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4
‘북한학 박사’ 탈북여성 김영희 씨
‘북한학 박사’ 탈북여성 김영희 씨
‘북한학 박사’ 탈북여성 김영희 씨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3-04-01
K040113FE-SI-FV.mp3
00:00/00:00
지난 2월 동국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탈북여성 김영희씨. 사진-김영희 씨 제공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북한에서 경제관리 일꾼들을 양성하는 정준택원산경제대학 출신의 탈북여성 김영희씨가
지난 2월 한국 동국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가 됐습니다.
한국정책금융공사라는 국책 금융기관에서 북한경제를 연구하는 직장인이자, 아들 둘과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주부이면서도 박사과정 공부를 하는 학생으로서의 3중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 낸 결과입니다. 평소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는 신념’으로 탈북과정과 한국사회 정착의 어려움을 극복한 전형적인 억척 북녀 김영희 박사를 만나 봤습니다.
전수일: 학위 논문이 북한사회 신체 왜소에 관한 연구인데요, 논문 내용을 저희 청취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김영희 박사: 북한 주민의 신체왜소가 어떻게 발생했고 어떻게 지속됐고 그 원인은 무언지를 논문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시기 식량난으로 신체왜소가 사회 전반에 확산됐는데
그 원인도 논문에서 밝혔습니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니 식량 부족도 원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제 논문에서는 그걸 저소비의식이라고 지칭했는데 식량이 부족한 환경에 북한당국이 어떻게 적응해 왔는가하는 문제와 연관된 것입이다. 당국은 식량난이 계속될 것은 아니고 어느 시점에서는 해결이 된다는 자긍심을 주민에게 심어 주었는데 이것이 저소비의식의 바탕입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식량 공급로는 배급을 통한 것과 시장을 통한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이걸 식품획득지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당국이 시장에서의 식품획득지위를 박탈함으로써 신체왜소가 90년대 중반 확산됐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도 이런 세가지 원인에 따른 것으로 봤습니다.
전: 시장이라면 장마당이겠죠?
김: 그렇습니다.
전: 그러니까 장마당 통제에 따른 식량 획득의 용이 여부도 지적하셨다는 얘긴가요?
김: 네.
전: 한국에서 사신지도 10여년이 넘었는데 왜 하필 북한사회의 신체왜소라는 문제에 논문 주제를 잡았는지 궁금합니다.
김: 신체왜소라는 문제는 일반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와 연관돼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대체로 식량부족과 그 문제를 연관시키지만 저는 그 문제의 뿌리가 정책적인 데 있다는 것으로 접근하고 싶었습니다. 제 논문에서는 간략해 언급됐습니다만 이 문제가 정책적 권력적인 문제라는 걸 좀 더 밝혀서 북한사회의 신체왜소가 극복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차후에도 계속될 것인지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이 문제가 저희 가족을 포함해 여기 한국에 오신 탈북자들 그리고 북한 주민이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현상인데 이걸 방치할 경우 향후에는 신장과 체중이 감소하는 신체왜소뿐만 아니라 지적능력의 하락으로도 갈 수 있고 나아가서는 국가경쟁력 감소로도 이어질 수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라서 이 분야에 접근하게 됐습니다.
전: 이 문제는 단순히 식량부족에서 기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북한 당국의 정책 자체가 바뀌지 않을 경우에는 신체왜소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이네요.
김: 네. 그렇습니다.
전: 김 박사님 직장 얘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한국정책금융공사 조사연구실의 수석연구원이신데 조사연구실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죠.
김: 조사연구실에는 4개팀이 있습니다. 남한의 산업을 조사분석하는 팀이 있고 설비조사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금융과 경제를 분석연구하는 팀이 있고 제가 소속된 북한경제팀이 있습니다. 북한경제팀은 북한의 경제와 산업 연구 그리고 북한의 인프라, 기업개발, 통일 동독의 사례, 남북경제협력 특히 개성공단 사례 등을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희 정책금융공사가 과거 한국사회의 산업개발 인프라 개발에 대한 경험이 있고 현재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이라든가 기업개발 등에 자금지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통일이 된 다음에 북한의 인프라, 사회기반시설, 기업개발, 산업개발 쪽에도 금융지원하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관련 조사보고서를 현업에 지원하는 업무도 보고 있습니다.
전: 인프라, 즉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고 계신데 북한 내의 기반시설이라면 도로 항만 철도 등의 여러 시설이 많이 노후, 낙후돼 있겠죠?
김: 네. 그렇습니다.
전: 그런 걸 개발하고 투자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들텐데요.
김: 그렇습니다.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철도 항만 도로 전력 상하수도 등 기본 인프라의 현재 실태가 어떤지 그리고 어느 부분부터 개발을 해야 하는지 또 그러려면 비용은 얼마나 듫 것인지 등데 이런 것들은 통일 이후에 이뤄지는 것이지요. 한국 정부가 1, 2년전에 이와 관련해 연구를 한 것이 있는데 만약 2030년에 통일이 될 경우 한 해동안에만도 55조의 통일비용이 든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희는 통일비용쪽 보다는 개발쪽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그래서 자금조달 부분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 굉장히 중요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반도에서 남북간 교류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통일 이후 한반도 살림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이니까요.
이번엔 탈북자 문제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김영희 박사님도 탈북해서 2002년도에 한국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북한에서 전공하셨던 회계학이나 경제 부문과 유사한 곳에 취업을 하셨습니다.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인 산업은행에 들어가셨는데요 그런데 일반 탈북자들의 경우는 노동이나 단순 노무직을 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 정착에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김 박사님도 한국내 탈북자들의 정착에 관심이 많고 취업문제에 언급도 많이 하시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2만5천명의 큰 사회로 발전한 탈북자사회가 한국사회에 적응하는데는 문화적 충격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을텐데요 이들의 정착 방법과 당국의 정착 정책에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김: 제 생각에 이만하면 탈북자 정책은 잘 돼있다고 봅니다. 교육정책이나 지역사회 적응을 지원하는 정책, 그리고 기업 지원정책 등을 보면 과거에 비해 세밀하게 잘 돼있습니다. 그런데 정책 자체보다는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정책 수행자들은 탈북자들이 원하는 일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지원을 펼쳐야 하는데 대체로 이벤트적-행사성 지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부에서는 탈북자 지원 예산은 쓰고 있는데 막상 수혜자들에게는 혜택이 닿지 않는 현실- 마치 물과 기름이 따로 노는 것 같은 현실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탈북자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김: 예를 들어, 취업지원이라고 하면 취업장려금제도나 직업훈련제도가 있는데요 이런 건 잘 돼있습니다. 노동부를 통한 이런 정부차원의 지원뿐만 아니라 민간단체를 통한 지원도 있습니다. 그런데 민간단체를 통한 지원은 대체로 이력서 작성방법이나 취업을 잘하기 위한 방법 등에 대한 교육입니다. 근데 이런 교육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취업이 절실한 수요자들이어야 할 텐데 취업행사의 대상을 보면 나이 60 넘은 어르신들이나 집을 지켜야 하는 가정주부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죠. 행사를 위한 행사성 교육이 되다보니 진짜 교육이 필요한 30, 40대 혹은 50대 이전의 탈북자들, 그것도 하나원을 나온 지 3년 미만의 사람들은 정작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죠.
전: 취업박람회나 취업행사를 할 때 30, 40대의 탈북자들은 가지 않습니까?
김: 그 취업행사가 자기와 연관이 되든가 이득이 된다면 가겠죠. 하지만 그런 취업행사가 대체로 취업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가서 서너시간씩 앉아 있어도 실제 취업에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전: 탈북자 사회, 특히 청년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20, 30대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김: 남한사회에 적응하려면 유념할 일들이 여러가지입니다. 우선 나를 완전히 바꿔야 하고 그리고 나를 무한히 낮춰야 하고 확실한 꿈을 가져야 하고 그 꿈에 도전하는 준비를 해야하고… 하지만 제 경험상 그 가운데 한 가지만 꼽으라면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간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무한히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합니다. 그래서 준비된 사람은 언젠가 기회가 올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까요.
전: 김 박사님 얘기를 하자면 가족 얘기를 뺄 수가 없겠죠. 부군인 김병욱씨는 2년전에 먼저 북한학 박사학위를 따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둘을 두고 계신데요, 모두 엄마 아빠를 닮아서 명석하고 공부를 잘 한다고 들었습니다.
김: 우리 애들은 8살과 6살 때 북한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10대 중반에 오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남한사회 적응이 쉬운 편이었습니다. 어투도 금세 서울 말투로 바뀌었고 학교생활 적응에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때부터 학급회장을 쭉 해왔습니다. 자신감을 더 갖게 됐지요. 하지만 작은 아이는 북한에서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왔기 때문에 남한사회 적응하는데 조금 힘들었습니다. 남들은 한글도 읽고 영어도 잘하고 하는데 한글을 몰라 많이 뒤쳐지기도 했죠. 그러나 3, 4학년이 되는 어느 시점이 되어서는 부쩍 공부 실력이 늘었습니다. 지금은 각각 고등학교 3학년, 1학년인데요 둘 다 무리없이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전: 큰 아이가 고3이면 이제 곧 대학을 가야 할텐데 진로나 희망하는 전공은 무엇인가요?
김: 현재 이과인데 기계공학을 전공하겠다고 합니다. 꿈은 카이스트나 포항공대라고 하는데 두고 봐야죠.
전: 일하시랴 공부하시랴 바쁘셨을 텐데 남편 김병욱 박사님의 외조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김: 원래 북한 남자들은 가부장적입니다. 그래서 남편도 처음에는 집안 일을 잘 안 도와 줬었습니다. 근데 제가 직장생활하면서 공부도 해야하고 집안 일도 하는 등 2중3중의 일을 하자니 어려웠습니다. 북한 같으면 그래도 당연히 여자가 다 해야 할터이지만 남편이 많이 도와 주었고 지금도 많이 도와 주고 있습니다. 특히 학교 선배이다 보니 논문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찾는데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 자료나 우리 한민족의 신장 변화라든가 동독관련 자료 등을 찾는데 큰 힘이 됐습니다. 이런 자료를 찾으려면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하거든요. 가끔 분석이 달라서 싸우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우리 부부는 같이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공유하는 부분도 많고 해서 다른 분들보다 서로 도움이 되고 행복합니다.
전: 학자적인 논쟁이야 얼마든지 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김: 그렇죠.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북한에서 경제관리 일꾼들을 양성하는 정준택원산경제대학 출신으로
한국 입국 11년만인 올해 2월 한국 동국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딴 한국정책금융공사의 김영희 북한경제팀장을 만나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