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3

대한청소년개척단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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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소년개척단

최근 수정 시각: 

분류

 

1. 개요2. 배경3. 진실4. 민정식은 누구인가?5. 상세 실태
5.1. 강제납치5.2. 강제노역5.3. 열악한 복지5.4. 폭력5.5. 삼엄한 경비와 탈출시도5.6. 결혼식 쇼의 실체5.7. 성상납5.8. 암매장
5.8.1. 수습
6. 선주민들의 인식7. 개척 이후

1. 개요[편집]

삼청교육대의 프로토타입이자, 서산시의 흑역사.

제3공화국 초기에 이루어진 부랑아 청년, 윤락녀 등의 인력들을 동원해 서산시(당시 서산군)[2] 인지면 모월리 일대의 뻘밭(폐염전 포함)을 개간하는 정부주도의 사업. 둔전에 해당하는 민둔이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둔전에 대한 기록을 참고하면, 과거에 이루어졌던 것은 정부와 백성들 모두 다 이득이 되는 사업이었던 만큼 합리적이었으나, 개척단은 그렇지 못했다. 

본 문서는 그것이 알고싶다 2018년 3월 3일 방영분(#1113)에 기초해 서술했음을 밝힌다. 

2. 배경[편집]

장면내각을 5.16 쿠데타로 밀어버린뒤, 박정희 정권은 정권에 대한 호응을 환기시키기위한 일환으로 구악일소라는 명목으로 깡패 소탕, 정치범에 대한 재판을 했다. 이때 이정재같은 거물 깡패들이 정부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고 형장에 이슬로 사라졌다는건 익히 알려져있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을 업고 부응해 대한청소년 개척단도 발족하게 되는데, 이때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사업자(?)로 선정된것은 서울에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민정식이었다.[3]

한편으로, 박정희 정부는 미국에서 공여받은 잉여농산물을 처리해야할 방법도 고안해야했다. 
정부는 익명의 군 대령을 대리인으로 보내서 민정식에게 무언가를 제안했고, 민정식 주도로 거리의 부랑아들, 윤락녀들을 모아서 서해안의 한 뻘밭을 개간하겠다고 개척단을 모집한다. 그렇게 수백명이 모였고, 개척단은 서산군으로 향했으며, 이러한 '양아치 총각'들과 '창녀 아가씨'들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집단 결혼식을 올린뒤, 이들의 활약상(?)은 대한늬우스 국책뉴스로써 여러번 선전되기에 이른다. 개척사업이 한창일때,개척단원의 최대 인원수는 1700여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3. 진실[편집]

부랑아 윤락녀 재활프로그램의 탈을 쓴 국가폭력

이들중 일부는 길거리를 떠돌던 거지나 깡패였을지언정, 개척단원이라고 포장된 피해자들중에는 선량한 시민들도 다수 끼어있었다, 아니 이들의 비중이 높았을지도 모른다. 

4. 민정식은 누구인가?[편집]

앞서 말했듯이 민정식은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끌기전에 을지로 일대에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경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공장을 경영하면서 한편으로는 대한청소년 기술보도회라고 해서 정비공장에 청소년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부정부패도 심했다. 
그는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끌게 된뒤로 나는 박정희 대통령 동서다!라면서 동네방네 거들먹거렸으며, 정부로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을 지원받을 명분으로 청소년개척단을 잘 악용했다. 그렇게 지원받은 양곡을 열차로 수송하다가 경유지인 홍성역에서 양곡을 내려서 주변 사람들이 보는앞에서 대놓고 그 양곡을 횡령해서 민간업자들에게 팔았다
또 경찰들을 불러놓고 돈가방을 제시하면 지역 경찰들이 그 돈을 받기에 바빴다. 당시 서산시의 지역 공무사회가 어떻게 돌아갔냐면 막말로 민정식에게 굽신댈정도였다. 민정식이 나타나면 당시 군수에서 경찰서장까지 쭉쭉 따라나서기에 바빴다. 경찰서는 벌벌 떨고 민정식은 무슨 대통령의 사자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에서는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했으며 민정식의 부인에게는 착한어머니상이라는 시상까지 했다. 당연히 짜고치는 고스톱이였다.

민정식의 근황을 추적하던 취재팀은 그가 소유했던 건물의 명의가 민○○ 이라는 사람에게 이전된 것을 보고 그를 추적했지만 그는 2017년경 사망한 뒤였고 어렵사리 유가족을 만나 민정식에 대해 물었으나 유가족은 취재를 거부하여 더이상 추적은 불가능했다.

5. 상세 실태[편집]

5.1. 강제납치[편집]

위에서 언급한 삼청교육대, 그리고 부산 형제복지원과 비슷한 수법으로 통행금지 어겼다고, 길 잃은 아이 유괴하는식으로 납치해간 아무것도 모르는 유소년에서 멀쩡하게 살던 청년들까지 당했다. 그중에서는 제법 인텔리인 이들도 있었다. 이런 소시민들은 주로 통행금지 어겼다고 잡아들어가거나 유괴한 경우가 많다. 이런 불법납치들은 주로 경찰등 공권력에서 실적을 채우기 위해 아무렇게나 붙잡는것이었다. 이는 속칭 '후리가리'[4]라 불렸으며 후리가리로 피랍당해 노역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치를 떨었다.
사례 1. 김귀술 
김귀술은 태평양 전쟁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겪고 돌아와서,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농산물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농산물 판매의 수익금을 가족들에게 보태주고 있었다. 그 가족들중에 20살 터울의 동생인 김막동이 있었는데, 김막동은 어느샌가 '형이 서산개척단에 있다'라는 편지를 받았고 군대를 다녀와도 형의 소식이 감감무소식해서 개척단이 있다는 서산에 가서 수소문해보니 이미 형이 죽어있었다는것이다.
사례 2. 성은석
그는 도시에서 밤늦게까지 가로등, 네온사인등을 설치하는 조명공이었다. 어느날처럼 그는 밤늦게 작업을 끝내고 친구들과 퇴근하다가 (헤어지고?) 통행금지에 걸려서 통금 단속경찰에 의해 끌려갔다
사례 3. 김광덕
양조장 관리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살았던 어린 김광덕. 여름방학에 마산시에 있는 할머니집에 방문하기 위해 열차를 탔는데, 낯선 남자 2명이 수면제를 탄 음료를 그에게 먹이고, 장항선으로 추정되는 어느 역에 강제로 내린뒤 유인해서 끌고갔다. 그리고 캠프에 넣은뒤 '어떻게 들어왔던 알바는 아니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가 아니란다'라고 선언하고 캠프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그 당시 김광덕의 나이 불과 10세였다.

김광덕씨의 사례처럼 이런식으로 캠프에 강제입소된 15세이하의 유소년들은 1962년도 보고서 기준으로 전체 726명중 187명(25.75%)이었다. 캠프 수용인원의 4명중 1명이 어린 아이들이었던셈. 심지어 이런 유소년들중에는 여아들도 다수 포함되어있던걸로 보인다. 
사례 4. 정화자
정화자씨는 어려서부터 크게 부족할것없이 커왔다. 그러나 친정의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정화자도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어려운 사정에 보태기 위해서 도시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정체불명의 남자 두세명이 이 안좋은 사정을 빌미로 '개척단으로 가자, 개척단으로 가면 모포공장이 있는데 거기서 지금 하는일보다 두배는 번다'라고 꼬드겨서 다른 여성들이 타고있는 군용트럭에 태워서 서산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목적지로 이동한 군용트럭은 여성들을 내렸는데, 모월리 해안 벌판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공장이 있다는 말에 속은 여자들이 불평할때, 이들을 수용한 책임자는 "여기가 무슨 공장이냐고? 인간공장이지"라면서 이들을 조롱했다.
여자들의 경우는 위의 사례처럼 공장 여공들한테 '좋은 공장이 있는데 거기가면 돈도 지금보다 두배는 더 벌수 있다'는 취업사기 방식으로 끌고갔다. 

그렇게 끌려간 이들은 일괄적으로 군용 작업복을 입으며 강제노역에 최소 5년이상 동원되었다.

5.2. 강제노역[편집]

무식하게 돌을 날라서 바다를 메우는식의 강제노동을 반복시켰다. 당시는 건설용 중장비가 매우 드물던 시절이라 건설 공사는 거의 인력으로 이루어졌고, 개척단 단원들은 인근 야산에서 채굴한 석재를 일일이 바닷가로 날라 방조제를 축조해야 했다. 간척 공사는 토목 기술이 발달하고 중장비가 즐비한 오늘날에도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는 난공사 중 하나인데 당시의 열악한 조건에서 개척단원들은 그야말로 매일같이 중노동에 혹사당해야 했다. 아이들은 거기에 가축 사료주기나 허드렛일까지 더해졌다.

5.3. 열악한 복지[편집]

영양실태도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밥도 5홉짜리 그릇에 보리밥을 대충 퍼주는 식으로 해결했고, 그나마도 반찬이라고는 소금국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다른 먹을것이 있다면 혈안이 되었는데, 원래 소에게 줄 콩 사료를 빼돌리는걸 개척단원들이 먹다보니 키워야할 소가 굶는(...) 웃지못할 광경은 기본이었고, 굶주린 이들이 그렇듯 살아 돌아다니는것들은 생으로 잡아먹기 위해 어떤 종류든 마다하지 않았다.
캠프도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얼기설기 세운 천막에 여러명이 콩나물 시루처럼 늘어져서 자는데, 비가 오는날이기라도 하면 그 천막 사이로 빗물이 다 튀었다. 

북녘에 무서운곳이 심히 연상된다. 그러면서 말 안들으면 때리고, 급조한 천막에서 재우고, 죽으면 묻지마 매장을 하고 그랬다. 

5.4. 폭력[편집]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벗겨놓고 때리는건 일상이었으며, 겨울에는 찬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심지어 밉보인 이들은 일주일 진단치 끊어놓아야한다는 협박과 함께 폭행이 가해졌으며, 죽일 기세로 폭행을 할때는 인간 샌드백 수법으로 죽을때까지 때렸다. 

주로 노역자들을 폭행하거나 경비를 서는이들은 구호반이라고 불렸는데, 개척단 구역 외곽의 철조망을 앞에 두고 경계를 구호반들이 소총을 들고 20~50m간격으로 서있으며 순찰을 했다. 이쯤되면 구호반이라고 쓰고 간수로 읽어야 하는게 정상이다.

5.5. 삼엄한 경비와 탈출시도[편집]

몇몇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서 옷을 벗은채로 뻘밭을 달리기도 했으나 총에 맞아 죽거나, 발각되기라도 하면 다른 노역자들이 보는 곁에서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한 시범케이스로 죽을때까지 구호반들에게 맞았다고 한다. 
그것도 안되자 스스로 불구가 되어서 개척단에서 나가려던 끔찍한 시도까지 있었다, 5통에서 노역하던 함정석씨 증언으로는 5통에서 두명이 화장실에서 음경을 스스로 자른 뒤 간부에게 보여줬다는 ('나 고자니까 이제 보내주세요'라는 의도로) 사례도 있고, 유재문씨 목격담으로는 병가 퇴소를 위해 바늘을 쌈지째로 삼켰지만 발각되어서 뱃속에 있는 바늘을 토하면서까지 맞아죽었다. 

한편 캠프 바깥에서 '개척단'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서산에 찾아온 개척단 친지가족들도 있는법인데, 구호단이 이들을 가로막으면서 '여기는 당신들 찾는 사람들이 없다'라고 우겨서 강제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심지어 이들의 제지는 군 장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일례로 위의 정화자씨는 약혼자로 당시 군 대위였던 직업군인이 있었는데, 서산에 납치당했다는걸 알게된 약혼자가 찾아왔는데, 대위라고는 하나 엄연히 군 장교신분인 사람에게조차 잃어버린 애인을 찾겠다는 기본적인 요구사항에도 '그런 사람 없다'면서 강제로 돌려보낼정도다. 그 정도로 민씨 이하 구호단들은 상당히 초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이들임을 방증하는 사례다.

5.6. 결혼식 쇼의 실체[편집]

결혼식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고 사실상 국정방송에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운동장에다가 우선 남성 노역자들을 세운뒤 여자들이 가서 아무렇게나 파트너를 찍으라고 하고 강제로 그 파트너와 결혼해서 살게 하라는것이다. 설령 그게 싫다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도록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심지어 싫다고 우는 여자에게도 강제로 짝을 지었다.
박준영 변호사 말마따나, 이는 '내가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조차 박탈해버린' 인권 탄압이다.

더 가관인것은 이러한 요식행위에 강제로 짝이 지어진사람중 절반 가까이는 이미 배우자가 있는채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결혼하기 싫다고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해서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정부에서도 그게 억지춘향인건 알긴 알았는지 강제 결혼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45쌍은 완전파경, 40%는 불안상태'라고 공식발표한 내용이 당시 언론보도에 실렸지만, 무슨 사회적 실험인거마냥 건조하게 보도되었다. 

5.7. 성상납[편집]

여성들에게 가해진 악랄한 조치로는 대기부녀부라는 제도가 있었다. 
여성 노역자들을 일정한 공간에 두고 언제든지 결혼을 할수 있도록 대기하라는 의미인데, 통장실에 있는 간부가 대기부녀부실(?)에 있는 여자들중 한명을 오라고 한뒤 통장실에서 성폭행을 한뒤 보내고 또 다른 여자를 불러서 성폭행하는것이었다. 

그럼에도 피해여자들이 목소리를 낼수 없었던것은 이미 정부에서 신나게 모든 개척단원 여성들을 선량하든 아니든간에 윤락녀로 싸잡는 통에 아무리 말해봤자 윤락녀라는 낙인이 찍힌 이상 함부로 말하기도 힘든 분위기였던게 컸다.

5.8. 암매장[편집]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선주민들이 '면산'이라고 부른곳 일대에다 아무렇게나 묻혔다. 정말로 아무렇게나 묻혔기에 우천시 암매장된 사체가 노출되는 경우도 있는데 부패로 인해 백골화가 진행된 사람도 있는가하면, 사체뿐만 아니라 산송장상태로 숨이 붙어있는 사람까지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그 참혹성은 암매장하는 거적때기의 시신에서 나온 핏물들이 바닥에 깔려서 온다는 전설이 인근 주민들에게 돌 정도였다.

5.8.1. 수습[편집]

청소년개척단의 비극이 진정될때쯤 면산에는 이러한 이들의 한이 서린 괴담이 돌기 시작했다.
가령 '날 궂으면 그 속에서 깡통같은게 뒹구는 소리가 났다'라든가 무덤(?)에 기대고 잠들었는데, '○○(잠들었던 선주민 이름)야 무거워'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괴담이 선주민들 사이에서 돌았다. 면산 일대는 후일 공동묘지로 재단장되는데, 묘지로 공사하는동안에도 '아무것도 움직이는게 없는데도 술병이 달그락달그락 거리는게 귀신같아서 무서워서 도망갔다더라'느니 하는 괴담이 돌았고, 묘지로 단장하기 위해 굴삭기로 땅을 파는 과정에서도 뼈가 숱하게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나온 뼈들은 한군데로 모아서 묘지의 높은 한 군데에 6개로 나눠서 일괄 매장했는데, 묘지측에서는 이를 무연총(無緣塚), 말 그대로 무연고자들의 무덤들이라고 불렀다. 

6. 선주민들의 인식[편집]

물론 서산을 제외한 전국에서는 대한늬우스등으로 '깡패와 창녀들의 새출발을 위한 양지'로 선전했지만, 개척단을 마주보던 기존 모월리 1,2지구의 주민들 시각은 전혀 달랐다. 
개척단 캠프가 워낙 폐쇄적인데다가 지역 공권력도 터치하지 못하는[5] 초법적 무소불위의 공간이다보니 간을 빼먹는다느니, 한센병 환우가 산다느니 하는 온갖 괴담이 돌기 시작했고, 개척단이라는 말은 모월리 선주민들에게 있어서 우는 애들도 울음을 그치게 만드는 단어였다. 근방에 갔다가 잡혀가서 죽을지도 모를정도로 무서운 구역이다보니 그렇다.
그나마도 운좋게 개척단원들이 행군하는걸 구경할수 있던 선주민들이 있는데, 간수들이 돌을 이고 다니는 개척단 노역자들을 채찍으로 치는 광경을 본 이들이 받은 인상은 현대판 노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여성 노역자는 탈출해서 선주민 민가에 자신을 숨겨달라고 말하면서, 개척단 구역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선주민들은 이들을 숨겨주기에도 곤란했던게 구호단들이 그렇게 피신한 사람들을 찾아다닐게 뻔해서 선주민조차도 무서워서 살기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7. 개척 이후[편집]

1966년, 단원들은 정부에게 탄원서를 보내나, 정부에선 당연히 씹었다. 
그럼에도 그게 반영은 되었는지, 민 단장은 홀연히 자리를 떠나고, 이후 개척사업은 서산군 관리하에 놓여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농지개량이라는 명분은 여전해서 잔류한 개척단원들의 처지는 민단장이 주름잡을때나 떠났을때나 다른게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정부에서 개척단을 갈아서 간척한 땅은 물경 250만m² 가량이고, 오늘날의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3지구가 되었으며, 오갈 곳 없던 잔류된 개척단원들이 터를 잡아서 모월 3구의 원주민이 된다.
그렇게 사람을 갈아서 개척한 땅이고, 정부는 개척한 사람들에게 개척만하면 그 땅은 개척민들에게 보상으로 돌아갈거라고 가분배증까지 써보여주면서 사탕발림을 했지만, 돌연 국유지라는 이유로 민정식 이하 지자체 측에서는 오히려 고생한 노역자들에게 "경작권만을 인정하였을 뿐이며, 소유권을 인정한것까진 아니니까, 너희들이 개간한 땅 쓰고싶으면 그냥 우리한테서 땅을 사"고 으름장을 떼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는 민정식과 당시 지자체측에서 국유지로 되어있음을 알고있음에도 노역자들에게는 자기 땅이 된다면서 거짓말을 친것이다
이에 반발한 개척단 생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걸었으나, 상고심까지 패소로 털렸다. 
그럼에도 생존자들, 즉 오늘날의 모월 3구 원주민들이 한동안 숨죽이며 살다가 다시 이의제기를 한 결과 2012년 재정부측에서 간신히 원가보다 조금 싼 가격으로(?) 장기분할 '저리 매각'방식으로 땅을 주민들에게 처리해서 조금이나마 보상했다는 체면치레를 했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땅은 누가 1조원 줘도 안팔것이라면서, 우리들의 피와 눈물이 섞인 땅이라면서 누군가가 이땅을 가지고 장난치는 행위는 용서할수 없는 입장을 밝힌다. 그정도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것이다.

지금도 서산시측에서는 당시 자료가 없음 혹은 폐기되었거나, 2013년도에 자산관리공사로 넘어갔으니까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입장을 거듭하고있다.

그렇게 그들은 수십년간 일하면서 청춘도, 가족도 잃어버렸다. 일례로 김광덕씨의 경우 그의 누나가 그를 찾으려 백방 노력했으나 번번히 허사여서 결국 정신병을 얻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그런 뒷배경이 있었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척단'이라는 단어는 터부시되었으며, 모월 3구라 불리길 원하지, 개척단이라 부르는건 해당주민들에 대한 심한 모욕에 가까운 말이 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중 몇몇은 수기같은걸 써서 세상에 실태를 알리려고 했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유재문씨는 군복무 당시 우연히 방송작가를 만나서 해당 실태를 토로하려 했지만 (그때는 아마 여전히 군사정권이라 그런지 ) 방송작가가 당신이 지금 그걸 이야기하면 쥐도새도모르게 군대에서 죽을수도 있다라면서 없는 일로 하라고 종용했고, 그는 침묵할수밖에 없었다. 
또 김○○라는 단원은 비공식적으로 수기를 많이 썼고, 이를 KBS인가에 제출했지만, 담당자가 '한 30~40년후에나 내지, 지금은 이거 못낸다'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군사독재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터부시 분위기로 인해 한동안 묻혀지다가, 근래에 생존자 노인들이 청와대에서 시위를 하기도 하고, 1박2일 유일용 PD 아래 이조훈 감독의 독립영화인 「서산개척단」으로 독립영화가 제작중이라 한다. 원래는 2013년부터 제작기획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정부가 정부라 아무래도 제작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었고, 박근혜가 탄핵하야하면서 그나마 제작이 진행되는걸로 여겨진다.
[1] 통금을 어긴 사람이나 어린 아이들까지 무차별로 잡아서 노역했다는점에서 형제복지원과 똑같다.[2] 당시는 현재의 태안군 지역도 서산군 관할이었다. 태안군은 1989년에 서산군에서 분리된다.[3] 시발택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 시절은 자동차공업이 조악한 시절이었기에, 미군에서 불하받은 낡은 차 부품등을 조립해서 차를 만드는 수준이었고, 민정식도 이러한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4] 일본어 잔재인것으로 보인다. 振り狩り(?)[5] 실은 안하는것에 가까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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