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9

Hyuk Tae Kwon - 고통에서 기쁨으로 시편 102 편 1-12 주관적 간구 보다 필연적 결과로 믿음의...

Hyuk Tae Kwon - 고통에서 기쁨으로 시편 102 편 1-12 주관적 간구 보다 필연적 결과로 믿음의...

Hyuk Tae Kwon
28 December 2017 ·



고통에서 기쁨으로

시편 102 편 1-12
주관적 간구 보다 필연적 결과로 믿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인생의 고통을 바꾸는 열쇠를 말하고 있읍니다.
착시 현상에서 떠나 언약을 바라 보고
공동체를 이루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길로 인도 합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 년 동안 광야에서
공동체 훈련을 받았읍니다.
오늘 말씀은 광야의 고통들로 시 를 만들고
고통의 노래처럼 노래하고 있읍니다.
이 노래가 끝 날 즈음 우리도 언약으로 돌아 가자
계명으로 돌아 가자
행동이 바뀌어 공동체적인 인간으로 바뀌어서
모든 슬픔을 이기고
환희의 세계로 가자는
결론이 나왓으면 합니다.
슬픈 것들 중 거의 모든 것이 오늘 시 한편에 다 모아져 있읍니다.
이제 인간의 아픈 사정을 시인의 현미경적 묘사로 생각하며 살펴 봅니다.
---------
1 그는 약함을 크게 느끼고 근심을 하나님께 퍼 붓습니다.
2 내 기도를 들으소서 .도움을 바라는 내 부르짖음이 당신께 도달 되소서
3 고통 속에 있는 나에게서 얼굴을 피하지 마시고
나를 향해 귀를 돌려 지금 당장 나의 청에 대답해 주소서.

주관적인 간구입니다.
자가 발전을 하듯 혼자만 말하고 있읍니다.
자기 믿음으로 홀로 간구 합니다.
아주 위독하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 구체적인 설명이 시작 됩니다.

4 내 생명이 연기처럼 사라져 가고
내 뼈는 타서 숫 덩이가 되어갑니다.

5 내 마음은 마른 풀 같이 그슬리고
먹는 것 조차 잊어 갑니다.

6 나의 큰 신음 소리는 뼈로 피부를 찌르게 합니다.

이제 부터 는 아픈 마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비록 슬프고 고통스런 것이지만
인간의 고통을 가장 아름답게 시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7 사막의 올빼미가 되엇고
폐허의 올빼미가 되었읍니다.
사람 없는 밤에만 보고
사람 없는 사막에서 사는 인생입니다.
고독 외로움 소외 배척 고립 따돌림
비참한 상태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표현이
올빼미 인생인 것 같습니다.

8 나는 누워 있지만 잠들지 못하는 지붕 꼭대기의 고독한 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지만
사람 속에서 잠자고 먹는 공동체의 행복이 너무나 귀한 것인데
거기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사는 모습입니다.
고독은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입니다.

9 하루 종일 내 원수는 나를 욕하고
내 이름을 저주라고 잘 못 욕되게 불러 조롱합니다.

10음식으로 재를 먹고
눈물을 섞어 마십니다.

11당신의 증오와 분노로
나를 들어 저 멀리 던져 버렷읍니다.

12나는 길어 지는 그림자 같고
풀 같이 말라 완전히 비틀어 빠진 인생이 되 었읍니다.
이 절대적 실패
절대적 고통
절대적 고독 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으로 돌아 가야 한다는
그 해결책의 실마리를 멀리 후에 나온
베드로 전서 1 장에서 볼 수 있읍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 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라고 말합니다.
23 절과 25 절이 해답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 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 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엇느니라.......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 좋은 소식입니다.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많이 부르 짖으면 하나님이 들어 주실 줄 믿을 수 있읍니다.
베드로 전서는 이것을 착각하지 않게 합니다.

자가 면역이란 것이 있읍니다.
아주 어려운 병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문제에 대한 면역이 아니고
내부에서 스스로 를 향해 만들어진 면역은 아주 힘든 병인데
몇 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항체를 제거하는 힘든 치료를 해야 합니다.
신앙도 이런 자가 면역 씻는 법이 라도 있으면 좋겟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중언 부언을 하지 않게 합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들어 주시지 않는 것을 알고
우리의 착시 현상이나
자가 면역 같은 무서운 병이 아닌지 아주 조심하며 생각 해 야 할 것입니다.
마취는 신앙이 아닙니다.
마취를 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벌써 주실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 즉
섭리하시는 하나님
공급하시는 하나님
영어로
Providence 라는 이 말을 구하고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만났읍니다.
하나님은 머리가 수풀에 걸린 숫 양을 모리아 산에서 준비하셧읍니다.
이 귀하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잊을 수 없읍니다.
밤 새도록 기도하는 것이
미리 준비하신 하나님을 못 믿어서 하는 것이면
그 불신 때문에
하나님이 거두어 갈 수도 있어서 조심스런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 대로 순종하여 일하고
계명을 잘 지키면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우리의 간구가
이루어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기도를 더 살펴 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다윗 개인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 시편 100 편 주위에는 아주 중요한 믿음의 기도가 펼쳐저 있읍니다.
그 기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을 보면 이렇게 왕따 당한적도 없고
외로운 적도 없고 고독한 적도 없고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으면
다윗 개인의 아픔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 해 알 수 있읍니다.
그러나 다윗의 공동체 즉 시온과 예루살렘 공동체는
고립 되고 비참한 비극의 역사로
오늘 말씀 같은 비운의 역사를 실제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음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아픔을 하나님께 토로 하고
공동체의 성공을 간구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밤 새도록 기도 할 수 있읍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면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이면
제왕적 군주적 자아 왕국을 위한 목적은 주의해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일을 하는데는 순종하지 않고
개인적인 사욕을 위해 구하는 것이 많을 수 있어서
주의 할 부분입니다.
자신의 아픈 처지를 놓고 많이 기도해서
착시 현상이나 자가 면역이나 일시 마취 같은 걸로 속지 말고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말씀 대로
얼마나 순종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동체를 우선하는지 자신을 우선하는지
사익을 추구하는지 공익을 추구하는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양심을 늘 평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구원의 세계는 먼 흣 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공동체를 이루어 우리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공동체 구원입니다.
이 복음이 베드로 전서 22 절 말씀입니다.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하여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 하기에 이르럿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 할 지니라.
뜨거운 베드로 공동체가
우리의 인생 무상 허무 고립 외로움 고독을 해결해 줍니다.
깨끗한 베드로 공동체가 길어 지는 그림자
마르는 풀 같은 얼굴의 주름을 진정으로 해결해 줍니다.
이말씀이 시편 102 편에 잘 설명 되고 있읍니다.

12 절 까지만 읽고
잘 도와주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착시 현상이나 일시 마취나 자가 면역에 빠지지 않도록

13 절 부터는 창세기의 창조를 근거로 올바르게 기도하도록
잘 설명하고 있읍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지침을 말씀으로 알려 주셧읍니다.
우리의 이기심이 공동체를 깨뜨리지 않도록
선악과를 주셔서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가 든든하게 하셧읍니다.
공동체를 깨뜨리는 본능을 씻지 못한채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우리의 아무 고통도 해결 받지 못합니다.
본능에 묻은 먼지를 씻어 내고
하나님이 주신 이성이 우리를 지배하는 정결함을 받아야
공동체가 이루어 지고 그 공동체로 인해서
우리의 비극은 제대로 끝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이 일을 위해 오신 태초에 계신 로고스 로 예수님을 증거 햇읍니다
요한의 공동체 베드로의 공동체를 우리도 이루어 가면서
크고 작은 우리의 모든 문제로 부터 진정한 해방을 누려야하겟읍니다.
혼자 하는 신앙 활동은 진정한 신앙 활동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공동체로 일해 질 때 는 진정한 신앙입니다.
시편 102 편 은 고독이나 왕따나 인생 무상이나 허무에 대해서
이런 관계의 문제를 부르 짖어서 해결하지 않고
창조의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루어 해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는 통렬한 기도를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대표로 하는 다윗을 볼 수 있읍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건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셧나이까 ?
라고 같은 기도를 드렷읍니다.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목자의 기도입니다.
부르짖어 자신만 살려고 한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정리하면서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는
Jhon Watt 가
이런 말로 설명을 합니다.
Sight belies such faith.눈은 그런 믿음을 착시한다.
요한 복음은 이 착시를 방지하려고
표적을 말하고 길게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영적 의미를 바로 알려면 요한 복음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Belie 와 believe 는 비슷한 모양이지만 전혀 다른 뜻입니다.
하나는 착각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John Watt 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But faith can take the form of a hope
centered in God's prophetic promises.
믿음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으로 모아진 희망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가 성취 되기를 원하시는 언약은
잠시 숨겨진 하나님 왕권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는 무너진 예루살렘의 하나님이 인정을 베풀도록
회상시키는데 감히 모험을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허무의 문제 고립의 문제 배척의 문제
고독의 문제 인생 무상의 문제는
수 많은 착시를 넘어
진정한 해결을 주는
공동체를 이루어 해결하는데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본능을 이기며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지어 가는 건물들이 많아 졋으면 합니다.
Unit 이 깨끗하게 되면
Community는 잘 지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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