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인식
“너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데,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일 뿐이다.”
이게 과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이가 자신을 인터뷰 하러 온 젊은 조선사 연구자들한테 한 얘기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서사를 주입받은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이런 발화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우리의 소망과 달리 러일전쟁 이후부터 형성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꽤나 긴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런 인식은 일본 우익들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동아시아 담론을 선호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애용하는 다케우치 요시미, 일본 리버럴 좌파의 거두 마루야마 마사오 등의 인식에서 “조선”이라는 물음이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와 같은 보편적인 역사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양선의 등장으로 막부가 위기에 처하고 일본국은 식민화의 위기를 겪는다. 일본을, 더 나아가 “동아시아”를 구하기 위한 ‘대의’로 뭉친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들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한다. 메이지유신의 결과로 집권한 이들은 근대국가에 걸맞는 비교적 “건강한”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 덕에 일본은 “건강한” 근대국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제국은 “타락”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 15년 전쟁과 같은 무분별한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었다. 이 “타락한” 쇼와의 시대에서 일본은 ‘강대국 미국’에게 패배하였고, 심지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을 맞은 국가가 되었다. “원폭 피해자”인 일본은 평화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일본국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사랑하며 그를 지키기 위해 평화헌법을 수호한다.
이러한 서사 속에 “아시아”가 끼어들 여지는 없으며, 하물며 “식민지 조선”은 더욱 그러하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고약하기 그지없는 역사인식이다. 여담이지만 지인이 일본의 러일전쟁 담론을 분석한 적이 있는데 “대한제국”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게 조선이란 무슨 의미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와다 하루키도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참고해보시길 바란다. 아무튼 일본국은 러일전쟁 이후로 이러한 인식을 적어도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전제로 외교활동을 전개해왔다. 지난 역사 속에서 이러한 전제를 뒤흔든 적은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몇 번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은 한국 정부, 특히 우익세력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인식의 형성에 어느 정도 관여를 해왔으며 그것의 결론이 일부에서 소위 ‘1965년 체제’라고 하는 한일관계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어왔다. 정치적으로는 ‘친일파’라 매도당하지만 이승만은 확실히 독립운동가였으며, 그런 경력은 그의 정치적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성을 지니고 있었다. 실상 그가 친일파를 손쉽게 등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그가 무슨 친일파라 그런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신의 위상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집권기동안 끊임없이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신의 업적을 영화 등으로 선전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로서는 이러한 일본의 인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반면 박정희는 그 자신이 일본군 장교를 했던 경험도 있고, 메이지유신에 대한 동경도 갖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이승만에 비해 좀 더 융통성 있게 대응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박정희는 1965년에 “결단”을 내렸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박정희가 비판받을 지점이 생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이 정권을 잡았어도 상황은 비슷했을 거라 생각한다. 일본국은 한국을 식민지배했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한국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 통렬한 자기반성과 정치세력의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 인식 전체를 바꾸는 일을 지금 정대협 등의 한국인들은 한국 정부에게 요구하고 있다. 나로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로서는 화가 나는 일이지만 저 역사인식은 전후에 미국이 만든 “국제질서”를 이루는 한 축으로써의 일본을 지탱하는 것이기에 미국의 지지도 받고 있다. 현재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의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일본국에게 어느 정도 자율성을 주려고 우익들에게 여지를 주는 것인데, 이번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 편을 든 것은 냉정하게 말해 무슨 미국이 인권의식이 높고 뭐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일본 우익들이 위안부를 빌미로 미국이 전후에 부여한 국제질서 자체를 부정하려 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기 위함이라 보는 것이 맞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에게 한계선을 정해줄 정치적 필요가 있으며, 마침 위안부 문제가 미국이 내세우는 인권 등에도 부합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미국이 만들어놓은 질서와 그에 부합하는 일본의 인식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게 아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와 진보파는 1965년 체제라는 판 자체를 바꾸고 싶어하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사실 이 분들은 미국이 만든 질서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2차세계대전에서 “상징적”인 “승전국”의 지위를 원한다. 일본국을 패퇴시키는 독립군을 꿈꾸고 있는 것인데, 역사속에 그러한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현실적으로 미국이 보기에 우리는 일본의 협력국이었으며 그렇기에 우리를 포로 취급했던 것이다. 실제 전투를 했던 이들이 공산주의자였다 이런 문제도 있지만. 어찌됐든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질서에 좋든 싫든 포섭되었으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축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성취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선조들과 약자들의 피와 땀을 팔아먹었다. 경제개발과 민주화 같은 좋은 성취는 우리의 덕이고, 나쁜 건 일본제국주의자•친일파 탓이라고 하는 건 지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행동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대화가 되는 일본 리버럴, 좌익 계열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융통성 있는 제스처로 일본국 내에서 친한파의 영향력이 인권이라든지 이런 대의로 통하게 만들어야지 민족주의적으로 나가봐야 저쪽 내셔널리즘도 자극되고 해결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역사 또한 통렬하게 반성하고 피해자 분들에게 더 많은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위안부 문제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입장은 이미 20여년 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증언을 이끌어낸 한 연구자 분이 한탄하듯이 초기 증언의 그 다양성은 사라져버리고 어쩌면 그리 똑같은 증언들만 남게 되었는가? 반성할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한국 내에서 얼마나 많은 논의와 토론이 이뤄졌는지 생각해보시라. 우리 내부의 민주주의 문제와 일본 내부의 민주주의 문제와 함께 연대하면서 나아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우리의 입장이 무조건적으로 "대의"고 "정의"라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이번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협상에 대해 비판하기란 너무나 쉽다. 나 또한 불만이 많다. 이것이 어떻게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위안부 문제를 끝내기는 해야 하겠으나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역사에 대해 진실되게 직시한다면 박근혜 정부를 단순하게 “친일파”니 뭐니 하면서 비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사는 선악의 대결이라기보다 오히려 악이 된 선들끼리의 대결에 가깝다. 그렇기에 역사는 정의가 승리해온 “천상의 왕국”의 기록이 아니라 더럽고 추잡한 잔혹동화에 가까운 것이다. 거의 모든 분들이 박근혜에게 병신년이니 친일파니 아비랑 똑같느니 뭐니 이런 얘기들을 한다. 이런 인식들이야말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이번을 포인트로 삼아 더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s 다 미제국주의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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