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8

1802 통일의 '통'자도 쓰지 말아야... 황석영이 생각하는 문익환의 길



"통일의 '통'자도 쓰지 말아야"... 황석영이 생각하는 문익환의 길 - 오마이뉴스 모바일

"통일의 '통'자도 쓰지 말아야"... 황석영이 생각하는 문익환의 길
[문익환의 사람과 물건 ①] 문 목사와 같은 시기 방북했던 황석영, 그의 '현실적 평화론'
글박정훈(twentyrock)사진·영상유성호(hoyah35)
등록 2018.02.15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의 거목인 '늦봄' 문익환 목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문익환 목사와 뜻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가 남긴 물건들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민족과 민중을 위해 헌신했던 문익환 목사의 삶을 기리고, '촛불 혁명' 이후 새로운 체제와 다시 시작된 '남북대화 국면'을 맞아 올바른 한국 사회의 변화 방향을 모색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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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작가가 30일 오후 경기도 일산서구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늦봄' 문익환 목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는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문 목사님이 남기신 발자국은 우리 통일 운동사에 지워지지 않은 크나큰 흔적이다”라며 “저도 70 중반이 됐는데 문 목사님의 뒤를 쫓아 죽을 때까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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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75) 작가는 선구자다. 89년도 황석영 작가와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통일 운동의 디딤돌이 되었고, 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현재의 남북 해빙모드에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과거의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통일이 '정치적으로 오염'된 언어이니까 쓰지 말자며, '평화체제'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자고 강조했다.

지난해 자서전 <수인(囚人)>을 발표해서 그런지 과거의 기억도 명확했다. 시대 상황에 따라 생각도 끊임없이 진화한 것처럼 느껴졌다. 문 목사와의 일화를 소개할 때는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지만, "목사님이 가신 길을 쫓아서 평생 한반도 평화에 헌신하겠다"는 말을 할 때는 눈이 빛났다.

지난달 30일 황석영 작가의 자택 앞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목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기침을 연신 했음에도, 그는 강건하고 단단해 보였다.

"지금은 통일 이야기할 때 아니다... 미국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해야"

- 뉴스 보고 계시죠? 오랜만에 북한과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내년이 문재인 정부 터닝포인트잖아요. 내년에 뭔가 성과를 이뤄내야 다음 정권도 이어서 할 수 있겠죠? 문재인 대통령도 한반도 평화체제 만들겠다고 하고, 북미수교와 평화협정 이야기하잖아요. 잘 될 겁니다. 지금 평창올림픽을 통해서 단일팀 뛰는게 얼마나 좋아요. IOC에서도 환영을 하고. 그런데 자유한국당은 재를 뿌리고 딴지 걸잖아. 남북이 계속 대결 구도로 가서 외세에 좋은 일 시키자는 건가요? 답답해."

- 젊은이들 사이에선 단일팀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10여 년 동안 보수 정부가 선전한 게 효과를 보는 거예요. 분단이 당연한 거고, 통일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선전했잖아요. 젊은 세대들 봤을 때 나는 요새 통일이라는 말 쓰지도 말자고 해요. 통일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오염됐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며 통일문제에 접근한 게 아니라 그때그때 마케팅하듯이 써먹어요. 통일의 '통'자도 쓰지 말아야 해요."

- 그럼 통일 말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평화'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겁니다. 이 체제가 민주화나 사회적 발전의 발목을 자꾸 잡는 거예요. 준전시체제의 '안보국가'를 면하지 못하면 젊은이들은 계속 군대 가야 해요. 이러다가 전쟁하면 국토가 폐허되고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이 파괴됩니다.

- 통일은 안 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입니까?

"평화롭게 두 개 나라가 공존하면서 '군사정치적' 패러다임을 '문화경제적'으로 바꾸면, 한반도가 '대륙의 경제권'을 형성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한 세대쯤, 30년 정도 공존하고 살면 서서히 북한 인민이 변화하겠지. 개성 주변에 근로자들 인식이 바뀌었잖아요. 이런 식으로 서서히 북한 변화를 유도해내고 그다음에 적당한때 하나의 나라가 되어야죠. 지금은 통일을 이야기 할 때도 아니고 역량이 없어. 모든 담론을 '평화와 공존'에 집중해야 해요."

그는 북한의 외교적 고립 등 핵 개발이 이뤄지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미국이 나서야 하며,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미국이 협상테이블에 나오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정전 협정 당사국도 아니다", "분단 문제에서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는 말들은 '반미(反美)'가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느껴졌다.

- 작가님이 방북했던 80년대가 오히려 통일의 대한 열망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요. 90년대~2000년대 획기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는 데 안됐어요. 독일 같이 모멘텀도 있었지만 역량이 없었고. 87 체제 들어섰지만 반북세력 반통일세력이 막강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전쟁을 했잖아요. 피의 흔적들이 남아있어요. 이제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지켜봐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했던 말 중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북의 미사일보다 백배 천배 강하다'고 했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근사하잖아요. 아마 그런 생각으로 평화체제를 달성하면 그 이후에 북한 사회 변화가 오겠죠."

- 평창 올림픽이 중요한 분기점이 되겠네요.

올림픽은 목적이 평화예요. 여러 민족 국가들이 평화롭게 스포츠를 통해서 교류하는 거잖아요. 얼마 전까지 트럼프과 김정은의 말싸움으로 위기가 고조됐는데 평창(올림픽이 열려서)이 참 다행이죠. 우스갯소리로 선조들이 지은 지명에 땅의 팔자가 정해져 있다고 해요. 평창은 평화가 번창한다는 뜻이에요.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동아시아 주요 3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건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만들라는 강력한 신호이자 기운이죠.

문익환과 황석영... 비슷한 생각, 다른 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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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작가는 1989년 3월 20일 북한 땅을 밟고, 뒤이어 문익환 목사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자격으로 3월 25일 북한 땅을 밟는다. 둘은 함께 3월 27일 한 차례 김일성 주석과 만났고, 이후 문익환 목사는 한 차례 더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북한의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4.2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황 작가가 주석궁에서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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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는 1989년 3월 20일 북한 땅을 밟고, 뒤이어 문익환 목사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자격으로 3월 25일 북한 땅을 밟는다. 둘은 함께 3월 27일 한 차례 김일성 주석과 만났고, 이후 문익환 목사는 한 차례 더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북한의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4.2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역사를 더듬어보면 문씨 집안에서 애국자를 많이 배출했다. 문익점이 붓대에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와 인민에게 큰 도움을 줬다. 문익환 목사도 같은 문 씨이냐?"

평창올림픽 참가로 방남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을 때 했던 덕담 중 일부다. 문 대통령을 치켜세우는 말임은 물론 북한에서 문익환 목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게 되는 말이다.

문 목사는 바로 입국해서 구속되지만, 황 작가는 4년간 망명 생활 끝에 뒤늦게 돌아온다. 황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그는 5~6차례 북한에 입국했고, 공식적으로도 김일성 주석을 7~8번 정도 만났다고 한다. 당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초대 대변인을 맡고, 90년 제1차 범민족대회에서는 남측 대표로 참가하기도 할 만큼 저술작업과 동시에 통일 운동에도 힘썼다.

문 목사는 평양을 떠나는 날, 황 작가에게 "다 돌아가서 차례차례 굴비 엮듯이 잡혀가지 말고 황형은 밖에서 활동을 좀 해라. 기행문 쓰고도 해외에서 활동을 하면서 연대 틀을 만들어줘라"는 부탁을 황 작가에게 전한다. 그리고 실제로 황 작가는 그 말을 지킨다.

- 문익환 목사님과 비슷한 시기에 북한에 들어갔고, 결국 함께 김일성 주석을 봤다. 신기한 인연 아닌가.

"문익환 목사, 리영희 선생 등이 북한으로 갈 거라고 짐작은 했어요. 정책적으로 어느 흐름인지 서로 알 수 있던 상황이었어요. 민간 자주 교류가 코앞에 닥쳤다고 느낄 때였고요. 정부가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 북한 빌미로 공안사건을 만드는 게 되풀이되잖아. 그게 한국 민주주의가 선진화되는데 걸림돌이라고 보고 북한 문제를 '저지르면서' 가자고 생각한거지. 북한 문제가 대중들에게 일상화되면 공안당국이 사건 조작하기 쉽지 않으니까. 정치인들 맡겨놓으면 그저 활용할 뿐이잖아요. '문목'과 나는 서로 알고 있었어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북한 가는 걸로."

- 문 목사님의 방북과 작가님의 방북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문화예술교류'라는 비정치적 화두를 들고 간 거예요. 초청장도 '북한문학예술동맹 초청장'으로 달라고 했어요. 조선노동당의 초청장이 아니고요. 처음엔 일본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그랬는데, 내가 분리하자고 했어요. '문목'은 민통련 대표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협상을 위해 가는 거고, 나는 문화 쪽을 담당해야 하니까. 나중에 조사받을 때도 이제 그게 염려가 되어서 나는 도이 다카코 일본 사회장 위원장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하고, '문목'은 정경모 선생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초청장을 받고 들어가는 걸로 정리하게 된 겁니다."

- 방북하기 전부터 친하셨나요? 나이가 차이가 좀 있으신데

"재야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걸핏하면 만나요. 사건 현장에서도 만나고, 일 터지면 만나고 그랬어요. 기억나는 게 함평고구마 사건 (1978년, 전남 함평군 농협이 고구마 매수 약속을 어겨 농민들이 이에 맞서 투쟁한 일)이 일어나서 북동성당에서 농성이 일어났어. 내가 서울로 가서 원로들을 모셔왔는데, 시외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문목'이 나타났어. 이제 경찰에게 포위당해있으니까 남의 집 마당을 통해 담을 뛰어넘었거든.

그런데 내가 손을 잡으니까 늙은 목사가 담을 가뿐하게 뛰어넘는거야. 내가 그래서 '왕년에 도둑질 좀 한 거 아니요' 농을 던지니까 '이런걸 요새 많이 해서 담 잘 넘어' 이러는 거야 (웃음) 거기서 단식 농성 성명서도 내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친해졌죠. 문정현, 백기완, 문익환 등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었고 한 식구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서로 분야가 다르고 밥 먹는 데도 다른데 그래도 일 생기면 모였어요.

- 엄혹했던 시절 아닌가. 문 목사님이나 작가님 둘 다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문 목사는 저보다 더 낙천적이었어요. 자유분방하고. 걱정하거나 시름에 빠지는 거를 못 봤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를 줬어요. 연설할 때도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했어요. '어린이같은 카리스마'가 있었어요.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랑하고. 참 어린이 같은 심성을 가진 분이었죠. 근엄한 목사님이 아니라 시인이잖아.

한편으로는 윤동주, 송몽규, 장준하 같은 죽은 친구에 대한 부담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 자기 지난 시절을 얘기할 때도 "장준하의 죽음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내가 이렇게 운동 일선에서 하지 않고 어딘가 작은 교회 하나 맡아서 조용히 살고 있었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

- 문 목사는 북한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에도 여유 있게 시를 읊으셨다고 하던데

"돌아가기 전날 만나려고 숙소에 찾아갔더니 대동강 정자 위에 앉아있어요. '황형 어서와 시 한 수를 썼어' 이래서 보여달라니까, 읽어주겠다면서 시 낭송을 하는 거야. 속으로 '이 양반 정말 태평이네, 돌아가는 길이 구속의 길인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또 같이 간 정경모 선생의 방에 가니까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으면서 "꼭 우리 (상황) 같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서정적인 여유를 보면서 '야 이런 사람들이 방북을 하고 이런 사람들이 통일을 논하고 이러는구나' 생각하며 아주 잔잔한 감동을 받았어요."

문익환 목사의 '현실적' 통일안, 김일성 설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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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작가가 30일 오후 경기도 일산서구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젊은이들 사이에선 단일팀 반대하는 여론이 높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지난 10여 년 동안 보수 정부가 선전한 게 효과를 보는 거예요. 분단이 당연한 거고, 통일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선전했다. 젊은 세대들 봤을 때 나는 요새 통일이라는 말 쓰지도 말자고 한다”라며 “통일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오염됐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며 통일문제에 접근한 게 아니라 그때그때 마케팅하듯이 써먹는다. 통일의 '통'자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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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만큼이나 두 분의 통일관도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문 목사의 생각이죠. 문 목사는 통일 중간에 과도적 기간이 있어야 한다. 남한이 과도적 기간이 없으면 대중을 납득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게 우리로서는 국가연합제이고요. 북에서는 낮은 단계라는 구절을 넣었고, 공존하는 기간을 길게 갖는다고 해서 느슨한 연방제예요. 이건 재야에서 주로 이야기했던 거예요. 김 주석의 생각을 바꾸는데도 문 목사님이 일조한 거예요."

황 작가의 자서전 <수인>에서는 이 부분이 조금 더 자세히 기록돼 있다.

"문익환 목사는 조평통의 초대 손님으로 김일성 주석과 독대하여 북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대하여 일종의 정치협상회의를 한 것으로 안다.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남한의 재야 민간 통일 운동권과 통일론의 실천 방향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의미였다. 사실 노태우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김일성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의한 응답이었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재야 통일 운동권은 당시 남측 대통령인 노태우의 통일방안을 반대하지 않으며 북측의 고려연방제 안이 현실적으로 몇 가지 어려운 장애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행기의 단계를 거쳐야 함을 설득했다"(<수인 1>, 황석영, 197p)

당시 문익환 목사와 남쪽 재야의 통일안은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두 번째 항인 "남과 북은 나라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조항으로 이어진다.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에 간 두 사람에 대해서 비현실적이거나 북한에 치우쳐져 있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소위 '통일 운동권'보다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정부와 언제든 협조할 수도 있다는 '열린 자세'를 지향했다. 오히려 환상 없이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에, 급진적이고 이념화된 자세가 통일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후 통일 운동에 대해선 비판적이시죠?

"편향이 심했죠. 난 갔다 왔으니까 알잖아. 통일 운동이 정부와 협조하지 않았어요. 비합법으로 운동의 영역을 넓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부의 앞잡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에 통일 운동이 대중화되지 못하고 이념화되면서 망해버렸어요. 계속 탄압받고 또 대중하고 분리되면서, 대중의 호응을 못 받았어요. 통일운동은 합법적으로 정부와 협의해가면서 정부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했어야죠.

나도 나중에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서 손을 떼잖아요. 남한에게 도움이 안 돼. 명분이 남아있지 않아요. 문 목사도 급진적인 사람들이 몰아세웠어요. 통일운동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다행히 진보세력이 민주 정부를 만들면서 정부가 앞장서서 훨씬 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면서 통일 운동의 명맥이 이어지게 된 거죠."

<수인>에서도 범민련을 중심으로 한 통일 운동에 대해서 두 사람의 우려가 비슷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93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3.1절 특별 사면으로 전화를 한 후 황석영 작가가 전화를 건다. 황 작가가 "범민련은 우리의 생각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간 것 같아서 내가 할 역할이 없어 보였다"고 말하자, 문 목사는 "통일 운동은 원래 대중운동이 되어야 하고 흥겨운 잔치여야 하는데 너무 활동가들 중심으로 전위적으로 가서는 안 될 것"이라며 염려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황 작가는 "서로의 의견이 같음을 확인했다"고 서술했다.

문익환의 꿈을 잇는 황석영

- 문익환 목사 '박물관 설립'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의리상 그렇잖아. 공범이고 동지고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능력이 안 되니까 조금 냈어요."

- 자서전에서도 수사관 앞에서 "주범보다는 종범이 형을 덜 받는게 아니오"라며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 나와요. 그렇다면 주범이...

"주범은 문 목사지 하하하하하. 그런데 내가 (감옥에서) 더 살았잖아"

- 동지이자 공범으로서 문익환 목사에 대해 평가하자면?

"통일의 개척자입니다. 김구 이래 처음으로 김일성 주석과 협상을 한 거잖아요. 역사적인 업적이고 그 이후 주도적인 민간교류가 신뢰의 바탕이 되어 그 뒤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서 남북협상을 순조롭게 이룰 수 있었던 거죠. 문 목사님이 남기신 발자국은 우리 통일 운동사에 지워지지 않은 크나큰 흔적입니다. 저도 70 중반이 됐는데 문 목사님의 뒤를 쫓아 죽을 때까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신가요?

"그동안 한국문학이 세계 문학에 동참하는 경험이 있었는데, 이제는 세계의 작가들, 예술인들과 더불어 한반도의 평화를 이끌어내는 글로벌한 연대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방북 당시 40대였던 그는 어느덧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 (만 75세)가 됐다. 한국을 떠나 살려고 했던 황 작가를 '촛불 혁명'이 만든 희망이 붙잡았다.

문익환이 장준하의 꿈을 이어간 것처럼, 황석영은 문익환의 꿈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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