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

<한국 보수주의가 나아갈 길> 토론회 [발제문 1] 한국 보수의 뿌리와 정체성 : 월간조선



<한국 보수주의가 나아갈 길> 토론회 [발제문 1] 한국 보수의 뿌리와 정체성 : 월간조선

<한국 보수주의가 나아갈 길> 토론회 [발제문 1] 한국 보수의 뿌리와 정체성
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인가


글 :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글 :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글 :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南時旭
⊙ 74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석사, 독일 베를린국제신문연구소 수료.
⊙ 《동아일보》 정치부장·편집국장·상무이사, 《문화일보》 사장, 現 세종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취재보도론).
⊙ 저서: 《한국보수세력연구》 《한국진보세력연구》.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는 1870~1890년대 조선조 말 집권세력인 수구파에 맞서 문명개화(文明開化)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한, 당시로서는 진보세력인 개화파이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개화파 1세대라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2세대이다. 1세대의 대표이면서 개화파의 비조(鼻祖)인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교육받은 2세대 인물들은 실패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며 개화당이라고도 불린다. 이승만 안창호 양기탁 등은 개화파 3세대이다.

이들의 대표격인 이승만은 젊은 시절 개화파의 행동단체인 독립협회의 급진파 청년회원이었으며 2세대인 서재필의 배재학당 시절 제자이다. 그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내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을 건립,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건국의 주역이다. 그는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 우익·보수세력의 원조격이라 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세력에 대해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882년 개화파의 대표인 김옥균이 일본을 방문한 무렵부터였다. 당시 일본신문들은 김옥균을 ‘조선개화당 수령’이라고 불렀다. 개화당은 또한 ‘독립당’ ‘개진당(改進黨)’ ‘진보당’ ‘일본당’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개화당의 적수였던 민씨 일파는 ‘사대당’ ‘보수당’ 또는 ‘청국당’으로 호칭되었다. 개화파 자신들도 ‘진보’라는 말을 좋아해 기회 있는 대로 ‘진보’라는 용어를 썼다. 독립협회가 주선한 독립문 기공식 때 배재학당 학생들은 ‘독립가’와 함께 ‘진보가(進步歌)’를 불렀다.


진보·보수라는 용어의 역사

그렇다고 《독립신문》이 무조건 ‘진보’만을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독립신문》 영문판은 미국 공화당의 정강을 논하는 사설에서 “애국심, 모국어에 대한 애착, 그리고 친척에 대한 사랑과 환경에 대한 적응 같은 보수적 경향은… 인간의 가장 훌륭한 품성들”이라고 찬양했다. 이어 이 신문은 조선정부의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사설에서 “정직한 보수주의(honest conservatism) 같은 것도 존재하므로 보수층에도 정부의 모든 관직을 채울 수 있는 큰 죄 없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다”고 썼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보수파’와 ‘구신파(求新派)’를 대비시켰다. 이 글의 모두에 나오는 《황성신문》의 논설 가운데 ‘진보’라는 용어는 발전과 혁신을 의미한다.

한국의 정치세력이 좌우로 나뉜 것은 1917년 중국 상해에서 조선사회당이 결성되고 이듬해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만들어진 데 이어 1920년에 상해와 소련의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이 성립된 때부터였다. 국내에서는 1919년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공산단체라는 지하조직이 생긴 것을 계기로 조선공산당과 사회혁명당이 결성되고 1925년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별도의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이 무렵부터 좌우 이념대립이 일기 시작하여 1922년 연말에는 “조선 민중이 취할 길이 사회주의에 있는가, 아니면 민족주의에 있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그칠 줄을 몰랐다. 사회주의세력은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스스로를 ‘진보세력’이라고 부르면서 민족주의 진영의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공격했다. 이때부터 우익은 민족주의 세력으로, 좌익은 사회주의 세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1940년대 후반의 광복정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김일성도 광복 직후에는 우익세력을 ‘민족주의 세력’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처럼 좌파를 진보로, 우파를 보수로 부른 예는 1945년 9월 결성된 민족주의 진영의 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발표한 강령에 보인다. 그러나 ‘진보’라는 용어는 최근까지 이승만 정부 때 결성되었다가 해산당한 조봉암의 ‘진보당’의 경우를 제외하면 별로 쓰이지 않고 ‘혁신정당’ 또는 ‘혁신계’라는 애매한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민주 공화제의 도입 경위

대한제국 말까지 독립협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자유민권과 3권분립, 그리고 헌법제정과 입헌군주제 및 민회(국회)의 도입을 주창하면서도 황제의 폐위를 의미하는 공화제는 주장하지 않았다.

공화제 논의가 나온 것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후였다. 이승만은 1904년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이라는 저서에서 절대군주제와 입헌군주제도 및 민주주의제도를 자세하게 비교 소개했다.

공화주의는 1919년 3·1운동 이후 설립된 여러 임시정부의 헌법(헌장)에 대부분 도입되었다. 한국 보수세력의 원조라 할 이승만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건국 프로그램이라 할 ‘건국종지’(建國宗旨)와 ‘대한공화국 헌법 대강’을 마련하는 데 주동 역할을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 보수세력의 원류(原流)인 개화파와 이들의 전통을 이은 독립운동가들은 민회(국회)를 설치해 영국식 입헌군주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해 오다가 1919년 기미독립운동 후에는 공화제를 채택, 임시정부의 헌장에 명문화했다. 이 점은 자유민주주의제도가 1945년 광복 후 미군정(美軍政)에 의해 비로소 한국 땅에 이식(移植)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한국의 보수세력에 보존할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일부 논자(論者)들의 질문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모르는 우문(愚問)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과 보수세력

이승만은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열린 제1차 미소(美蘇)공동위가 미소냉전의 시작으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기휴회되자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정읍발언’으로 알려진 이 연설에서 그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무렵 미군정청은 국무성의 지시에 따라 여운형과 김규식을 주축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소련이 그해 2월 북한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정권을 수립하여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마당에 남한에서의 좌우합작과 미소공동위에서의 임시통일정부 수립 노력은 남한마저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초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소적(親蘇的)인 한반도정책에 반대한 이승만은 그해 12월 도미(渡美)해서 미 국무성이 추진하는 대한(對韓)정책의 부당성을 홍보하는 활동을 미국 조야(朝野)를 상대로 폈다. 미국정부는 처음에는 이 같은 이승만의 태도에 대해 몹시 불만이었으나 미소 간의 냉전이 본격화하고 한국 국내에서는 좌우합작협상과 제2차 미소공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간 1947년 7월부터 종래의 대한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이승만의 자율정부수립 노선에 좌익세력은 물론이고 김구 등 우익세력 일부도 반대해 우익진영의 분열이 초래되었으나 오늘의 시점에서 평가할 때 이승만과 그에 동조한 한국민주당 등 보수세력의 선택은 최선(最善)은 아닐지언정 차선(次善)의 부득이한 현실적 결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비록 남한 지역에만 수립된 국가이기는 하지만 조선조 말 개화파와 그 맥을 이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근대적 국민국가의 실현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즉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는 현재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위상을 차지한 나라로 성장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함으로써 오늘의 한국을 세계 제13위의 경제대국이자 G20 국가의 하나로 만든 주역들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든 이 점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보수세력의 功過와 正體性

대한민국은 약 20년의 시차를 두고 1940년대에는 건국을 하고, 1960년대에는 산업화, 1980년대에는 민주화 단계로 각각 들어섬으로써 서양에서 300~400년 이상이 걸린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반세기 만에 달성하는 기적을 이룩해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정보통신의 최선진국일 뿐 아니라 한류(韓流)라는 특이한 소프트 파워를 자랑하는 세계 중견국가의 하나로 성장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분단 60여 년 만에 봉건적인 세습왕조로 변한 스탈린주의적인 북한정권에 비해 체제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2차대전 종결 때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이 이처럼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발전을 거듭한 데는 건국의 주역인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보수주의 이념, 다시 말하면 ‘한국적 보수주의’ 사상이 원동력이 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뒷받침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한국 보수세력의 업적을 산업화에만 국한하는 경향이 있으나 민주화 역시 보수세력의 업적임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에 민주주의의 기적을 이룩한 민주화 세력은 넓은 의미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뚜렷이 성장한 총체적인 국민역량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정통 보수야당의 역할이 컸다.

6월항쟁의 중요한 추진세력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끈 민주통일당이라는 정통보수야당과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계와 각 시민단체의 지도자들, 그리고 보수성향의 언론을 포함하는 한국 보수세력이다.

보수세력에 과(過)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보수세력은 일제(日帝) 때 친일(親日)하고,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때는 장기집권과 인권탄압에 협력하거나 동조했다. 한국 보수세력의 또 다른 과오는 부정과 부패, 그리고 도덕적 타락이다.


보수세력이 지켜야 할 가치

보수주의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혁명적 방식이 아닌, 점진적 방식에 의해 실현하자는 태도를 말한다. 문자 그대로 그 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보존하면서 변화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영국의 보수주의는 혁명대신 의회정치제도를 지키자는 것이고, 독일과 프랑스의 현대 보수주의는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기존의 공화정을 지키자는 것이며, 미국의 보수주의는 200여 년 전의 독립선언서에 규정된 자유주의를 지키자는 것이다. 일본의 보수주의는 공산혁명으로부터 천황제를 지키자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보수세력이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보수적 가치는 자유주의, 반공주의, 법치주의, 사유재산권존중, 점진주의적 개혁, 그리고 민족문화, 전통, 애국심, 애향심, 예절, 부모공경, 경로사상에서부터 일부일처제, 낙태반대, 동성혼인반대 등 기존 가족제도의 옹호도 포함된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건국과정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이념으로 받들고 이를 공산주의로부터 지키려 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두 가지 가치체계는 당시는 물론 현재도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이다. 아무리 발달된 선진국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100% 달성될 수 없는 수준의 문제일 뿐이므로 미완성의 가치체계라 해서 대한민국의 가치체계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미완성의 이념을 지키면서 가꾸는 것이 지금까지 한국 보수세력이 걸어온 발자취요 동시에 앞으로의 과제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그동안 치열한 좌우투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보수세력의 반공주의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대한민국을 부정, 전복하려는 혁명적 좌파세력이 발호하는 한 한국의 보수세력에는 방어태세가 불가피하다. 그것이 바로 ‘방어적 민주주의’이다.⊙

<한국 보수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토론문 ①

자칭 보수의 많은 수가 ‘생각 없는 얌체’

姜圭炯 명지대 기록정보대학원 교수

토론자는 한국의 좌파를 진보라고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진보라 함은 형식상으로나마 ‘진보’하는 생각과 행동을 취해야 하는데 한국의 좌파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퇴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발표자께서 개화파를 한국 보수의 뿌리로 본 것은 탁월한 해석이다. 특히 근대화론과 부국강병론이 개화파와 한국 보수의 공통분모 중 하나라 할 것이다.

원래 진보의 중요 어젠다는 국제주의와 인권이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는 한반도 한쪽에서의 인권은 부르짖으나 다른 한쪽의 경악할 만한 인권상황에는 완전히 눈 감는다. 또한 과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쇄국(鎖國)정책을 방불케 하는 폐쇄성을 띤다.

한국 좌파의 큰 기둥인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민중경제론》, 그리고 그가 대필한 《대중경제론》, 더 나아가 변형윤 교수 중심의 학현학파 논리도 이 범주에 속한다. 리영희 역시 마오(모택동)체제를 찬양하며 이런 흐름에 편승했다.

특히 서구의 진보가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베른슈타인 수정주의에 입각한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가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품에 안기고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할 때, 한국의 좌파는 철 지난 공산주의, 그것도 다양한 변종의 공산주의에 대한 호의를 가졌다. 이것은 북한체제를 의식한 행동으로서, 한국 좌파의 담론투쟁에서 민족해방파(NL파), 그중에서도 특히 주체사상파가 승리를 거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

좌파사상 중에 가장 낙후된 주체사상이 담론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한국 좌파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러나 발표자가 잘 지적했듯이 한국 보수 역시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에는 왜 ‘헤리티지 재단’이나 ‘존 올린 재단’과 같은 훌륭한 보수주의 싱크탱크와 지원단체가 없으며, 왜 박정희 도서관이나 기념관의 건립이 기금부족으로 무산될 위기에 있는가.


左右대결은 문화경쟁

잠정적인 결론은 한국의 기득권, 자칭 보수의 많은 수가 ‘생각이 없는 얌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 인생을 신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그런 뜻있는 재단이나 기구를 만들거나 지원할 의지와 철학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 6·25 종전(終戰) 이후 한국의 보수는 권력과 기득권의 보호 속에서 성장했다. 온실 속 화초가 저항력이 약하듯 한국의 보수는 자생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오랜 세월 메마른 광야에서 야성적으로 커온 진보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무력(無力)했다. 현재 새로운 자생적 보수가 주목을 받으며 진보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는데 그 구성원의 대다수가 1980년대 진보세력에서 태동(胎動)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생각 없는 국민에게는 미래가 없다. 마찬가지로 생각 없는 보수에도 미래가 없다. 치열한 자기 혁신을 통해 진보하는 보수, 생각하는 보수, 야성을 가진 보수, 그리고 정열과 따뜻한 가슴을 가진 보수로 거듭나고 사회적 저변이 확대될 때에만 비로소 한국 보수에 미래가 있다.

한국의 좌파는 1980년대 이후 치열한 자세로 사회를 밑으로부터 변화시키는 문화·가치·사회운동에 성공했다. 이제 한국의 우파는 그 이상의 노력과 치열함으로 그들과 경쟁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투쟁과 같은 수준이라기보다는 누가 현실 문제를 더 잘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실용적인 논쟁이고 밑으로부터의 문화경쟁인 것이다.⊙

<한국 보수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토론문 ②

保守보다는 右派, 主流라는 표현이 적절

韓基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로서 개화파를 들고, 개화파의 사상을 실학파의 전통에 개화파 선구자들이 외국을 직접 견문한 바를 접목한 개화사상이라는 지적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런데 개화파 인물들이, 특히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 등이 한국 보수파의 원조(元祖)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이들의 사상이 보수주의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즉 왕조제나 반상(班常) 신분제를 핵심으로 하는 봉건제를 존중하는 가운데 현대 민주주의로 넘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 이것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 즉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앞서 나아가는 것을 넘어서는 거의 혁명적 인식변화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현대 문명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외국의 문명으로부터 수입한 것이었다.

남 선생님 발제문에서 보면, 한국에서 진보, 보수라는 용어의 등장이 일제시대에 좌익 사회주의 세력이 자신을 진보로, 우파는 민족주의 진영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도 ‘보수’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보수’로 위장한 세력이 문제

이처럼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구분법은 편의적인 용법이라면 몰라도, 현실을 정확히 반영키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의 기적도 사실은 무엇인가 만들어진 것을 보존하면서 수리(보수)해 나간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즉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한 가장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화조차도 민주화를 추동한 세력 내에서 자유민주주의 우파와 급진 좌파혁명 세력이 공존했고, 단기적 시기에 급진좌파 세력이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은 있으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본다면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진보나 보수라는 용어는 말 자체에 특별히 긍·부정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음에도 마치 진보는 좋은 것, 새것으로 인식되고 보수는 낡은 것, 오래된 것으로 인식되는 등 용어상의 혼란이 많기 때문에 좌파, 우파 같은 용어를 적극적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수세력보다는 주류(主流)세력, 주류층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최근 가장 큰 현안이 되고 있는 FTA 체결을 위시한 적극적 세계화나, 북한의 인권문제같이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반대하는 것 등도 보수세력이 적극 지지하고, 이른바 진보세력은 일종의 쇄국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진보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는 인권도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진보가 과연 ‘진보’라 불릴 수 있는가 의심스럽다. 오히려 쇄국, 수구, 퇴보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보수세력으로 불리는 집단의 문제점이라면, 앞에서 말한 주류세력(주류층) 전체의 문제라기보다, 보수를 표방하는 혹은 보수로 위장한 정치세력의 문제라고 본다. 즉 애국심, 철저한 선공후사(先公後私), 자기희생, 솔선수범하지 않고 당리당략과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보수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극복되지 않으면 ‘보수’의 위기가 아니라 국가의 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너무 높고, 선진화와 통일주도는 공염불이 되고 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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