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교수의 북한인식
송두율교수의 북한인식
홍진표
이글은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일하는 시대정신 [2001 05-06월호] 제15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
1.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논란
1998년 前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는 <북한의 진실과 허위>라는 글에서 송두율 교수가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밝히고, 이에 송 교수가 이를 부인하며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면서 시작된 논란은 아직까지 법정공방을 비롯하여 긴 시간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의 핵심은 결국 누구의 말이 진실이냐는 것이다. 즉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황장엽씨가 송 교수의 문제를 처음 밝힌 글의 원문을 보자.
<예를 들어 나는 독일에 있는 송두율 교수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총명하고 박식한 학자이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 학생들과 독일에 있는 남한 유학생들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김철수라는 가명 밑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하고 김일성이 접견한 사진을 신문에 크게 보도한 바 있다.
그러면 김정일이 그를 믿고 있는가? 김정일도, 통일전선부 간부들도 그를 믿지 않고 있다. 대남공작을 하던 이선실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북한에서 그는 가련한 존재로 되고 있다. 만일 송두율 교수가 이선실을 직접 만나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면 이선실을 통하여 김일성, 김정일에게 속아서 한 생을 헛되이 보내고 남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얼마나 가슴아픈가에 대하여 반드시 듣게 될 것이다.
김일성이 새로 건설된 광복거리를 돌아보러 나갔을 때 한복차림으로 참가했던 이선실이 큰마음 먹고 김일성을 찾아가 큰절을 올렸는데 김일성은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였다. 그녀가 물러난 다음 김일성은 수행한 간부들에게 어떤 여자인가 물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목격하고 대남공작에 동원되는 사람들의 신세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절실히 느꼈다.
독일에 있다가 작고한 윤이상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김정일이 애국적 민주인사들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민족의 운명이란 제목 밑에 그에 대한 영화까지 만들도록 하였지만 김일성은 어느 날 나에게 윤이상은 간첩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후 그가 곧 사망하였기 때문에 무사하였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북한 통치자들에게 욕을 보았을 것이다.
송두율 선생은 어떤 문제를 보는 데서 나와 견해를 달리 할 수는 있어도 내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노리고 송 선생 같은 학자를 팔아먹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김일성, 김정일과 같이 오랫동안 일하면서 그들을 섬겨온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의 허위와 기만을 더 참을 수 없어서 가족과 친지를 다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들과 결별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송 선생이 냉정하게 북한 통치자들의 허위와 기만에 찬 말과 행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전망이 전혀 없는 그들과의 관계를 하루라도 빨리 끊고 우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우리와 서로 힘을 합쳐 나가자는 것을 간곡히 권고하고 싶다.>
황장엽씨는 송 교수에게 북한정권에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라는 충고 내지 경고를 공개적으로 한 셈이다. 황장엽씨는 그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한울, 1999)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독일에 있는 송두율 교수와 남한의 소설가 황석영과도 만난 적이 있다. 송두율 교수에게는 주체사상의 진수를 알려주려고 시도했으나, 북한의 실정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사실 북한당국이 그를 신뢰하는 차원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들의 나쁜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그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을까. 김용순은 나에게 송두율 교수를 교양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송두율은 주겠다는 것인지 달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미치광이여서 다른 사람이 상대하기가 어렵소. 황 비서께서 좀 영향을 주어 그의 머리를 고쳐주시오.
김용순과 통일전선부 일꾼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안다면, 송두율 교수 본인은 뭐라고 말할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황장엽씨가 송 교수를 문제삼은 동기에 대해 송 교수 측은 나도 너무나 궁금하다. 다만 1991년 사회과학원에서 강의할 당시 많은 사람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심어준 점, 특히 김일성 주석과 이례적으로 몇 시간 동안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깊은 얘기를 나눴고 「로동신문」에 크게 보도됐다는 점 등이 황장엽으로 하여금 송두율이란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비록 해외에 머물고 있지만, 남한 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나의 학자적 자질 문제지 결코 정치적 영향력 문제일 수는 없다.(민족 258쪽)고 추측한다. 비록 우회적 표현이지만 자신의 실력 내지 영향력에 대해 황장엽씨가 시기해서 모략을 한 것으로 주장한다. 더구나 북한에서 자신이 인정받는 것은 어떤 정치적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북한당국이 자신의 학자적 자질을 제대로 평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송 교수는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문제에서 유력한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국정원이 황장엽씨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결론이 내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신건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에서 송두율씨는 김철수란 가명을 사용하는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확신한다 이어 송 교수의 과거 보안법 위반행위는 반드시 수사할 대상이며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어 입국하면 수사한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황장엽씨를 오랫동안 안가에서 보호하고 있는 국가정보원의 최고 책임자가 황씨의 주장이 틀렸다고 반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국정원이 황장엽씨의 얼굴을 의식해 황씨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이 아닌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이런 문제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인간관계를 고려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송 교수는 독일 국적자이기 때문에 국정원이 그의 신분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황장엽씨를 이른바 일반관리로의 전환을 추진했던 현정부가 그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난센스다.
흥미로운 것은 송두율 본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극력 부인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의 일부 언론을 비롯하여 지식층에서 송 교수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근래 송 교수의 칼럼이 국내 언론에 실리고 있는 것이 논란이 되자 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는 송 교수는 70년대 유신독재 철폐에 앞장섰으며 최근에는 국내 유수 학자들과 함께 남북한 해외학자 통일회의 개최를 위해 노력하는 등 학문적 양심과 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지성인이라며 송 교수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권유린은 송 교수 뿐 아니라 그의 지성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추진위에는 한완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김중배 「문화방송」 사장, 민주당의 김근태, 이재정, 임종석 의원 등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 교수의 책 출판을 비롯하여 고정 지면을 할애해온 「한겨레신문」이 송 교수의 결백을 옹호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지만 이에 동참하는 다른 언론들도 눈에 뛴다. 지난해 「중앙일보」의 권영빈 주필(당시 논설위원)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는 칼럼에서 그의 저술이나 대화를 통해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나는 믿는다. 그 스스로도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여러 번 밝혔다., 또 지금은 남북 정상이 약속하고 선언한 민족협력과 상생의 시대다. 송두율만큼 북한을 객관적으로 알려 하고 사실상 북한의 주체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한 학자가 없을 것이다., 물론 남는 의문은 있다. 그는 정말 북한정권 21위 서열의 정치국원 후보 김철수인가. 이 의문에 대해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독일 국적인 나를 어떻게 정치국원 후보로 올릴 것인가. 누군가의 음해다. 설령 북한 내부에서 그런 인사를 했다 해도 본인에게 사후 통보라도 할텐데 그런 사실조차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글로 썼다고 황장엽씨를 명예훼손죄로 고발했다., 이제 이 의문을 풀 주체는 국정원이다. 정치국원 후보 김철수는 베일에 싸여 있는 간첩으로 알려져 있다. 간첩 김철수와 송두율의 동일인 여부는 국정원이 총력을 기울여 그 진상을 밝혀내야 할 기본업무다.
송 교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학자이기 때문에 그가 북한노동당원일 리가 없으며 이를 부인하는 그의 주장을 매우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송 교수의 부인논리는 부인 그 자체일 뿐 특별한 논증이나 정황증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독일 국적인 나를 어떻게 정치국원 후보로 올릴 것인가.- 법률적 국적이 어디냐가 북한노동당 비밀당원이 되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가 들어 알고 있는 김철수는 네 명이다.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친북 인사 金모씨, 오스트리아 빈에서 한국 학생 두 명의 방북을 주선한 김철수, 「강철 서신」 의 저자 김영환을 북으로 데려간 김철수, 그리고 서경원 전 의원이 방북할 때 여권에 사용한 김철수 등이다. 그러나 이 네 명의 김철수는 모두 나와 상관없는 인물들이다.- 김철수라는 가명을 쓴 인물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송 교수가 김철수라는 가명을 쓸 리 없다는 증거가 전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가명이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김철수라는 가명논란은 이 문제의 극히 지엽적인 부분이다.
설령 일방적으로 정치국 후보위원자리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최소한 당사자에게 통지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솔직히 후보위원 자리가 뭐 그리 우스운 자리라고 당사자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박수 치고 끝내겠나.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본인은 모르기 때문에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할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인데, 이 또한 부인한다는 동의어 반복 이상은 아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학자에게 예우상 권력서열 23위 후보위원 자리를 내준다면 평생을 사회주의 건설에 몸바쳤다는 황장엽씨보다도 높은 서열 아닌가 - 말 그대로 실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우상의 직책인 만큼 권력서열은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부인의 합리적 논거가 될 수 없다. 유명한 대남공작원 이선실도 예우상의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
국정원이 그 최고책임자가 직접 공개적으로 수 차례에 걸쳐 송 교수가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논리로 이를 부인하고 있는 송 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며 부당한 권력 또는 냉전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동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앙일보」 권영빈 주필처럼 그의 학자적 양심을 신뢰하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송 교수가 북한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과연 그런 평가가 타당한가. 이런 의문에서 출발해본다.
2. 송 교수의 철학 경향
송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67년에 독일로 유학하여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국적을 취득하여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줄곧 학자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한편 그는 독일교민사회를 기반으로 반유신투쟁을 시작으로 민주화운동을 앞장서서 전개하여 군사정권들로부터 이른바 반체제인사로 억압받아온 실천하는 지성이기도 하다. 그의 북한에 대한 관심에는 두 가지 동기가 발견된다. 우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막스베버에 있어서 동양세계의 의미」라는 주제였으며 1982년 교수자격 논문도 소련과 중국에 대한 비교연구를 내용으로 했고, 그해 6월에 있었던 취임강연의 제목도 현실사회주의의 한계 문제에 대해서였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나름대로 맑스주의철학을 비롯하여 사회주의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북한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번째로는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북한에 대해 갖게되는 미묘한 관심이다. 박 정권 등이 반공반북을 강조하는 만큼 이에 대해 일단 의심을 갖고 접근해보는 심리이다. 특히 독일은 동백림 사건으로도 유명하듯이 북한대사관에의 접근이 용이한 매우 특별한 지역이었다. 송 교수는 유학이래 한번도 남한을 방문하지 못했으나 지난 9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송두율은 자신을 독일어로 그렌츠갱어(Grengzganger) 즉 경계인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대해 그는 경계인은 민족분단으로 생긴 남과 북사이에, 동양과 서양사이에, 그리고 부국과 빈국이라는 북과 남사이에 있는 경계에 살고 있다는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경계가 단순한 선(線)이 아니라 전체성의 철학을 내포한다는 의미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세르(Michel Serres)는 통합하고 또 배제하는 제3이라고 부르고 있다. 평소 나는 남과 북, 동과 서 그리고 북과 남 사이에서 양자를 통합하면서도 또 이 양자를 동시에 배제할 수 있는 긴장에 주목해왔다. 그러나 양자를 통합하면서도 또 양자를 배제-원효의 역동역이(亦同亦異)와 비동비이(非同非異)의 세계처럼-하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느끼면서 지난 30년을 유럽에서 살아왔다. 경계인의 삶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르지만, 이 통합하고 배제하는 제3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앞으로 남은 과제다.(「민족」 189-190쪽)
그는 남북한문제에 국한하자면 어느 한편에 편파적이지 않고 양쪽을 다 아우르는 그런 위치에 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만큼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나를 계속 친북 인사로만 규정한다.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남한정부는 오히려 나를 잘 이용해서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도 있다. 나를 친북 인사로 얽어매야 살 수 있는 세력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민족」 199쪽)는 말처럼 공정한 태도의 견지에서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인 중간매개자의 역할까지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동서냉전의 종결과 함께 물질적인 풍요와 자유주의 외에는 어떠한 이념도 존재할 수 없는 역사의 종언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도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밑에 전개되고 있는 가장 순수한 자본주의는 그러나 가깝게는 직장 내의 동료간에서 멀게는 지구적 범위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적 연대성을 무서운 속도로 허물고 있다. 나없는 우리도, 우리없는 나도 없다고 하지만, 현실은 나라는 이해관계-그것은 개인적인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초국가적인 자본일 수도 있다- 가 철저히 관철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이 시정되지 않고는 결국은 너나할 것 없이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대화」 253쪽)
위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철학 경향은 통상 신좌익으로 분류될 수 있다. 물론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인 하버마스의 지도를 받은 것에서도 그의 학풍은 알 수 있다. 요즘처럼 좌우의 구분이 애매해진 시점에서 전형적인 좌파의 모습을 그려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만 노자(勞資)간의 계급갈등을 위주로 사회를 분석한다든지,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반대하고 정부 주도의 복지정책의 강화를 추구하고, 생태주의적 경향을 띠는 등 흔히 말하는 유럽좌파의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한국 좌파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송 교수의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작업은 급진주의적 기준에 따른 민주주의의 결핍문제가 한 주제를 이룬다. 사회민주주주의자들의 반응도 나라마다 다르지만, 신자유주의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를 결합시킨 이른바 제3의길을 지구화시대에 사회민주주의가 재생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적극적인 시민사회와 긍정적인 복지국가 또는 생산적 복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재생해야 할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도대체 있기는 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민족」 95쪽) 구미 지식사회와 우리 지식사회가 다르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우리 지식사회의 정체성 확인 작업의 시작이라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복지사회의 기본 틀조차 변변찮은 우리 조건에서 생산적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 종종 그래왔듯이 바로 이 다름에 대한 무감각이 빚어낸 또 하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시키는 복지가 노동자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는 정책이라고까지 비난받고 있는 영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생산적 복지도 결국 노동자에게 채찍만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최근 격양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민족」 153-154쪽)
유럽의 민주주의 발전에 비하면 한국은 천박한 수준에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의 논의를 할 만한 토양이 아니라는 것을 다소 냉소적인 분위기로 강조하고 있다.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가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많이 띠고 있는 유럽식 민주주의를 선호하고 이를 한국 사회 비판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는 것이다.
3. 송 교수의 북한인식
1) 내재적 접근법
그의 북한론에 있어서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것이 내재적ㆍ비판적 접근법이라는 방법론이다. 지난 1988년 북한 사회를 평가하려면 북한 사회 내부의 내재적 요구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내용의 내재적 접근법을 제시해 국내에서 신선한 평가를 받았다고 평가되는 그의 방법론에 대해 정의를 하자면 내재적 접근법이란 예컨대 인류학(Ethology)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일반적인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학문 영역에서 일반화된 방법론을 내가 북한 사회 분석에 적용했다고 해서 곧바로 북한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술수라고 매도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판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원리가 얼마만큼 구현돼 있느냐는 문제의식을 통해 드러나듯이, 이런 방법론은 남한 사회 분석에서도 얼마든지 의미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 259쪽)
주로 문화인류학에서 특정 문화(주로 서구)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비교비판하고 우열을 평가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대두된 이 방법론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송 교수의 발명품은 아니다. 이를 북한 접근에 응용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적 상대주의와 연결되어 제시된 이 방법론을 북한 사회 분석의 일반적인 것으로 채택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예컨대 북한의 표준말이 평양중심이라는 것은 상대주의로 보는 것이 맞겠지만 일당독재체제라는 것은 남한과의 비교를 떠나 현인류의 민주주의 관념이나 정치문화의 발전수준에 비추어 얼마든지 비판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즉 내재적 방법론은 극히 제한적인 영역에서 그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일반론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지난번 일어난 서해안 충돌 사건만 해도 남북이 서로 달리 해명하고 있다. 특히 언론이 진실을 만들고 있다. 내재적 접근방식으로 서로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 7ㆍ4남북공동성명이 명시한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실천하여 남북이 서로 신임할 수 있어야 한다. 한ㆍ미ㆍ일 공조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남과 북이 공조해야 한다.(「민족」 198쪽) 이 구절은 송 교수가 내재적 방법론을 적용한 사례 중의 하나인데 서해안 충돌 사건에 대해 남북이 각자 자기주장이 있다는 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아주 당연한 일이며, 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우선은 휴전협정위반자가 누구냐는 정도일 것이다. 이걸 내재적 접근방식으로 보면 도대체 무엇이 달라 보이는지 납득이 쉽지 않다.
자기 속의 타자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정립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자기와 똑같지 않으면서도 남이 아닌 자기 안의 타자로 상대방을 대할 때,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관점을 인정할 수 있는 합리성과 함께 관용과 여유를 배울 수 있다. (「민족」 282쪽) 송 교수는 내재적 접근법에 대해 이와 같이 정서적인 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발상을 북한에 적용해보자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마치 우리 일처럼 생각해보자는 것은 북한에 대해 무관심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지적이다. 그런데 송 교수는 이 역지사지의 사고법을 주로 북한의 잘못된 체제나 정권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데 적용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북한 동포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애정의 표시라고 할 수 없다.
송 교수는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 사회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북한정권과 북한 주민이 상호 이해가 일치되는 공동운명체의 관계로 전제하는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가 권력의 분권, 대의정치, 고도화된 경제의 사법화 등을 내용으로 했다면, 인민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당의 정치적 권력의 독점, 노동계급과 인민간의 이해의 동일성 등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대화」 116쪽) 남한 사회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주로 자본 위주의 지배층과 피지배민중)의 갈등구조로 파악하면서 북한은 달리 보는 것이다. 송 교수의 북한에 대한 이 전제에 오류가 있다면 아무리 탁월한 방법론을 고안하고 적용하더라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내재적 접근법도 그 자체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보다는 북한 사회의 정권과 민중사이를 지배, 피지배의 관계로 보느냐 아니면 북한정권이 주장하듯이 수령-당-대중의 통일체로 보느냐라는 근본문제를 따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그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2) 북한 비판의 모호성
송 교수의 글 어디를 뒤져보아도 북한의 정권과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간혹 북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지만 너무나 막연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조차 이해하기 쉽지 않다. 반면 남한 사회에 대해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비판을 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만약 송 교수 스스로 북한정권과 일체감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면 이는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객관적인 학문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의문을 갖게 된다.
어떤 사회주의 체제를 불변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선험적인 체제존재론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나의 소련과 중국 사회주의 비교연구를 북의 사회주의 연구에까지 확장한 이 방법론은 지금 시점에서 북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고 본다. 북의 주체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상과 결과 사이의 괴리가 국내외적인 조건 속에서 과거보다 현재 더 커졌다는 사실과 함께 주체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경제에서 새로운 관계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북 자신도 말하고 있다. (「민족」 184-185쪽) 그가 그나마 북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것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언급하는 차원이다. 보기에 따라서 북한 비판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항상 차이가 있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개념으로 현재 북한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 이상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지적에 다름 아니다.
송 교수가 북한정권의 정책 등에 대해 언급한 몇 가지 사례를 더 살펴보자.
북한입장에서 이산가족 문제는 역시 예민한 문제입니다. 최소한 장기수 송환이 이뤄지고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만나는 것은 어렵겠지만 잘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언론입니다. 북쪽의 가족과 친척을 만났더니 못 먹어서 그런지 피골이 상접했더라는 식의 기사가 계속 나간다면 저쪽에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지요. 언론이 이런 점을 유의해서 잘 협조한다면 순탄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민족」 287-288쪽)
북한정권이 이산가족 문제를 예민하게 느끼는 원인은 무엇보다도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주입해왔기 때문이다. 굶주리고 헐벗고 미군들의 상시적인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식의 선전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이런 선전의 허구가 드러나는 것이 정치적인 불안을 야기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다. 더구나 월남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은 대체로 여러 가지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살아온 하층민들이다.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정권을 자극하지 않는 정치적인 고려는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면이 이 문제의 본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좌파가 스탈린주의의 테러와 억압에 대해서 비판을 자제했다는 공격-이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퓌레(F.Furet)의 『환상의 끝: 20세기에 있어서 공산주의적 이념에 대한 시론』이나 쿠르투아(S.Courtois)등이 최근 펴낸 『공산주의 흑서: 테러, 억압』등에서 지적되고 있다-과 함께 좌파 지성의 인간주의적 동기와 이상향의 추구가 결국 공산주의라는 현실적인 재앙에 눈감았다는 비판은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논리 밑에서 줄곧 있어왔다. 즉 북한의 모순에 대해서는 눈감고 남한 사회의 모순만을 시비한다는 비판은 북풍을 둘러싼, 남북의 집권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적인 공존관계에 관한 확증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렇게 20세기말을 보내는 분위기가 어수선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경제위기 속에서 고통분담이 노동을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삼는 수많은 근로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마시는 물과 호흡하는 공기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끔 만든 환경오염문제, 미래를 위한 가장 값진 투자라는 교육의 심각한 파행성 그리고 민족분단에 뿌리를 둔 이성 잃은 정치문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 앞에 손을 털고 주저앉거나 회의와 냉소 속에서 시간만 보낼 수는 없다.(「대화」 25-26쪽)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송 교수도 서구에서 좌파지식인들이 소련의 강제수용소 등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모르는 체 했던 편파(偏跛)성에 대해 비판이 가해졌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 사회를 얼마나 비판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기준을 북한 사회에는 왜 적용하지 않는가에 있다. 작은 악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더 큰 악에 대해 침묵한다면 적어도 양심적인 학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북한의 식량난
지난 95년부터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식량난은 수백만의 아사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상당히 완화된 현재도 여전히 식량 배급체계는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송 교수는 북한 식량난의 원인에 대해 북한이 현재 맞고 있는 경제위기는 식량위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북한은 이러한 위기의 원인을 지난 몇 년 동안 지속된 자연재해(이상기온, 홍수, 해일 및 가뭄)로 보는데 반해, 남한과 국제기구의 농업전문가들은 자연재해도 한 요인이지만 이보다는 북한농업의 구조적문제(농민의 생산의욕 저하, 육종기술의 낙후, 비료와 농약 생산의 정체 등)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자연재해에 남한과 국제기구는 인재에 각각 분석의 역점을 두고 있다.(「대화」 95쪽)며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한다.
이어 자신은 내가 북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시점이 수해 이전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수해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의 농업생산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농경지의 협소, 집약적 농업이 동반하는 토지의 산성화, 지력감퇴 등의 문제와 농기구 동력용 기름ㆍ비료ㆍ농약의 부족, 농민의 성취동기 약화 등)가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1995년과 1996년의 수해가 결정적으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민족」 186-187쪽)
전에는 부족분을 사회주의권과의 구상무역을 통해 해결했으나,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무역이 경화결제 방식으로 전환한 탓에 1990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식량공급 체계에 어려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역시 1990년대 중반에 연이어 찾아온 자연재해였으며, 이로 인해 산업의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생긴 농약과 비료, 농기구의 부족은 농업생산의 전반적 침체를 가속화했다.(「대화」 96쪽)며 농민의 성취동기 약화를 지적하기는 하지만 사회주의권 몰락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외부적인 원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중국,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을 다년간 연구했다는 학자가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 이른바 북한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중국과 베트남의 예를 보더라도 농업개혁을 통해 개인의 생산의욕이 고취되는 방식으로 전환시킨 후 만성적인 식량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백 보 양보해서 북한 식량난의 원인이 자연재해에 있다고 하더라도 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수해가 났다고 해서 기아사태 발생이 필연화되는 그런 법칙은 없다. 당장 그 해에 먹을 식량이 부족하다면 농산물을 수입하면 된다. 김일성의 장례식과 무덤을 꾸미는데 엄청난 외화를 쓴 것을 보면 북한정권이 그만한 외화가 없는 것도 아닐텐데, 여하튼 식량난을 방치하고 말았다. 더구나 북한정권은 정치적인 이유도 아니고 오로지 먹을 것을 찾아 중국동북지방으로 넘어간 탈북난민들을 극도로 탄압했다. 어떤 경우에도 국가가 식량을 독점 공급하는 북한체제에서는 식량난에 대해 정권의 절대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결국 자연재해를 식량난의 원인으로 강조하는 것은 고의든 아니든 북한정권의 책임을 면해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송 교수는 한발 더 나가 북한농업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있다. 다음의 글을 보자.
현재 북한농업이 당면하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 즉 농업생산량의 절대 부족→공급체계의 마비→농민시장의 활성화→사회적 불평등의 증폭을 하루빨리 끊기 위해서도 농민의 생산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생산조직의 구조를 중국처럼 개혁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얼마 전부터 북한도 작업반(대체로 전통적인 마을 크기를 생각하면 된다)단위의 생산과 분배를 이보다 더 작은 단위인 분조(대체로 5∼6가구의 크기를 생각하면 된다)로 넘겼으며, 이 분조는 일정한 계약에 따라 생산물 중 일부를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체소비를 하거나 농민시장에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농업생산이 가족 단위로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경우와 다르고, 또 제한된 지역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점에서도 이를 북한농업의 중국식 개혁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결론이다. -중략-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농업생산과 분배의 단위를 하향 조정하는 문제를 현재 북한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책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사회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집단주의를 내부부터 붕괴시킬 위험을 안고있고, 아직도 북한인구의 약 40%를 점하고 있는 농촌인구를 생각할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화」 95-97쪽)
송 교수는 북한에서 농업의 개혁이 필요한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견해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북한정권이 그러한 정책을 쉽게 쓰지 않을 것이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다는 식의 화법을 쓰고 있다. 비록 우회적이고 복잡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글의 맥락으로 보면 북한정권의 정책을 지지하고 적극 변호하고 있다는 정도는 극도로 둔한 독자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저서에서 미묘한 대목에 이르면 이처럼 북한정권의 정책 등에 대해 일종의 해석만을 하고 자신의 입장은 아끼는 경우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역시 현재 북한의 제반정책에 대해 송 교수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이를 지지하는지 아니면 북한을 의식하여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주장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북한체제에 대해 대단히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남한의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는 그가 북한 주민의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못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민사회문제는 선진자본주의 사회 또는 이러한 사회로 진입하려는 남한과 같은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특히 소련과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시민사회의 부재 또는 미성숙이 꼽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문제는 민족통일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북한사회주의와 관련한 중요한 화두를 제공하고 있다.(「대화」 123쪽)며 북한에서의 민주주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결국에는 그리고 이른바 반(半)아시아적 상태로 남아있었다고 본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구에서 현실사회주의가 사라지고 난 후, 특히 국가주의적 전통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장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을 때 일어난 중국의 천안문사태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사회주의의 내부에서부터 분출된 시민사회에 대한 희망의 표현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인권문제에 대한 서방측의 공개적인 개입은 물론 서방측으로 망명한 인권운동 지도자들의 국내지하세력과의 연계 기도도 공공연하게 이야기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중국에서도 시민사회의 성립과 성장을 촉진할 것으로 보는 것은 희망 섞인 관측일 뿐이다. 북한에서는 지금까지도 통제가 너무 심해 불가능했지만 경제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암시장같은 지하경제가 확산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한 피치 못할 인구이동 등이 일어나 중국의 천안문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시민사회에 대한 북한 주민의 욕구도 분출되고 조직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희망 섞인 주장일 뿐이다. (「대화」 124쪽) 재판 없이 구금되고 처형되는 유례없는 인권탄압은 차치하고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권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북한 사회에서 그 방법과 과정, 그리고 시기는 예상할 수 없더라도 결국 민주화의 길을 가리라는 것은 오랜 인류의 경험상 확신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학자라는 사람이 그 필요성은 아예 일축하고 그 가능성마저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4) 김정일 평가
송 교수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평가를 보게되면 그의 북한체제에 대한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김정일 위원장은 그렇게 쩨쩨하거나 남의 뒤통수를 치는 사람이 아니다. (「민족」 278쪽), 김 위원장은 두뇌회전이 빠르고 스케일이 큰 인물이다. 특히 오십대의 젊고 패기 있는 인사들이 핵심 참모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민족」 280쪽), 북한 주민은 최근 몇 년간의 어려운 시기를 김 위원장의 판단과 식견과 정치력에 의존해 극복해 왔습니다. 오죽했으면 김 위원장만 믿고 따른다는 슬로건이 있겠습니까(「민족」 287쪽)
송 교수는 김정일 위원장이 정치지도자의 높은 자질을 갖고있고 나아가 북한 주민들과 일체감을 갖고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언론을 통해 비친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을 본 남한 국민들이 그의 몇 가지 겉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북한에 대해 각종 정보를 접하고 빈번하게 북한을 드나들고 있는 송 교수가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의아스럽다. 김 위원장이 두뇌회전이 빠르다는 것은 인격에 대한 평가는 아니기 때문에 따질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왕의 남북관계를 보더라도 김정일 주도하에 뒤통수를 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그런데도 김정일 위원장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외세와 결탁한 남한 일부세력의 고의적인 공격으로 인해 한국정부가 흔들리거나 할 때 김 위원장이 서울 방문을 결단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사태를 내버려둔다면 그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민족」 288쪽) 이 대목에 이르면 송 교수는 김정일 위원장을 매우 숭고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런 송 교수의 김정일 평가에 대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 주간지의 기자는 그 동안 해외 반체제인사로만 인식돼 온 송 교수가 북한 지도자와 그 체제에 대해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고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인물로 떠오른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4. 당파성
송 교수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북한정권에 대해 당파성(黨派性)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당파성이란 진리가 무엇이든지 오직 그 당파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당파성이 우선시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여야관계에서도 이른바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의해 진실이 무시되는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 당파성은 어느 정도 선에서는 허용되고 이해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송 교수는 자신이 당파성을 갖고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기보다는 여러 번 지적했지만 국내 지식계 일부에서 송 교수가 진리를 기준으로 하는 학문의 원칙에 철저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종족적ㆍ민족적 정체성을 위해서 죽을 각오로 투쟁하기도 하지만, 사회주의를 위해서 투쟁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는 사회주의가 본래의 사회정의와 동떨어지면서 조롱거리로 전락하여 냉소주의를 야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지만, 사회주의는 오직 사회정의와 생태계를 위한 새로운 운동이 전 지구적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근본요구 또는 이해와 결합해서 개인들이 자신이 사는 세계를 적극적으로 변혁할 때 가능하다. 새로운 지구적 삶의 형식들이 지구적인 연대성을 촉진하고 지구적인 정의를 추동하는 새로운 철학을 시작해야 한다. (「민족」 96쪽)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송 교수는 사회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북한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시각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관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인정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컨대, 개인우상화 문제만 하더라도 이는 애초에 사회주의 이념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당의 우위라는 맑스주의의 원칙을 버리고 수령을 당의 우위에 놓는 이론을 내 놓았다. 더구나 사회주의 또한 민주주의를 더 철저히 추구하려는 이상을 기본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인권의 사각지대인 북한을 그 일탈로 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송 교수의 글을 보면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그가 자유가 말살된 북한에 대해 시종일관 당파성을 갖고 접근하고 있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지만 미스터리임에 틀림없다.
* 이 글은 송두율 교수의 『21세기와의 대화』(이하 「대화」, 한겨레신문사, 1998)와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이하 「민족」, 한겨레신문사, 2000)는 두 권의 저서를 주로 참고하였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