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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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시아 태평양전쟁 l 일본 근현대사 6

요시다 유타카 (지은이) | 최혜주 (옮긴이) | 어문학사 | 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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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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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6권. 말레이반도 상륙과 진주만 공격에 의해서 개시된 '아시아.태평양전쟁'. 왜 개전을 회피할 수 없이 장기화한 것일까. 병사와 후방의 사람들, 아시아의 민중은 총력전을 어떻게 살고 죽은 것일까. 모순을 품고서 강행시킨 일본과 아시아에 깊은 상흔을 남긴 총력전의 여러 모양을 그리면서, 미일교섭부터 무조건 항복까지의 5년간을 가늠해본다.





머리말-7

제1장 개전에의 길 17
1. 삼국동맹에서 대미영 개전으로 18
2. 전쟁의 성격 26
3. 왜 개전을 회피할 수 없었을까 47

제2장 초기작전의 성공과 도조 내각 69
1. 일본군의 군사적 승리 70
2. ‘도조 독재’의 성립 81

제3장 전국의 전환 103
1. 연합군에 의한 반공(反攻)의 개시 104
2. 병력 동원을 둘러싼 여러 모순 117
3. ‘대동아공영권’의 현실 128
4. 국민 생활의 실상 143

제4장 총력전의 수행과 일본 사회 153
1. 마리아나 제도의 실함(失陷)과 도조 내각 154
2. 전시하의 사회 변용 177

제5장 패전 199
1. 전장과 병사 200
2. 본토 공습의 본격화와 국민 215
3. 전쟁의 종결 225

맺음말-251

저자 후기 258
역자 후기 260
연표 263
참고문헌 265
색인 272






저자 : 요시다 유타카 (吉田 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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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아시아.태평양전쟁>,<일본의 군대>,<일본인의 전쟁관> … 총 55종 (모두보기)
소개 : 1954년 사이타마 현(埼玉縣)에서 출생
1977년 도쿄쿄이쿠(東京敎育)대학 문학부 졸업
일본근현대사 전공
2012년 현재 히도쓰바시(一橋)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교수

저서
『昭和天皇の終戰史』(巖波新書, 1993), 『日本の軍隊』(巖波新書, 2002),『日本人の戰爭觀』(巖波現代文庫, 2005), 『天皇の軍隊と南京事件』(靑木書店, 1986), 『現代歷史學と戰爭責任』(靑木書店, 1997)
공저
『アジア·太平洋戰爭』(吉川弘文館, 2007) 외 다수
편저
『巖波講座 アジア·太平洋戰爭』(巖波書店, 2005) 외 다수



역자 : 최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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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문교의 조선 총목차 인명색인>,<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통치론>,<창강 김택영의 한국사론> … 총 23종 (모두보기)
소개 :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와 대학원,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석·박사과정을 졸업했다. 문학박사로 전공 분야는 한국근대사·한일관계사이며, 현재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창강 김택영의 한국사론』(1996), 『한국 근대사와 고구려·발해인식』(공저, 2005), 『근현대 한일관계와 국제사회』(공저, 2007), 『최남선 다시 읽기』(공저, 2009),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공저, 2010), 『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통치론』(2010), 『문교의 조선-해제·총목차·...





‘가족이나 군대의 모습, 식민지의 움직임까지 고려하면서
막말에서 현재에 이르는 일본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새로운 통사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전 10권, 원제 シリ?ズ日本近現代史)>는 2007년 이와나미서점에서 간행한 역사 시리즈로, 19세기 중반의 외국 함선 내항으로부터, 21세기의 현재까지, 대략 150년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근현대의 일본은 무엇을 요구해 어떠한 걸음을 진행시켜 왔으며, 지금부터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여, ‘막말·유신’에서 ‘포스트 전후 사회’까지를 9개의 시대로 구분해, 각 시기마다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중견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한 통사로서 간행되었다.
<1권 막말·유신>(이노우에 가쓰오), <2권 민권과 헌법>(마키하라 노리오), <3권 청일·러일전쟁>(하라다 게이이치), <4권 다이쇼 데모크라시>(나리타 류이치),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가토 요코), <6권 아시아·태평양전쟁>(요시다 유타카), <7권 점령과 개혁>(아메미야 쇼이치), <8권 고도성장>(다케다 하루히토), <9권 포스트 전후 사회>(요시미 슌야)의 9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본 역사 시리즈에는 각 시대 분야에 정통한 한국의 번역자 9명이 담당하여, 본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어문학사)가 출간되는 데 힘을 모았다. 이 번역 작업은 일본사뿐만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사상사 등에서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전공하고 있는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이전에 보지 못한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인 내용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의미 있다. 각 권마다 ‘역자 후기’를 덧붙여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시대 의식, 한국 사회에 남겨진 과제 등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본 시리즈가 주목받는 데에는 21세기 현대의 일본이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어떠한 역사적인 맥락을 거쳐서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사를 그린 집필자 9명은 각 시대의 일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물음을 내걸어 거기에 대답하면서 총정리를 행하고 있다. 곧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시작한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흐름을 되짚어 보면서 그중에서도 군대와 가족, 식민지의 현실을 탐구하는 것을 통해 ‘근현대 일본’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권 막말·유신>을 쓴 이노우에 가쓰오는 시리즈의 마지막 10권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역사학에서 생겨난 커다란 변화는 구미 중심의 역사관에서, 예전에는 주변부라고 인식되었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 역사가 새롭게 서술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문화권의 배치도가 세계적으로 대변동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원래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산업 시스템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풍부한 자원과 방대한 시장에 의해서 번영을 누려왔던 것입니다. 아시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거대한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구성되어 재해석을 시작한 이 통사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한국의 국민 역시 한국의 새로운 역사 주체 형성은 누가 될 것이며,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해 있으며, 이러한 질문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찾아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일본의 사회 변화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 통사의 흐름이 보여주는 현실을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숙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제6권 아시아·태평양전쟁> 소개
전후에 태어났다고 해도 전쟁의 시대와 연속해 있는 시대를 살아왔다고 하는 실감이 있다. 나의 유년기를 담당한 의사는 데라시 요시노부(寺師義信, 1882~1964년) 전 육군군의 중장이다. 위엄이 있는 수염을 기른 노선생이었지만 치료 뒤에 사탕을 받은 기억이 있다. 손녀가 소·중학교 시대, 나의 1학년 밑에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일중 우호에 진력한 엔도 사부로(遠藤三郞, 1893~1984년) 전 육군 중장의 주거도 나의 행동반경 안에 있었다.
또 최근 중학생 시대의 동급생인 구리하라(栗原好江) 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서, 동급생 하야시(林夏子) 씨의 부친이 ‘오우카(櫻花)’를 장비한 해군의 특공부대, 제721 해군항공대의 생존자임을 알았다. 721공의 비행대장 노나카 고로(野中五郞, 1910~1945년) 소좌가 ‘오우카’의 출격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출격 전의 노나카 소좌의 생생한 언동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하야시 씨의 아버지 하야시 후지오(林富士夫) 전 해군대위다. 전쟁의 생생한 상처가 매우 가까운 곳에 남겨져 있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식민지 지배의 문제에서도 같다. 동급생 가운데에는 재일조선인의 자제가 상당히 있었지만, 나의 놀이 친구였던 것은 일본에 살고 있는 가운데서도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에는 일본 사회의 최저변의 노동자층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A씨의 부친도 그중 한 사람인데, 이마에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땀투성이가 되면서, 거름통을 실은 리어카를 끌던 모습이 눈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동급생의 부친 가운데 지금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A씨 부친의 불그레한 얼굴뿐이다.
그런 세대의 연구자인 나 자신의 강한 생각 같은 것이 이 책에는 짙게 반영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젊은이, 젊은이라고 대우받고, 젊은이, 젊은이라고 오만불손했던 시대는 먼 과거의 것이 되었고, 지금은 중견이라 부를 수 없는 세대의 연구자가 되었다. 이 사이 계속해서 성장해 온 젊은 세대의 연구자가 보면 나 자신의 이런 생각은 답답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집필을 마친 지금 나의 가운데에는 해야 할 책무를 내 나름대로 해냈다고 하는 만족감(자기만족감?)이 있다. 독자 및 젊은 연구자 여러분의 기탄 없는 비판을 부탁드리고 싶다.

-저자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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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편




아시아 태평양 전쟁 / 요시다 유타카 nana35 ㅣ 2017-07-17 ㅣ 공감(3) ㅣ 댓글 (0)


1941년 4월 시작된 미일교섭의 최대 쟁점은 중국 문제였다. 미국의 철병 요구에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응하려 하자, 육군은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편다. 도조 히데키(1884-1948) 육군대신은 "철병 문제는 심장이다. (중략) 육군으로서는 이것을 중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주장대로 했다간 지나사변(중일전쟁)의 성과를 궤멸하는 것이다. 만주국도 위험하다. 더욱이 조선 통치도 위험하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도미노이론이지만, 이에 따라 교섭 타결의 전망을 잃어버린 고노에 내각은 어쩔 수 없이 총사직을 하여, 10월 18일에는 도조 히데키 육군대장을 수반으로 하는 도조 내각이 성립한다."(29-30)




강경 입장으로 돌아선 일본은 1941년 11월 5일 어전회의의 <제국국책 수행요령>에서 '영미란전쟁을 결의'하면서 "무력 발동의 시기를 12월 초두로 정하여 육해군은 작전 준비를 완성한다"고 결정한다. 차후 "외교 교섭을 계속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 성격은 개전 결의를 위장하기 위한 '기만 외교'로서의 측면을 강화해 간 것이다."(31) 그러나 해군은 육군과 달리 "대영미 개전이라는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 관료적 이해(대미 전비 확충)를 추구하는 얼핏 모순되는 방침"을 취하였다. 즉 "군비 확충에 필요한 예산과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무력남진정책을 추진하되, 충분한 승산이 없는 대미영전은 회피하고 싶다는 것이 해군의 속마음이었다."(60)




육군은 "북방에서의 대규모 작전 행동이 불가능한 동계 중에 영미에 대한 남방 작전을 종료시킨 다음 1942년의 독일군의 춘계 공세에 호응하는 형태로 대소전을 개시"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미일교섭이 지연되고 대미영 개전 시기가 늦춰지면, 이 작전 구상은 붕괴되어 버리기에, 육군은 "외교 교섭에 기한을 두는 것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었다. 즉, "군사 논리에 따라 외교가 규정"되는 전도현상이 발생한 것이다.(63) 문제는 "전쟁에 대한 벼랑 끝 외교 정책의 정치적 귀결이다." 국내의 강경론이 정책 결정 과정을 역규정하면서, 대미 타협 주장이 국론을 분열시켜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나 내란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신중론을 잠식했던 것이다.(68)




진주만 기습으로 대표되는 초기작전은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위기의 징후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해군의 잠수함부대는 상선과 유조선 등에 공격을 집중하여 일본의 해상 교통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에 비해 일본 해군의 잠수함부대는 주목표를 미해군 함정에 두었기 때문에 충분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반대로 강력한 대잠 능력을 가진 미해군에게 궤멸당했다." 더구나 말레이해전 후 1년도 되지 않아 "연합군 함선의 방공 능력이 한층 향상됨에 따라 육공기에 의한 백주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1942년 8월부터 시작된 "과다카날 섬을 둘러싼 공방전에서 솔로몬 해역은 문자 그대로 육공기의 '무덤'이 되었다."(74-5)




1941년 12월에 있던 중부태평양의 "웨이크 섬 공략 작전은 이도(離島,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제공권 장악이 갖는 결정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울러 육상 전투에서도 "일본군의 주력 전차인 97식 중전차와 95식 경전차는 미군의 M3 경전차"에 고전하는 형편이었다. "장갑 면에서도 탑재포의 관통력 면에서도, 미군 전차의 대전차전 능력이 일본군의 것을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중기가 되면 "한층 강력한 M4 중전차를 전선에 투입하는데, 이미 이 단계에서는 일본의 전차병에게 97식 중전차나 95식 경전차는 '철로 만든 관(棺)'에 지나지 않았다."(75-6)




"1942년 5월 7일부터 8일에 걸쳐 싸운 산호해 해전은 사상 최초의 공모끼리의 전투였다. 미국 측에서는 공모 '렉싱턴'이 침몰했고, '요크타운'이 손상을 입었으며, 일본 측에서는 소형 공모 '쇼호'가 침몰하고, '쇼가쿠'가 대파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일본군이 조금 우세한 전투였지만 일본군은 해상으로부터의 포트모르즈비 공략작전을 어쩔 수 없이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전략적으로는 패배했다. 또 대파된 '쇼가쿠'와 다수의 함재기를 잃은 '즈이가쿠'의 2공모는 모두 1개월 후인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미해군은 '요크타운'의 수리를 단기간에 마치고 전열에 복귀시켰다. 이것은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가르는 것이 되었다."(105-6)




미드웨이 공략작전의 주목적은 "미 주력 함대의 격멸이었지만, 둘리틀 중좌가 폭격대를 이끌고 일본 본토에 첫 공습을 가한 것도 작전의 실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체면을 구긴 일본 해군은 본토의 초계 라인을 동쪽으로 연장할 필요가 있었고, 전초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미드웨이 섬 공략이 필요했다. "6월 5일 미드웨이 섬 공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미해군의 급강하 폭격대에 공격을 받아 눈 깜짝할 사이에 '아카기' '가가' '소류'의 3공모를 잃어버렸다. 남은 '히류'의 반격으로 미공모 '요크타운'을 대파시켰지만(나중에 일본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 '히류'도 미군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결국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대패로 끝났다."(106-7)




1942년 8월 7일 시작된 과다카날 전투에서의 손실은 "전쟁 경제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해 전력을 급속하게 증강시키고 있던 미국보다,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특히 초기작전의 성공을 지탱해온 숙련된 항공기 탑승원을 다수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나아가 전사자들 가운데 "직접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5,000~6,000명에 지나지 않고, 남은 것은 기초 체력의 자연 소모에 따른 '영양실조증, 열대성 말라리아, 설사 및 각기 등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사자 중의 약 70%는 선박에 의한 식량 및 의약품의 보급이 끊어진 상황 아래서 생긴 광의의 아사자였다. 그리고 과다카날 섬의 이 비극은 그 후 각 지역의 전장에서 반복된다."(109)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조선 내에서 황민화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1942년 10월에는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이 공포되고, 취학하지 않은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청년 남자를 각지의 청년특별연성소에 입소시켜, 군대나 군수 산업으로의 동원을 위한 예비 훈련을 의무적으로 행하도록 하였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국어보급운동요항>이 제정되어 일본어 보급 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민중에게 우선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은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한 인적 자원의 강제 동원, 이른바 '강제연행'이다.(130) 일본 전시 체제는 생활 수준 유지를 중시한 독일과 달리 본토에서도 "전시 체제의 강화와 국민 생활의 궁핍화가 병행"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143)




1943년 4월 18일에는 "솔로몬 제도의 전선 기지를 시찰 중인 야마모토 이소로쿠(1884-1943)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비행기 안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야마모토의 전선 시찰을 사전에 탐지한 미군은, 16기의 전투기에 의한 잠복 공세로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격추한 것이다." 5월 12일에는 "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에 미군의 1개 사단이 상륙"하자, 일본군 수비대는 최후의 돌격을 행하고 전멸한다. 대본영은 여기서 "통신이 완전히 두절, 전원 옥쇄(玉碎)한 것을 인정한다"라는 형태로 처음 '옥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고도(孤島)의 수비대가 전멸할 때마다 처참한 전장의 현실을 은폐하는 옥쇄 캠페인이 전개되었다."(156-7)




※ 일본군이 무력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우려가 대두되어 1944년 2월 25일 퀘제린섬, 루오트섬 전멸 발표부터 '옥쇄' 표현 삭제




"오키나와전에 패배한 뒤에도 일본군의 항전이 계속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사자 대부분이 마리아나 함락 전후의 절망적 항전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1944년 1월 1일 이후의 전사자(패전 후의 전사자 포함)가 전체의 87.6%에 달하는데, 이는 종전 결단이 늦춰지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어버렸는가"를 잘 보여준다.(203) 1945년 3월 9일의 도쿄대공습을 시작으로 이어진 도시 폭격으로 패전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지만, 천황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리고 나서가 아니면 (전쟁 종결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서, 전쟁 책임자 처벌 문제를 회피하는 조건에서 강화를 성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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