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9

“정치란 더 많은 평등의 기회 줄 방법을 찾는 것”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정치란 더 많은 평등의 기회 줄 방법을 찾는 것”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정치란 더 많은 평등의 기회 줄 방법을 찾는 것”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 인터뷰
등록 :2012-12-18

알랭 바디우(75)


<한겨레>는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75)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바디우는 무성했던 탈근대 담론들을 헤치고 철학에 ‘진리’를 다시 끌어들인 철학자로, 슬라보이 지제크와 더불어 자본주의-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최전선에서 비판해온 급진적 사상가다. 그는 “투표 결과에 따라 야기되는 차이가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꾼다”며 투표의 의미를 되새겼다.

월간 <객석>의 파리통신원인 김나희-아델라이드(27)씨가 파리에서 지난 14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바디우를 만나 인터뷰했고, <한겨레>로 보내온 전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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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희-아델라이드(이하 김) 당신은 철학자로서, 활발한 사회적 참여를 보이고 있다. 상아탑에 갇힌 학자가 아니라 정치적인 의견을 드러내며 정치적 색깔을 확실히 밝히고, 사회적 현안에 대해 의견을 드러낸다. 철학자로서 이렇게 활발한 외부 활동을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알랭 바디우(이하 바디우) 맞다. 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철학자이지만, 당신 말대로 방송 인터뷰와 토론에 참석 하고, 정치적 의견을 담은 칼럼을 쓴다. 철학자가 철학이론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것은 프랑스 정통 철학자의 모델이 아니다. 1950년대 나의 첫 사상적 스승인 장-폴 사르트르가 그렇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정치적 앙가쥬망’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철학적 저서를 쓰면서 동시에, 희곡을 쓰기도 했고, 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사회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를 해왔다. 내가 이십대였으니 나의 모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사르트르를 보면, 그가 앙가쥬망을 실천한 첫 철학자가 아니다. 18세기의 철학자인 루소나 볼테르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들은 소설이나 희곡등 문학작품을, 철학적 저술과 비슷한 분량으로 쓰고, 동시에 신문 기고등을 통해 정치적 현안에 대해 견해를 밝혀왔다. 프랑스에는 18세기부터 비롯된 이러한 철학자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참여에 대한 전통이 있다. 특별한 학문적 철학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가치를 지닌 철학, 공인으로서 존재하는 철학자에 대한 이상이 있었다.


이처럼 철학자들은 시대의 질문에 대해 그들의 답변을 공적으로 밝혀왔다. 나는 이 전통에 충실하며, 대대로 내려온 승계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영어권의 철학자에 대한 인상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에게 철학자들은 대학이란 학문연구기관 안에 존재하며,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전공자들이다. 프랑스에 존재하는 철학자의 이미지와 이상향을 나 혼자만 방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쉘 푸코, 자크 데리다 등도 최근의 인물로서 손꼽을 수 있다. 정치 역시, 학문으로 접근해야 하는 분야인만큼, 무엇보다도 철학에 철저한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는 고도의 분업화와 전공의 특수화에 대한 결과로, 철학자는 철학만 이야기하라, 정치는 정치인들의 것이다, 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이 개념에도 반대한다. 모름지기 철학과 사상이라면 인간을 위한 것인만큼 모든 분야에 열려있어야 한다.





불평등 맞서 싸우는게 정치
가치와 진리 묻지 않는다면
위정자 야욕 달성 수단일뿐

미래 긍정적 낙관 어렵지만
나는 진보의 가치 믿는다
투표는 우리 삶 바꾸는 행위

김 당신이 시와 희곡을 쓰는 것, 철학담론을 쓰는 것은 다른 작업이 아닌가? 서로 다른 분야의 글쓰기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가? 예를 들어 현재 한국에서는 정치적 경력(국회의원)이 길지 않다는 이유가 선거 후보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바디우 물론 다르다. 희곡을 쓸때의 나와, 철학사상 담론을 다루는 나는 내 자아의 다양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 자신이다. 희곡이든 철학담론이든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본질과 우주적인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 수단이 다르다 한들, 그건 근원적인 장애물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분야를 다룬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려는 것을 마냥 방해하기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내가 쓰는 희곡이나 소설에는 철학적 화두가 담겨있다. 만약 국회의원 경력이 짧으니, 인권 변호사 출신이었다고 해서 정치적인 감각이 없고, 정치 현실에 둔하다라는 평가는 온당치 않다. 만약 그가 인권 변호사로서 무능한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그의 능력에 대한 비난을 할 수는 있겠지. 어쨌거나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제각기 다른 과제들을 수행한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아주 다양한 활동으로 가득차 있다. 걷고, 말하고, 먹고, 생각하고, 무엇을 읽거나 보고….

나는 철학과 동시에 수학박사 학위도 가지고 있다. (프랑스 국가에서 인정하는 박사 학위) 프랑스에서 수학에 매료된 철학자들은 시대를 거슬러 가보면 데카르트가 있다. 더 멀리 간다면 플라톤으로부터 역시 그가 얼마나 수학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수학이란 절대적으로 순수한,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은 지적 결정체(팡세)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수학에 즉각적으로 매료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툴루즈의 시장이었지만, 정치인 이전에 수학자였다. 파리고등사범(Ecole Normale Superieure)에서 수학을 전공한 수학 교수였기 때문에 나는 태생적으로 수학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꾸준히 수학을 계속한다.

현대 정치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정치는 우리들만의 것, 이라는 아집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통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철학적 고민을 하지 않는다. 지난 사르코지 정권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정책을 보면 그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가 우리가 만들어낸 문제가 아닌 외부적 요인인 이민자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선동했다. 과연 프랑스 사회가 지닌 고질적인 병폐들이, 이민자들에 대한 가혹한 정책으로 해결되었는가? 그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김 당신은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는데 어떠한 압력을 받은 적은 없는가?

바디우 전혀 없다. 나는 지금 정말이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구체적이고 미세한 사안에 대해서도 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지난 20년 남짓, 외국인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변해왔다.

나는 그동안 많은 토론에서, 프랑스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권리를 변호해왔다. 프랑스스에서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마치 어떤 상징과도 같은데,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저 외국인들이 문제의 근원이야.’라고 말한다. 이건 정말 심각한 신호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막상 그들이 꺼리는 3D업종의 큰 비중을 담당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비난한다. 프랑스의 복지제도가 그들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혐오감은 위험하다. 이제 시작일 뿐 경제적 위기와 함께 뭔가 더 큰 것이 다가올 위험이 있다. 경제적 위기는 우리를 현혹시키기 쉽다. 1929년 대공황이 있었기 때문에 유태인에 대한 학살이 용인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외국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적인 앙가쥬망 중 중요한 과제이다. 예민한 주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는데 압박을 느끼지는 않는다. 한국의 사정보다는 낫겠지. 민간인 사찰, 언론에 대한 탄압과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현재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다.



김 철학자가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준다고 여기나.

바디우 철학이란 우주적인 가치, 진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 위대한 음악,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들여다보고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이다. 인간의 개별적, 집합적인 결과물, 인간성(휴머니티)의 결집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넓은 범위의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는 화두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니 당연히 정치에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가치와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정치는 권력을 쥔 위정자들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철학이라는 것이 아주 어렵고 막연한 것이 아니다. 나는 철학 뿐아니라 수학, 음악, 문학에 관심이 많다. 바그너의 음악, 18세기의 영미문학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상관없이 창조된 예술 작품들이다. 이것들은 내 가슴을 유난히 깊이 울리는데 과연 어째서일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렇게나 멀리 있는 것들이 왜 나를 감동시키는가. 왜 가치가 있는가. 여기에 답을 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관심사이며, 논리정연한 설명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철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 -예술이든 정치든-이 왜 우주적인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한 평가와 해석, 그 이유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우주적 가치를 갖는다. 음악, 사랑, 시에서 볼 수 있는 무형의 가치가 바로 이것이다. 플라톤을 예로 들어보면 2500년 전의 철학이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를 가나, 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플라톤을 읽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전쟁이 생활의 일부였던 사회였다. 당시의 내로라했던 정치인들은 우리가 과연 얼마나 기억하는가? 그들의 저서나 생각들을 탐구하는가? 그들은 그냥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존재들이다. 반면 플라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소포클레스 역시 그렇다. 그의 희곡은 고전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고 미래에도 영원히 읽힐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다. 설령 속한 사회가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어둠의 시대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뭔가를 창조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교훈을 배우기 때문이다. 먼지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긍정의 자세로, 진리를 찾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사랑도 정치도 예술도,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명과도 같은 진리를 향해 가는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한 움직임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의 승리로 남는다. 역사의 가르침도, 역시 우주적인 가치를 지닌다. 지나온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교훈과 가치를 체득하게 된다. 역사의 가르침 역시 인간 문명의 승리이다.

나는 68년 5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길거리의 시위현장에 나가있었다. 68년 5월 혁명이 온전히 성공했다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철학적 질문이 있었다. 그 철학은 무엇이 가장 최선인지 그 답을 요구했다.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물론 세련되고 날카로운 예각이 번득이는 공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건 문제되지 않는다. 나와 친한 작곡가 프랑수와 니꼴라(Francois Nicolas)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68년에 스무 살의 에꼴 폴리테크닉(Ecole Politechnique)의 학생이었다. 시위에 참여하면서, 그는 가라데를 배웠다. 노란띠 수준이었지만 키가 컸기 때문에 전경들을 상대로 실전에서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의 가라데는 급으로 따진다면, 무예가 아니라 길거리의 몸싸움일 것이다. 고수들이 하는 가라데의 우아함과 거의 예술에 가까운 움직임을 프랑수와에게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가 시위 현장에서 스스로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폭력적인 전경들을 상대로 펼쳤던 가라데가 가치없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종종 민중들의 투쟁이 세련되지 않았다고 해서 폄하하는데 그것이야 말로 편협한 시각이다. 실천하고 투쟁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만큼 역사는 진보해왔다.

진정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진정한 자유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진짜 자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실현시키는데에 있다. 개인적인 수준이든 집단적이든 우리의 욕구와 능력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가? 이것이 결국에는 평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무한한 재산을 가진 사람과 아무것도 못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 역시 철학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평등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을 해야하는 것이 정치의 고민이다. 평등이란, 사회의 개개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제약에 가로막혀 그것을 실현시킬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인류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며 사회적인 문제이다.

김나희 아델라이드(27)

현대 민주주의와 혁명은 바로 이 지점에서, 겨우 2세기 남짓 전에 시작한 것이다.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권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익숙해져서 망각하기도 하는데, 현재의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세계의 부와 권력을 다 가지고 특권을 누리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다. 이 불평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며, 불평등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바로 정치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물론 내 정치적 참여가 모두 성공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성공하든 실패하든 중요한 것은 맞서 싸우는 것이다.



김 당신은 낙천주의자, 긍정주의자인가?

바디우 그렇다. 나는 긍정적이다. 나는 평생 진보에 몸담아왔는데, 진보를 대표하는 가치가 사랑이라고 본다. 사랑은 우주적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해야 한다. ‘사랑 예찬’은 내 저서들 중 프랑스에서나 외국에서나 가장 인기있고 성공한 책이다. 사랑에 대한 질문이 왜 중요하고 이 질문은 왜 우주적인가. 음악과 수학처럼 가장 오염되지 않은, 수직적 시대와 수평적 공간을 다 뛰어넘어 어디든 갈 수 있는 가치로서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에 인간애의 실천이 진보의 참된 얼굴이라 할 수있다.

반면, 현실적으로 철학자로서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건 아주 어렵다. 지금껏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얼마나 사회가 불평등했는지 알 수 있다. 현대 사회가 그나마 가장 자유롭고 평등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곳곳에 불평등이 산재해있다. 다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수백 억달러를 가진 미국의 부자와 중앙아프리카에서 당장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재력의 차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서 정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정의를 어떻게 현실 사회에서 실현시켜야 하는가, 라는 화두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김 당신이 말하는 정의란?

바디우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정의이다. 법적인 뉘앙스의 정의는 법이라는 특별한 체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정의는 좀 더 보편적인 범주를 지칭한다. 평등과 자유 사이에 바로 정의가 있다. 독재란 간단하게 말하면, 평등이 부재하는 독재자 한 사람이 누리는 자유이다. 정의란, 평등과 자유사이의 균형잡힌 공존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해나가는 것이다. 정치의 영원한 과제이기도 하다. 사회가 원래 존재하던 모습 그대로 기능케 하는것은 정치의 순기능이 아니다. 정의를 실현시켜 사회가 앞으로, 미래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이때 정치의 우주적인 가치 -정의를 창조시키는 것- 가 빛을 발한다. 실제 현대 사회에서는 이에 반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여전히 경제 성장을 위해, 경제 위기를 무사히 넘어가기 위해, 덜 가진 사람들을 더 착취해야 한다고, 불평등이 아직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래야 사회가 더 발전하고 소득을 늘릴 수 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단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의 논리일 뿐이다.



김 정의를 실현시키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한국의 경우,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데 이것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으로 이뤄졌다.

바디우 정의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인간성에 대한 질문, 불평등에 대한 해결은 아주 느린 속도로 이뤄져왔다. 우리는 늘 후퇴의 경험에 익숙하다. 1968년 5월 혁명에 내세웠던 가치들이 2008년이 되자 빛을 바랬고, 오히려 더 후퇴했다는 인상마저 든다. 이런 후퇴의 경험으로 인해,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미래를 긍정적으로 낙관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의 가치를 믿는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아주 좁은 보폭의 걸음으로, 힘겹게 이곳까지 왔다.

한 국가가 개인으로부터 비롯된 보편적인 의지의 소산이며 주권은 국민에서 나온다. 이건 이미 1791년 개정된 프랑스 헌법 서문인 세계인권선언문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치들이다. 실제로 정착되기까지 프랑스 역시 한 세기 이상의 혼란과 진통을 겪었다. 이 모든 혼란을 겪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68년, 거리로 뛰쳐나오며 외쳤던 가치들이 과연 퇴색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여러 가지 답과 엇갈린 평가가 나올 것이다.

한국의 경우, 헌법을 유린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독재자와 군사정권으로부터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지난 여름 파리에 온 ‘나는 꼼수다’ 멤버들에게 나는 연대의식을 느낀다. 설령 그들이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용기와 실천력이 진보의 참된 얼굴인 ‘인간애(휴머니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들에게 연대의식을 표명한다.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에게도 지지를 보낸다.



김 한국에서는 19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던 독재자의 딸이 그의 후계임을 자처하면서도 꽤 높은 지지를 받고 있어서, 전 세계에서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독재의 그림자가 다시 되돌아오는 현상에 대해 패배감과 무력감을 호소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진보에 대한 믿음이 배신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투표를 앞둔 이들에게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가?

바디우 현재의 한국과 같이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정부는 아주 단순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권력 앞에 나타난 후보자들은 이미 사회적 동의를 획득한 존재들이다. 투표를 통해 혁명을 이룬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 선택 의사를 표현하는 행위인데, 정당은 이미 사회적 동의와 합의에 의해 존재한다. 물론 정당들 간에는 동의하지 않는 지점이 더 많겠지만 어쨌든 간에 그들은 사회를 유지하고, 민생, 치안, 안보에 주력하며, 사회의 현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자유와 인권의 보호, 언론과 표현의 자유, 대북 관계등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큰 맥락에서, 그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연속선상에서 사회를 지속해 나갈 것이다.

투표란 원하는 후보와 정당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행위이지만, 유권자는 이를 통해 두 가지를 드러낼 수 있다. 첫째로, 사회 유지에 대한 동의이다. 우리는 참여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를 유지한다는 것에 대한 합의를 드러낸다. 두번째로, 개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이 차이 역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제약된 종류의 것이다.

어쨌거나 투표를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 결과가 가져올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투표 결과에 따라 야기되는 차이가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꾼다. 같은 이유로 투표를 통해, 유권자들이 드러내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가능하며, 이것은 현실 정치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 된다. 투표는 우리의 합의를 전달함과 동시에, 이 차이점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개인적인 기준과 경험에 따라, 후보 혹은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진다. 나이, 성별, 학력, 지위, 재산…. 그중 나이는 많은 것을 결정한다. 프랑스에서 65세 이상은 80%이상 늘 보수를 지지한다. 내 정신은 68년 5월 혁명에 아직 머물러 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프랑스 젊은이들은 70% 이상 진보를 지지한다.



김 민주주의란 어쩌면 불완전한 정치 시스템이라는 것인가?

바디우 리비아나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벌어진 중동혁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혁명은 늘 소수에 의해 일어났고, 그 혁명이 차차 사회적 합의와 지지를 획득해 나갔던 것이다. 68년 5월 낭테르와 소르본의 대학생이 처음 들고 일어섰을때 그들은 지극히 소수였다. 사실 아주 결정적인 역사의 위대한 변화는, 소수에 의해서 일어나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중에 결국 그 결과물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하지 않는다. 예술을 예로 들어보면 미술의 다다이즘, 인상파, 문학의 상징주의, 음악의 음렬주의 등이 그러했다.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소수에 의해 새로운 발견이 이뤄졌고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정치도 과학이나 예술과 같다.

민주주의는 이렇듯 보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 뒤에 자본주의를 감추고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프랑스에도 고정된 보수층과 좌파는 각각 45%정도이다. 결국 중도의 참여가 역사적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설령 변화를 위한 열망이 모인다 하더라도, 사회를 통째로 뒤집을 수는 없다. 양면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 엄청난 격차의 불평등, 외국인 혐오 등은 어떻게든 어느 사회에서든 여전히 존재할 현상이다. 다만 정치에 따라 이 현상에 따라오는 부정적인 효과가 늘거나 줄어들 것이다.

‘독재자의 딸’ 박근혜와 그 주변이 여전히 70년대 독재정치 시대에 머물러 있나? 권위주의에 빠져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을 펴면서 다수의 서민을 착취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으며, 군부의 압력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북한과 대적하면서 긴장을 유발하고 전 국민을 군사교육으로 압박하는 그런 끔찍한 어둠의 시대 말이다. 문재인은 급진적인 진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보수를 포용할 수 있는 통합적인 후보라면, 그를 진보적 민주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해야 한다. 한국의 좌파를 프랑스의 좌파와 비교할 수 없지 않나?

프랑스로 비교하면, 마리-르펜과 올랑드 중에, 올랑드를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 것처럼, 나는 문재인을 지지한다. 독재자의 딸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인권변호사의 대결이라니 당신들은 문재인을 뽑을 이유가 충분하다. 두 후보 사이의 간극과 투표가 가져올 차이와 그 간극이 이렇게 크지 않나. 새정치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그를 지지한다고 했나? 문재인이 당선된다고 해서, 혁명적인 변화가 당장 일어나지는 않을테니 성급하게 실망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때로는 후퇴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믿는 우주적인 가치와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한 진보의 발걸음이라면,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나는 언제나 같은 편이다.

정리/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66013.html#csidx1baab35cce49d1ab0077c28f64e8a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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