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3

'불쌍하고 게으른' 고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 오마이뉴스 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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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고 게으른' 고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평등행 버스를 타겠다 ④] 동정받거나 무시당하거나, 학력 차별의 늪
엠건(equalityact)편집김예지(jeor23)등록 2017.12.06 13:42수정 2017.12.0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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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크게보기10,000인기기사 더보기세계인권선언기념일을 앞둔 12월 9일, 차별금지법제정촉구대회 <우리가 연다, 평등한 세상>이 열린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2007년 삭제되었던 7개의 차별금지사유(병력, 출신국가, 성적지향, 가족형태, 학력 등)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묻는다. 여전히 차별금지법은 나중인가? 차별은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을 나중으로 미룬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평등행 버스를 타겠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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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엄마는 '초졸'이다. ⓒ pixabay
우리 엄마는 '초졸'이다. 6학년 때라고 했나. 수학이 너무 어렵고 따라가기 버거워 학교를 무작정 안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엄마의 부모는 그런 딸을 부러 말리지 않았고 농사짓느라 바쁜 어른들 대신 밥을 짓게 했다. 열세 살에 시작한 가사노동은 10대 시절 내내 이어졌다.

엄마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검정고시로 초졸을 딸 수 있었다. 중졸도 따볼까 했지만, 공장 일을 다니느라 바빠서 결국 시도를 못 했다고 했다. 이런 사정을 처음 들은 게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였다. 학교에서 학기 초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걷었다. 거기에 부모의 학력 란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 최초로 마주한 학력 차별은, 채울 수 없는 빈칸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엄마의 얼굴이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나도 어쩌면 어릴 때 본 엄마와 비슷한 얼굴을 했을지 모르겠다. 더 이상 가정환경조사서를 낼 필요는 없지만, 이력서를 써야 했다. 고졸 학력과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경력들을 적고 나면 내기도 전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럴 때마다 초졸이나 중졸, 고졸 같은 단어에 드리운 초라한 울림은 누가 만든 건지 묻고 싶었다.

불쌍해 보여야 하는 거야?



3년 전, <대학거부, 그 후>의 공저자로 참여한 후 언론 인터뷰를 할 일이 몇 번 있었다. 학력이 낮아서 차별받은 경험담으로 시작해 대학 거부는 왜 했는지, 학력차별이 왜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지까지 나름 성의껏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을 말했다. 한 시간가량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후 나온 기사 타이틀은 다음과 같았다. '대학거부, 그 후… 알바도 못 구해'. 며칠 전 고졸자의 노동 실태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이 기사의 타이틀은 또 이랬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나는 고졸입니다'. 3년 전 인터뷰에서 나는 기자가 이미 짜놓은 불쌍한 그림에 도구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지금도 그 기사를 보면 가슴 한쪽이 긁히는 기분이 든다.

요즘 나오는 기사들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기자들은 저학력자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있는 그대로 고발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인터뷰이를 대중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는 걸까. 국제 아동 구호 단체가 내세우는 굶주린 어린이들의 사진처럼 보다 '잘 팔리게끔' 불행을 전시 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노력하지 않은 자의 패널티

언론이 저학력자들의 현실을 다루는 방식은 아침드라마처럼 통속적이다. 그리고 통속은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지' 따위의 오래된 차별적 관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연민을 자극하는 방식은 기사 조회수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직접적인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공감이 내 일처럼 느끼는 동일시의 감정이라면, 연민은 대상에 대해서 불쌍하긴 하지만 내 문제는 아니라고 선을 긋고 타자화하는 감정이다.

댓글을 보면 안다. 익명의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더 적나라한 속내를 보여준다. 본인도 중·고졸이라서 '나도 그랬다'고 비슷한 사례를 들려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저것'들을 동정하거나 적대하거나 혐오한다. 그러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어. 남들이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 갈 때 니들은 뭘 했는데? 징징대지 마라, 니들만 힘드냐. 요즘은 대학생 취업이 더 힘들다 등등.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결론은 똑같다. 당신들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내 문제와 네 문제는 별개라는 인식 속에서 학력 차별은 다시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아오고, 저학력자들의 열악한 현실은 더 노력하지 않은 너희들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죄지은 자의 페널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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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면접 장면. 주인공 애라에게 심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간 뺏고 싶으면 24번 시간을 먼저 채워왔어야죠. 저 친구들이 유학 가고 대학원 가고 해외봉사 갈 때 24번은 뭐 했어요?" ⓒ kbs
"돈 벌었습니다"

몇 달 전 종영한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면접 중인 주인공 애라에게 심사관이 말한다.

"우리 시간 뺏고 싶으면 24번 시간을 먼저 채워왔어야죠. 저 친구들이 유학 가고 대학원 가고 해외봉사 갈 때 24번은 뭐 했어요? 열정은 혈기가 아니라 스펙으로 증명하는 거죠."

그녀의 신랄한 평가에 애라는 이렇게 대답한다.

"돈, 벌었습니다. 유학 가고 해외 봉사 가고 그러실 때 저는 돈 벌었습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곧장 취업을 택한 이들 중 상당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에 갈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20대 내내 공장, 기술직, 서비스직 등 사회 밑바닥 노동으로 불리는 직군들을 담당하고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에 시달린다. 나만 해도 20대 초중반의 기억은 각종 알바를 했던 것밖에 없다. 집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고, 알아서 돈벌이를 해야만 생활비를 벌 수 있기 때문에 일을 쉴 수가 없었다.

주변의 어떤 친구는 실업계를 졸업하고 바로 정규직 취업을 했지만 딱히 꽃길은 아니었다. 어차피 고졸은 아무리 열심히 오래 일해도 승진과 연봉에 제한이 있다고 했다. 더구나 회사 근무 환경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원래 출근시간은 9시였지만 다들 8시 출근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라 새벽같이 출근해야 했고, 퇴근 시간 역시 보장되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을 읽어보니, 고졸이라고 허드렛일만 맡기는 정도는 흔했고, 상사가 학력을 언급하며 직접적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학력 차별로 가장 이득을 보는 건 누굴까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람 같은 건 없다. 차별은 어떤 개개인들이 잘못 살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차별은 폭력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조건 위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차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고졸 이하 학력을 무시하는 전문대생의 위에는 4년제 대학생들이 있다. 수도권 대학의 학생들은 '지잡대'를 대학도 아니라고 유령 취급 하지만 그들의 위에는 SKY가 있다. 모두가 알아주는 명문대라고 해도 어디 캠퍼스 소속이냐에 따라서 성골, 진골 신분제 나누듯 급이 나뉘고, 입학 전형에 따른 서열이 다시 나뉜다. 차별을 위한 구별 짓기는 끝이 없고, 학력이 주는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보다 높은 학력 자본을 가진 존재들에 대한 열등감과 함께 작동된다.

먹이사슬 같은 차별의 연쇄 속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건 누굴까. 헬조선은 아주 예전부터 학력 사회라는 영악한 차별의 기제를 통해 편리하게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해왔다. 학력·학벌 서열은 고스란히 임금 격차와 일치한다. 누군가의 학력이 전문대보다, 4년제보다, 명문대보다, 해외 유학파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더 적은 임금을 줘도 되는 근거가 된다.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고졸 출신 기자라는 분이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일부러 구조적 모순을 만든 건 아니냐"고 발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동감한다. '학력에 따른 차별은 능력의 격차에 따른 보상이므로 합리적'이라고 인정할 때 착취하는 손은 감춰진다. 내가 더 높은 학력, 더 좋은 학벌을 가지지 못해서 이렇게 사는 거라고 자책하는 고립된 개개인들의 열패감만 남게 된다.

그건 나에게 유리한 차별이 아니야

학력 차별에 관해서는 특히나 우리 모두가 누구 좋으라고 서로를 할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계속해봤자 학위 장사에 눈이 벌게진 대학의 배를 불려주는 꼴밖엔 안 된다. 입시가 이미 경제력 싸움이고, 취업 또한 그 연장선상인데, 이미 이것은 위너가 정해진 게임이다. 금수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학력차별에 동조하는 게 그다지 본인에게 유리하지도 않다.

수저 색깔대로 경제적 격차가 나뉘는 더럽고 치사한 헬조선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본인이 흙수저인 걸 원망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알 것이다. 어차피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러니 글러 먹은 이번 생에는 다 같이 저 뒤에 숨은 착취하는 손을 끌어내리고, 그들의 도구가 되는 차별적인 시스템에 돌을 던져보면 어떨까. 돌이 힘들다면, 뭐, 욕이라도 같이 하면 좋고. 차별금지법 제정촉구대회라도 같이 가면 더 좋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일 맞이 차별금지법제정촉구대회 <우리가 연다, 평등한 세상> 여러분들의 후원으로 집회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https://socialfunch.org/equalact2017

△ 200만원 모금 시 : 우리가 연다, 평등한 세상! 최소 집회비용(공연 60만원, 수화 통역 20만원, 현수막 20만원, 음향 100만원)으로 (빚 안내고) 집회 성사!
△ 350만원 모금 시 : 힘차게 외쳐보자! 무대 업그레이드!
△ 450만원 모금 시 : 더멀리 더크게! 지역 참가자를 위한 버스대절!
△ 500만원 모금 시 : 어화둥둥 차별금지법 제정! 참가자 모두를 위한 무지개 팔찌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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