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3
알라딘: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알라딘: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은이)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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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양장본 | 356쪽 | 223*152mm (A5신) | 600g | ISBN : 978899311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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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은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 이덕일이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점을 살펴보고, 한국사 인식체계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을 통해 참된 우리 역사와 올바른 역사관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 고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이 과연 한반도 내에 있었는지 살펴보았고, 서기 3~4세기까지의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김부식이 조작해낸 가짜라는 역사학계의 정설이 옳은가를 검증했다.
또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내고, 효종의 북벌에 시종일관 발목을 잡은 우암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서술하고, 실학의 이용후생학파, 곧 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세도정치를 정조의 책임으로 돌린 노론사관의 실체를 밝혀냈다. 마지막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과연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존재했다면 왜 말살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낸 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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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글
1부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1. 고조선과 한나라 간의 전쟁(다시 고조선 문제/국민세금으로 살아 있는 식민사관/한나라는 왜 고조선을 침략했을까?)
2.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는가?(낙랑군 유적으로 조작된 고구려 유적/식민사학 청산 못한 대한민국의 비극/한사군은 민족사의 축복이었나?)
3. 한사군은 어디에 있었는가?(한사군의 위치/낙랑군의 명칭과 위치/위나라 관구검의 공격로와 퇴각로/낙랑군 수성현 갈석산/갈석산을 찾아서/창려현은 수성현인가?/고조선의 수도 험독성은 어디 있었는가?/장성의 끝)
4. 대방군은 황해도에 있었는가?(현도군의 위치/대방군은 어디인가?/대방군과 진번군/요동태수가 된 공손도)
5. 유물과 유적으로 살펴본 한사군(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물/고구려로 온 중국인들/중국계 유적과 유물에 대한 북한 학계의 견해/북한에서 출토된 봉니/아직도 일제 연구만 인용하는 주류 사학계/임둔태수장 봉니가 출토된 요녕성 금서시)
2부『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6.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교과서에서 빠진 한사군/『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국사 교과서』/고구려의 시조는 누구인가?/백제의 시조는 누구인가?/『삼국사기』와「광개토대왕릉비문」/신라의 시조는 누구인가?/『만주원류고』와 삼한의 위치/신라는 내물왕 때 건국되었는가?
7. 식민사관 뺨치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쓰다 소우키치의 고민과 김부식)
3부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8. 노론 후예 학자들이 만든 신화들(십만양병설에 대한 네 가지 변조/유성룡은 십만양병을 반대했는가?/송시열과 송준길은 북벌론자인가?/상공업 중심 개혁론은 노론이 주도했는가?/노론과 함께 사라진 남인)
9. 정조 독살설의 진실과 거짓(『정조어찰첩』은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사료인가?/어찰을 보내기 전의 정조와 심환지/어찰을 보낸 시기와 정조시대의 의리/정조와 심환지의 핫라인 가동 양상/정조의 와병과 죽음/정조의 급서와 독살설/즉위 당일 정조를 배신하다/노론 벽파 세계관의 재생산 구조)
4부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10. 독립운동사 말살정책(대한제국 멸망에 앞장선 노론/사라진 무장투쟁사/삼부의 무장투쟁/해방 후 발생한 문제점/진정한 동북아 평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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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 한국 주류 사학계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출발점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 출발점부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출발점에 다시 선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일제 식민사학이 만든 고조선사를 검토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조선사에 관한 정설은 일제 식민사학이 만든 이론 그대로다. 따라서 일제 식민사학이 어떻게 고조선사를 만들어냈는지 사학사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일제 식민사학이 만든 고조선상像의 베일을 걷어내고 원原 고조선상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간 고조선상은 두 가지 사관에 의해 왜곡되어왔다. 바로 중화사관과 일제 황국사관이다. 이 두 가지 사관으로 가려진 베일을 걷어내야 진정한 고조선상이 드러난다.
P.159 : 중국이 동북공정에 박차를 가하던 1997년 요녕성遼寧省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여아가女兒街 태집둔邰集屯 소황지小荒池의 옛 성터에서 ‘임둔태수장’이라고 쓴 봉니와 승丞 자가 새겨진 봉니가 각각 1점씩 수습되었다. 금서시는 갈석산에서 발해 해안을 따라 올라와 금주만錦州灣을 끼고 있는 만주 서쪽의 해안도시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에서 발견했다는 봉니는 조작과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는 반면 금서시에서 발견된 봉니는 위작시비가 일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중국역사지도집』은 임둔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고 했는데 임둔태수장 봉니가 발견된 곳은 중국 요서 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불리한 사료가 중국에 의해 발견되었으니 위작시비가 일 수 없는 것이다.
P.232 : 그런데 쓰다 소우키치는『삼국사기』의 풍부한 왜 관련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고사기』·『일본서기』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삼국사기』는 신라가 강력한 고대 국가이고 왜는 작은 정치세력으로 본 반면『고사기』·『일본서기』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란 식민통치기관을 운영했다고 썼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는 사실과 다른 기술을 한 것이 분명했다. 쓰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삼국사기』초기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냈다. 쓰다 소우키치는『일본서기』의 제14대 쥬아이[仲哀]천황까지는 신화시대의 천황으로 후대인에 의해 조작되었고 제15대 오진[應神]천황부터 실재한 국왕이라고 주장했는데 동일한 잣대를『삼국사기』에도 들이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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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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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덕일의 당당 한국사>,<미래로 가는 바른 고대사 1.5> … 총 135종 (모두보기)
소개 :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이 변형시킨 한국사의 원형을 현재에 되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 시대의 ‘문제적’ 역사학자. 방대한 문헌 사료를 치밀하게 분석해서 고대사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해방되지 못한’ 한국사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남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역사와 사회를 보자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를 필두로『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과 그의 시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 『조선 왕 독살 사건 1, 2』, 『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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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은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 이덕일이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점을 살펴보고, 한국사 인식체계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을 통해 참된 우리 역사와 올바른 역사관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 고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이 과연 한반도 내에 있었는지 살펴보았고,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초기기록이 김부식이 조작해낸 가짜라는 역사학계의 정설이 옳은가를 검증했다. 또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내고, 효종의 북벌에 시종일관 발목을 잡은 우암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서술하고, 실학의 이용후생학파, 곧 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세도정치를 정조의 책임으로 돌린 노론사관의 실체를 밝혀냈다. 마지막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과연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존재했다면 왜 말살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낸 후 바로잡았다.
-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조선과 한사군 문제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강역문제가 중심이 된다. 둘째는『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이다.『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제창한 인물은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우키치인데 그의 이론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한 번도 근본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고 부분적 수정만 거친 채 한국 사학계의 주류 이론이 되었다. 셋째는 조선 후기사를 노론사관에 의해 서술하는 문제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내고, 효종의 북벌에 시종일관 발목을 잡은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서술하고, 실학의 이용후생학파, 곧 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세도정치를 정조의 책임으로 돌 기술들의 실체를 살펴보고 과연 그것이 옳은가를 검증했다. 넷째는 독립운동사를 말살한 부분이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기상천외한 논리로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말살시켰다. 과연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존재했다면 왜 말살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하루 빨리 우리 사회의 담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현상의 문제에 집착한 반면 현상을 발생시키는 본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왔다.『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은 바로 그런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우리의 2세들이 앞으로도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왜곡된 역사를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포함하는 식민사관은 침략사관이고 노론사관은 상대에게 닫힌 폐쇄사관으로 두 사관이 가진 침략적, 폐쇄적 성격은 현재 동북아의 화해와 평화 체제 구축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 체제 구축의 선구가 되려면 그 시발점은 일제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의 극복에 두는 것이 옳다.
-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 고조선과 한나라 간의 전쟁은 한 무제가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회유했으나 고조선의 우거왕이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수 없던 섭하는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인 패수에서 자신을 배웅한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죽이고 한나라로 도주했다. 한 무제는 섭하를 처벌하는 대신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라는 벼슬을 내려 표창했다. 그러자 우거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해 섭하를 죽였고 한 무제는 죄수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해 고조선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대해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주장대로 압록강으로 보거나 이병도의 시각대로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사이를 흐르는 청천강이라고 보는 것이 한국 역사학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패수의 위치가 현재의 압록강이나 청천강이라면 고조선과 한나라는 전쟁 자체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그간 고조선상은 두 가지 사관에 의해 왜곡되어왔다. 바로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이다. 이 두 가지 사관으로 가려진 베일을 걷어내야 진정한 고조선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사기』,『수경』,『한서』,『삼국사기』,『삼국지』등 1차 사료는 물론, 한반도에서 출토된 중국계 유적과 유물을 정밀하게 분석해 현재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조선사에 관한 정설이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원原 고조선상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삼국사기』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이른바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이란 것이 있다.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초기기록은 김부식이 조작한 가짜라는 것으로 현재 주류 사학계의 정설이다. 이 이론의 창안자 역시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다. 쓰다 소우키치의 한국 고대사관은 간단하다. 1910년대 남만주철도회사의 위촉을 받아 쓴『조선역사지리』등의 저서에서 쓰다는 고대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래야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를 존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삼국사기』는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존재했다고 서술할 뿐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서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쓰다는『삼국사기』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만들어낸 것이다.『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임에도 해방 후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는 부인하면서도『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은 그대로 존속시켜 정설로 만들었다. 이렇듯 이 책에서 저자는『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이 만들어진 배경은 물론 이 이론이 우리나라 현행『국사 교과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냈다. 또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가 연구기관의 실태를 샅샅이 파헤쳤다.
-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론은 장희빈의 왕비 책봉을 계기로 숙종 때 잠시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경종의 왕권을 무력화하려다 소론에게 잠시 정권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정조 때 소론과 남인들이 일시 정계에 진출했으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노론 우위는 계속되었다. 노론의 사상적 배경은 극단적 친명 사대주의와 성리학 유일사상 주의였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모든 개방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의 완화 내지 폐지를 요구하는 사회 흐름에 역행해 신분제를 강고히 했으며 적서차별과 남녀차별을 극대화했다. 주자학과 다르면 같은 유학이라도 사문난적으로 공격했고, 천주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을 극단적으로 억압했으며 사회변화를 거부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노론의 사관이 조선 후기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처럼 조작하고, 효종의 북벌정책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송시열을 북벌의 화신처럼 서술하고, 노론 당론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는 실학의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최근에는 정조독살의 혐의를 받는 노론 벽파가 정조의 우당友黨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모두 조선 후기사를 노론의 시각으로 본 결과물들이다. 이렇듯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체계가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는 것이다.
-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한 나라가 숱한 고초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면 그 직후부터 독립운동사 연구가 붐처럼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은 1980년대 독립운동사와 사회주의사 연구가 붐처럼 일어나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을 무력화시키기까지 독립운동사는 소수의 연구자들을 제외하고는 전문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껏『국사 교과서』는 무장투쟁보다 식민지 체제 내의 애국계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 등을 위주로 서술해왔으며, 무장투쟁사는 마지못해 이름 정도 적어주는 선이었다. 예를 들어 현행 고등학교『국사 교과서』에는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 조직인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의 삼부에 대한 내용이 거의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삼부는 이렇게 축소 서술해야 하는 조직이 아니다. 삼부 중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는 1924년 결성 당시 5개 중대에 600여 명의 무장병력을 갖춘 행정·군사 조직으로, 일제 기관에서 발표한 것만으로도 교전 78회, 주재소 습격 56회, 면사무소와 영림서 소각 20개소, 일제 군경 사살 95명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1924년에는 함경도 혜산을 순시하고 압록강을 따라 신의주로 내려오던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마고토[齋藤實] 총독의 배에 수백 발의 총탄을 퍼부어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의부와 신민부 역시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펴가며 항일 무장투쟁운동을 벌였으나『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런 사실은 일체 침묵한 채 1940년 임정 산하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고만 서술했다. 한국광복군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서기 전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1920년의 청산리·봉오동 전투 외에는 별다른 무장투쟁 없이 연합국 승전의 부산물로 해방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대부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과연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이 이렇게까지 축소된 배경에는 어떠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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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7편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인가? 민달팽이 ㅣ 2015-02-20 ㅣ 공감(1) ㅣ 댓글 (0)
책은 전체가 10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일곱개 장이 고조선사에 관련된 글이다. 나머지는 노론사관 비판, 정조어찰과 정조독살설, 국사교과서에서 비중이 희미한 무장투쟁사에 대한 문제제기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고조선사에 대한 것은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과 식민사학,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한일역사공동위원회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의 기본지식을 얻기 위해서 읽었다. 얻은 정보도 많지만, 그 때문에 더 혼란스러워진 측면도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관련도서를 더 읽어봐야 내 나름대로의 시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생긴 의문도 있다. 도대체 식민사학의 뿌리는 무엇이고, 그게 아직도 살아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김상태나 이덕일에 따르면 동북아연구재단 같은 한국사 방어기구조차도 그런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긴데.
고조선사의 기본문제는 기록이 너무 적고, 기록의 대부분이 중국사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록이래야 <삼국유사>가 거의 전부인데, 이 책은 정통역사서라기보다는 설화집 비슷하게 인식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하게 되는 것은 중국의 역사서들에 나오는 고조선 관련 기록들이다. <사기>나 <삼국지>같은 기본 사서를 통해서 우리는 위만조선이니 기자조선이니 하는 기록들을 얻어듣게 된다. 중국인들의 시각으로 쓴 기록이니 과연 진위가 무엇인지도 헷갈릴 수 밖에 없다. 근래에 발견된 <한단고기>같은 책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세밀하게 기록했다고 하지만, 위서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래저래 사료를 통하여 고조선의 문제를 접근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존재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혁신적인 지점은 여기에 있다. 그는 동아시아 1000년의 시간동안 당연시되던 주류사관을 뒤집었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고 과감히 주장한 것이다. 중국과 고조선의 경계인 요하가 오늘날의 요하가 아니라 난하라고 본 점이다. 난하는 중국본토에 상당히 가까운 강이다. 그 밖에 진시황과 한무제가 중국을 순행하면서 들렀다는 갈석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점도 치열한 논쟁이 있는 부분이고 흥미롭다.
재미있는 부분은 한사군의 핵심이라고 하는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점을 둘러싼 논쟁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평양지역 유물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그것이 일제에 의한 유물위조가 아닌가 하는 점으로 이어진다. 글에 의하면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연과학자들에게 데이터 조작의 유혹이 크듯이 사회과학자들이나 역사학,고고학을 하는 이들에게도 사료위조의 유혹은 크다. 심지어 인류학자들도 자료를 소설 쓰듯이 위조하기도 한다. <뿌리>로 유명한 알렉스 헤일리는 실제 자기 조상 이야기인것처럼 드라마를 찍었지만, 이야기를 상당 부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나 업계에서 영구퇴출되었다고 한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노론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십만양병설의 핵심은 서인의 종주인 이율곡이 임진왜란을 내다보고 병력증강을 주장했던 반면에, 이를 반대했던 남인의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세력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조선후기의 주류인 서인과 그를 이은 노론세력이 자기들의 선조인 이율곡을 높이고 남인의 북극성인 유성룡을 깎아 내리는 역사조작을 했다는 것이다. 사료를 들어서 비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이 있으면 한번 살펴보고 싶다.
이놈들 역사가 두렵지 않느냐 旅인 ㅣ 2013-12-19 ㅣ 공감(1) ㅣ 댓글 (0)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2009.09.04일 초판이 1쇄 발행되었다.
올해는 교학사 한국사교과서의 왜곡문제로 시끄러웠다.
이덕일의 '한국사...' 이 책은 교학사의 한국사 왜곡 정도는 우습다고 하는 것 같다.
2006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가열되자 정부에서는 교육부 산하의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한다. 하지만 연구성과가 이병도에서 이어지는 식민사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논리를 제공하기 보다 동북공정을 강화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망국적 기구화하고 있다고 이덕일은 지적한다. 물론 이전에도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자 한 일 정상의 합의로 2002.05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발족한 바가 있는데, 한일 간 역사에 문제가 되는 19개의 주제를 가려 2005.06.01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양국의 사학자들이 인식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아 따지고 역사를 바로하기 보다 오히려 한국의 고대사의 연대를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 비정한 시점보다 더 낮추는 등 더 식민사관이고 친일적이었다고 분노한다. 즉 국민의 세금을 축내는 관변사학기구들이 황국사관이나 중화사관을 지지하는 매국적 보고서나 만들어 내고 있다는 침통한 보고를 하고 있다.
이덕일은 그의 다른 책 '역사사랑'에서 황국사관이나 중화사관은 국가권력이 강하게 개입된 관 주도의 어용사학이며 강한 대외팽창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공통적으로 우리 역사의 시공간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한다. 공간적으로는 우리의 대륙사와 해양사를 모두 소멸시키고 협소한 반도사로 한국사를 국한시키고, 시간적으로는 단군조선을 부인하면서 기자, 위만, 한사군 등 외지인이나 식민지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사학계가 왜곡된 배경을 한국사의 태두라고 불리는 이병도가 식민사관 맹신에서 비롯한 것에 더하여 우리 학계가 스승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학문 풍토와 1차 사료를 학자 본인 스스로 직접 검토해가며 자신의 이론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이병도 등의 친일사학자들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해 왔던 탓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지도를 펼쳐놓고 삼국사기, 사기, 한서, 삼국지 등을 교차 대조해가면서 때때로 현지답사도 곁들여 역사를 연구해야 하는데, 선배교수가 불러준 노트나 딸딸 외어 석박사를 땄으니 인식의 지평이 스승에 비하여 넓어질 턱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국의 상아탑이라는 곳이 스승의 연구가 틀렸다고 반박할 경우 학위를 따고 강단에 설 기회를 잃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이병도는 와세다에 유학,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이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한 요시다 토우코(吉田東伍) 밑에서 배우고 귀국하여 낙랑 평양설을 주장한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밑에서 수사관보로 근무하면서 식민사학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주장한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등의 식민사관까지 흡수하여 해방 후 '신수한국사대관'이라는 책을 써서 오히려 식민사관을 강화해왔고, 정인보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납북 등으로 부재하게 되자 한국 주류 사학계를 식민사관으로 물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인지 이덕일은 "한국 주류 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축약한 것이 바로 국사교과서"(171쪽)라고 힐난한다.
이덕일은 4부로 나누어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노론사관은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등을 묻는다.
1부.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이덕일은 한사군은 물론 고조선 왕검성과 한사군의 위치, 그리고 패수나 열수가 어디에 있는가를 추적한다. 고대 사서와 지도를 펼쳐들고 이러한 보물찾기에 우리를 초대한다. 이 여행은 인디아나 존스 박사를 뒤쫓아가는 것 만큼 재미있다.
그는 사기, 한서 등에서 요동과 패수와 열수, 그리고 낙랑군 그리고 조선현 등의 사료를 찾아 기원전 1~2세기의 요동으로 간다. 이러한 고대사의 지명과 사건들이 압록강에서 대동강 일대라는 한반도 북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의 훨씬 서쪽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의 갈석산(碣石山)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갈석산이야말로 당시로는 중국의 끝이자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이며, 그 밑으로 흐르는 난하(?河)야 말로 패수(浿水)라고 한다. 여기에 고조선이 위치했고 한나라와 싸웠으며 그 자리에 한사군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이 글을 보면서 홍콩 중화서국에서 찍어낸 사기의 조선열전을 펼쳐보았다. 거기만도 방대한 주석이 달려 있어서 우리의 고대사가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방대한 자료들을 구할 수 있건만, 이병도 등은 어째서 해방 후에도 낙랑군을 대동강 일대로 남겨두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한국사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의 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고대사를 중국 것이라고 하는데, 중국이 마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2부.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우리나라 주류사학계는 쓰다 소우키치의 주장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모두 가짜라고 부인해버리고 '삼국지' '동이열전'은 모두 진짜라고 한다는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가 삼국의 성립 시기를 늦추고자 한 것은 북부는 한사군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이라는 78개 소국이 우글거려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를 존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에는 한반도 남부에도 백제와 신라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함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이병도 등은 삼국사기 초기불신론을 맹신한다.
이러다 보니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에는 쓰다 소우키치 등이 고구려가 태조대왕(53~146년) 때 건국되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13대 서천왕(270~292년) 때까지 미루고 고대국가 체제는 17대 소수림왕 때나 되었다고 보고할 뿐 아니라, 백제는 이병도가 고이왕 27년(260년)에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완비로 고대국가를 성립했다고 했는데, 이병도가 근거한 '백제본기'조차 조작되었으니 더 늦춰야 한다고 하면서 낙랑군 대방군이 고구려에 멸망된 이후 높은 문화를 지닌 유민들이 편입된 근초고왕(346~375년) 때나 건국한 셈이라는 식의 논지를 펼친다. 몽촌토성에서 수습된 목탄, 목재, 토기 등 13점의 유물이 탄소연대측정 결과, BC199 ~ AD231년에 걸친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음에도 3세기 후반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축조되었다고 보고서에 기재한다. 그리고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는 대방지역의 고급문화를 차지하기 위하여 30년에 걸친 전쟁을 벌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이 어느 나라 사학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더 우스운 것은 쓰다 소우키치가 '일본서기'를 근거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인했음에도 불구, 정작 '일본서기'의 14대 천황 이전의 기록에 의문을 달은 탓에 1942년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덕일은 고대 국가성립의 필요충분조건인 철기 생산시기가 신라에서도 서기 1세기 전후이며, 고고학계에서는 한국에서 철 생산 시기는 아무리 늦어도 서기 1세기 이전이라고 보고 있다.
3부.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서인들은 진정한 임금은 명나라 황제이고 광해군은 제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광해군이 임금을 배신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것은 임금(명 황제)에 대한 충성이라는 논리 아래 쿠테타를 일으킨다. 이런 배경에서 서인의 후예인 노론들은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기득권을 유지했으며,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노론사관이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노론에 의하여 조선의 후기사가 왜곡되었는데, 율곡의 '십만양병설', 송시열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하는 것이나, 노론계열이 실학의 이용후생학파를 주도했다는 등의 역사가 당시에는 노론, 지금은 이병도 등에 의해서 날조 또는 지지되고 있다고 선조실록 등을 펼쳐 증거를 대고 있다.
정조와 심환지 간의 어찰이 발견되자 연구자들은 이 어찰이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결정적 자료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언론에 큰 글씨로 특필되었다. 하지만 이덕일은 어디에도 결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어찰을 보니 심환지와 정조가 친했고, 몸이 아프다는 구절로 보아 심환지(노론)가 죽일 리도 (독살로) 죽은 것도 아니라고 급히 말한다. 이덕일은 어찰이야말로 항상 대척점에 서 있는 노론세력을 컨트롤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정조와 노론세력 간에는 어쩔 수 없는 의리의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영조가 경종을 죽이지 않았다는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의 사건에 대한 임인의리의 문제는 노론이 주도한 사건이고 정조는 영조의 후손인 만큼 공통의 합의 사항이고, 정조의 즉위 후 반대자인 화완옹주와 정후겸에 대한 사형 후 발표한 '명의록'에 대한 의리는 어느 선에서 상호 합의가 가능한 부분이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년의 의리는 결코 타협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즉 노론 아니면 정조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해소될 수 있는 불구대천의 문제라는 것이다. 노론벽파는 뒤주에 갇혀 죽은 일은 노론이 살기 위해서라도 옳은 일이고, 정조는 부친 살해사건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8일 전 오회연교(五晦筵敎 : 다섯번째 그믐날 경연에서 내린 교시)에서 한 이야기가 빌미가 되어 독살되었다고 본다. 그 날 정조는 "그것이(노론 벽파) 한 번 굴러 모년(사도세자 죽은 사건)의 대의리에 관계되었고, 두 번 굴러 을미년(1775년: 세손인 자신의 대리청정 반대사건)이 되었고, 세 번 굴러 병신년(1776년: 정조 즉위년의 즉위 방해사건)이 되었으며, 네 번 굴러 정유년(1777년: 자객의 정조 암살시도)이 되었다. 정유년 이후는 ... 나 또한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정조실록 24년 5월 30일조)고 말한다. 이는 이 모든 사건에 노론벽파가 연루되어 있으며 자신의 뜻에 동참하지 않으면 관두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를 간파한 노론에서 정조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4부.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1910.08.22일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그 해 10월 일제는 76명에 달하는 조선인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준다. 76명의 명단을 보면, 그 중 당파를 알 수 있는 인물 64명 중 노론 56명, 소론 6명, 북인 2명, 남인은 없다. 단적으로 3부 노론사관과 맥락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노론이 친명 사대주의를 주창한 이유는 성리학을 무기로 국왕과 권력투쟁을 하기 위한 것이며, 임금이나 왕조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 대신 개인과 집안, 당파의 이익에 민감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했고 일제 수작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이덕일은 분석한다.
이런 가운데 해방 정국 이후 친일파와 친일사학자가 주류 세력이 되다보니, 독립을 쟁취하고 새 정부가 수립하면 독립운동사 연구가 붐처럼 일어나는 것이 보편현상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까지 상아탑 내에서 현대사 연구는 터부시 되어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고통과 가난 속에 삶을 마감하여 자료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국사교과서'는 무장투쟁보다 식민지 체제 내의 애국계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 등을 위주로 서술하다 보니 마치 항일 무장투쟁이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형편 속에서 해방 후 수립된 정부 성격이 민족정체성 수립과 거리가 먼데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표창과 친일세력에 대한 정리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부 수립 후 과거사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적 표창과 친일파에 대한 청산고 함께 각종 식민지배 이론에 대한 청산작업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현재까지 짐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덕일은 이승만 정부 시절 독립유공자로 표창을 받은 사람은 이승만 자신과 혼자 받으면 비난이 일까봐 준 이시영 부통령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이러니 독립운동가를 발굴할 이유도 없고 안중근, 홍범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열사 그 누구도 독립유공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며, 역사다.
참고로 이덕일은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난 보수우익이고 싶다, 쫌~~~ 글샘 ㅣ 2013-09-09 ㅣ 공감(14) ㅣ 댓글 (7)
한국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떠드는 인간들의 목적은,
한국도 역사를 쫌, 지들 입맛에 맞게 고쳐서
국민을 지들 입맛에 맞게 우민화해야한다는 것일 때가 많다.
그 인간들은 '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좌편향이거나 민중주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고 침을 튀기고,
새로운 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적이어야하며, '국가관'을 투철하게 해야한다고 핏대를 세운다.
그렇지만, 한국사 교과서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서술되었는지,
쥐박 각하께옵서 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아예 교육과정에서 삭제하시었는지,
이 책을 보면 답이 나온다.
한 마디로, 한국 역사학계의 '태두'부터 역사학의 적자(종손)는 '노론'계열과 '친일' 계열이었다.
미국 군정이 남조선을 접수하고 젤첨에 한 일이 '국립종합대학교설립안'이었으며, 그것이 무지 심한 반대에 처했더랬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미국은 그렇게 서울대학교를 설립하여 그 노른자를 친미주의자로 심었다.
그리고 '친일파 척결'이 이뤄지지 않은 '대한민국' 에서 '노론-친일-친미'의 계열은 하나의 동아리를 형성하였다.
식민지와 전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를 뼈저리게 겪은 민중은,
박정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베트남 전쟁, 정경유착과 재벌 위주 경제 파탄, 부의 편중, 국민의식 억압' 등에는 관대하고,
먹고 살게 되었다는 하나만을 통해 '국익'을 실감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노론-친일-친미' 계열의 '한국사'를 가르치는 일은 '국익'과 직결된다는 이상한 사고를 갖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나라들에서는 파시즘적 독재가 쉽게 힘을 얻는다.
군주는 야수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특히 여우와 사자의 성질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자는 책략의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힘으로 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는 함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 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마키아벨리, 군주론)
이런 것이 16세기 마키아벨리의 약한 나라의 군주에게 바쳤던 충정이었다면,
1960년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설파한 '헌장'을지은 것 역시 그런 충정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국가인 것이다.
21세기에도 발달한 인터넷에 족쇄를 채우려 하고,
가려지지 않는 하늘을 가리려 '공권력'을 내세우는 정권이라면,
'민주주의' 이념보다는 차라리 마키아벨리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왕조'의 이념을 따라는 자들이리라.
그래서 한국의 '시위대' 맞은 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버이 연합'이 있다.
한국의 시위대가 주장하는 바는 대부분 '보수적 주장'이다.
소고기 좀 정체를 알고 수입하자.
광우병 소고기를 한국만 제한없이 수입하는 일은 주권을 버리는 일이다.
라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부터,
선거법을 위반한 투표하면 무효가 아니냐.
국가 기관인 국정원과 선관위가 <국민투표>에서 불법을 자행했다면 그걸 조사하라.
이런 문제까지, 이건 지극히 체제 내적 문제고,
합헌적인 문제제기이며,
보수적이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우익>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들을 '빨갱이'라고 내몰면 ㅋ~
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욕먹을 건 지들도 아니까,
<종북>이라고 ㅋㅋ, (얘들아, 종북보다는 빨갱이~가 만국 공용어란다.)
그래가지고, 진짜 '적국'인 북한을 따르는 거라면,
'어버이 연합'이나 '경찰'이 아니라, '국군'이 진압해야 할 세력이라면, 탱크를 몰고 올 일이지,
왜 정체 불명의 '어버이 연합?'
그건, 그들의 사고가 지극히 '봉건적, 노론'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장유유서, 부자유친의 수직 질서를 내세워, 할아버지를 칠래?
한대만 쳐봐, 조중동에 대서특필~ 일파만파~ 작전으로 나갈거니깐.
이러는 것이다.
이덕일의 이 책에서는 한국사에서 '노론과 친일'의 입장에서 우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류에 쏠린 저자의 관점은
왜 한국 현대사가 이렇게 왜곡되었는가,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가려지고 호도되는가>를 탐구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노론'과 '친일'이라는 같은 집단이 이적지 이 나라의 '역사학계'의 주류였음을 역설하는 책이다.
정조는 정말 심환지와 친했고, 독살 안 당했다는 '노론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건지,
송시열은 북벌론자고, 이율곡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노론의 주장은 진짜인지,
이 책은 자료를 살펴가며 이야기를 풀고 있다.
정조가 노론 벽파를,
다른 장점은 없고 남의 옳지 않은 점을 보면 힘껏 말하고
통렬하게 배척하는 것 뿐,
모두 아침에는 동쪽으로 갔다가 저녁에는 서쪽으로 가고
냄새를 쫓아다니며 모였다가 흩어지는 무리들...(298)
이라고 비난한 것은, 요즘의 정치인들이랑 별다를 것도 없어 보여 씁쓸하다.
국왕이 노론과 반대되는 행보를 걸을 때는 독살도 서슴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노론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이 부족한 반면
개인과 집안, 당파의 이익에는 민감했다.(323)
그리하여 그들은 사직이 기울어질 때,
임금에 대한 충성보다는 집안이나 당파의 이익을 위해 친일파가 되기에 이른다.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친일세력이 청산되기는 커녕
해방 후에도 사회 주도세력이 되었던 정치상황이
학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역사학계는 조선 후기 노론과
일제 식민사학을 계승한 학자가
이른바 태두로까지 등극했다.(337)
이렇게 비틀어진 역사를 안고 지금까지 흘러왔다.
한국사 바로세우기를 위하여 힘썼던 한홍구 씨 같은 이는 이제 다시 빨갱이 학자가 될 판이다.
난 그냥 내가 먹고 사는 일에나 애쓰고,
보수적 가치나 애들에게 이어주는 교사로 만족하고 싶다.
그리고 월드컵을 즐기며 대~한 민국이나 외치는 우익으로, 멍청하게 살고 싶다. 쫌~~~
역사적 진실은 어떤 것일까? tabulasa ㅣ 2012-02-24 ㅣ 공감(0) ㅣ 댓글 (0)
우리 역사에서 고유한 역사의식이나 시대정신을 가진 위정자의 정치가 얼마나 있었는지?
당쟁, 당파 , 그리고 소수자 그리고 승리한 자들의 목소리만 남은 역사가 우리의 역사인것 같다. 지금도 친일 , 독재세력이 대한민국의 정치를 좌지우지 하고 있으며, 그들의 논리에 빠져서는 진보하는 시대정신이나, 역사의식을 요구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현실이다. 왜 그럴까? 진실은 승리한다고, 사실은 사실로 존재한다고 배우고 믿고 있는데 , 현실 세계에서는 거짓과 허위와 위선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한발짝의 역사적인 진보도 어렵게 만들고 있으니..
광대한 영토를 가진 우리의 과거사를 왜 숨기고 싶어할까? 그 논리에 따르고자 하는 것은 자신만의 기득권에 정통성이 부정되니까.그 뿌리는 의외로 깊고 단단하다. 무장독립투쟁의 의미 축소 아니 아예 기술조차 하기 싫어하는 집단은 이 나라에 불필요한 존재들 아닌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가 이렇게 우리의 삶에도 , 우리 미래의 삶에도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을까? 제대로된 역사로 되돌릴 수 있을까?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시대정신은 고사하고 , 과거로 회귀하는 세력에게 기회를 주고 우리의 미래세대에게까지 짐을 지울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한 발 역사적 진보를 하는 선택을 할 것인지. 그래서 정치는 우리 삶에 중요한 것 같다.
그것이 역사의 한 장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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