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2

추적보고-송두율의 배후세력<후편> : 월간조선



추적보고-송두율의 배후세력<후편> : 월간조선




추적보고-송두율의 배후세력<후편>



글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추적보고 - 송두율의 배후세력; 송두율ㆍ 서동만(국정원 기조실장)ㆍ 이종석(청와대 NSC 사무차장)은 「내재적 접근법」으로 맺어졌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宋의 초청으로 「통일학술회의」에 참석한 徐東晩ㆍ李鍾奭 宋斗律 사건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宋斗律은 1995년 1월28일부터 3월11일까지 북한에 들어가 金容淳(김용순·對南 담당비서 재직 중 2003년 사망)과 남북 해외학자들이 참여하는 통일학술회의 개최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金容淳으로부터 통일학술회의에 북한의 학자를 파견하겠으며 회의장소는 北京으로 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같은 해 6월4일부터 6월6일까지 宋斗律은 사회과학원 산하 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위장한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 김경남, 사회과학원 연구사로 위장한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 김관기와의 예비회담에서 남북한 통일 관련 공동세미나 명칭은 「남북 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로 한다고 합의했다. 1995년 7월31일부터 8월1일까지 중국 北京 「長城대반점」(쉐라톤호텔)에서 제1차 「남북 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가 개최됐으며, 북측단장인 김구식(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사상과 리념, 제도와 신앙을 달리하는 북남 해외의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는 공동의 통일강령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조국통일강령에 대해 말할 때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金日成 주석님께서 밝혀 주신 조국통일강령을 생각하게 됩니다』라며 金日成이 제안한 조국통일 3大 헌장(조국통일 3大 원칙, 全민족대단결 10大 강령, 고려민주공화국 창립방안) 등 북한의 통일방안에 대해 선전했다. 토론 과정에서 북한 노동당 비밀당원 宋斗律은 『그러한 전반적인 문제를 볼 때 역시 연방제적 구조라는, 체제와 민족국가라는 우리의 공통의 이상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두 개의 체제와 하나의 민족국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구성적인 조건을 이제는 마련해야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등의 발언을 했다. 제4차 회의 때(1998년 2월 北京)에는 1994년 「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한 朴英洙(박영수·66)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단장으로 참석했다. 그는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해명하는 한편, 金大中 정부의 출범 이후의 관계개선에 대한 강한 기대를 표명했다. 李鍾奭, 駐韓미군 철수를 예언 1995년 제1차 통일학술 회담에는 現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인 李鍾奭 당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鍾奭은 「통일의 원칙과 화해협력」이란 주제의 제1회의에서 「조국통일 3大 원칙의 해석과 실천에 관한 제언」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그는 『駐韓미군은 점진적으로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종연구소가 1995년 3월에 실시한 「국민의식 조사」 자료를 인용했다. 조사에 따르면, 빠른 시일 내에 완전 철수 5.9%, 단계적 철수 45.5%, 현재 규모 계속 주둔 36.8%, 강화시켜 계속 주둔 4.7%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용했다. 그는 『아직까지 남한 주민들 사이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공감대가 완전히 형성돼 있지 못하다. 그러나 남한의 자위역량의 강화와 보조를 맞추어 주한미군은 점진적으로 철수할 것이며 그것이 또 앞으로 남한 주민들의 일반적 정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2003년 12월9일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李鍾奭 차장은 통일 후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그것은 후대의 담당자들이 결정할 일로, 미리 나서서 얘기할 사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2003년 가을 정부는 이라크 파병 결정을 발표하며 규모는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으나, 외교부와 국방부 실무진은 5000~ 6000명, 많게는 1만 명을 얘기하고 있었다. 尹永寬(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曺永吉(조영길) 국방장관, 청와대 潘基文(반기문) 외교보좌관, 金熙相(김희상) 국방보좌관 등은 줄곧 韓美 동맹관계를 위해 『이라크의 재건 지원과 치안 유지를 위한 전투병을 중심으로 한 5000~1만 명 규모로 파병하자』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10월27일, 盧대통령이 파병에 대해 함구령을 내린 가운데 李鍾奭 차장은 한 언론에 『이라크 추가 파병 규모는 非전투병 중심의 재건지원 부대로 2000~3000명 선』이라고 밝혔다. 이 언급은 자연스레 「盧心(노심)」을 대변한 것으로 이해됐고, 그 뒤 대세로 자리 잡았다. 기자는 2003년 12월13일 NSC 李鍾奭 차장의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NSC 직원이 답변했다. 그는 ▲남북통일학술회의에 초청받은 경위 ▲宋斗律씨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여부 ▲통일학술회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주장한 주한미군 철수 예견 발언이 NSC 차장인 지금도 유효한지 여부 등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남북통일 학술회의는 吉昇欽(길승흠) 서울大 교수의 초청제의를 받고 갔다. 사무차장과 宋斗律씨는 당시 회의에서 처음 만났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李鍾奭씨가 사무차장으로 있는 국가안전보장회의는 盧武鉉 정부의 외교·安保·통일정책을 총괄·조정·지휘하는 부서다. 이 기구는 대통령, 국무총리, 통일부 장관, 외교통상부 장관, 국방장관, 국가정보원장과 대통령이 정하는 약간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대통령이 회의의 의장이다. NSC와 국정원의 관계는 국가안전보장회의법 제10조(國家情報院과의 관계)에 의거, 국정원장은 국가 安全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를 모집, 평가하여 이를 회의에 보고하고 심의에 부치도록 되어 있다. NSC의 사무를 처리하는 부서가 사무처이며, 사무처 책임자는 처장으로 대통령 비서실 외교안보보좌관 羅鍾一(나종일)씨가 겸임하며, 처장 바로 밑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가 차관급인 사무차장 李鍾奭씨다. 盧武鉉 정부의 NSC는 金大中 정부의 NSC와 비교할 때 기능과 조직, 인원 면에서 더욱 확대되고 힘도 막강해졌다. 2003년 4월22일 국회 情報委 주최의 국정원장 후보자 高泳耉씨에 대한 人事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李鍾奭 사무차장은 자신의 역할과 정보관리실의 임무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외교·안보 부처들의 업무 중에서 조정하고 협의할 수 있는 것들을 조정·협의하는 것을 제가 실무적으로 관장하고 있습니다』 이날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은 李鍾奭 참고인에게 『국군 기무사나 국정원의 외교·안보·북한 관련 보고서를 李鍾奭 참고인이 전부 독점적으로 받아서, 李鍾奭 참고인이 대통령한테 보고하는 체제를 잡고, 국정원에 근무하는 동창 등을 통해 국정원 핵심 인사에도 간여하며 국정원을 장악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이 퍼지고 있다』고 질의했다. 이 질문에 李鍾奭 참고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宋斗律의 「사상적 영향」 받은 李鍾奭ㆍ徐東晩 1988년 무렵 국내 학계에 소개된 宋씨의 「內在的(내재적) 접근론」은 徐東晩 국정원 기조실장과 李鍾奭 차장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북한의 사회주의를 북한의 입장에서 보고 북한을 비판하기 전에 실체를 인정하자」는 것이 內在的 접근론이다. 宋斗律은 「소련과 중국」이란 책 서문에 『사회주의 체제를 공부하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이들의 체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비판은 그 다음』이라고 역설했다. 이해하고 나서 비판하자는 논리는 말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몰입하고 나면 비판이 어려워진다. 북한 노동당 비밀당원 宋씨는 2003년 12월2일 열린 첫 공판에서도 자신의 내재적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1세계와 3세계의 중개인으로 생각해 왔다. 조국을 떠날 때 나는 3세계인이었다. 내 입장은 北과 南을 내 속에 있는 他者(타자)로 바라보자는 것이 내 철학의 팩트다. 이것이 내재적 방법론이다』 이 내재적 접근론을 북한학 연구에 활용한 사람이 李鍾奭이다. 그는 宋斗律의 內在的 접근론을 차용하면서도 비판이란 단어를 집어 넣어 「內在的 비판적 접근론」이란 자기 나름의 분석 틀을 만들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조선노동당의 지도 사상과 구조 변화에 관한 연구」 앞 부분에 연구방법론이 나오는데 「內在的 비판적 접근」을 취했다고 밝혀 놓았다. 李鍾奭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內在的 비판적 접근론」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내재적 비판적 접근 방법이란 연구 대상이 되는 사회나 집단의 내재적 작동 논리(이념)를 이해하고 그것의 현실 정합성과 이론·실천적 특질과 한계를 규명해 내려는 접근 관점을 말한다(중략). 그러나 북한 연구에서 이 접근 방법이 강조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많은 북한 연구가 북한의 내재적인 논리가 완전히 무시된 맹목적인 전체주의적 접근이나 표피적인 선정주의적 접근에 의해서 오염되어 왔기 때문이다. 본래 내재적 비판적 접근 방법은 독일의 루츠, 바이메, 宋斗律 등에 의해서 연구에 적용되고 국내에는 宋斗律 교수를 통해서 처음 소개된 내재적 접근법에 필자가 그 뜻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비판적」이란 말을 덧붙인 것이다> 성균관大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2년 만에 석사를 끝낸 李鍾奭씨는 4년 만에 박사 과정을 마쳤다. 석사학위 취득 후 경희大, 부산大, 서강大, 성균관大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던 그는 1994년 9월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되었다. 徐東晩, 「내재적 접근법」 높이 평가 徐東晩 국정원 기조실장은 경남大 북한대학원에서 발간한 「현대 북한 연구」 1998년 창간호에서 「북한연구에 대한 반성과 과제: 1990년 연구성과와 문제점」이라는 기획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내재적 접근법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오히려 내재적 접근이 충분히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북한 없는 북한 붕괴론이 판을 친 것이라 생각된다. 북한 연구에서 오히려 다양화되고 풍부화되어야 할 접근법은 내재적 접근법이다. 그것은 북한 연구에 있어서 기존의 내재적 접근이 아직은 허약하기 때문이다> 2003년 10월2일 국회 정보위원회의 소속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에 따르면, 야당 의원들은 『宋씨가 내재적 북한 접근법을 제시해 親北(친북) 이론을 전파했다』며 『내재적 접근론의 (국내) 대표적 학자는 李鍾奭 NSC 사무차장이 아닌가』라고 질의했다. 그러나 李차장은 그간 『宋씨의 「내재적 접근법」이 북한을 전혀 비판하지 않는 점이 문제』라면서 『나의 북한에 대한 이해 방법은 「내재적 비판적 접근」』이라고 宋씨와의 차별성을 말해 왔다. 徐東晩씨는, 李鍾奭씨가 자신의 이론이 宋씨의 「내재적 접근법」과 차별된 「비판적 내재적 방법론」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위 논문에서 李鍾奭씨의 차별화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판적」이라 함은 내재적이라 함과 반드시 구분되어야 할 별개의 범주는 아니며 그 속에 內包(내포)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 형성과정이나 의사 결정과정에서 공식화된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견해를 내재적 경험에 포함시킨다면 굳이 「비판적」이란 표현을 가지고 내재적 접근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 宋씨, 「북한 공작원」과 참가대상자ㆍ주제선정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宋斗律은 1999년 1월16일부터 1월18일까지, 1999년 6월29일부터 7월6일까지 두 차례 북한에 들어가 통일전선부 공작원 김경남 등과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의 주제 선정과 참가 대상자 선별문제 등을 협의했다. 1999년 10월26일부터 10월27일까지 北京 캠핀스키 호텔 별관에서 「제5차 남북 통일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이는 宋씨가 북측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李鍾奭씨와 徐東晩씨를 학술회의 발표자로 선발했으리라는 개연성을 의미한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통일학술회의에 참석한 남측 학자들은 김순권 경북大 교수, 박호성 서강大 교수, 문정인 연세大 교수, 오기평 서강大 교수, 박명림 고려大 교수, 하영선 서울大 교수, 안병준 연세大 교수, 김정기 한국外大 교수, 정운찬 서울大 교수, 최장집 고려大 교수, 김학준 당시 단국大 이사장 등이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통일학술회의」는 「對南 통일전선전술의 역량 강화 방안」의 하나로 추진됐음이 드러난다. <(송두율은) 1994. 8. 하순 일자 미상경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6차 세계정치학회」에 참석, 서울대학교 교수 길승흠으로부터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통일 관련 문제를 주제로 한 남북한 학자들의 공동세미나 개최 가능성을 북한 측에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인 김용순과 국제담당 비서인 황장엽 등에게 공동세미나를 개최하자고 요청하여 동인들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1994. 10. 일자 미상경 위 길승흠에게 『북한의 황장엽과 김용순을 접촉한 결과,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니 이 일을 보다 구체화했으면 좋겠다』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등 북한이 대남 통일전선전술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법의 하나로 위 통일학술회의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조선 것들과 서방 반동들이 공화국을 악랄하게 비방중상 선전하면서 공세적으로 나올 때 가만히 있지 말고 맞받아 공세적으로 나가 남조선이나 서방 것들이 조국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기 위하여』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기로 마음먹고(下略)> 1999년 5차 회의에 처음으로 초청된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 徐東晩은 「금강산 관광의 의미와 전망」이란 발제에서 『금강산 관광은 직접 남북 당국이 대화를 해서 성사된 것은 아니지만 과거 1971년 7·4 공동성명이나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徐실장은 2003년 4월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국회 情報委 소속 與野 의원들의 일치된 반대(사유는 親北 편향성·경험과 자질 부족)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됐다. 徐東晩 실장은 경기高 출신이며 서울大 정치학과 75학번이다. 徐東晩 기조실장은 1978년 8월 긴급조치 7호 위반으로 구속된 운동권 출신이다. 그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으나 당시 영등포지원 판사인 高泳耉 現 국정원장에 의해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이란 가벼운 刑을 선고받고, 8개월간 옥살이를 한 뒤 풀려났다. 그는 1983년에 창립된 民靑聯(민청련) 회원이 되었다. 당시 民靑聯 의장은 金槿泰(김근태) 現 열린당 의원이다. 親北학자 와다, 金賢姬 존재는 인정 1986년 徐東晩씨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東京大 대학원에 적을 두고 국제관계론을 공부했다. 1990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1995년에 「북조선에 있어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1945~1961」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徐東晩씨의 석사·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親北학자 東京大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이다. 와다 하루키는 소련 및 북한문제 전문가이자 일본 사회당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에서 번역된 저서 「북한을 읽는다」에서 와다 하루키는 KAL機 폭파범 金賢姬에 대해 언급하며 KAL機 폭파는 북한 金正日이 일으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북한 측은 사이타마縣 출신의 호스티스 다구치 야에코도 납치되었으며, 1986년 7월30일 북한에서 사망했다고 전해 왔다. 李恩惠가 다구치 야에코라면 그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金賢姬의 존재까지 인정하는 말이 된다. 따라서 북한이 그 사실까지 인정하기란 불가능하리라는 관측을 뒤집고 다구치 야에코 납치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중략) 1981년부터 1983년까지 李恩惠로부터 일본인化 교육을 받았다는 金賢姬의 주장처럼 다구치 야에코가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하기 전에 金賢姬와 지내면서 교육했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다> 박사학위를 받고 1995년 귀국한 徐東晩씨는 경남大 극동문제연구소에서 2년간 객원 연구위원으로 있다가 1997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이곳에서 4년을 근무한 후 2001년 3월 상지大 교수가 되어 교양학부에서 북한 정치를 가르쳤다. 그해 10월엔 李鍾奭씨와 함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기획위원이 되었다. 국정원 기조실장은 국정원 예산과 인사(조직)를 담당하는 정무직 차관급 자리다. 특히 예산 집행을 통해 국정원에서 하는 모든 일을 「손금 보듯」 알 수 있는 자리다. 이런 자리이기 때문에 국회 情報委는 與野 합의로 「親北 편향성이 강하고 정보 업무 경험이 전무하여 국정원의 정무직 공무원으로서의 자질이 부적합」이라는 이유로 그의 기조실장 임명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2년 미래전략포럼에서 『西海교전이 군사적으로는 계획된 선제공격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우발적인 북한의 실수라고 본다』고 발언했다. 徐東晩씨는 좌파운동 단체의 연합체인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이하 통일연대)」 지도위원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인터넷독립신문은 2003년 5월12일자 기사에서 「徐실장이 통일연대의 지도위원 명단에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통일연대」가 徐실장의 허락 없이 이름을 무단으로 올렸다』면서 지도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을 부인했다. 통일연대 측도 『홈페이지 개편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라고 말했으나 徐씨의 이념성향을 고려할 때 납득이 되지 않는다. 2001년 3월 결성된 「통일연대」는 통일운동을 하는 38개의 시민단체 연합으로 출범했다. 이 단체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실천하고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다. 경실련 통일협회, 한국노총, 민변 등 다양한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으나 현행법상 이적단체로 규정돼 있는 한총련과 범민련 남측본부 등 親北좌파세력이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李鍾奭 NSC 사무차장과 徐東晩 國情院 기조실장은 일본의 親北학자 와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李鍾奭 사무차장은 대학원생 시절인 1992년 와다 하루키가 쓴 「金日成과 만주 항일전쟁」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2003년 5월9일 국정원은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對共정책실이 폐지되고 對共 수사 기능은 축소되었으며 해외정보, 外事, 방첩 기능이 강화됐다. 국정원 고유 임무인 對共 수사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폭군으로부터 달러를 받다』 검찰에 따르면, 유럽본부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宋斗律은 국정원 조사과정에서 수사관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가입 여부를 묻자, 처음에는 부인으로 일관하다가 국정원이 입수한 가입원서를 들이대자 시인했다고 한다. 범민련은 대법원에 의해 利敵단체로 규정돼 있다. 공안기관의 2002년 자료에 의하면, 이적단체인 범민련남측본부 상임고문에 宋씨를 초청한 朴炯圭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위촉돼 있었다고 한다. 공안당국에 의하면, 범민련은 북한을 축으로 남·북·해외를 연결하는 對南통일전선 조직으로 북한 노동당 산하 對南공작부서인 「통일전선부」에서 직접 관장한다. 범민련은 공동사무국 밑에 북측본부, 남측본부, 해외본부(유럽본부, 미주본부, 일본본부, 중국본부 등)이 있다. 범민련 북측본부의 인적구성은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부부장과 외곽조직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간부진으로 구성돼 있다. 1990년 12월 베를린에서 해외본부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현재 해외본부는 일본 東京), 북측본부와 남측본부가 각각 1991년 1월 결성됐다. 북한 노동신문은 2003년 11월20일 범민련 결성 13돌을 기념하는 글에서 『통일을 가로막는 「주적론」과 보안법을 철폐시키기 위한 민족공동의 투쟁을 해내외의 각지에서 더욱 힘있게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북한 노동당 비밀당원 宋斗律과의 관련설을 적극 부인하고 있다. 북한은 2003년 10월8일 노동신문 「사람잡이에 미쳤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요즘 남조선의 한나라당 패거리들이 사람잡이에 미쳐도 되게 미쳐 돌아가고 있다. 이 당 족속들이 최근 남조선을 방문한 한 해외동포(송두율을 지칭)에 대한 탄압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을 놓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중략) 이 해외동포로 말하면 오래 전에 남조선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군부파쇼 정권에 신물을 느끼고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다. 그를 우리와 연결시키는 것은 反공화국 대결의식이 골수에 들어찬 자들의 억지 공사이다』라고 주장했다. 독일 언론은 宋斗律의 「거짓말」에 분노하고 있다. 시사주간 「데르 슈피겔」은 2003년 10월27일자에서 「폭군으로부터 달러를 받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宋씨는 정치국 위원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2년 전에 이미 남한 법원은 이 문제에 있어서 宋씨가 옳다고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심문과정에서 宋교수는 1973년부터 북한 노동당에 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중략) 1967년 朴正熙 治下의 남한으로부터 독일로 옮겨갔던 이 좌익 지식인의 일생사업은 새로운, 아주 당황케 하는 조명 아래 나타나고 있다. 공부를 많이 한 이 철학자가 폭군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경우든 20만 명 가량의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있고, 독재정권하에서 약 200만 명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굶어죽게 만들었던 한 폭군으로부터 달러를 왜 받았는가에 대해 서울에서는 수수께끼를 풀고 있다> 그리고 슈피겔은 盧武鉉 정부와의 「기획 입국설」도 제기했다. <그동안 명백하게 된 것은 宋씨가 귀국하기 전에 宋씨는 남한의 국정원으로부터 자유주의적 盧武鉉 대통령下에서 어떤 형벌도 받지 않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는 신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宋斗律 기획입국의 노림수: 공안무력화ㆍ국가보안법 무력화 2003년 4월26일 宋斗律은 독일의 좌파성향의 일간지 「디 타게스자이퉁」과 인터뷰했다. 「디 타게스자이퉁」이 남북 통일학술회의에 대한 宋斗律의 공헌을 기념해 성사된 인터뷰였다. 宋씨는 『이 6차에 걸친 학술 회의에 대한 재정지원을 누가 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유럽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대기업 SK에 근무하는 동창이 매년 15만 달러를 제공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은 의혹을 제기하자, SK 관계자는 『사실무근이며 宋씨 개인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공소장에 따르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宋斗律은 북한으로부터 1987년 10월 폐쇄되었던 「한국학술연구원」의 再개설 및 운영자금으로 미화 2만~3만 달러를 수수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남북해외학자 통일회의 5년 자료집」에 따르면, 통일회의는 SK그룹·LG그룹·삼성그룹 등 대기업, 그리고 동아일보·중앙일보·한국일보·한겨레 등의 후원을 받았다. 2003년 12월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宋씨에 대한 첫 재판이 서울지법 311호 법정에서 서울지법 형사24부(재판장 李大敬) 심리로 열렸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의 신경전도 볼 만했다. 재향군인회·자유시민연대 등 7개 보수우익단체로 구성된 「안보 지키기 위한 비상회의」는 서울지법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었고, 「宋斗律 교수 대책위원회」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서울지법 청사 앞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150여 명의 방청객이 자리를 메운 이날 법정에는 宋씨의 부인과 차남, 朴虎聲(박호성) 서강大 교수 등 자칭 진보단체 회원들은 「좌측」에,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은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공소장에 따르면, 宋씨는 국가보안법上 反국가단체의 구성, 잠입·탈출, 회합·통신, 사기 미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된 혐의, 1973년 이후 22차례 방북해 북한으로부터 「주체사상 전파」 지령을 받고 학술대회와 저술활동 등을 통해 親北 활동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은색 양복에 흰색 셔츠를 받쳐입은 宋씨는 한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법정에 출두했으며, 자신의 변호사를 피고인석 옆자리에 앉힌 뒤 조언을 받으며 검찰 신문에 임했다. 재판정에 나타난 宋씨는 金世均 서울大 교수, 朴虎聲 서강大 교수와 자신의 가족, 독일에서 온 라이너 교수 등을 향해 손을 흔든 뒤 피고인석에 앉았다. 宋씨는 冒頭(모두)진술을 통해 『37년만에 귀국한 이래 상상 못한 나날을 보냈다. 여론재판에 한 개인이 무력했다. 옛 것과 새 것이 충돌하고 있는 긴장된 상황속에서 이번 재판은 우리 국민은 물론 전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며 『희랍어에 轉機(전기)를 뜻하는 에포케(epoche)는 「일단 정지」를 의미한다. 지금 나는 한 평 공간에 갇혀 있지만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는 「일단 정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방청객들이 박수를 치다 재판장으로부터 제지를 받았으며, 재향군인회 회원들은 宋씨를 향해 『빨갱이, XXX』라며 욕설을 해 잠시 재판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어 검찰 신문 과정에서도 검찰과 宋씨 측은 공소사실의 문구 하나하나를 놓고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宋씨 측 金炯泰 변호사가 『노동당 규약에 따르면 정치국 후보위원 선출방식이 나와 있는데도 공소사실에는 宋씨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선출됐는지 나와 있지 않으니 해명하라』고 요구하자 검찰은 『재판과정에서 밝히겠다』고 맞섰다. 宋씨는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느냐』는 검찰 신문에 『지령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宋씨는 자신의 혐의를 대부분 부인했다. 그는 검찰 신문에 답하는 도중, 金日成이 등장할 때마다 「선생」이라는 말을 꼬박꼬박 붙였다. 對北 전문가 L씨는 『재판에서 宋斗律이 重刑(중형)을 받지 못하면 앞으로의 공안 사건 수사는 어렵다. 이 정도의 완벽한 증거와 거물급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처벌하지 못하면 그 외의 공안사범들은 「조무래기」에 불과한데, 더 이상 공안기관의 존재이유는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林炚圭(임광규) 변호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전략 전술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간첩행위를 하다 적발되면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보장을 십분 활용, 「소송투쟁」 방법을 택한다』면서 『宋斗律의 변호인들은 판사보다는 사회를 법정으로 삼아 국민들의 눈을 호의적으로 이끌려고 사회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 최근 宋斗律의 救命(구명)을 위한 대책委인 「송두율 교수 석방과 사상·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2003년 11월 발족되었다. 대책委 홈페이지에는 100여개에 달하는 단체와 강만길·고은·백낙청·홍근수(이상 고문)와 김세균·손호철(이상 상임대표), 강정구·단병호·이삼열(이상 공동대표), 박병섭·차명제 (이상 운영위원)씨 등 8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대책委 홈페이지에는 「국가보안법 철폐, 송두율 처벌·추방 반대」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對北 전문가인 L씨는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해외인사 초청을 계기로 해외 저명 민주인사를 총망라해 입국시켜 「국가보안법」을 有名無實하게 만들고, 청와대·국정원·검찰 등 남한의 주요 「公安 신경망」을 무력화시키려 할 것』이라고 했다. 기자는 「간첩 혐의자」 宋씨를 초청하며 2003년 한 해에만 국민 세금 78억원을 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反국가단체」인 한통련을 초청한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 그리고 宋씨를 귀국시키는 데 간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정원·청와대를 취재하며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宋씨를 37년 만에 이 땅에 불러온 인맥들의 공통점은 民辯 출신이거나 親北좌파 인사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民辯 출신의 高泳耉 국정원장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소 보류」 의견을 첨부해 놓고도 왜 「기소해야 한다고 단일의견만 달았다」는 「딴소리」를 해야 했을까. 民辯 출신 변호사인 盧武鉉 대통령은 왜 『우리 한국사회의 폭과 여유와 포용력을 全세계에 보여 주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이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선처를 호소했을까. 여기에 질세라 民辯 출신 康錦實 법무부 장관도 개전의 情이 없는 북한 노동당 비밀당원을 비호하는 발언을 했다. 盧武鉉의 청와대와 高泳耉의 국정원-심장부로 이어지는 宋斗律·左派 커넥션과 그를 둘러싼 거대한 親與左派 인맥들의 포진은 宋斗律 기획입국이 큰 구도를 가진 「氷山의 一角」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 국정원 對共수사국과 검찰의 公安부서 등은 제 역할을 톡톡해 해냈다. 이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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