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7

함석헌 - Daum 백과

함석헌 - Daum 백과






함석헌咸錫憲

사상가인가 행동가인가

출생 1901년
사망 1989년


목차

시대가 그를 만들었는가, 그가 시대를 만들었는가
기독교에 입문하다
민족운동에 눈을 뜨다
평생의 스승 세 분을 만나다
스스로 이단자가 되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뜻으로 본 한국역사
씨알의 민중성, 창조성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시대가 그를 만들었는가, 그가 시대를 만들었는가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을 모르는 이가 드물 것이다. 현실모순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술과 고기와 놀이를 멀리했고 언제나 단정한 한복을 입고 수염을 드리우고 다녔다. 수도승이나 다름이 없는 차림이었고 행동거조였다. 가냘픈 몸이 강연장소나 시위현장에 나타나면 함부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개가 짙게 깔렸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4·19직후였다. 광주의 청년들이 그를 모시고 여러 이야기를 듣기로 했는데 그는 먹물 빛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강연은 정열적이었으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필자는 서울 가는 통일호(가장 비싼 열차) 기차표를 끊어 좌석을 잡아드렸다. 그는 앉자마자 작은 가방에서 〈타임스〉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게다가 필자에게도 뭘 하느냐 등 한 마디 물어보는 말이 없었고 잘 가시라고 인사를 건네도 고맙다든지 따위의 대꾸도 없이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그의 앞자리에 앉았던 후배 이종목이 먹을거리와 맥주를 사서 권하자, 도리어 학생이 이런 걸 먹으면 안 된다고 꾸지람을 주더란다. 필자는 그를 너무 우러러 본 나머지 너무 근엄했다든지, 쌀쌀 맞았다든지, 청교도 같다든지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려다 보니 새삼 첫 인상이 떠오른다.

그는 기독교 사상을 기저로 한 사상가요,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운동가요, 민족정서를 구현한 지사요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문필가라 평가할 수 있다. 그만큼 그가 추구한 영역은 넓었다. 시대가 그를 만들었는지, 그가 시대를 만들었는지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할 것 같다.

기독교에 입문하다

함석헌은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태생지를 행정구역으로만 말하면 그곳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을 잘 모르게 된다. 황해 쪽의 용암포 앞에는 졸망졸망한 섬들이 이어져 있다. 그 중에 사섬[獅子島]이라는 곳이 있다. 사섬은 원래 섬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 갯벌을 막아 육지로 이어지게 해서 이름만 섬이지 실제로는 육지에 붙은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물론 어부도 농군도 아닌 반농반어로 생활을 꾸렸다. 이곳에 함가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자신들은 양반이라 우기지만 대대로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한 상인이나 다름없는 한미한 씨족이었다 한다. 더욱이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사람들을 ‘서북 지방 출신’이라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던가? 이 언저리에서 태어난 홍경래는 봉기를 주도하면서 “평한(平漢, 평안도 놈)의 한을 풀자”고 외쳤다.

함석헌

그는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된 뒤 1942년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1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종교는 하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그는 “이단이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며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함석헌의 할아버지는 평범한 농부로 소작농이었지만 생활수준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할아버지를 두고 “언제 누구와 큰 소리로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글자는 하나도 모르는 이였다”라고 했다. 아버지 형택(亨澤)은 신진 지식인은 아니었으나 의원노릇을 하면서 생활의 여유를 갖고 구학 지식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고집이 세서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기와집을 짓고 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어서 함석헌의 유학자금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는 김씨였다. 여느 여인네처럼 이름이 없었으나 호적을 새로 정리할 때 형도(亨道)로 올렸다 한다. ‘형’은 아버지 이름에서 따왔다 한다. 여느 여성의 이름 짓는 상식과도 다르고 ‘순’이나 ‘숙’을 붙이지 않은 것도 독특하다. 그는 “글은 몰랐지만 어머니는 도리에 밝으셨고 또 중년 후부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했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장남인 그를 비롯해 2남 3녀의 형제자매는, 나도는 아버지를 대신한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의 회고를 보자.

“나는 일본이다. 너는 아라사(러시아)야.”

“아냐, 내가 일본 할래.”

뒤로 땋아 늘인 텁수룩한 머리에다 옥수수 잎을 뜯어 두 끝을 마주 매어 군인 모자를 만들어 쓰고 수숫대를 다듬어 좌우 허리에 칼을 찬 마을의 어린이들이 모여 서로 편을 짜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일본놀이라 불렀다.

대가리가 좀 두둑두둑한 놈들은 대장이랍시고, 작은 것들은 시키는 대로 졸병이 되어 서로 칼을 휘둘러 찌르고 때리다가, 한창 열이 날 때는 앞집 처마가 결단이 나는지 뒷집 빨래가 녹아나는지도 생각할 겨를 없이 따라가고 쫓기고 아우성을 치며 노는 데 해가 가는 줄을 모른다.
-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나라는 망하고〉

함석헌은 어릴 적 놀이를 이렇게 아주 실감나게 적었다. 그런데 이 전쟁놀이는 역사적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이 지역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의 싸움터였다. 동네 아이들은 이 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러시아 군대는 용암포에 진주했는데 그의 집과는 30리 거리에 있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사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청군, 러시아군, 일본군의 발길에 공포에 떨었다. 이런 지리 환경이 그의 의식을 일깨웠던 것이다.

함석헌은 삼천재라는 서당에 다녔고 이어 서당을 덕일학교로 개조하자 이 학교에 다녔다. 그는 머리를 깎고 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배운 속에 동명왕, 을지문덕, 이순신, 임경업을 알게 되었고, 홍경래의 이야기도 들었다. 또 동네에 차린 야학에서는 “남자교육이 먼저냐, 여자교육이 먼저냐” 따위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더욱이 풍속 개량, 두루마기 짧게 입기, 옷소매 좁게 하기, 고름 대신 단추달기, 굿 그만두기 따위의 새 생활운동도 벌였다. 그리고 예배도 보고 기도도 했다. 아홉 살짜리 소년 함석헌은 여기에 흠뻑 빠졌으며 기독교도가 되었다.

민족운동에 눈을 뜨다

그 동네에는 함일형(咸一亨)이라는 함씨의 종가 아들이요 한학자가 살았다. 그는 과거를 하려다가 실패하고 민요 장두(狀頭, 앞장선 사람)가 되었다가 관가에 가서 볼기를 맞은 적도 있었다. 그는 논밭을 팔아 아들 둘 중 하나는 서울, 하나는 도쿄에 유학을 보냈다. 그는 서울을 왕래하면서 기독교도가 되었고 서당을 학교로 개조한 주인공이었다. 함석헌의 이름은 그가 지어주었다. 처음에는 헌(憲) 옆에 화(火)를 변으로 붙인 글자로 지었으나 이 글자는 자전에도 없어서 ‘화’를 떼어내고 호적에 홀렸다. 함일형은 함석헌의 첫 스승이었다.

1910년, 함석헌의 나이 열 살. 나라가 망한 사실이 사섬에도 알려졌다. 어느 날 중학교에 다니는 동네 선배인 이용엽이 아이들 다섯을 조용히 불렀다. 이용엽은, 우리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해야 된다는 것,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서로 맹세를 하고 동지가 되자고 했다. 맹세하는 글은 피로 쓰지 않고 잉크로 쓰기로 하고 다섯 장이나 되는 글을 이용엽이 쓰고 손도장을 찍어 하나씩 가지고 철저히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그 단체 이름은 일심단(一心團)이었다.

당시 단지동맹(斷指同盟)이 곳곳에서 결성되었다. 손가락을 자르거나 피를 내서 맹세의 약속을 하여 독립운동을 벌이자는 비밀결사였다. 일심단도 단지동맹의 하나였고 열두 살짜리 함석헌도 여기에 들었다. 함석헌은 이때부터 민족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처가가 있는 양시에 약방을 차려 제법 돈을 벌어들였다. 그래서 양시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평생의 스승 세 분을 만나다

함석헌은 10대 후반의 나이에 번화한 도시 평양에서 공부하면서 새로운 눈이 열렸다. 그는 일본식 교육을 시키는 평양고보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재력이 뒷받침되어 공립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아마 그 시기 대성학교가 폐교된 사정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학교에서 일본인 교장과 교사 밑에서 일본어를 쓰고 일본 예절을 익히며 다니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919년 봄, 형뻘이 되는 함석은이 찾아와 그에게 평양고보의 연락책임을 맡겼다. 그는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와서 다음 날 평양경찰서 앞에 뿌렸다. 이어 시가행진에 참여해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면서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연달아 총에 칼을 꽂고 압박해 오는 일본군의 발길로 채이고 짓밟혔다. 3·1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60세가 된 그는 그때를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정말 먹었던 대동강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했다”고 회상했다. 뒤에 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발각이 되어 스스로 중퇴했다. 그의 열혈은 이즈음부터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복교를 했지만 그는 아예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미래가 보장된 군수나 의사, 변호사를 내팽개친 것이다.

그는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와 바다를 벗하고 독서를 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2년 동안 보냈다. 평양에 있을 때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고향집에 와서는 열심히 교회에도 나갔다. 그는 다시 정주의 오산학교에 편입했다. 오산학교는 3·1운동 당시 일본 헌병이 불을 질러 타버렸다. 그래서 유지들과 동네사람들이 뜻을 모아 초가 교실이나마 마련했으나 교실에는 의자 한 개도 놓지 못했다. 학생들은 그냥 마룻바닥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함석헌이 학교에 가보니 자신과 같은 평양고보를 퇴학한 자, 동맹휴학하다가 쫓겨 온 자, 서른 살짜리 수염 기른 노학생, 교회 장로와 훈장을 하던 이들이 어우러져 “우리 오산, 우리 오산” 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왜 그랬지요?”하며 존댓말을 쓰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평양고보에서 “오마에(너)”라는 엄한 소리만 들었던 것이다. 또 그는 한글 배달 같은 말을 처음 배우고 들었다. 마침 32세의 정열에 찬 유영모가 교사로 와서 학생들을 훈도했고,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랐다.

당시 남강 이승훈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벌였고, 용강에서 태어난 안창호는 미주를 오가면서 민족운동의 선봉에 나섰으며, 조만식은 오산학교의 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사업 또는 사회운동을 열성적으로 벌였다. 이 셋은 기독교도로 서북 지방의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다. 본디 신교는 남쪽보다 북경을 통해 전래된 북쪽 지방에 왕성하게 전도되었고 선교사와 현지 기독교도들은 신교육을 벌이는 교육사업에 앞장섰다. 조선시대에 소외를 받았던 그들이 앞장서서 신문물을 수용했던 것이다.

오산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함석헌은 이 세 지도자를 평생 동안 가슴에 담고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남강, 도산, 고당선생의 인격의 알짬이 기독교 신앙이고, 따라서 오산정신의 알짬 역시 그것임을 말하는 데 있어서 잊어선 아니 될 것은, 그것이 선교사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 분이 다 선교사 밑에서 일한 이들이 아니요, 오산학교는 미션학교가 아니었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남강 · 도산 · 고당〉)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함석헌은 이때는 안창호를 만나보지 못했다. 안창호는 미국이나 상해를 넘나들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없었다. 뒷날 그는 안창호를 딱 두 번 만났다고 했다. 안창호가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서울에 있을 때 김교신, 송두용, 이광수와 함께 여관으로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안창호가 오산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안창호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성장하면서도 조금도 늦추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만식과 이승훈에게는 직접 훈도를 받았다.

그는 늦은 나이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도쿄로 건너가 1년 정도 준비를 끝낸 뒤 입학하기 어렵다는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에 합격했다. 신천지에서 새로운 인생을 열게 된 것이다.

스스로 이단자가 되다

그가 전공을 선택할 때 여러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신학은 아예 생각이 없었고 철학, 법률 등 여러 분야를 놓고 고민한 끝에 문학을 선택했다. 한편 “다가오는 일본제국주의의 압박 앞에 이러다가는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으로 온통 망해버린다는 불안이 사회에 넘치는 때였다. 그러므로 교육이 가장 급하다는 생각에 사범 길을 택했다. 그래도 들어가 놓고는 거기가 학문적이 아닌 것 때문에 불만이어서 들어간 것을 후회도 해보았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이단자가 되기까지〉)고 했다. 그는 교육자의 길을 택했으나 학문에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도쿄대지진을 겪으면서 용케 목숨을 구해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녔다. 그런데 그의 새 인생의 전기가 될 일이 벌어졌다. 친구 김교신이 우연히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를 알고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함석헌은 유영모에게서 우치무라의 신앙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당시 우치무라는 주마다 ‘예레미야’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 6명은 주일마다 몇 시간씩 기차를 타고 우치무라의 집으로 가서 한 시간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바쁜 시간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으나 “오늘 가기를 잘했지, 그 말씀 못 들었다면 어쩔 뻔했나?”라고 말할 정도로 경도되었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성서조선》이라는 이름의 동인지를 냈다. 김교신이 이 일에 가장 열성을 부렸고 귀국해서는 혼자 도맡아 책을 냈다. 마분지 같은 종이에 몇백 부 찍어 돌렸다. 이들은 석조당의 으리으리한 기성 교회를 배척하고 무교회주의를 제창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적 민족을 생각하고 민중을 염려했다. 그 무렵 함석헌은 교회에 나가면 늘 실망했고 “심령의 소생하는 것이 없고 낡아빠지고 껍데기 돼버린 교회 형식만 되풀이되는 데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이들을 기성 교회에서는 불순분자라고 매도했다. 아직은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이지는 않았다. 해방 뒤에는 이들을 이단이라 규정짓고 “우치무라 총독이 군림한다”는 극단적 용어를 써가면서 압박했다. 이들을 두고 “그 사람들 무교회주의자요, 경계하시오” 하면 일반 신자들은 슬금슬금 가버렸다.

한편 그가 이런 운동을 벌일 때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했다고 하여 오산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는 오산에서 과수원을 돌보면서 세월을 보냈고 평양의 송산리에 있는 농사학원을 인수받아 경영을 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유치장에 자주 들락거렸으나 정식 감옥생활은 한 것은 자기도 뜻하지 않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농사일을 할 때였다. 농사학원 설립자인 김두혁이 도쿄에서 검거되었고 이들의 비밀결사체인 계우회(鷄友會)의 조직이 발각되었다. 함석헌의 집 쓰레기통에서 이들과 왕래한 편지가 발각되어 이를 증거로 그는 대동경찰서에서 1년을 보내게 되었다. 1940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임종을 해 서울에 있던 김교신과 송두용이 아들을 대신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들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운동을 벌이면서 조선총독부 정책에 항거하자, 일제 경찰은 〈조와〉라는 글을 트집 잡아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성서조선》을 폐간시켰다.

함석헌은 《성서조선》사건에 연루된 뒤 1942년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1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반야경》, 《무량수경》, 《노자》, 《장자》 등을 읽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는 하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그는 “이단이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며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대선언〉이라는 시를 보자.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김경재는 이를 두고 기독교적 종파주의나 교파주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선생》 〈함석헌사관의 기독교적 요소〉). 나이 40대 첫 무렵, 옥살이를 하면서 동양과 불교책을 읽고 변화를 보였고, 한국전쟁 시기 민족의 비극을 보고 그는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를 이단이라 자처한 것이다. 이런 사상적 기조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집필한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아버지가 새로 약국을 벌였던 용암포 언저리에 살면서, 상속을 받은 토지에 농사를 짓기도 하고 아버지가 남긴 의서를 보며 세월을 보냈다. 평생 처음 가장노릇을 하면서 한가하다면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이렇게 해방을 맞이했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함석헌은 고향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역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특히 그 고장에서 태어난 홍경래, 그 언저리에서 활동한 임경업 그리고 국경성인 백마산성, 용골산성에 얽힌 전설도 흥미를 가지고 들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교사가 되어서는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비록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식민지 백성으로서 자기 뿌리를 찾고 고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에게 역사는 씨과 함께 자아의 발견이었다. 그리하여 “집이 없으면 천지를 집을 삼을 수 있어도 자아가 없어진 다음에는 지옥에 갈 자리가 없지 않느냐”(《뜻으로 본 한국역사》 〈머리말〉)라고 했다. 그는 교사시절 역사를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적었다.

나는 예닐곱 해 전부터 중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젊은 가슴에 영광스러운 조국의 역사를 안겨줄 수 있을까 하고 힘써 보았다. 그러나 쓸데없었다. 어려서 듣던 을지문덕, 강감찬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았다. 그러나 그 소리로써 묻어버리기엔 5천년 역사의 앓는 소리는 너무나 컸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머리말〉

그의 역사에 대한 고뇌가가 시작된 것이다. 이 고뇌는 직접 한국사 강의를 하고 책을 엮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는 《성서조선》의 겨울집회에서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한국사 강의를 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이 강의의 내용을 모아 월간지가 된 《성서조선》에 2년 동안 연재했다. 그의 고백대로 지도교수가 있는 대학도 아니요 도서관도 참고서도 없는 시골 정주 오산학교에서 중등학교 교과서와 굴러다니는 몇 권의 참고서를 참고해 써내려갔다. 게다가 말의 자유가 없는 때라 당당히 할 말도 스스로 깎아야 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 《뜻으로 본 한국역사》 〈머리말〉

자랑할 것 없는 역사였다. 그래서 또 “고난의 역사를 처음으로 말할 때 내 심정은 약혼 받은 거지 처녀 같은 상태였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사유의 방황보다 어떤 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역사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기록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찾는 기록이다”라고 했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사람의 바탕이기는 하지만 그 바탕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라고 했고, “역사는 영원히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라고도 했다. 알쏭달쏭하기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무엇을 말하려는 듯도 하다.

이 책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자신이 말한 대로 책은 발행되었으나 독자는 300여 명이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이 책의 내용을 두고 그를 잡아가는 구실로 써먹었다. 그는 ‘역사의 고난’이란 예수의 수난을 비유한 것이라고 했다.

해방이 되자 이 책을 다시 내자고 하여 별로 고치지 않고 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져 이 책을 구해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셋째 판을 내자는 요구가 있었다. 그가 50년대부터 월간 《사상계》에서 여러 글을 쓰면서 많은 독자들이 생겨났고 그의 글들이 구매력이 높을 때였다. 그리고 군사쿠데타를 반대하는 글을 쓴 탓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그의 성가는 더욱 올라갔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 책을 내자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많이 망설였다. 일제시기보다 금기는 많이 없어졌으나 그의 믿음이 달라져 있었기에 이를 내용에 반영해야 한다는 짐이 지워진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 역사를 쓸 때 나는 기독교 신자, 그 중에서도 무교회 신자였다. 기독교만이 참 종교요, 그 기독교는 성서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본래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라 하였고 뜻으로도 그것이 좋은데 일본 사람들이 성서라 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어느덧 성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책이름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 하였고, 참의미의 역사철학은 성서에만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남의 종교를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넷째 판에 붙이는 말〉

그의 신앙이 일대 전환을 한 것이다. 이 무렵 앞에서 소개한 시 〈대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로 재무장했다. 해인사에 한 달 머물면서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버리고 책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 고쳤다. 그는 고난의 역사를 고난의 말로 쓴 것이다. 게다가 방법에 있어서도 “지나간 일을 기록한다 하지만 지난날에 있었던 모든 일을 그대로 그려놓는 것이 역사가 아니다”라고 하여 뜻으로 풀어본 것이다. 그러니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창조주의 유일신앙을 토대로 한 일원론,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여러 가치를 인정하면서 풀이한 다원론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한국사 관련의 두 책은 처음 30대에 집필하여, 50대에 대폭 수정을 가했다. 그런데 첫 책의 내용은 많이 부실했다. 사실의 오류와 함께 억지 논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두 번째 책에서는 오류와 억지를 많이 다듬었다. 그리고 사실의 적시나 평가보다 그야말로 뜻으로 풀이했다. 보기를 몇 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신라통일의 의미를 깎아내렸다. 반 토막 통일이었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북방의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둘째, 양반 당쟁 따위의 지배세력들이 벌인 정치행위를 심하게 매도했다. 그런 잘못된 권력투쟁이 나라를 망쳤다는 소박한 접근이었다. 셋째, 홍경래와 전봉준의 봉기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 실패를 안타까워했다. 민중사적 접근을 보여준 것이다. 이때쯤에는 그도 아마 신채호나 박은식 같은 민족사학자의 글을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는 여전히 드러나고 있었다. 홍경래나 전봉준의 지향 곧 신분제도 같은 봉건모순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군과 고구려를 민족사상과 민족기상으로 표현하고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임경업이 대명의리로 죽은 사실, 이민족을 짓누른 문명적 무기였던 중화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또 천주교가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신교의 일제 식민지 통치 협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지면의 한정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그 책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가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는 역사학자가 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의 사상성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으나 역사철학적 접근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대비 대결을 언급했다고 해서 역사철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의지에 철저했던 것이다. 이것이 곧 ‘뜻’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와 방향을 던져준다. 어느 인사들은 마치 그를 역사학자라거나 역사철학자라고 말하지만 그런다고 그가 더 돋보이는 것이 아니다. ‘뜻’으로 한국역사를 풀이하고 진단한 것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공적을 쌓았다. 그러니 이 책은 역사책이나 역사철학책이 아니라 역사를 뜻으로 진단한 역사에세이며 이를 저술한 그는 역사에세이스트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씨알의 민중성, 창조성

함석헌은 식민지 시기부터 씨에 의미를 부여해 왔다. 그러면 씨은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을까? 어떻게 보면 생명의 근원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자아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민중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참이나 희생 같기도 하다. 그러니 한 마디로 개념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민중에 대해서, 일제시대에 자신이 감옥에 드나드는 것을 민중은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해방이 되자 언제부터 친했던 것처럼 가까이 오더니, 공산당이 나오자 다시 자신에게서 멀찍이 물러났고, 소련군 감옥에 가는 걸 보고는 “저 사람은 감옥 가는 것이 일이야”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을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이상 더 개인적 영웅주의에 서서 비판하는 눈으로 민중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씨이 저를 깨고 나오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깨기 전은 씨입니다. 깨면 전체입니다.
-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내가 맞은 8·15〉

이로 보면 씨은 근원적인 민중일 수도 있다. 민중과 개체는 어떻게 구분할까? “글은 씨의 것이다. 씨에서 나오고 씨로 돌아간다.······글은 씨의 하는 소리요 씨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라고도 했다. 그리고 “민중이 뭐냐? 씨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민중과 씨과 나, 삼위가 일체가 되는 것인가? 어려워서 이해 못할 지경이다.

그런데 씨은 생명에서 환경으로도 이어지는 모양이다. 그의 담론 속에는 들-야인-청정-선, 도읍-관료-부패-악으로 이어지는 이분법적 설정도 있다. 그가 내린 공해의 정의를 보자.

똥은 식물의 거름이 되고 동물이 뱉은 탄산가스는 식물의 동화작용에 섭취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인간이 그 생각하는 힘을 잘못 써서 자기의 쾌락만을 구하게 되면 그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고 생명에 해가 되는 너무 많은 찌꺼기를 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는 전체 생명 자체가 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더러움을 공해라고 합니다.
-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씨의 생명은 원원히 살아 있습니다〉

그는 독재에 항거할 때에도 《씨의 소리》를 계속 찍어 돌렸다. 씨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원효로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씨의 의미를 얼마나 알았을까? 아무튼 잡지 형태의 《씨의 소리》는 1970년부터 배포되었고 때로는 필화에 걸려 정간과 복간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 내용들은 그의 만년의 철학적 사유의 응결이라 할 수 있다. 《성서조선》보다 훨씬 생명력이 강인했다.

씨알의 소리

1970년부터 함석헌과 그의 제자들이 함석헌의 정신을 받들어 펴낸 정기 간행물. 반독재 저항 정신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해방 뒤 함석헌이 감옥에 가게 된 직접적 배경은 계급독재 또는 군사독재와 벌인 투쟁 탓이다. 그는 소련군이 진주한 고향 언저리에서 용암포 자치원 원장 등을 지낸 뒤 1945년 신의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50일간 감방에서 보낸 것을 필두로 한 차례 더 체포되었다. 그는 그쪽 사회에서는 체질로나 사상으로나 살 수 없었다. 이 무렵부터 수염을 길러보았지만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당시에는 김교신과 송두용도 없는 마당에 변변한 친구도 없었다. 그는 순박한 늙은 어머니를 남겨두고 남하했다. 그도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사상의 대전환을 도모했다. 1958년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실었는데, 이 글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내용을 군데군데 깔았다. 그리하여 남쪽에 와서 처음으로 20일간 구류를 살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상계》는 같은 서북 지방 출신인 장준하가 발행인이었는데, 서북 지방 기독교 인사들 곧 안병욱, 함석헌, 안병무 등을 고정 필진으로 내세웠다. 이 잡지는 당시 3만 부가 시판되는 가장 인기 있는 지성잡지였으므로 함석헌에게는 대단한 혜택이었다. 한문 투가 아닌 쉬운 우리말을 구수하게 깔아 쓰는 그의 글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4·19혁명이 전개될 때 그는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직 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도 군사쿠데타를 반대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장준하는 함석헌에게 이를 반대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함석헌은 그 현란한 문장으로 박정희와 그 일당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 무렵 그는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

박정희님, 내가 당신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고, 육군대장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여러분은 여러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 군사쿠데타를 한 것이 잘못입니다. 또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는 얻지 못합니다.······혁명공약 지켜 물러가십시오.

그는 직설 화법으로 공격했다. 아무도 그 시퍼런 칼날 앞에 오금을 펴지 못할 때 필봉을 휘둘러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는 군인들에게서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1962년 그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여행도 하고 강연도 하고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도 했다.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가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국에서 그에게 날아든 소식은 쿠데타세력이 민정으로 이양하는 과정에서 박정희가 대통령후보로 나선다는 것이었다. 그는 분개하여 인도와 아프리카 여행을 취소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끊임없이 군사쿠데타세력에 맞서 싸웠다. 특히 1963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추진되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때 그는 단식으로 맞서 항의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민족운동, 민주화운동의 장정에 나섰다. 1970년 《씨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목소리를 담았다. 학생과 청년들은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일을 도왔다.

그는 정치가들과도 손을 잡았다. 반민주적 조치가 있을 때마다 그의 발길은 분주했고 반대조직을 만들기도 하고 만든 조직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중요한 사례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1971년 삼선개헌반대투쟁 위원회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1976년 삼일민주구국선언, 1979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에 위원, 대표, 참여 등으로 이름을 올리고 투쟁의 대열을 이끌었다.

이 무렵 그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과 통합운동의 의미를 부각시키기도 하고, 노자, 장자 등 동양학 강의를 하기도 하고, 전태일 추도식에 참여해 씨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징역을 살기도 하고 구류를 살기도 했으며 고난을 함께 해왔던 부인 황덕순을 사별하기도 하고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분주하다면 분주했고 화려하다면 화려했다.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비록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유신은 사라졌으나 다시 전두환 신군부와 투쟁해야 했다. 그는 다시 단식을 하기도 하고 구류를 살기도 하고 《씨의 소리》를 폐간 당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6월 민주항쟁의 참여는 그의 마지막 생애를 장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군부의 호헌에 전면적 투쟁을 전개하려 결성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고문을 맡았다. 그 항쟁의 선언문을 8명 고문의 이름으로 발표할 때 그의 이름이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끝내 신군부가 무릎을 꿇는 6월 항쟁의 결실을 보았다.

그런데 이 해 처음 암수술을 받고난 뒤 2년이 안 되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 평생 고난의 역정을 걸었으나 그는 88세의 장수를 누렸다. 그의 장수비결은 절식, 채식 그리고 술과 담배를 멀리한 절제된 생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근면한 몸가짐에 있었다. 이 때문에 아무리 감옥을 들락거리며 시달리고 고문을 받았어도 버텨낼 수 있었다. 스스로도 말했지만 한의원인 아버지가 산삼을 많이 먹여 그 효과를 본 것이라고도 한다. 세상 소문이 믿을 것이 못 되지만, 그래서인지 가끔 젊은 여인과의 로맨스가 떠돌았다.

그는 고난에 찬 이 땅에 큰 족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종교인으로서 타락해가는 기독교의 반성을 글로 몸으로 외쳤다. 그의 민족, 민주, 인권, 평화를 위한 사상과 행동은 한 지성인 또는 사상가의 표본이 되었으며,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오래 그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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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이이화 | 주니어김영사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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