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4

리종만 《민족이 안겨살 통일조국의 품》(4)



《민족이 안겨살 통일조국의 품》(4)
주체 105(2016)년 8월 22일 《통일의 메아리》


《민족이 안겨살 통일조국의 품》(4)


겨레의 목소리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전시간에 이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였으며 우리 공화국의 첫 조국통일상수상자의 한사람이였던 리종만선생의 아들 리형우가 주체99(2010)년 8월에 쓴 글 《민족이 안겨살 통일조국의 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네번째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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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월 아버지가 로환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시였다. 조국전선서기국의 책임일군을 부르신 수령님께서는 아버지의 한생을 값높이 평가해주시며 리종만선생이 그렇게도 념원하던 조국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간것이 가슴아프다고, 리종만선생의 장례를 잘해주자고,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고 신문과 방송에 부고도 내도록 하자고 교시하시였다.

이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날로 더욱 뜨거워만지는것이 통일애국인사들에 대한 절세위인들의 사랑이고 믿음이다.

어버이수령님 그대로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애국렬사릉이 꾸려졌을 때에 아버지를 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지금도 추석날에 아버지의 묘소를 찾을 때면 절세위인들의 한량없는 사랑과 믿음에 대한 가지가지의 일들이 떠올라 눈굽이 젖어든다.

언제인가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해방을 전후하여 남조선에서 아버지가 당한 기업활동의 좌절을 두고 《금광왕 리종만이 스물아홉번의 실패로 인생이 끝났다.》고 전한바 있다.

아마도 아버지가 남조선에 그냥 남아 기업을 하였더라면 십중팔구 그들이 말하는대로 《실패한 인생》으로 생을 마감하였을것이다.

그러나 공화국의 품에 안겼기에 절세위인들의 각별한 사랑속에 통일애국의 값높은 삶을 누릴수 있었고 93살까지 로당익장하면서 조국통일상수상자, 통일애국인사로 민족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였다. 위인을 모시여 아버지의 삶이 성공한 인생으로 되고 우리 자식들도 보람찬 애국의 삶을 살아올수 있었다.

아버지와 서울에서 헤여졌던 내가 어버이수령님의 다심한 은정속에 혈육의 상봉을 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후더워진다.

주체45(1956)년 5월 모란봉극장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제시하신 조국의 평화적통일방안을 지지하는 제44차 조국전선중앙위원회 회의가 있었다. 휴식시간에 아버지를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막내인 내가 지난 전쟁시기 의용군으로 들어왔는데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는 사연을 들으시고 아들을 만나게 해주자고 하시며 민족보위상에게 리종만선생의 아들을 곧 제대시켜 공부시키도록 해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은혜로운 사랑속에 나는 아버지와 뜻깊은 상봉을 하였으며 제대되여 로동학원을 거쳐 건설대학을 졸업하고 도시건설일군으로 일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이 아들을 아버지와 만나게 해주시였다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생사를 모르던 누님을 찾아주시였다. 당국의 박해를 받아 남조선땅을 등지고 동남아시아를 걸쳐 카나다에서 살고있던 누님(리남순)은 근 30년만에 조국에 와서 아버지와 감격적으로 상봉하였다. 친부모의 정을 모르고 이역만리에서 살아가던 누님은 장군님 은덕으로 아버지와 감격적으로 상봉하고 너무도 고마와 그이께 감사의 큰절을 삼가 올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누님이 방문기간 조국의 여러곳을 돌아보도록 세심한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그것은 타향살이설음속에 한생을 살아온 해외동포들의 가슴속에 조국을 새겨주시고 깊고깊은 혈육의 정을 안겨주시는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의 한없는 은정이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누님이 조국을 방문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도록 은정깊은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아버지의 묘비를 붙안고 흐느껴울면서 누님은 《아버지! 아버지가 안겨산 품이 얼마나 고마운 품인가를 잘 알았어요. 아버지처럼 열심히 통일애국에 살겠어요.》라고 말하였다.

조국해방 50돐 민족통일대축전에 해외대표로 참가하였던 누님은 3년전에도 딸과 함께 조국을 방문하여 통일애국의 길을 끝까지 걸을것이라고 말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아래 6.15자주통일시대를 펼쳐주시여 주체93(2004)년에 나는 금강산에서 반세기이상 헤여졌던 셋째형님과 조카를 만날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북과 남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힘껏 노력할것을 다짐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6(2007)년 1월에 세상을 떠난지 오랜 아버지의 서거 30돐 추모모임을 애국렬사릉에서 가지도록 하는 크나큰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뜻깊은 조국통일상이 제정된 때로부터 20년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처럼 이 값높은 칭호의 수상자로 되였던가. 그 많고많은 수상자들중에는 남쪽에서 살다가 공화국의 품에 안겨 통일애국의 삶을 산 사람들도 있고 멀리 해외에서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투쟁한 동포인사들도 있다.

소속도 직업도 살아온 경력도 서로 다른 민족의 각이한 구성원들이 조국통일상수상자라는 값높은 칭호속에 오늘도 생을 빛내이고있는것은 믿어주고 아껴주고 내세워주는 위인의 넓고 따사로운 품이 있기때문이다.

그 품은 통일애국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과거경력이 어떠하든 다 안아주고 내세워주는 위대한 애국의 품이며 온 겨레가 안겨살 통일조국의 품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한 출판물에 낸 수기에서 이렇게 쓴바 있다.

《가슴속에 더운 피가 맥박치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라나서야 한다. 나는 이 길이야말로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한 길이며 또 이 길에 개인의 행복도 영예도 있다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것은 나의 어제와 오늘이 실증해주고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말은 곡절많은 90평생에 찾은 귀중한 진리로서 우리 자식들에게만이 아니라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에게 전하는 당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 우리 온 가족은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위업을 이어나가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더 잘 받들어모시고 강성국가건설과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나갈 마음을 굳게 가다듬는다.



지금까지 네번에 걸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였으며 첫 조국통일상수상자의 한사람이였던 리종만선생의 아들 리형우가 주체99(2010)년 8월에 쓴 글 《민족이 안겨살 통일조국의 품》을 전부 보내드렸습니다.

겨레의 목소리 여기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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