝에 영입을 했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박원순 시장이 문재인 상대로 극단적인 공세를 퍼붓는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다만 유시민 작가는 썰전에서 임종석을 박원순계로 분류하는 이같은 시선에 대해서는 꼭 그런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면서 '편견이다'라고 비판했다.
2017년 5월 들어서는 문재인 정부 초대 비서실장이 되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극한직업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거의 모든 일정에 참가하며(심지어 주말에도) 매번 같은 수트에 같은 넥타이 차림인것을 보고 네티즌들은 대체 퇴근은 하는 거냐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임플란트 예약이요 일명 청와대 감금설. 이 때문에 한 때 '임마루'라는 별명도 붙었다. 마루는 문재인 대통령이 사저 시절부터 키우는 반려견의 이름인데, 임종석이 고생하는게 마치 청와대에 묶여 있는 마루 꼴 같다고. 회의 도중 몸에 부항 자국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래서 대중들 사이에선 임플란트 하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퍼지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장면에서 유독 환하게 웃으면서 보내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고 각종 사이트에서 그렇게 좋냐며 신나게 놀려먹고 있다. 7월 5일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독일로 출국하는 장면에서도 또 환하게 웃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임명 이후 '비서실장' 이라는 이름처럼 대통령 보좌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듣는 자리이고 전 정부가 '왕실장' 이라는 소수 측근들의 과도한 권력 행사로 비판 받았던 만큼 적절한 역할 수행을 해내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당청 불화설이 일자 추미애 대표를 찾아 장미꽃을 선물하며 불화설을 일축하고, 추경 통과를 위해 당대표의 사과를 요구한 국민의당 박주선 비대위원장에게 대통령 대리인으로서 사과하면서 막힌 정국을 해결해 청와대 2인자의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수석보좌관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대통령 비서실의 간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장하성 정책실장, 정의룡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인수위 기간 없이 시작된 문재인 정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던 점 역시 고평가 받는 요인 중 하나이다.
이번 정부 첫 국회 업무보고에서는 사과 할 일에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야당의 공격을 적절히 방어해 청와대와 야당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지 않는 노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의원 시절에도 친화력 있는 성품으로 유명했던 만큼 업무 보고 중에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가 충북 지역도 신경 써달라며 서로 농을 던지기도 하는 등 훈훈한 광경이 나타났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의 탈 권위 행보에 발 맞쳐서 소탈한 모습이 자주 비춰지기 때문에 임종석 비서실장이 '고통받는 비서실장'이라는 밈 화가 될정도로 인기가 좋다.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자 내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당의 박지원 의원이나 주승용 의원같이 존재감 있는 인물들에게서 전남 지사를 수성하기 위해 임종석 실장이 나서야 하는것 아니냐는 전남 지사 차출론이 솔솔 나오고 있다. 그런데 비서실장 얼마나 했다고 차출인가....
공식적으로 지방선거 차출은 없다고 청와대가 입장을 밝혔다.
11일 6일, 청와대를 대상으로 진행된 국정 감사에서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청와대가 반미, 친북적인 강령을 가졌던 주사파와 전대협에게 장악 당한 정부의 외교를 믿지 못하겠다고 비판하자, 격앙된 목소리로 "그게 질의입니까? (국민을 대표해서 묻는데 그렇게 말하냐는 말에 대해) 국민의 대표 답게 질의하지 않으니깐 그렇죠!" 라며 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임 실장은 전 의원의 비판에 "제가 5공화국, 6공화국 때, 저는 전희경 의원님 말씀에 매우 모욕감을 느끼고, 아주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5, 6공화국 때 정치 군인들이 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제가 의원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진 않았습니다.[2] 그러나 지금 의원님께서 거론하신 대부분의 그 사람들이 인생을 걸고 삶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의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습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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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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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주사파 출신 논란 및 관련된 사실들[편집]
12 과거 대학 재학 시절, 전대협 의장으로서 임수경 방북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여 지명수배가 되어 크게 논란이 됐었다. 지명수배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나와 각종 운동에 참가하는가 하면, 기습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덕분에 당시 임종석의 포상으로 2계급 특진과 1000만 원의 보상금이 걸려 있을 정도였으며, 임종석을 잡기 위해 12만 명의 경찰이 동원됐었다. 국보법·집시법 위반 외 10여 개의 볍률 위반 혐의와 임수경의 방북을 도와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 하였고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특별 사면 되었다. 여담으로 임수경은 탈북자들에게 변절자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
또한 김정일의 사망 당시 임종석은 북한에 조문을 써 보냈고, 북한에게 답신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임종석은 그 조문에 대한 답신을 박정근의 구속 사유를 비꼬기 위해 트위터에 올리게 되었는데, 그가 문재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자 각종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통일부의 허가를 받고 통일부에 활동내역 신고를 한 상태에서 진행된 남북교류라서 실정법을 위배하는 사안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추가바람 * 트윗 아카이브, 사진 아카이브
위에 서술된 각종 논란들이 더해 하태경 등 NL 노선 출신 인사는 공식적으로 전향을 한 바 있으나 임종석은 전혀 그런 발언 및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강성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유로 전향발언의 의무를 갖는 건 아니지만 주사파는 그 이념부터가 논란의 중심이므로 주사파 출신임에도 전향을 확실시하지 않은 인물을 청와대에 들이는 것은 경솔하다 할 수 있다.
덕분에 자유한국당에서는 비서실장 임명에 대해 과거 행적을 들어, 이런 주사파 출신으로 알려진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는 게 합당하냐며 반발하였다. 하지만 바른정당에서는 임종석에 대해서는 딱히 논평을 내지 않았다. 하태경이 있어서?[3]
4.1.1. 임종석 본인의 입장[편집]
1989년 언론과 갖은 인터뷰에서 임종석 당시 전대협 의장은 전대협의 핵심 간부들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주사파라는 지적에 대해 “전대협이 지향하는 이념은 자주 민주 통일이며 북한의 주체 사상은 결코 전대협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임종석 당시 의장은 “전대협이 북한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해서 찬양을 한 적도 없었다”며 “전대협이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나 정부가 주장하듯 북한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이적단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4.2. 임종석 UAE 특사 파견 논란[편집]
해당 문서 참조.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새천년민주당
68,481 (48.4%)
당선 (1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을)
열린우리당
36,467 (49.6%)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을)
통합민주당
26,718 (46.7%)
낙선 (2위)
6. 여담[편집]
전국에 지명수배된 상황에서도 공권력의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전국을 누비면서, 임길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임길동이라는 별명 뒤에는 그와 비슷한 체구의 학생들이 클론 처럼 돌아다니면서 추적을 피하도록 했다. 호감형 외모와 투사의 이미지 그리고 신출귀몰한 행적, 전대협 의장이라는 카리스마 등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 심지어 여고생들이 주로 보는 하이틴 잡지에서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여성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2017년 청와대 입성 이후에도 "꽃보다 청와대" 멤버로 불릴 만큼 외모가 화제이다.
1996년 결혼했고, 결혼식 기사가 경향신문에 났다. 부인은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 편지를 주고받으며 알게 되었다고 한다. 슬하에 딸 1명 있다
한총련이 2003년 미군 훈련장 난입 사건 때 과격했다고 한총련을 깠다. 임종석은 위에서 봤듯이 임수경 방북 사건과 각종 사회운동을 주도한 전대협 제 3기 의장이었다. 한총련의 문제를 최소한 인식은 하고 있을 뿐 아니라, 80년대 전대협의 통일운동과 90년대 이후 한총련 주사파는 성향에 큰 차이가 있다.
2005년에 디시인사이드에서 정사갤러들과 간담회를 가진 이후 '본인의 요청'으로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임종석 갤러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7년대의 디시 갤러리들은 우후죽순 마구 만들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만두 조공을 바치고 리플로 찬성 여론을 만들어도 겨우될까말까한 갤러리 개설이 김유식과 임종석의 이해관계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잆이 손쉽게 그것도 정치인의 갤러리가 개설된 것에 대한 반발이 매우 심했다. 예를 들면 당시에 매우 인기있던 문근영, 이나영등의 여배우들은 관련 팬덤들이 만두 조공도 바치고 각종 팬카페 및 디시 갤러리에서 이용자들의 동의 리플을 부탁하는 이른바 '화력 지원'을 거쳐 갤러리가 생기는게 관례였는데 임종석은 이러한 과정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딱히 거물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갤러리 관리 또한 다른 곳과는 다르게 본인이 직접 했었는데 과도한 글 삭제와 필터링 때문에 말이 많았으며 나중엔 본인의 이름까지 금지어로 설정해 '금지어 갤러리'라고 조롱당하기도 했다 관련이미지 이를 비꼬는 의미에서 "종석이 얼굴만 보면 고추가 커져요."같은(...) 뻘글성 꾸준글이 생기기도 하며 명맥을 잇기도 하였고 후에 찌질열전을 통해 이런 일화들이 알려지게 되기도 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성덕선이 동생 성노을을 보호하려고 성노을의 여자친구와 여친의 친구들과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갔을 때 동생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벽에 붙은 수배전단에 등장한 것. 단순 소품이 아니라 작가가 일부러 옛날 자료를 구해서 재현하여 붙인 것이라고 한다. 지인의 제보로 임종석 본인도 찾아보고 크게 웃었는데 키를 170cm로 표기해서 섭섭하다고 트위터에 올렸고 이에 작가진은 옛날 자료라 인쇄상태가 나빠 176을 170으로 잘못 보고 적었다고 답글을 보냈다.
2014년에는 "지금 야당은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 있다"면서 "중도를 지향해야"고 밝혔다.인터뷰 기사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성향에서 보이듯 종북이라고 낙인을 찍을 수도 없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후에도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고 해서 '미스터 함박'이라는 별명이 붙혀졌다. 또한 회사생활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 '청와대 회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예를 들어 부장님의 해외 출장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나 회사 회의에 부장님보다 늦게 오는 모습을 보이는 등 국민들이 공감하는 등 청와대가 친근한 장소가 되었다는 걸 한몫한 셈이 됐다.
최근 친문성향 커뮤니티에서 널리 알려진 다른 별명은 바로 '임마루'. 문재인 대통령이 기르는 그 개 마루 맞다(...).
문 대통령이 초청하는 만찬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오면 국무총리가 가서 인사를 나누고 임 실장이 곁에서 지킨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한 문재인 정부이지만 대통령이 귀빈 여러 사람들을 영접해야 하다보니 위안부 할머니를 세심히 챙길 수 없어서 대통령비서실장이 곁에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듣고 알려달라고 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
[1] 그러나 북한은 국가간 저작권을 존중하는 베른 협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저작권물 이용에 관해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2] 굳이 설명하자면, 전희경은 1975년생이니까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때 겨우 5살이고 제6공화국의 시작인 1987년에도 고작 12살 밖에 되지않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살피고 할 나이는 아니다(...). 물론, 임종석 본인도 1966년 생으로 5.18 당시 겨우 15살 중학생이었다. 그도 5.18 때 민주화운동에 깊게 참여했다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전라도에 살던 그는 당연히 들려오는 얘기로라도 알았을 것이고 당시 전남에선 어린 학생들의 참여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또한, 6월 항쟁때는 운동권에서 앞장선 대학생이었다.[3] 하태경 역시 전대협 출신이기 때문. 당시 임종석, 임수경 등과 같이 활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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