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9

손민석 - 개인적인 감상.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라고 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17) 손민석 - 개인적인 감상.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라고 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외국의...




손민석
7 May at 00:31 ·



개인적인 감상.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라고 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외국의 글들까지 포함해서 마음에 드는 글이 안타깝게도 없다. 읽어보면 대부분 내용이 비슷비슷하다. 언어가 그리도 다른데 어쩌면 내용들은 그리 비슷한지. 현실사회주의는 잘못됐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진짜’ 마르크스는 레닌-스탈린주의와 다르다, 엥겔스를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이 마르크스를 왜곡해서 문제다 등등. 이런 서술들 중 내가 가장 불만을 지니고 있는 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리이다.

마르크스로부터 엥겔스를 분리해내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마르크스의 사상적 가치는 확연하게 줄어든다.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류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5가지인데, 그 5가지의 기준 중 무려 2개가 엥겔스에 의해 정식화된 것이다. 물론 그 엥겔스의 구분도 따지고보면 마르크스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 수는 있지만 명료하게 정식화한 것은 역시나 엥겔스의 공로이다. 40%의 내용이 엥겔스를 제외해버리면 소거되어 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나머지 3가지 기준간의 내적 연관 또한 소멸된다.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이 지니는 통찰력의 상당 부분은 엥겔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자연사에 관한 엥겔스의 관점까지 합친다면 그 비중은 더 상승한다. 아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류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5가지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만큼이나 복합적으로 역사를 파악했고 엥겔스도 그런 복합적인 역사인식을 가진 한 사람의 사상가이다.

마찬가지로 레닌을 마르크스(또는 엥겔스)와 분리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불만이 많다.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현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다소 무리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1870년대부터 1945년 이전까지의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이론으로써는 의미가 있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던지는 논점 중에도 따져볼 것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는 그의 정치이론도 재해석을 통해 조명될 지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레닌의 정치이론이 정치학에 던지는 가장 중요한 논제는 그가 기존의 홉스 이래로 전개되어 온 근대국가의 정치적 틀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전에 다소 간략하게나마 쓴 적이 있는데, 레닌이 보기에 마르크스가 근대 정치학에 던진 가장 결정적인 비판은 “적대”가 세계사적으로, 구조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적대’는 개인 혹은 어떤 정치적 집단 간의 알력이나 특수한 분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체적으로 이미 자본과 노동이라는 적대가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근대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다. 이 분리 속에서 정치적-계급적 논리 또한 경제영역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래서 레닌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노동자의 경제투쟁인 조합주의와 경제주의가 착취의 정도를 낮추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넘어서는 정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이러한 정치는 경제적 영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욕망의 분출로는 이뤄질 수 없다고 보았기에 외부로부터의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중시하였다. 여기서 홉스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홉스가 근대국가이론을 정초짓는 데 있어 가장 기여한 것은 국가의 존재가 대내적 자연상태를 소거하고 대외적 자연상태를 정초지음으로써 이 적대를 가린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홉스가 보기에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자연상태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되려 국외적 자연상태, 즉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국가들간의 무정부적 상황은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이득이 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국가로의 충성을 강화하고 국내적으로 내전이 나타날 수 있는 요인들을 정치적으로 해소시켜야 할 유인이 나타나며 국가로서는 인민들을 자신에게 보다 강하게 복종시킬 유인이 나타나게 된다. 개인과 국가 모두 국내적 자연상태를 해소하는 계기로서의 국외적 자연상태의 존재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홉스 이래의 근대국가 이론이나 정치이론은 이 틀 속에서 법과 정치를 논한다. 홉스가 자유주의의 비판자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홉스의 이론 속에서 역사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아무튼 그래서 자유주의 정치이론은 개인을 ‘중성화’시키고 국가 또한 중성화시킨다. 무슨 말인가? 근대국가의 근간인 법치는 부르주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 게다가 ‘공통’의 이익을 국가가 담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적 소유권의 보장과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의 보장이라는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자신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바로 이런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국가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사회구성체적으로 규정되는 ‘특수한 힘’이 된다. 그러나 그것의 적용에 있어서는 보편적인 힘으로의 전화 가능성이 나타난다. 예컨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지적하고 있듯이 국가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충실하게 따르다보니 전인민을 무장화시키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인민의 무장화! 그것은 마르크스가 1871년에 <프랑스내전>에서 웅장하게 주장했듯이 사회주의로의 전화 과정에서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단계이다. 근대국가의 관료제를 지양하는 계기로서의 전인민의 무장화. 근대국가는 부르주아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게 복무한다는 자신의 본질을 따르다가 역으로 자기 자신의 지양의 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화와 무장화라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이미 경제적으로는 제국주의 단계에 도달해 독점의 형태로 계획경제의 맹아가 형성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그 독점자본주의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조직화하고 있다. 레닌에게 있어서 혁명의 현실성은 이미 도래해 있다. 중요한 건 계급들 간의 대립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이 힘의 총량과 방향성이 모든 걸 규정한다.

이러한 레닌의 인식에서 중요한 건 기존의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통해 경제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계급들 간의 이해관계의 투쟁을 정치적 영역에서 ‘중성화된’ 근대국가가 제어하고 있던 상황, 심지어 “신사적으로” 국가들이 서로 간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대내적 자연상태인 ‘내전’ 특히 “계급간의 내전”을 통제하고 있던 상황을 계급적 적대라는 이름으로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권자의 주체가 국가였던 시대를 레닌은 계급 혹은 의식화된 개인의 차원으로 뒤집어버린다. 레닌의 그 유명한 테제, “제국주의에서 내전으로”라는 명제는 이 점을 매우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근대국가가 수행하고 있던 중성화 기능을 계급 적대와 계급 단결로 완전히 무화시키면서 투쟁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이제 대외적 자연상태는 다시 대내적 자연상태로 회귀한다. 아니 대내적, 대외적 자연상태의 구분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적 법체계와 주권은 정지해버린다. 아니 예외상태의 항상화가 나타난다. 여기서 주권 자체는 계급적대에 기반해 정초된다. 이렇듯 시대적으로, 세계사적으로 규정되는 계급적대는 국가를 가로질러 나타난다. 레닌이 이끌어낸 것은 계급적대라는 본질을 현상의 차원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가 적색테러를 공공연하게 말했던 건 그의 인격이 사악하고 잔혹했기 때문이 아니다. 힘으로 그 계급적대라는 본질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걸 인민에게 드러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중성화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카우츠키나 멘셰비키, 그리고 경제적 투쟁만을 중시하는 경제주의자들이나 조합주의자들 모두에게 우리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 그 기만성을 폭로하고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 그는 대놓고 적색테러를 저지른다.

레닌에게 있어 ‘정치’란 단순히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게 아니다. 노동자계급마저도 계급적대를 망각하면 테러와 숙청의 대상이다. 정치란 중간계급, 다시 말해 중산층과 같은 중성화된 이들에게 그리고 경제주의와 같이 경제영역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계급적대의 본질을 주입하고 드러내 보여주느냐에 있다. 인민 앞에 드러난 계급적대라는 본질 속에서 무엇을 택하고 행동할 것인지, 레닌은 예외상태를 규정하는 개인으로 만들어내 국가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정치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가 왜 독일혁명을 외치며 ‘다국적 적군’으로 유럽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도 이제 보다 명확해진다. 또 그가 왜 그렇게 소련을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연방제로 구성해 각 민족이 자유롭게 탈퇴하고 가입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도 이해가 된다.

문제는 이런 레닌의 근대국가를 가로지는 계급적대 의식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에 의해 ‘봉합’되었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레닌의 계급적대 이론을 다시 근대국가의 틀로 봉합시켰다. 그의 일국사회주의론이나 혁명론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줘도 근대국가들간의 ‘신사적인’ 대외적 자연상태로의 회귀를 지향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다시금 레닌의 계급적대를 불러냈던 마오조차 다시 근대국가의 틀로 회귀하게 되었기에 스탈린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월러스틴의 지적처럼 현실사회주의는 결과적으로 서구와의 공조 속에서 유지되었다. 냉전과 같은 신사적인 국가간의 전쟁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레닌의 시대는 지난 것일까 아니면 현재도 여전히 나타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후자에 가깝다. 레닌의 계급적대 이론은 마오에 의해 전유되었으며, 베트남전쟁을 지나 최근의 테러의 시대까지 계속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이들과 다른 점은 레닌의 경우에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라는 차원에서 행했다는 데 있다. 세계적 규모의 예외상태가 봉쇄되어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봉쇄와 해체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근대국가 체제 속에서 이 레닌의 계급적대 이론은 어떠한 의미와 위치를 지니고 있는가? 근대국가와 국제관계에 대한 레닌의 분석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명확하게 파악해야 비로소 그 이후의 스탈린과 현실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예외상태를 규정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개인의 수준으로 나아간 시대라는 조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법이나 국가, 제도 등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 틀을 만들어내는 구조로서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어떻게 지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레닌을 다시 독해해야 그 계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레닌의 이론을 통해 근대국가와 정치를 다시 독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이론으로써만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근대국가라는 틀을 넘어 사고했던 사상가이자 이론가로서의 레닌의 측면을 되살리는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이론이 지니고 있던 잠재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건 ‘진짜’ 마르크스를 찾아내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자꾸 사상가들을 떨궈내는 게 아니라 그 사상가들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틀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에서 발굴해내 이후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덧붙여 점점 더 큰 이론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런 식의 왜소화는 결국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도 ‘진짜’ 마르크스를 찾는다는 명분 아래 소거시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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