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학전문가 한호석소장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
한호석 소장의 최근 평론 <촛불바다가 교역주권과 국민건강 지킨다> 외 2편
이필완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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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6월 27일 (금) 06:14:42
최종편집 : 2008년 06월 27일 (금) 06:57:36 [조회수 : 9909]
그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UMC 목회과정을 밟다가 재미한국청년연합회 활동에 진력하면서 친북인사로 낙인 찍혔고 결국은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이후 유니온신학교에서 해방신학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남미의 민중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80년대 레이건대통령 시절 구 소련과의 대결구도가 굳어지면서 중남미 민중을 배후에서 탄압 조정하던 시절에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진보운동이 결집되면서 해방신학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는 자양분 공급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중남미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였다..
PHD 박사 학위를 따러 미국에 갔지만 다른 사람과는 달리 학술적 주제가 아니라 현장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소장의 신학교 주임교수는 흑인신학을 주창한 제임스 콘이었는 데 남미 해방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하바나에서 쿠바의 카스트로가 눈물을 흘리며 읽은 책으로 소개한, 중국에서 활동했던 김산(장지락)의 일대기를 쓴 뉴욕 1942년 판 린 웨일즈의 '송오프아리랑'을 접하게 되었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변선환, 서남동의 한국적 토착화신학만 알고 있었고 기껏 민중신학의 껍데기만 접하면서 안병무, 서남동 등의 이름 석자만 알고만 있었을 뿐 학문적 주제는 아니었던 상황에서 이미 이 땅에 오래전부터 장지락 같은 인사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면서 무지를 절감하며 좌파들의 기록을 연구하게 되었고 한국의 진보운동사에 투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처음엔 미주 이민교회에서 목회활동도 시도하였지만 미주이민교회의 실상은 한국보다도 더 비참하였고 미주이민교회의 실상을 부끄럽게 느끼다가 결국은 점점 교회에 등을 지게 되었고 지금은 교회나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없이 그가 이름 지은 통일학전문가로 활동 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6.16 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풀렸으니 예전처럼 북한과 한국을 연견하는 끈 역할을 할 것도 없단다. 한소장은 1995년 뉴욕에 본격적으로 통일학연구소를 내고 현장을 누비면서 정치환경에 관한 평론을 쓰고 국내외를 누비면서 강연활동을 한다.
어느덧 초로에 접어든 한호석소장은 남북의 엇갈린 정치환경으로 많이 외로웠던 시절을 숨기지 않았으며 최근 시청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촛불문화제를 보면서 젊을 때의 쓰라린 기억들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할 얘기는 더 많았고 교회 떠나게 된 구체적 이유를 다 듣지도 못했지만 더 캐어묻기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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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소장은 일단 7월 1일 출국한다. 부모님이 연로하니 한해에 한두차례씩은 꼭 고국을 찾고 있단다. 다음에 옛적 친구들과 함께 좀 더 편히 만날 것을 기약하며 점심시간을 이용한 짧은 인터뷰를 그렇게 마쳤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가 최근 통일뉴스에 기고한 글을 허락얻어 당당뉴스에 전재한다.
▲ 당당뉴스 이필완목사의 한호석소장 인터뷰는 인사동 누리찻집에서 이뤄졌다 ⓒ 송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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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완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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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6월 27일 (금) 06:14:42
최종편집 : 2008년 06월 27일 (금) 06:57:36 [조회수 : 9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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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 출신에 필자와 같은 74학번 동기인 그가 감신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 유학간 것은 1981년, 이후 친북 통일전문가로 알려진 84년부터 94년까지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에 이르러서야 겨우 문익환 목사 10주기 때 고국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그때만 해도 감신대 주변의 동문들이 그를 위한 환영회룰 열어주기도 했었단다.
▲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 송양현
한호석소장은 최근엔 통일뉴스와 민중의소리에 횔발한 기고 활동을 하면서 지난 2월에는 21세기코리아연구소 주최로 NCCK 강당에서 열린 세미나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은 미국이 직접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것 밖에 없다'고 진단했었다.
그의 진단대로 일까! 최근 북미관계는 급속히 발전하면서 6월 27일 핵신고를 하였고 미국도 북한을 테러국가 지정을 해제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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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 출신에 필자와 같은 74학번 동기인 그가 감신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 유학간 것은 1981년, 이후 친북 통일전문가로 알려진 84년부터 94년까지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에 이르러서야 겨우 문익환 목사 10주기 때 고국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그때만 해도 감신대 주변의 동문들이 그를 위한 환영회룰 열어주기도 했었단다.
▲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 송양현
한호석소장은 최근엔 통일뉴스와 민중의소리에 횔발한 기고 활동을 하면서 지난 2월에는 21세기코리아연구소 주최로 NCCK 강당에서 열린 세미나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은 미국이 직접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것 밖에 없다'고 진단했었다.
그의 진단대로 일까! 최근 북미관계는 급속히 발전하면서 6월 27일 핵신고를 하였고 미국도 북한을 테러국가 지정을 해제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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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UMC 목회과정을 밟다가 재미한국청년연합회 활동에 진력하면서 친북인사로 낙인 찍혔고 결국은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이후 유니온신학교에서 해방신학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남미의 민중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80년대 레이건대통령 시절 구 소련과의 대결구도가 굳어지면서 중남미 민중을 배후에서 탄압 조정하던 시절에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진보운동이 결집되면서 해방신학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는 자양분 공급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중남미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였다..
PHD 박사 학위를 따러 미국에 갔지만 다른 사람과는 달리 학술적 주제가 아니라 현장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소장의 신학교 주임교수는 흑인신학을 주창한 제임스 콘이었는 데 남미 해방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하바나에서 쿠바의 카스트로가 눈물을 흘리며 읽은 책으로 소개한, 중국에서 활동했던 김산(장지락)의 일대기를 쓴 뉴욕 1942년 판 린 웨일즈의 '송오프아리랑'을 접하게 되었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변선환, 서남동의 한국적 토착화신학만 알고 있었고 기껏 민중신학의 껍데기만 접하면서 안병무, 서남동 등의 이름 석자만 알고만 있었을 뿐 학문적 주제는 아니었던 상황에서 이미 이 땅에 오래전부터 장지락 같은 인사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면서 무지를 절감하며 좌파들의 기록을 연구하게 되었고 한국의 진보운동사에 투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처음엔 미주 이민교회에서 목회활동도 시도하였지만 미주이민교회의 실상은 한국보다도 더 비참하였고 미주이민교회의 실상을 부끄럽게 느끼다가 결국은 점점 교회에 등을 지게 되었고 지금은 교회나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없이 그가 이름 지은 통일학전문가로 활동 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6.16 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풀렸으니 예전처럼 북한과 한국을 연견하는 끈 역할을 할 것도 없단다. 한소장은 1995년 뉴욕에 본격적으로 통일학연구소를 내고 현장을 누비면서 정치환경에 관한 평론을 쓰고 국내외를 누비면서 강연활동을 한다.
어느덧 초로에 접어든 한호석소장은 남북의 엇갈린 정치환경으로 많이 외로웠던 시절을 숨기지 않았으며 최근 시청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촛불문화제를 보면서 젊을 때의 쓰라린 기억들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할 얘기는 더 많았고 교회 떠나게 된 구체적 이유를 다 듣지도 못했지만 더 캐어묻기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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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소장은 일단 7월 1일 출국한다. 부모님이 연로하니 한해에 한두차례씩은 꼭 고국을 찾고 있단다. 다음에 옛적 친구들과 함께 좀 더 편히 만날 것을 기약하며 점심시간을 이용한 짧은 인터뷰를 그렇게 마쳤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가 최근 통일뉴스에 기고한 글을 허락얻어 당당뉴스에 전재한다.
▲ 당당뉴스 이필완목사의 한호석소장 인터뷰는 인사동 누리찻집에서 이뤄졌다 ⓒ 송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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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진보담론 (15) 2008년 06월 14일
한호석 (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도덕적 승리와 허약한 정치공세
2008년 5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40일 동안 이 나라의 광장과 거리에서,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난 대사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토론이 분분하다. 그러한 토론들 가운데서 돋보이는 것은, 분노의 광장, 저항의 거리, 소통의 인터넷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대사변을 국민대중의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으로 한정하여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론적 해명에서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이 땅의 국민대중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운집하여 항의를 표명하였고 인터넷 공간에서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였다는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에서 출발하여 저항운동으로 나아간 역동적인 발전과정이다. 이 글에서는 대사변을 ‘40일 저항운동’이라 부른다.
‘40일 저항운동’이 남긴 성과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운동이 거둔 도덕적 승리(moral victory)이다. 도덕적 승리란 시위군중이 경찰의 야만적인 강제진압과 강제해산에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도덕적으로 우위에 선 것을 뜻한다. 아닌게 아니라, 국민대중이 밝힌 촛불은 저항운동 첫날부터 도덕적 승리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40일 저항운동’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귀를 막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차츰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 ‘40일 저항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군중이 외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거대한 함성에서 입증되었다. 이 중요한 변화는 ‘40일 저항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하였음을 말해준다. ‘40일 저항운동’은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함으로써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도달한 반정부운동의 최고발전단계인 정권퇴진투쟁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양대전략은 협상전략과 투쟁전략이다. 협상전략과 투쟁전략 이외에 다른 전략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상과 투쟁은 국민대중과 집권세력의 대립관계를 풀어내는 기본전략이다.
그렇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중과 그것의 수입을 강행하려는 이명박 대통령 사이에서 협상이 가능하였을까?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 그와 국민대중 사이에서는 어떤 형태의 협상도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등돌리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소통거부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정치적 의미이다. 소통거부행위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를 증폭시킴으로써 결국 대통령이 스스로를 정치곤경에 빠뜨리는 자해행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자해를 바라보는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가 집단행동으로 번져갈 때, ‘40일 저항운동’은 청와대를 겨눈 정치압박공세를 개시할 수 있었다.
정치압박공세란,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자해하는 대통령을 협상요구전술로 압박해들어가는 것이다. 만일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협상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통령에게 직접협상을 요구하였더라면, 협상을 거부하는 그에게 사퇴압박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사퇴압박공세는 ‘40일 저항운동’에 기폭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40일 저항운동’에서 직접협상요구전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그 회의체는 전술적 판단을 담당할만큼 탄탄하게 조직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 동안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분노와 저항을 고조시켰으나, 그 거대한 동력을 집적하고 분출하는 위력적인 전술은 없었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광장과 거리,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 넘치는 대중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였을 뿐이다.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을 때 직접협상요구전술을 이용하여 대통령에게 사퇴압박을 가하지 못한 것, 그것은 ‘40일 저항운동’이 도덕적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정치공세에서는 허약해진 원인으로 되었다.
역사적 경험에서 길어올린 진리
‘40일 저항운동’이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틈에,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역사적 경험이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60년 4.19 혁명에서 전개된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다. ‘40일 저항운동’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군부독재연장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1960년 4.19 혁명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6월 민주항쟁과 4.19 혁명이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하였다는 점이다.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6월 민주항쟁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이었고,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4.19 혁명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였다.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 복잡하게 뒤엉킨 그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직선화하면 아래와 같다. 6월 민주항쟁은 6.29 선언 발표→대통령 직선제 개헌→보수야당 분열→대선 실시→군부독재연장으로 이어졌고, 4.19 혁명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과도정부 수립→내각책임제 개헌→총선 실시→보수야당 집권으로 이어졌다.
위의 역사적 경험에서 관심을 두어야 할 대목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퇴한 직후에 보수야당이 집권한 과정이다. 그 정권교체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1960년 4월 26일 국회 부의장(당시) 이재학의 사회로 진행된 국회 회의는 ‘이승만 즉시 하야 촉구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그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이재학은 중진의원들 가운데 민주당 의원 7명, 자유당 의원 6명, 무소속 4명을 급히 불러모았다. 이재학까지 포함해서 18명의 국회의원은, 외무장관(당시) 허정을 수반으로 하여 과도정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과도정부수립문제를 국회의원 18명이 서둘러 결정한 것은, 무정부상태에 빠진 정국이 이재학의 정치선동에 좌우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정권교체시기에 전면에 나서서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했던 이재학은,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에 소속되어 3.15 부정선거를 자행할 당시에 자유당 선거기획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검찰이 선거사범을 구속하기 시작하자 이재학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5월 26일에 구속, 수감되었다.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이 파멸직전에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한 것은, 그 혁명이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국회운영위원회는 여야의원 9명이 참가하는 ‘국회 내각책임제 개헌안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결하였다. 민주당 의원 4명, 자유당 의원 4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된 개헌안 기초위원회는 1960년 5월 11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국회는 6월 15일 개헌안을 의결하였고, 허정 과도정부는 새 헌법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새 헌법에 의거하여 총선을 실시하였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러한 정권교체경험에서 돋보이는 것은,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그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이미 해체과정에 들어간 집권여당이 보수야당과 야합하여 정권퇴진투쟁의 결과를 고스란히 가로채고 만다는 점이다.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4.19 혁명 당시나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국민대중의 정치적 승리는 기대할 수 없다.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란, 진보정치세력이 쓰는 전문용어를 빌리면, 전선체이다. 오늘 진보정치세력이 무력하여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어도 전선체를 결성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한 근본원인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력에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국민대중은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통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하였다. 진보정치세력 일각에서는 국민대중이 보여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집단행동을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 실현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한다고 해서, 그러한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과대평가이다. 국민대중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가는 하나의 방도이다.
또한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와 대비하면서, 앞의 것을 선진적 집회방식으로, 뒤의 것을 후진적 집회방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에는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군중이 참가하기 때문에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 같은 의견수렴절차가 생략되는 것이지, 체계적인 정치집회가 참가군중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후진적 집회방식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지적해야 할 것은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에서 드러나는 한계이다. 자율적인 군중집회는 비체계적인 의견수렴절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멈추고 집단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인터넷 댓글달기는 인터넷이 국민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의사소통방식이지만,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은 이번에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전통적인 군중집회방식이다. 이를테면 1898년 3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만민공동회가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끄는 군중집회의 효시였다. 만민공동회는 같은 해 12월 25일 조선왕조 봉건정부가 탄압하여 강제해산되었지만,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에 이르는 1만 명 대군중이 종로에 운집하였고, 42일 동안이나 철야시위를 진행하는 치열함도 있었다.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던 지난 시기에는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열 수 없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대중통신수단인 인터넷과 손전화기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식 군중집회를 열 수 있었다.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은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오직 그러할 때 자율통치기구에 의해서, 자율통치기구를 통해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국민대중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정당정치(party politics)와 의회정치(parliamentary politics)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가 폐기되고, 평의회정치(council poltics)에 의거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
평의회정치의 역사적 유형은 1871년 파리꼬뮌(Paris Commune), 1917년 사회주의10월혁명 시기의 쏘비엣(Soviet), 1936년 스페인내전 시기의 반파시스트 민병대위원회(Anti-fascist Militia Committee), 1970-1973년 칠레 아옌데 정권 시기의 산업지구대(Cordones industriales) 등이 있다.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난해한 정치공정을 거쳐서 실현되는 것처럼, 평의회정치에 의거하는 직접민주주의도 그러하다.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급진적인 정권교체과정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고 어렵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이루어진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으로 과대평가한 것은,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우기까지 전개되는 발전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지를 알지 못한 정보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승리하지 못한 두 가지 전술
국민대중과 대통령 사이에서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국민대중에게 투쟁을 선택할 가능성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40일 저항운동’ 기간 내내 국민대중이 분노의 광장과 저항의 거리에 운집하였건만, 정작 있었어야 할 정치투쟁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40일 저항운동’이 곧 정치투쟁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군중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친 것은 정치행동이지 정치투쟁은 아직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의 정치행동에 정치투쟁도 포함되지만, 대통령에게 항의를 표명하는 정치행동을 넘어서, 저항의사를 전략과 전술을 통하여 관철하는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정치행동을 정치투쟁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반정부운동이 투쟁전략에 집중하면 그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40일 저항운동’은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밖에 알지 못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1년만에 가장 많은 군중이 참가한 것은 광장운집전술의 승리였고, 진압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방패를 휘두를 때 평화적 시위로 대응한 것은 비폭력대응전술의 승리였다.
그러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로는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어도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그 까닭은, 그 두 가지 전술이 ‘준법질서의 허용범위’라는 결정적인 제약에 묶여있는 ‘성숙한 시위문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반정부운동의 목적이 국민대중의 집단적 항의표명에 한정된다면, 그 두 가지 전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제기한 반정부운동이 그 두 가지 전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전술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반정부운동의 투쟁전략이 그 두 가지 전술에 국한될 때, 그 운동이 노리는 정치압박효과는 극도로 제한된다. ‘40일 저항운동’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40일 저항운동’이 정치적 승리를 거두려면, 전술문제를 해결하여야 하였는데, 참가군중에게 전술적 판단을 맡기는 것은 무리이다.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는 전략과 전술에 관한 다양한 토론이 오가는 소통공간이지 전술문제를 결정하는 작전회의는 아니다. 반정부운동의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을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로 대체하는 것은, 자연발생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반정부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정권퇴진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격동적인 과정은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생산공정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하고 긴박한 과정이다. 자동차 생산공정에 과학적 사고와 기술공학적 판단이 필요한 것처럼, 정권퇴진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과정에도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은 누가 담당하는 것일까? 터놓고 말하자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술적으로 판단하는 주체는 ‘40일 저항운동’ 기간 내내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대책회의가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그 회의체는 촛불문화제를 원만하게 진행하는 최저임무에 집중해왔을 뿐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40일 저항운동’에 참가한 국민대중이 ‘이명박은 물러나라’고 외치기 시작할 때, 정권퇴진투쟁에 요구되는 전술을 내와야 하였는데, 국민대책회의에게 그러한 역할과 임무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힘들었다.
진보정치세력이 빠지기 쉬운 선동주의적 편향을 극복한다고 하면서, 대중의 자연발생성에만 의존하려는 또 다른 편향에 빠져드는 ‘패배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 그것은 ‘40일 저항운동’ 이후 진보정치세력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대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군중은 ‘청와대로 가자’는 구호를 외쳤고, 그 중 일부는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경찰과 충돌하였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전술문제에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성난 군중이 청와대에 밀고 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시위군중이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의 의의는 물리적 난입기도가 아니라 정치적 사퇴압박이다. 위에서 논한 직접협상요구전술과 더불어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사퇴압력을 가하는 압박전술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직접협상요구전술과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이 배합될 때, 대통령에게 밀려드는 사퇴압력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40일 저항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전술이다.
그런 까닭에, 청와대 방향 진출의 전술적 의의를 일찌감치 간파한 공안당국은, 광장집회와 거리행진에 대해서는 무대응 비접촉전술로 대응하여 사실상 방치하면서도 청와대 방향 진출시도에 대해서만은 초기부터 예방적으로 차단하는 폭력진압전술로 대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중이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 쌍방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하다.
군중이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충돌은, 국민대책회의의 비폭력대응전술과 경찰의 무대응 비접촉전술이 한꺼번에 폐기되는 것을 뜻한다. 물리적 충돌에 대비하여 아무런 대책도 갖지 못한 국민대책회의가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을 운용하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제 대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한 가지 대안은 협상전략과 투쟁전략을 포기하고 도덕적 승리를 자축하는 촛불문화제를 장기화하는 것이다.
만일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다섯 해 동안 계속한다면, 반정부운동이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문화제의 장기화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일종의 소모전이므로, 소모전이 장기화될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반정부운동이다. 촛불문화제를 장기적으로 계속하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소모전에 지친 군중이 흩어져버리는 원심력 작용을 계산에 넣지 않은 단견이다. ‘차분한 촛불문화제’와 ‘성숙한 시위문화’를 장기화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을 포기하고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에 관행적으로 집착하는 것으므로 대안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이 있을까? 지난 6월 12일 기자회견에서 국민대책회의는 대통령에게 6월 20일까지 부쉬 정부와 쇠고기 수입문제를 전면재협상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전면재협상에 나서지 않을 경우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현재 전개되는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가 정권퇴진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40일 저항운동’ 이후의 대안을 정권퇴진투쟁으로 정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권퇴진이란 대통령의 사퇴를 뜻한다.
시위군중은 이미 ‘이명박은 물러나라’고 외쳐왔으므로, 국민대책회의는 한 발 늦게 정권퇴진투쟁을 선언하는 소극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투쟁을 밀고 나가는 조직태세를 갖추는 적극성과 주동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정권퇴진투쟁의 조직태세를 갖추는 것은 ‘40일 저항운동’이 넘겨준 최대과제이며, 앞으로 반정부운동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적인 문제이다.
정권퇴진투쟁의 조직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비상정치회의 명칭은 거기에 참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합의하여 정하면 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대통령 사퇴촉구에 동의하는 정당과 사회단체가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폭넓게 결집하는 것이다.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과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내야당인 민주노동당과 통합민주당, 원외야당인 진보신당이 참가하는 문제이다. 정당참가문제를 중시하는 까닭은,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그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여 결국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과거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각 총사퇴를 촉구하기는 하나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지는 않는 통합민주당은, 국회로 돌아가서 한나라당과 타협할 생각에 젖어있기 때문에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합민주당이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과제를 언제까지나 미루어놓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통합민주당이 비상정치회의에 참가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반정부운동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정권퇴진투쟁으로 격화되는 정도에 달려있다. 반정부운동이 격화되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정권퇴진투쟁이 본격화될 경우, 통합민주당을 비상정치회의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상정치회의의 구성이 최종적으로 완결되고,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최후의 결전’을 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각계각층 대중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이 청와대를 물리적으로 압박하는 유일한 전술이라면,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것은 청와대를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유일한 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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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도덕적 승리와 허약한 정치공세
2008년 5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40일 동안 이 나라의 광장과 거리에서,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난 대사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토론이 분분하다. 그러한 토론들 가운데서 돋보이는 것은, 분노의 광장, 저항의 거리, 소통의 인터넷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대사변을 국민대중의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으로 한정하여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론적 해명에서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이 땅의 국민대중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운집하여 항의를 표명하였고 인터넷 공간에서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였다는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에서 출발하여 저항운동으로 나아간 역동적인 발전과정이다. 이 글에서는 대사변을 ‘40일 저항운동’이라 부른다.
‘40일 저항운동’이 남긴 성과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운동이 거둔 도덕적 승리(moral victory)이다. 도덕적 승리란 시위군중이 경찰의 야만적인 강제진압과 강제해산에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도덕적으로 우위에 선 것을 뜻한다. 아닌게 아니라, 국민대중이 밝힌 촛불은 저항운동 첫날부터 도덕적 승리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40일 저항운동’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귀를 막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차츰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 ‘40일 저항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군중이 외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거대한 함성에서 입증되었다. 이 중요한 변화는 ‘40일 저항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하였음을 말해준다. ‘40일 저항운동’은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함으로써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도달한 반정부운동의 최고발전단계인 정권퇴진투쟁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양대전략은 협상전략과 투쟁전략이다. 협상전략과 투쟁전략 이외에 다른 전략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상과 투쟁은 국민대중과 집권세력의 대립관계를 풀어내는 기본전략이다.
그렇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중과 그것의 수입을 강행하려는 이명박 대통령 사이에서 협상이 가능하였을까?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 그와 국민대중 사이에서는 어떤 형태의 협상도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등돌리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소통거부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정치적 의미이다. 소통거부행위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를 증폭시킴으로써 결국 대통령이 스스로를 정치곤경에 빠뜨리는 자해행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자해를 바라보는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가 집단행동으로 번져갈 때, ‘40일 저항운동’은 청와대를 겨눈 정치압박공세를 개시할 수 있었다.
정치압박공세란,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자해하는 대통령을 협상요구전술로 압박해들어가는 것이다. 만일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협상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통령에게 직접협상을 요구하였더라면, 협상을 거부하는 그에게 사퇴압박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사퇴압박공세는 ‘40일 저항운동’에 기폭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40일 저항운동’에서 직접협상요구전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그 회의체는 전술적 판단을 담당할만큼 탄탄하게 조직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 동안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분노와 저항을 고조시켰으나, 그 거대한 동력을 집적하고 분출하는 위력적인 전술은 없었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광장과 거리,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 넘치는 대중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였을 뿐이다.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을 때 직접협상요구전술을 이용하여 대통령에게 사퇴압박을 가하지 못한 것, 그것은 ‘40일 저항운동’이 도덕적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정치공세에서는 허약해진 원인으로 되었다.
역사적 경험에서 길어올린 진리
‘40일 저항운동’이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틈에,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역사적 경험이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60년 4.19 혁명에서 전개된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다. ‘40일 저항운동’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군부독재연장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1960년 4.19 혁명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6월 민주항쟁과 4.19 혁명이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하였다는 점이다.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6월 민주항쟁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이었고,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4.19 혁명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였다.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 복잡하게 뒤엉킨 그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직선화하면 아래와 같다. 6월 민주항쟁은 6.29 선언 발표→대통령 직선제 개헌→보수야당 분열→대선 실시→군부독재연장으로 이어졌고, 4.19 혁명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과도정부 수립→내각책임제 개헌→총선 실시→보수야당 집권으로 이어졌다.
위의 역사적 경험에서 관심을 두어야 할 대목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퇴한 직후에 보수야당이 집권한 과정이다. 그 정권교체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1960년 4월 26일 국회 부의장(당시) 이재학의 사회로 진행된 국회 회의는 ‘이승만 즉시 하야 촉구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그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이재학은 중진의원들 가운데 민주당 의원 7명, 자유당 의원 6명, 무소속 4명을 급히 불러모았다. 이재학까지 포함해서 18명의 국회의원은, 외무장관(당시) 허정을 수반으로 하여 과도정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과도정부수립문제를 국회의원 18명이 서둘러 결정한 것은, 무정부상태에 빠진 정국이 이재학의 정치선동에 좌우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정권교체시기에 전면에 나서서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했던 이재학은,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에 소속되어 3.15 부정선거를 자행할 당시에 자유당 선거기획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검찰이 선거사범을 구속하기 시작하자 이재학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5월 26일에 구속, 수감되었다.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이 파멸직전에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한 것은, 그 혁명이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국회운영위원회는 여야의원 9명이 참가하는 ‘국회 내각책임제 개헌안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결하였다. 민주당 의원 4명, 자유당 의원 4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된 개헌안 기초위원회는 1960년 5월 11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국회는 6월 15일 개헌안을 의결하였고, 허정 과도정부는 새 헌법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새 헌법에 의거하여 총선을 실시하였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러한 정권교체경험에서 돋보이는 것은,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그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이미 해체과정에 들어간 집권여당이 보수야당과 야합하여 정권퇴진투쟁의 결과를 고스란히 가로채고 만다는 점이다.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4.19 혁명 당시나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국민대중의 정치적 승리는 기대할 수 없다.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란, 진보정치세력이 쓰는 전문용어를 빌리면, 전선체이다. 오늘 진보정치세력이 무력하여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어도 전선체를 결성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한 근본원인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력에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국민대중은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통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하였다. 진보정치세력 일각에서는 국민대중이 보여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집단행동을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 실현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한다고 해서, 그러한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과대평가이다. 국민대중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가는 하나의 방도이다.
또한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와 대비하면서, 앞의 것을 선진적 집회방식으로, 뒤의 것을 후진적 집회방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에는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군중이 참가하기 때문에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 같은 의견수렴절차가 생략되는 것이지, 체계적인 정치집회가 참가군중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후진적 집회방식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지적해야 할 것은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에서 드러나는 한계이다. 자율적인 군중집회는 비체계적인 의견수렴절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멈추고 집단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인터넷 댓글달기는 인터넷이 국민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의사소통방식이지만,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은 이번에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전통적인 군중집회방식이다. 이를테면 1898년 3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만민공동회가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끄는 군중집회의 효시였다. 만민공동회는 같은 해 12월 25일 조선왕조 봉건정부가 탄압하여 강제해산되었지만,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에 이르는 1만 명 대군중이 종로에 운집하였고, 42일 동안이나 철야시위를 진행하는 치열함도 있었다.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던 지난 시기에는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열 수 없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대중통신수단인 인터넷과 손전화기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식 군중집회를 열 수 있었다.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은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오직 그러할 때 자율통치기구에 의해서, 자율통치기구를 통해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국민대중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정당정치(party politics)와 의회정치(parliamentary politics)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가 폐기되고, 평의회정치(council poltics)에 의거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
평의회정치의 역사적 유형은 1871년 파리꼬뮌(Paris Commune), 1917년 사회주의10월혁명 시기의 쏘비엣(Soviet), 1936년 스페인내전 시기의 반파시스트 민병대위원회(Anti-fascist Militia Committee), 1970-1973년 칠레 아옌데 정권 시기의 산업지구대(Cordones industriales) 등이 있다.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난해한 정치공정을 거쳐서 실현되는 것처럼, 평의회정치에 의거하는 직접민주주의도 그러하다.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급진적인 정권교체과정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고 어렵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이루어진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으로 과대평가한 것은,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우기까지 전개되는 발전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지를 알지 못한 정보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승리하지 못한 두 가지 전술
국민대중과 대통령 사이에서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국민대중에게 투쟁을 선택할 가능성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40일 저항운동’ 기간 내내 국민대중이 분노의 광장과 저항의 거리에 운집하였건만, 정작 있었어야 할 정치투쟁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40일 저항운동’이 곧 정치투쟁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군중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친 것은 정치행동이지 정치투쟁은 아직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의 정치행동에 정치투쟁도 포함되지만, 대통령에게 항의를 표명하는 정치행동을 넘어서, 저항의사를 전략과 전술을 통하여 관철하는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정치행동을 정치투쟁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반정부운동이 투쟁전략에 집중하면 그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40일 저항운동’은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밖에 알지 못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1년만에 가장 많은 군중이 참가한 것은 광장운집전술의 승리였고, 진압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방패를 휘두를 때 평화적 시위로 대응한 것은 비폭력대응전술의 승리였다.
그러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로는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어도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그 까닭은, 그 두 가지 전술이 ‘준법질서의 허용범위’라는 결정적인 제약에 묶여있는 ‘성숙한 시위문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반정부운동의 목적이 국민대중의 집단적 항의표명에 한정된다면, 그 두 가지 전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제기한 반정부운동이 그 두 가지 전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전술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반정부운동의 투쟁전략이 그 두 가지 전술에 국한될 때, 그 운동이 노리는 정치압박효과는 극도로 제한된다. ‘40일 저항운동’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40일 저항운동’이 정치적 승리를 거두려면, 전술문제를 해결하여야 하였는데, 참가군중에게 전술적 판단을 맡기는 것은 무리이다.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는 전략과 전술에 관한 다양한 토론이 오가는 소통공간이지 전술문제를 결정하는 작전회의는 아니다. 반정부운동의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을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로 대체하는 것은, 자연발생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반정부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정권퇴진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격동적인 과정은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생산공정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하고 긴박한 과정이다. 자동차 생산공정에 과학적 사고와 기술공학적 판단이 필요한 것처럼, 정권퇴진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과정에도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은 누가 담당하는 것일까? 터놓고 말하자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술적으로 판단하는 주체는 ‘40일 저항운동’ 기간 내내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대책회의가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그 회의체는 촛불문화제를 원만하게 진행하는 최저임무에 집중해왔을 뿐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40일 저항운동’에 참가한 국민대중이 ‘이명박은 물러나라’고 외치기 시작할 때, 정권퇴진투쟁에 요구되는 전술을 내와야 하였는데, 국민대책회의에게 그러한 역할과 임무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힘들었다.
진보정치세력이 빠지기 쉬운 선동주의적 편향을 극복한다고 하면서, 대중의 자연발생성에만 의존하려는 또 다른 편향에 빠져드는 ‘패배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 그것은 ‘40일 저항운동’ 이후 진보정치세력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대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군중은 ‘청와대로 가자’는 구호를 외쳤고, 그 중 일부는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경찰과 충돌하였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전술문제에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성난 군중이 청와대에 밀고 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시위군중이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의 의의는 물리적 난입기도가 아니라 정치적 사퇴압박이다. 위에서 논한 직접협상요구전술과 더불어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사퇴압력을 가하는 압박전술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직접협상요구전술과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이 배합될 때, 대통령에게 밀려드는 사퇴압력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40일 저항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전술이다.
그런 까닭에, 청와대 방향 진출의 전술적 의의를 일찌감치 간파한 공안당국은, 광장집회와 거리행진에 대해서는 무대응 비접촉전술로 대응하여 사실상 방치하면서도 청와대 방향 진출시도에 대해서만은 초기부터 예방적으로 차단하는 폭력진압전술로 대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중이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 쌍방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하다.
군중이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충돌은, 국민대책회의의 비폭력대응전술과 경찰의 무대응 비접촉전술이 한꺼번에 폐기되는 것을 뜻한다. 물리적 충돌에 대비하여 아무런 대책도 갖지 못한 국민대책회의가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을 운용하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제 대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한 가지 대안은 협상전략과 투쟁전략을 포기하고 도덕적 승리를 자축하는 촛불문화제를 장기화하는 것이다.
만일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다섯 해 동안 계속한다면, 반정부운동이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문화제의 장기화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일종의 소모전이므로, 소모전이 장기화될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반정부운동이다. 촛불문화제를 장기적으로 계속하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소모전에 지친 군중이 흩어져버리는 원심력 작용을 계산에 넣지 않은 단견이다. ‘차분한 촛불문화제’와 ‘성숙한 시위문화’를 장기화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을 포기하고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에 관행적으로 집착하는 것으므로 대안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이 있을까? 지난 6월 12일 기자회견에서 국민대책회의는 대통령에게 6월 20일까지 부쉬 정부와 쇠고기 수입문제를 전면재협상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전면재협상에 나서지 않을 경우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현재 전개되는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가 정권퇴진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40일 저항운동’ 이후의 대안을 정권퇴진투쟁으로 정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권퇴진이란 대통령의 사퇴를 뜻한다.
시위군중은 이미 ‘이명박은 물러나라’고 외쳐왔으므로, 국민대책회의는 한 발 늦게 정권퇴진투쟁을 선언하는 소극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투쟁을 밀고 나가는 조직태세를 갖추는 적극성과 주동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정권퇴진투쟁의 조직태세를 갖추는 것은 ‘40일 저항운동’이 넘겨준 최대과제이며, 앞으로 반정부운동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적인 문제이다.
정권퇴진투쟁의 조직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비상정치회의 명칭은 거기에 참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합의하여 정하면 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대통령 사퇴촉구에 동의하는 정당과 사회단체가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폭넓게 결집하는 것이다.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과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내야당인 민주노동당과 통합민주당, 원외야당인 진보신당이 참가하는 문제이다. 정당참가문제를 중시하는 까닭은,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그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여 결국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과거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각 총사퇴를 촉구하기는 하나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지는 않는 통합민주당은, 국회로 돌아가서 한나라당과 타협할 생각에 젖어있기 때문에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합민주당이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과제를 언제까지나 미루어놓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통합민주당이 비상정치회의에 참가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반정부운동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정권퇴진투쟁으로 격화되는 정도에 달려있다. 반정부운동이 격화되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정권퇴진투쟁이 본격화될 경우, 통합민주당을 비상정치회의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상정치회의의 구성이 최종적으로 완결되고,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최후의 결전’을 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각계각층 대중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이 청와대를 물리적으로 압박하는 유일한 전술이라면,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것은 청와대를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유일한 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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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진보담론 (11) 2008.5.17
한호석 (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에서 은폐되는 광우병 위험
소가 걸리는 해면상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을 광우병이라 하는데, 광우병 발병물질(prion agent)이 들어있는 쇠고기를 먹은 사람은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에 걸리게 된다. 발병하면 1년 안에 목숨을 잃는 치사율 100%의 인간광우병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는 그처럼 무시무시한 광우병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2004년부터 미국 정부당국은 광우병 의혹을 지닌 앉은뱅이 소(downer cow)를 잡아 상품화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금지조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2007년 1월 휴메인 소사이어티(Humane Society)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웨스트랜드-홀막 육류회사 도축장에서 앉은뱅이 소를 잡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이 공개되자, 시중에 팔려나간 쇠고기 7천 150t을 부랴부랴 걷어들이는 대소동이 일어난 바 있다. 그 단체는 2008년 5월 7일에도 미국 각지의 육우경매장에서 앉은뱅이 소들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국은 해마다 소를 3천 500만 두나 잡으면서도 0.05-1%밖에 되지 않는 표본조사대상에 대해서만 광우병 검역을 실시하는 너무도 허술한 검역체계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1년부터 2007년 9월까지 미국 공군에서 발생한 핵무기 취급부주의사고가 237건이나 적발되었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핵무기 관리체계가 엉망인 나라에서 육류검역체계의 정상운영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처럼 허술한 도축위생관리체계와 육류검역체계를 거쳐 수출된 미국산 쇠고기를 사들인 이 나라의 검역당국이 포장을 뜯고 현물검사를 실시하는 대상은 고작 3%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관리들은 쇠고기를 많이 먹는 미국 소비자들이 인간광우병에 걸린 사례가 거의 없다고 하면서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사실을 살펴보면, 그들의 헛소리가 헛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미국 정부당국은 미국에서 인간광우병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그 병에 걸린 환자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가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는 치매환자와 인간광우병 환자의 증상이 매우 비슷해서 치매환자를 대상으로 뇌생체조직검사(brain biopsy)를 하지 않으면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광우병 환자들이 치매환자로 오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예일대학교 신경병리학과장 로라 머누딜리스(Laura Manuedilis)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미국의 치매환자 가운데 13%는 인간광우병 환자이다.
미국에서는 2007년 현재 치매환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고, 해마다 약 6만 명이 치매로 목숨을 잃는다. 2000년대에 미국에서는 심장질환이나 뇌졸중 같은 성인병 사망률이 차츰 줄어든 것과 달리, 유독 치매 사망률은 33%가 늘어났다. 1979년에 653명에 그쳤던 치매 사망률은 2002년에 와서 5만 8천 785명으로 무려 90배나 폭증하였다. 노인성 치매는 청장년층에서도 확산되고 있는데, 영국의 최근 통계자료는 30-64세 연령층 10만 명 가운데 67.2명이 치매에 걸렸음을 말해준다. 미국 청장년층의 치매발병률도 비슷할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인간광우병 발병률이 매우 높은데도 치매 발병률 속에 은폐되어 있어서 미국의 육류소비자들이 심각한 안전불감증에 걸려있다는 점이다. 인도주의자원연구소(Humanitarian Resource Institute)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치매환자로 분류되었지만 실제로는 인간광우병에 걸린 환자가 약 12만 명에 이른다.
국민보건순위가 세계에서 37번째로 쳐진 미국을 ‘광우병 안전국’이라 하는 부쉬 정부의 발표는 혹세무민하는 거짓말이며,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은 유언비어이다.
사법처리를 해야 할 대상
이처럼 인간광우병 발병률을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광우병 위험을 검역적으로 통제하지도 못하는 미국이 자국시장에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게 팔아넘기는 꺼림칙한 쇠고기를, 더욱이 미국의 초대형 육류기업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강매하는 쇠고기를 마구잡이로 들여다놓고, 이 땅의 서민들이 싼값으로 사 먹으면 좋고, 꺼림칙하여 사 먹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으면서도, 청와대의 정갈한 만찬식탁에는 미국산 쇠고기가 한 점도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먹을거리를 가지고 정치농간을 부리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군중촛불집회가 날마다 열리는 까닭은 명백하다. 먹을거리를 가지고 정치농간을 부리는 정권에 쏟아붓는 분노, 바로 이것이 군중촛불집회라는 집단행동을 이끌어낸 촉발원인이다. 이 나라 평범한 사람들의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를 가지고 정치농간을 부리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가 촛불바다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다. ‘그저 애만 키우던 아줌마들’이나 ‘학교와 독서실 밖에 모르던 중고생들’까지 그야말로 이름 없는 각계각층 군중이 마침내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오랫동안 참아왔던 정치적 요구를 거대한 촛불바다에서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명박 정부는 “배후세력의 광우병 괴담선동에 놀아난 중고생들이 불법집회에 멋모르고 참가하여 때아닌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들의 비뚤어진 시야를 사로잡아버린 그 확신은, 그들의 머리 속에 가득 들어찬 아집과 오만이 내비친 조잡한 반사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2008년 5월 4일 경찰은 군중촛불집회 주동자를 집시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5월 6일 서울에서 결성된 ‘광우병 위험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긴급대책회의’에는 1천 500여 명에 이르는 정당 대표들, 사회단체 대표들, 각계인사들이 참가하였는데, 경찰의 사법처리선언은 절대다수 대중을 억누르겠다는 무지막지한 대탄압선언과 다르지 않다.
이 땅에 등장한지 겨우 두 달 하고 몇 날밖에 되지 않은 이명박 정권은, 절대다수 대중의 정당한 요구를 억누르며 극소수 지배세력의 이익추구에 열중하는 모든 역대정권들이 그러했듯이, 아니 역대정권들보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심하게 대중이 진절머리를 내는, 그런 혐오스런 몰골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나라 대중의 양심에 비춰보면, 정작 사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대상은 이명박 정권이 아닌가.
그 많은 군중은 어디서 나타났을까?
촛불을 들고 서울의 밤거리에 나선 이름 없는 군중은 누구일까? 군중촛불집회에 참가한 군중의 구성성분이 복잡하여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관련자료들을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10대 중고생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미국산 쇠고기를 중고교 집단급식에 넣을 것이 너무도 뻔하므로, 중고생들이 가장 심각한 발병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학교급식 식단은 학생들의 선택권을 배제한다. 중고생들이 적극적으로 군중촛불집회에 나서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중고생들이 군중촛불집회에 자발적으로, 집단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피부에 와 닿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대중을 움직인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입증한 것이다.
둘째, 군중촛불집회와 더불어 진행되는,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천만 명을 목표로 내걸고 2008년 4월 6일에 시작된 그 서명운동에는 지금까지 127만 4천 명이 넘는 군중이 참가하였다. 그 서명운동에 참가한 127만 4천 명은 군중촛불집회에 직접 나가거나 아니면 그 집회를 적극적으로 지지, 성원하는 군중이다. 그 서명운동에 참가한 군중의 성분을 분석한 자료는 없지만, 20대와 30대의 연령층이 대다수를 차지한 것이 확실하다.
2007년 12월 19일에 실시된 대선과 2008년 4월 9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연령층은 20대였고, 따라서 이 나라 청년계층의 정치적 무관심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당시의 분석평가를 뒤집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왜 이러한 이변이 일어났을까?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에 참가한 청년들은,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투표를 외면하였던 탈정치화된 청년들과는 구분된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그들은 이 나라의 부패무능한 보수정치를 불신하고 그것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투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이다. 20대 연령층 인구 가운데 16.4%를 차지하는 청년실업인구 109만 명을 ‘처량한 백수’로 내몰아버린 이 절망적인 사회체제에서 느끼는 저항심리를 대통령 탄핵요구로 표출하는 청년들, 바로 그들인 것이다.
대선과 총선에서 청년계층의 투표권 포기는, 아전인수격 해석에 익숙한 보수언론의 시야에 침묵으로 비쳐졌고 그에 따라 사회 전반이 마치 퇴행적으로 보수화된 것처럼 분석한 오보가 나돌았다. 그러나 ‘경영인 성공신화’를 내돌리며 군중심리를 자극한 정치선동이 먹혀 들어간 대상은, 선거 때마다 보수정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전체 유권자들 가운데 30%를 조금 상회하는 고정지지층에 한정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주목하는 것은, 그때 보수언론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땅의 대중에게서, 그들의 순박한 가슴속 저 깊은 데서 소리 없이 끓고 있는, 부패무능한 보수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과 환멸이다. 보수정당과 입을 맞추고 대선승리와 총선승리에 연달아 도취되어버린 보수언론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은 정한 이치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부패무능한 보수정치를 불신하고 그것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요즈음 생긴 일이 아니다. 대중의 그러한 불신과 환멸은, 정세변동에 따라서 때로 양적 증감과 표출강도의 차이를 보였지만, 이승만 정권이 등장한 뒤로 무려 60년 동안이나 꿈틀거리고 뒤틀리며 덧쌓여온 것이다.
60년 동안 꿈틀거리고 뒤틀리며 덧쌓여온 불신과 환멸이 오늘에 와서 군중적 집단행동으로 표출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표출원인은 이 땅의 대중이 날마다 일터와 가정과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그리하여 광우병 공포보다 훨씬 더 깊고 컴컴한 두려움 바로 그 속에 들어있다. 그 두려움을 민생경제의 파탄위기라 한다. 만일 민생경제가 파탄위기에 빠지지 않았다면, 광우병 공포는 각계각층 대중을 군중촛불집회로 이끌지 못하였을 것이다. 민생경제의 파탄위기라는 근본원인이 부패무능한 보수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날로 키우는 가운데, 광우병 공포라는 대중심리의 기폭제가 굉음을 내며 터진 것이다.
광우병 발병물질보다 더 치명적인 독소
한미 쇠고기협상 합의문을 조목조목 뜯어본 송기호 변호사의 정밀분석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응당 행사하여야 할 교역주권을 사실상 포기하였음이 드러난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결재한 대외비 문건 ‘미국산 쇠고기 관련 협상 추진계획(안)’을 언론에 공개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문건에서는 대미협상에서 관철해야 할 중대한 요구들을 협상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리 포기하였음이 드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한미 쇠고기협상은 2008년 4월 17일 당시 워싱턴을 방문하고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을 수행한 정부고위관리들과 숙소에서 긴급회의를 가진 직후에 전격적으로 타결되었다.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쇠고기협상을 긴급회의를 통해 직접 지휘하여 전격타결로 이끌어갔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튿날 대기업 최고경영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협상타결소식을 전해듣고 환하게 웃으면서 “협상이 타결되었다”고 말하고 손뼉까지 치면서 부쉬 정부 관리들보다 더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반겼던 한미 쇠고기협상 합의문에는 광우병 위험을 가려낼 결정적인 단서인 쇠고기 도축월령을 미국 검역당국이 수출검역증에 표시하지 않아도 되는 치명적인 독소조항이 제22조로 들어가 있다. 쇠고기 협상타결을 부쉬 정부에게 바친 굴욕외교, 조공외교라고 타매하면서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분노한 목소리는 그래서 터져나온 것이다. 쇠고기협상타결은,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정에서 행사할 교역주권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다. 교역협상에서 교역주권을 포기하면, 남는 것은 협상이 아니라 굴종이다.
광우병 위험이 도사린 미국산 쇠고기를 사들여 서민에게 공급하는 행위가 범죄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명박 정부는 왜 교역주권을 포기하였을까? 협상과 굴종을 혼동할 만큼 어리석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 교역주권 포기에 박혀있는 본질은, 쇠고기를 강매하는 부쉬 정부에게 굴종하면서 극소수 지배세력의 이익추구에 열중하는 이명박 정부가 일으킨 고도의 정치문제인 것이다.
교역주권 포기를 그냥 정치문제라고 덤덤히 표현하지 않고 고도의 정치문제라고 날을 세워 표현하는 까닭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마치 한미관계를 훼손한 것처럼 몰아부친 부쉬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그 관계를 복원, 강화한다고 하면서 취한 첫 조치가 바로 교역주권 포기이기 때문이다. 훼손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강화되어온 한미관계를 이명박 정부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복원, 강화한다고 하면서 교역주권을 포기한 것은,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미국 연방의회에서 비준하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부터 전면적으로 개방하여야 한다는 부쉬 정부의 강요에 굴종한 조치이다. 부쉬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하루빨리 비준해달라고 연방의회를 재촉하는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나라 서민들의 밥상에 오르게 될 미국산 쇠고기에는 광우병 발병물질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독소, 다시 말해서 쇠고기 수입만이 아니라 대미교역관계에서 교역주권을 사실상 불능화하고 불공정무역을 극대화하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이라는 신자유주의 독소가 들어있는 것이다.
군중 촛불집회의 의의, 어디까지인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느낀 이명박 대통령은 “쇠고기 개방으로 국민건강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있다면 즉각 우선적으로 수입을 중지할 것”이라는 진화발언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백악관의 눈치나 살피면서 재협상 문제를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거짓말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이 국민건강문제를 넘어서 교역주권문제에 직결된 것임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생각할 만한 가치가 없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은, 교역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국민건강만이 아니라 경제체제 전반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촛불을 들고 밤거리에 나선 군중은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으로 이 나라의 국민건강을 해치는 정치농간에 분노하지만, 그 농간의 ‘배후주범’이 교역주권을 불능화하고 한미자유무역협정 시행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체제라는 사실을 집회현장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근본원인을 파헤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표출원인에 반응해 전술적으로 대처한다는 점에서, 군중촛불집회는 자연발생성의 한계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군 장갑차가 두 여학생을 깔아 죽인 참사가 있었을 때,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군중촛불집회가 10만 명이나 모이는 결집력을 시위하였으면서도, 그 집회의 의의를 알리기 위해 광화문 집회현장에 세워놓았던 작은 기념비조차 지켜내지 못한 한계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04년 1월 종로구청이 강제철거한 자주평화촛불기념비는 2007년 5월 23일 청운동 동사무소 인근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청와대와 백악관이 다그치는 한미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신자유주의체제의 완성으로 끌고 가는 한미 쇠고기협상 타결을 각계각층 군중이 거부한다는 점에서, 각계각층 대중을 교역주권과 국민건강을 지키는 저항운동으로 힘있게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군중촛불집회는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2008년 4월 6일부터 “국회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진행되어오는 1천만 명 온라인 서명운동에는 5월 9일 현재 128만 4천 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그 서명운동에 결집한 거대한 힘이 촛불바다로 굽이쳐 흐른다면, 그리하여 군중촛불집회가 어떤 발화점을 지나 정권퇴진투쟁으로 격화되고 여러 지방도시로 확산된다면, 청와대를 강타하는 민심의 폭풍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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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나누기(8개)
한사랑 (218.209.72.42)
2008-06-27 09:46:55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좌익사상이 신앙을 빼앗아 간거군
신학에 사상을 투영하려니 신앙을 잃어버릴 수 밖에
교회에 남아 있어봤자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없겠지
역시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상임이 확인되는구나
참, 이분이 미국에선 소고기 먹었는지 궁금하군
그토록 위험한 걸 알면서
먹을 수도 없을거고,
안먹을 수도 없을거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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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
여ㅏㄷ (211.244.37.85)
2010-07-19 19:37:52
내 알기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난 그가 신앙에서 밀려나게(실제론 버림 받은거) 된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치 않는 단세포 투성이인 이 사회 구조가 잘못 된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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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먹 탐 (121.129.18.145)
2008-10-25 03:22:32
그대생긱의한계 는 맘몬 사기먹사의 생각
국보급 문제아 나그네야 니생각은 예수님과는 적대적 생각이니라..이꼴통아
나의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창과 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라 나의 말이니라
나는 너에게는 이단이나 너는 태여나지 않은것이 합당했느니라...니부모님께는 죄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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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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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71.255.104.206)
2008-10-24 23:07:01
바라고 소원하는 대로 되시요
역사 이래로 군사가 없던 시절이 없었고
있어도 약하면 남의 식민지가 될수 밖에 없었던 것을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그대여!....
자자 손손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대로 되시지요 원준씨......
여호와의 증인들?.......그럼 저 양반도?......파수대?.......
아!...먹탐자로 포장한 새 대치도 이 부류 인게로군!
이단중에도 징한 이단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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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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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준 (125.142.176.245)
2008-07-08 00:33:21
나그네 ㅋ
나그네 ㅋ
그 마음 속에 군대를 먼저 없애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거라사 귀신의
정신병자의 군대 귀신을 안수 하겠소?
무고한 국민들이겠오..
군대가 존재하는 나라가 정당한 것처럼 매도한 것은..
그렇게 근시안적 사고방식에서 한국이 자유주의자가 안 나오나 문학부분에 노벨상이 나옵니까?
신앙을 떠나서요.. ㅉㅉ
그렇다고 난 여증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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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
먹탐 (121.129.18.145)
2008-07-07 23:01:43
나그네...니ㅁ
주ㅣ......새....끼....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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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
김집사 (220.121.193.167)
2008-06-30 06:51:07
한사랑 여기서도
에고~ 여기서도 주접 떨고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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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
나그네 (71.126.114.92)
2008-06-27 10:45:35
청와대를 강타하는 민심의 폭풍을 누가 막을수 있을까?.....
청와대를 강타하는 민심의 폭풍우를 누가 막을 수있을까?......이정권 타도 하자는 간절한 외침의 소리로 글을 마무리 하였다.
물론 이런 글을 올려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길에있는 자가써서 올렸으리라.
거의 반 평생을 남의 나라에서 떠돌아 다니면서 쌓인 한이 어찌 이 정권만 무너지길 바라겠는가? 나라가 무너져야 하겠지!....
그러나 그 길은 자신이 택하여 간것이니 엄밀이 말하면 나라 탓이라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을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타국을 떠돌다가 한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는데 그나마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할 하나님 마져 잊었으니 이제 영원한 나라에서까지도 지난 세월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수도 없는 엄청난 큰 고통이 영원히 이어지는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진리를 아는 친구들이 없어서 예수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그 분을 믿으라는 권면의 말도 들은것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야 말로 불쌍한자 중에 불쌍한 자가 아닐수 없다.
사상이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친북 좌파의 표본 이라고나 할까?.....
이 세상은 물론 저 세상에 까지도 가지고 가는것이 사상이다. 현재 한국에 친북 좌파 성향에 진보 파라는 목사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걷으로는 개혁이라는 구호는 외처대지만 그 속 마음을 이끌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들이하는 것이다. 여전히 부채질 하고 그런 글귀만 보이면 영락없기 끌어다가 올린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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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에서 은폐되는 광우병 위험
소가 걸리는 해면상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을 광우병이라 하는데, 광우병 발병물질(prion agent)이 들어있는 쇠고기를 먹은 사람은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에 걸리게 된다. 발병하면 1년 안에 목숨을 잃는 치사율 100%의 인간광우병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는 그처럼 무시무시한 광우병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2004년부터 미국 정부당국은 광우병 의혹을 지닌 앉은뱅이 소(downer cow)를 잡아 상품화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금지조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2007년 1월 휴메인 소사이어티(Humane Society)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웨스트랜드-홀막 육류회사 도축장에서 앉은뱅이 소를 잡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이 공개되자, 시중에 팔려나간 쇠고기 7천 150t을 부랴부랴 걷어들이는 대소동이 일어난 바 있다. 그 단체는 2008년 5월 7일에도 미국 각지의 육우경매장에서 앉은뱅이 소들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국은 해마다 소를 3천 500만 두나 잡으면서도 0.05-1%밖에 되지 않는 표본조사대상에 대해서만 광우병 검역을 실시하는 너무도 허술한 검역체계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1년부터 2007년 9월까지 미국 공군에서 발생한 핵무기 취급부주의사고가 237건이나 적발되었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핵무기 관리체계가 엉망인 나라에서 육류검역체계의 정상운영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처럼 허술한 도축위생관리체계와 육류검역체계를 거쳐 수출된 미국산 쇠고기를 사들인 이 나라의 검역당국이 포장을 뜯고 현물검사를 실시하는 대상은 고작 3%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관리들은 쇠고기를 많이 먹는 미국 소비자들이 인간광우병에 걸린 사례가 거의 없다고 하면서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사실을 살펴보면, 그들의 헛소리가 헛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미국 정부당국은 미국에서 인간광우병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그 병에 걸린 환자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가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는 치매환자와 인간광우병 환자의 증상이 매우 비슷해서 치매환자를 대상으로 뇌생체조직검사(brain biopsy)를 하지 않으면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광우병 환자들이 치매환자로 오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예일대학교 신경병리학과장 로라 머누딜리스(Laura Manuedilis)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미국의 치매환자 가운데 13%는 인간광우병 환자이다.
미국에서는 2007년 현재 치매환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고, 해마다 약 6만 명이 치매로 목숨을 잃는다. 2000년대에 미국에서는 심장질환이나 뇌졸중 같은 성인병 사망률이 차츰 줄어든 것과 달리, 유독 치매 사망률은 33%가 늘어났다. 1979년에 653명에 그쳤던 치매 사망률은 2002년에 와서 5만 8천 785명으로 무려 90배나 폭증하였다. 노인성 치매는 청장년층에서도 확산되고 있는데, 영국의 최근 통계자료는 30-64세 연령층 10만 명 가운데 67.2명이 치매에 걸렸음을 말해준다. 미국 청장년층의 치매발병률도 비슷할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인간광우병 발병률이 매우 높은데도 치매 발병률 속에 은폐되어 있어서 미국의 육류소비자들이 심각한 안전불감증에 걸려있다는 점이다. 인도주의자원연구소(Humanitarian Resource Institute)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치매환자로 분류되었지만 실제로는 인간광우병에 걸린 환자가 약 12만 명에 이른다.
국민보건순위가 세계에서 37번째로 쳐진 미국을 ‘광우병 안전국’이라 하는 부쉬 정부의 발표는 혹세무민하는 거짓말이며,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은 유언비어이다.
사법처리를 해야 할 대상
이처럼 인간광우병 발병률을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광우병 위험을 검역적으로 통제하지도 못하는 미국이 자국시장에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게 팔아넘기는 꺼림칙한 쇠고기를, 더욱이 미국의 초대형 육류기업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강매하는 쇠고기를 마구잡이로 들여다놓고, 이 땅의 서민들이 싼값으로 사 먹으면 좋고, 꺼림칙하여 사 먹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으면서도, 청와대의 정갈한 만찬식탁에는 미국산 쇠고기가 한 점도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먹을거리를 가지고 정치농간을 부리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군중촛불집회가 날마다 열리는 까닭은 명백하다. 먹을거리를 가지고 정치농간을 부리는 정권에 쏟아붓는 분노, 바로 이것이 군중촛불집회라는 집단행동을 이끌어낸 촉발원인이다. 이 나라 평범한 사람들의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를 가지고 정치농간을 부리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가 촛불바다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다. ‘그저 애만 키우던 아줌마들’이나 ‘학교와 독서실 밖에 모르던 중고생들’까지 그야말로 이름 없는 각계각층 군중이 마침내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오랫동안 참아왔던 정치적 요구를 거대한 촛불바다에서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명박 정부는 “배후세력의 광우병 괴담선동에 놀아난 중고생들이 불법집회에 멋모르고 참가하여 때아닌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들의 비뚤어진 시야를 사로잡아버린 그 확신은, 그들의 머리 속에 가득 들어찬 아집과 오만이 내비친 조잡한 반사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2008년 5월 4일 경찰은 군중촛불집회 주동자를 집시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5월 6일 서울에서 결성된 ‘광우병 위험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긴급대책회의’에는 1천 500여 명에 이르는 정당 대표들, 사회단체 대표들, 각계인사들이 참가하였는데, 경찰의 사법처리선언은 절대다수 대중을 억누르겠다는 무지막지한 대탄압선언과 다르지 않다.
이 땅에 등장한지 겨우 두 달 하고 몇 날밖에 되지 않은 이명박 정권은, 절대다수 대중의 정당한 요구를 억누르며 극소수 지배세력의 이익추구에 열중하는 모든 역대정권들이 그러했듯이, 아니 역대정권들보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심하게 대중이 진절머리를 내는, 그런 혐오스런 몰골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나라 대중의 양심에 비춰보면, 정작 사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대상은 이명박 정권이 아닌가.
그 많은 군중은 어디서 나타났을까?
촛불을 들고 서울의 밤거리에 나선 이름 없는 군중은 누구일까? 군중촛불집회에 참가한 군중의 구성성분이 복잡하여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관련자료들을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10대 중고생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미국산 쇠고기를 중고교 집단급식에 넣을 것이 너무도 뻔하므로, 중고생들이 가장 심각한 발병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학교급식 식단은 학생들의 선택권을 배제한다. 중고생들이 적극적으로 군중촛불집회에 나서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중고생들이 군중촛불집회에 자발적으로, 집단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피부에 와 닿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대중을 움직인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입증한 것이다.
둘째, 군중촛불집회와 더불어 진행되는,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천만 명을 목표로 내걸고 2008년 4월 6일에 시작된 그 서명운동에는 지금까지 127만 4천 명이 넘는 군중이 참가하였다. 그 서명운동에 참가한 127만 4천 명은 군중촛불집회에 직접 나가거나 아니면 그 집회를 적극적으로 지지, 성원하는 군중이다. 그 서명운동에 참가한 군중의 성분을 분석한 자료는 없지만, 20대와 30대의 연령층이 대다수를 차지한 것이 확실하다.
2007년 12월 19일에 실시된 대선과 2008년 4월 9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연령층은 20대였고, 따라서 이 나라 청년계층의 정치적 무관심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당시의 분석평가를 뒤집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왜 이러한 이변이 일어났을까?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에 참가한 청년들은,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투표를 외면하였던 탈정치화된 청년들과는 구분된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그들은 이 나라의 부패무능한 보수정치를 불신하고 그것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투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이다. 20대 연령층 인구 가운데 16.4%를 차지하는 청년실업인구 109만 명을 ‘처량한 백수’로 내몰아버린 이 절망적인 사회체제에서 느끼는 저항심리를 대통령 탄핵요구로 표출하는 청년들, 바로 그들인 것이다.
대선과 총선에서 청년계층의 투표권 포기는, 아전인수격 해석에 익숙한 보수언론의 시야에 침묵으로 비쳐졌고 그에 따라 사회 전반이 마치 퇴행적으로 보수화된 것처럼 분석한 오보가 나돌았다. 그러나 ‘경영인 성공신화’를 내돌리며 군중심리를 자극한 정치선동이 먹혀 들어간 대상은, 선거 때마다 보수정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전체 유권자들 가운데 30%를 조금 상회하는 고정지지층에 한정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주목하는 것은, 그때 보수언론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땅의 대중에게서, 그들의 순박한 가슴속 저 깊은 데서 소리 없이 끓고 있는, 부패무능한 보수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과 환멸이다. 보수정당과 입을 맞추고 대선승리와 총선승리에 연달아 도취되어버린 보수언론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은 정한 이치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부패무능한 보수정치를 불신하고 그것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요즈음 생긴 일이 아니다. 대중의 그러한 불신과 환멸은, 정세변동에 따라서 때로 양적 증감과 표출강도의 차이를 보였지만, 이승만 정권이 등장한 뒤로 무려 60년 동안이나 꿈틀거리고 뒤틀리며 덧쌓여온 것이다.
60년 동안 꿈틀거리고 뒤틀리며 덧쌓여온 불신과 환멸이 오늘에 와서 군중적 집단행동으로 표출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표출원인은 이 땅의 대중이 날마다 일터와 가정과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그리하여 광우병 공포보다 훨씬 더 깊고 컴컴한 두려움 바로 그 속에 들어있다. 그 두려움을 민생경제의 파탄위기라 한다. 만일 민생경제가 파탄위기에 빠지지 않았다면, 광우병 공포는 각계각층 대중을 군중촛불집회로 이끌지 못하였을 것이다. 민생경제의 파탄위기라는 근본원인이 부패무능한 보수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날로 키우는 가운데, 광우병 공포라는 대중심리의 기폭제가 굉음을 내며 터진 것이다.
광우병 발병물질보다 더 치명적인 독소
한미 쇠고기협상 합의문을 조목조목 뜯어본 송기호 변호사의 정밀분석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응당 행사하여야 할 교역주권을 사실상 포기하였음이 드러난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결재한 대외비 문건 ‘미국산 쇠고기 관련 협상 추진계획(안)’을 언론에 공개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문건에서는 대미협상에서 관철해야 할 중대한 요구들을 협상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리 포기하였음이 드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한미 쇠고기협상은 2008년 4월 17일 당시 워싱턴을 방문하고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을 수행한 정부고위관리들과 숙소에서 긴급회의를 가진 직후에 전격적으로 타결되었다.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쇠고기협상을 긴급회의를 통해 직접 지휘하여 전격타결로 이끌어갔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튿날 대기업 최고경영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협상타결소식을 전해듣고 환하게 웃으면서 “협상이 타결되었다”고 말하고 손뼉까지 치면서 부쉬 정부 관리들보다 더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반겼던 한미 쇠고기협상 합의문에는 광우병 위험을 가려낼 결정적인 단서인 쇠고기 도축월령을 미국 검역당국이 수출검역증에 표시하지 않아도 되는 치명적인 독소조항이 제22조로 들어가 있다. 쇠고기 협상타결을 부쉬 정부에게 바친 굴욕외교, 조공외교라고 타매하면서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분노한 목소리는 그래서 터져나온 것이다. 쇠고기협상타결은,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정에서 행사할 교역주권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다. 교역협상에서 교역주권을 포기하면, 남는 것은 협상이 아니라 굴종이다.
광우병 위험이 도사린 미국산 쇠고기를 사들여 서민에게 공급하는 행위가 범죄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명박 정부는 왜 교역주권을 포기하였을까? 협상과 굴종을 혼동할 만큼 어리석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 교역주권 포기에 박혀있는 본질은, 쇠고기를 강매하는 부쉬 정부에게 굴종하면서 극소수 지배세력의 이익추구에 열중하는 이명박 정부가 일으킨 고도의 정치문제인 것이다.
교역주권 포기를 그냥 정치문제라고 덤덤히 표현하지 않고 고도의 정치문제라고 날을 세워 표현하는 까닭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마치 한미관계를 훼손한 것처럼 몰아부친 부쉬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그 관계를 복원, 강화한다고 하면서 취한 첫 조치가 바로 교역주권 포기이기 때문이다. 훼손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강화되어온 한미관계를 이명박 정부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복원, 강화한다고 하면서 교역주권을 포기한 것은,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미국 연방의회에서 비준하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부터 전면적으로 개방하여야 한다는 부쉬 정부의 강요에 굴종한 조치이다. 부쉬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하루빨리 비준해달라고 연방의회를 재촉하는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나라 서민들의 밥상에 오르게 될 미국산 쇠고기에는 광우병 발병물질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독소, 다시 말해서 쇠고기 수입만이 아니라 대미교역관계에서 교역주권을 사실상 불능화하고 불공정무역을 극대화하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이라는 신자유주의 독소가 들어있는 것이다.
군중 촛불집회의 의의, 어디까지인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느낀 이명박 대통령은 “쇠고기 개방으로 국민건강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있다면 즉각 우선적으로 수입을 중지할 것”이라는 진화발언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백악관의 눈치나 살피면서 재협상 문제를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거짓말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이 국민건강문제를 넘어서 교역주권문제에 직결된 것임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생각할 만한 가치가 없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은, 교역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국민건강만이 아니라 경제체제 전반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촛불을 들고 밤거리에 나선 군중은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으로 이 나라의 국민건강을 해치는 정치농간에 분노하지만, 그 농간의 ‘배후주범’이 교역주권을 불능화하고 한미자유무역협정 시행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체제라는 사실을 집회현장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근본원인을 파헤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표출원인에 반응해 전술적으로 대처한다는 점에서, 군중촛불집회는 자연발생성의 한계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군 장갑차가 두 여학생을 깔아 죽인 참사가 있었을 때,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군중촛불집회가 10만 명이나 모이는 결집력을 시위하였으면서도, 그 집회의 의의를 알리기 위해 광화문 집회현장에 세워놓았던 작은 기념비조차 지켜내지 못한 한계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04년 1월 종로구청이 강제철거한 자주평화촛불기념비는 2007년 5월 23일 청운동 동사무소 인근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청와대와 백악관이 다그치는 한미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신자유주의체제의 완성으로 끌고 가는 한미 쇠고기협상 타결을 각계각층 군중이 거부한다는 점에서, 각계각층 대중을 교역주권과 국민건강을 지키는 저항운동으로 힘있게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군중촛불집회는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2008년 4월 6일부터 “국회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진행되어오는 1천만 명 온라인 서명운동에는 5월 9일 현재 128만 4천 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그 서명운동에 결집한 거대한 힘이 촛불바다로 굽이쳐 흐른다면, 그리하여 군중촛불집회가 어떤 발화점을 지나 정권퇴진투쟁으로 격화되고 여러 지방도시로 확산된다면, 청와대를 강타하는 민심의 폭풍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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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회를 잇는 다리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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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나누기(8개)
한사랑 (218.209.72.42)
2008-06-27 09:46:55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좌익사상이 신앙을 빼앗아 간거군
신학에 사상을 투영하려니 신앙을 잃어버릴 수 밖에
교회에 남아 있어봤자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없겠지
역시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상임이 확인되는구나
참, 이분이 미국에선 소고기 먹었는지 궁금하군
그토록 위험한 걸 알면서
먹을 수도 없을거고,
안먹을 수도 없을거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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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ㅏㄷ (211.244.37.85)
2010-07-19 19:37:52
내 알기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난 그가 신앙에서 밀려나게(실제론 버림 받은거) 된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치 않는 단세포 투성이인 이 사회 구조가 잘못 된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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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먹 탐 (121.129.18.145)
2008-10-25 03:22:32
그대생긱의한계 는 맘몬 사기먹사의 생각
국보급 문제아 나그네야 니생각은 예수님과는 적대적 생각이니라..이꼴통아
나의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창과 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라 나의 말이니라
나는 너에게는 이단이나 너는 태여나지 않은것이 합당했느니라...니부모님께는 죄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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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71.255.104.206)
2008-10-24 23:07:01
바라고 소원하는 대로 되시요
역사 이래로 군사가 없던 시절이 없었고
있어도 약하면 남의 식민지가 될수 밖에 없었던 것을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그대여!....
자자 손손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대로 되시지요 원준씨......
여호와의 증인들?.......그럼 저 양반도?......파수대?.......
아!...먹탐자로 포장한 새 대치도 이 부류 인게로군!
이단중에도 징한 이단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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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준 (125.142.176.245)
2008-07-08 00:33:21
나그네 ㅋ
나그네 ㅋ
그 마음 속에 군대를 먼저 없애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거라사 귀신의
정신병자의 군대 귀신을 안수 하겠소?
무고한 국민들이겠오..
군대가 존재하는 나라가 정당한 것처럼 매도한 것은..
그렇게 근시안적 사고방식에서 한국이 자유주의자가 안 나오나 문학부분에 노벨상이 나옵니까?
신앙을 떠나서요.. ㅉㅉ
그렇다고 난 여증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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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탐 (121.129.18.145)
2008-07-07 23:01:43
나그네...니ㅁ
주ㅣ......새....끼....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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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사 (220.121.193.167)
2008-06-30 06:51:07
한사랑 여기서도
에고~ 여기서도 주접 떨고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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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71.126.114.92)
2008-06-27 10:45:35
청와대를 강타하는 민심의 폭풍을 누가 막을수 있을까?.....
청와대를 강타하는 민심의 폭풍우를 누가 막을 수있을까?......이정권 타도 하자는 간절한 외침의 소리로 글을 마무리 하였다.
물론 이런 글을 올려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길에있는 자가써서 올렸으리라.
거의 반 평생을 남의 나라에서 떠돌아 다니면서 쌓인 한이 어찌 이 정권만 무너지길 바라겠는가? 나라가 무너져야 하겠지!....
그러나 그 길은 자신이 택하여 간것이니 엄밀이 말하면 나라 탓이라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을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타국을 떠돌다가 한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는데 그나마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할 하나님 마져 잊었으니 이제 영원한 나라에서까지도 지난 세월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수도 없는 엄청난 큰 고통이 영원히 이어지는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진리를 아는 친구들이 없어서 예수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그 분을 믿으라는 권면의 말도 들은것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야 말로 불쌍한자 중에 불쌍한 자가 아닐수 없다.
사상이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친북 좌파의 표본 이라고나 할까?.....
이 세상은 물론 저 세상에 까지도 가지고 가는것이 사상이다. 현재 한국에 친북 좌파 성향에 진보 파라는 목사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걷으로는 개혁이라는 구호는 외처대지만 그 속 마음을 이끌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들이하는 것이다. 여전히 부채질 하고 그런 글귀만 보이면 영락없기 끌어다가 올린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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