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1

알라딘: 우애의 경제학

알라딘: 우애의 경제학

우애의 경제학

가가와 도요히코(저자) | 홍순명(역자) | 그물코 | 2009-02-10 | 원제 Brotherhood 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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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9,000원
판매가 8,100원 (10%, 900원 할인) |
반양장본 | 199쪽 | 200*135mm | 259g | ISBN : 978899009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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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기독교에 묻는다, 경제정의가 살아있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1936년,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그것은 아담 스미스의 오래된 경제학의 길이 아니고, 칼 마르크스―레닌의 변증법에 의거한 유물론적 경제학도 아니다.

또한, 경제윤리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그저 믿음뿐인 기독교 교회도 답이 아니다. 기독교의 이상이 사랑과 우애라면, 거기에 바탕을 둔 경제체제는 자유경쟁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물건이 아닌 인격을, 이윤 추구가 아니라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의식을 각성하는 교육을 통해 자라는 협동조합체제여야 한다는 것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답이다.

기독교도로서 가가와 도요히코는 기독교 윤리의 중심 사상―예수의 속죄애에 의한 형제애―을 개인의 종교 영역에서 현실사회에 적용한 경제 제도로 협동조합을 주창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십자가를 지는 사랑의 원리가 설교단에서 신학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사회생활 전체에서 나타나야 된다고 말한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경제운동의 본질이 되는 원리가 존재한다고.

만일 여러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몇 가지 해석상의 차이가 있더라도 모두에게 공통하는 신약성서의 원리에 따라 서로 일치할 수 있다면, 만일 그들이 형제애에 바탕을 두고 협동조합운동을 실천하는 데 합의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만연할 수밖에 없는 실업이나 공황, 착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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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옮긴이의 글

제1장 카오스에서 빠져나갈 길이 있는가
제2장 그리스도와 경제
제3장 유물론적 경제관의 잘못
제4장 변혁의 철학
제5장 여러 세대를 꿰뚫는 형제애
제6장 현대 협동조합운동
제7장 형제애의 행동
제8장 협동조합 국가
제9장 형제애에 바탕 둔 세계평화

참고문헌
찾아보기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하여-김재일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 가보지 않은 길, 협동조합 국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09년 2월 14일 지성 새책





저자 : 가가와 도요히코 (賀川豊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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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그리스도교 입문>,<우애의 경제학> … 총 3종 (모두보기)
소개 :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우치무라 간조와 더불어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실천적 크리스천이다. 세계 최대 생활협동조합인 ‘코프고베’를 설립하고 노동자·농민 운동과 빈민 구제에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예수의 친구회’를 통해서 백만인 구령 운동을 벌였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이름으로 복음 전도와 사회 개혁을 접목한 운동을 전개했다. 1940년에는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사죄하는 글을 발표해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민간인으로서는 일본인 최초로 맥아더 장군과 만났다. 한국의 자유당 정권 때 개인 자격...




역자 : 홍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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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논과 마을을 살리는 오리 농업>,<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홍순명 선생님이 들려주는 풀무학교 이야기>… 총 12종 (모두보기)
소개 : 1936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중학 시절 김교신, 함석헌, 노평구 같은 이들의 책을 통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다. 17세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 무교회 정신으로 풀무 농업 고등 기술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군 제대 후 바로 합류해 1960년부터 교사로 재직하다 2002년 정년을 맞아 퇴임하였다. 지금은 풀무 생태농업 전공과정 강사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으며, 2011년에 세워진 홍동밝맑도서관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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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풀무학교는 어떻게 지역을 바꾸나>,<충남의 미래 2040 :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토종 농사는 이렇게>등 총 64종
대표분야 : 환경/생태문제 4위 (브랜드 지수 30,28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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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기독교에 묻는다,
경제정의가 살아있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1936년,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그것은 아담 스미스의 오래된 경제학의 길이 아니고, 칼 마르크스―레닌의 변증법에 의거한 유물론적 경제학도 아니다. 또한, 경제윤리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그저 믿음뿐인 기독교 교회도 답이 아니다. 기독교의 이상이 사랑과 우애라면, 거기에 바탕을 둔 경제체제는 자유경쟁 원리를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물건이 아닌 인격을, 이윤 추구가 아니라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의식을 각성하는 교육을 통해 자라는 협동조합체제여야 한다는 것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답이다.

자유경쟁 원리에 바탕 둔 자본주의 운명을 예언한 사상가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의 명문가에 태어났으나, 빈민가에서 15년 동안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노동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 농민조합에 실천적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본 생활협동조합의 토대를 놓아, 일본만 아니라 세계의 3대 협동조합 사상가로 꼽히고 있다.
기독교도로서 가가와 도요히코는 기독교 윤리의 중심 사상―예수의 속죄애에 의한 형제애―을 개인의 종교 영역에서 현실사회에 적용한 경제 제도로 협동조합을 주창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언적 존재’였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공산당이 형제애를 무시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었듯이, 물질만 추구하고 정신성을 표류시키는, 경쟁과 약탈의 자본주의 운명도 같이 보았던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협동조합으로!
우리나라도 2005년 1월, 법률 7348호로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 통과되었다. 한국 협동조합운동은 30년대부터 민족의 수난기에 선각자들이 국권의 회복과 사회 개조의 신념으로 전개해왔다. 협동조합 이론가들은 조합을 ‘있어야 할 조합’과 ‘무늬만 있는 조합’으로 구분한다. 운영과 효율만 있고 높은 윤리성이 없는 조합은 물질적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궤도를 갈 것이다. 조합이 정말 ‘있어야 할 조합’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지구적인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치하는 분단현실 속에서 우리나라가 물리적 통일만이 아니라, 진정 인권과 형제애에 바탕 둔 경제정의사회가 수립되기를 염원할 때, 이 책은 한 번 읽고 생각할 만하다.

지금의 협동조합운동에 던지는 메시지
우리나라에도 많은 협동조합이 있다. 그러나 조합원으로 가입한 사람은 물론, 협동조합을 운영해가는 사람들의 의식이 진정한 협동조합 정신에 얼마나 가 닿아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초의 생활협동조합으로 알려진 영국 로치데일 생협이 성공한 비밀 가운데 하나는,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서 조합원들 사이에 서로 사랑한다는 약속이었다. 경쟁과 약탈이 아닌, 우애의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만 협동조합은 가능하며, 이러한 정신은 기독교의 이상과 합치한다는 것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가가와 도요히코는 생협운동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은 생협의 여러 원칙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착취 없는 경제체제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물음, 현대 세계의 소란 가운데 왜 교회는 무력한가?
가가와 도요히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많은 그리스도 교회는 사랑의 높이와 깊이, 넓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인간의 생각을 바꿔 사랑의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는 주저하고 있다. 이런 주저는 주로 개신교 교회 역사와, 그와 관계를 가진 자본주의 사회에 기인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교회 조직의 대부분은 부당 이득 사회의 특권계급에 의존하고 있다. 이기적이고 부당한 특권계급이 교회를 지배할 때, 교회는 신약성서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생활의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존재가 왜 취약하며 현대 세계의 소란 가운데 왜 교회가 무력한지 우리들에게 밝혀주고 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십자가를 지는 사랑의 원리가 설교단에서 신학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사회생활 전체에서 나타나야 된다고 말한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경제운동의 본질이 되는 원리가 존재한다고. 만일 여러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몇 가지 해석상의 차이가 있더라도 모두에게 공통하는 신약성서의 원리에 따라 서로 일치할 수 있다면, 만일 그들이 형제애에 바탕을 두고 협동조합운동을 실천하는 데 합의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만연할 수밖에 없는 실업이나 공황, 착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1936년, 2009년 우애의 경제로
전 세계적인 불황과 경기 침체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근본적 결함이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대안이 있을까,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 특히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면 7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가가와 도요히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2009년은 가가와 도요히코가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일본(이와나미)에서도 이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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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3편




형재우애의 경제학으로....가자.. 데이비드온1세 ㅣ 2017-04-03 ㅣ 공감(0) ㅣ 댓글 (0)


우애의 경제학(brotherhood economics)을 읽고- 가가오 도요히코 저/홍순명 옮김



작년 우연히 일본 여행중에 우연히 “가가와 도요히코”를 알게 되었다. 매우 존경할 만한 분임을 알게 되었고 그 궁금증에 이 책을 읽게 됨....


이 책은 저자가 1936년 4월경 미국 콜게이트 로체스터 신학교의 초대로 강연한 것을 토대로 지은 책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말한 우애의 경제학은 8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가 읽고 있는 고전 경제학 책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가가와 도요히코가 말한 협동조합을 통한 경제적 공동체의 회복 논리는 타당한 것일까?

저자는 머리말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이 책을 초대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고기를 잡으러 나간 어부와 같다.어부는 낚싯대나 먹이를 준비해 가지만,고기는 그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부와 고기의 내적인 목적 사이에는 일치가 아니라 대립이 있다.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원래 서로 같이 움직여야 할 두 가지 부자연스러운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벌어진 틈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결코 구원되지 못할 것이다.불황,공황,실업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저자는 예견이나 한 듯이 8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한 듯 싶다!!즉 내적인 목적 일치! 이것이 먼저 우선시 되어야 함을 말하는 듯 싶다.

그가 키운 일본 고베의 협동조합 규모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가 생각하는 우애의 경제학은 무엇일까?

첫째 그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4가지로 정확하게 인식할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네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약탈시스템,둘째 적은 사람 손 안에 자본이 축척되어 상류계급을 만든다. 셋째 자본 집중과 동시에 세력은 지배계급에 집중한다. 넷째, 무산자, 저임금 노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숫자가 늘어간다.(p27)”
1940년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혼돈의 시대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약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사회 재건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함을 깊이 있게 인식한 듯 하다.



둘째, 기독교의 진정한 실천은 경제생활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타당하며,그 기도는 개인만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를 위한 것이고 그 완전한 용서는 어떻게 나타나겠는가? 그것은 경제적 협동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p32)



셋째, 기독교 윤리의 중심사상을 예수의 속죄애 인식에 따른 형제애로 규정하고 개인의 종교영역에서 현실사회에 적용한 경제제도가 협동조합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그리스도 자신이 가치의 7요소를 우리들에게 보이셨는데 그 가치는 생명,노동,교환,성장,선택,질서,목적의 가치이다.이 가치의 7요소가 우리들이 경제시스템을 검증하는 기준이라고 한다.(p33)
그렇다면 저자는 십자가가 경제적 가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개인의 가치운동과 사회의 가치운동 사이에 완전한 일치를 본다.신학자들이 흔히 예수 속죄의 죽음은 개인의 영혼을 위한 일이고,사회 전체를 위한 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개인의 잘못은 전 세계의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애는 사회 전체를 구하기 위한 개개인의 영혼의 구원을 의미한다. 만일 십자가의 의식을 전 인류가 이해하게 된다면 이상적 사회가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이 십자가의 사랑은 경제적 가치의 7요소 모두를 포함한다.결론적으로 십자가 정신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짜여진다면 우리들의 경제 실천에서 주저하거나 더듬는 일은 전혀 없게 될 것이다.”



넷째, 진정한 경제 혁명은 그리스도와 같이 생명에 대하여 자각한 의식이 사회화할 때에만 이루어진다.바꾸어 말하면,기독교적인 형재애의 발전이 이상적 경제사회 발전에 기본적이라고 굳게 믿는다.기독교적인 형제애가 되지 않으면 우리들은 결코 이상적 경제사회를 볼 수 없을 것이다.( p77)


이렇게 협동조합의 정신적 가치의 기반을 십자가 정신에 두고, 경제적 협력체를 구성하기 위해서 협동조합을 키우셨다. 그 이후 저자는 길드와 중세시대의 수도회 등을 설명하며, 그 정신적 기반이 바로 십자가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피력한다.



지금 고베에 있는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협동조합의 외형을 생각하기 이전에, 이렇게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마음에 품고 키운 이 십자가정신을 잊어서는 안될 듯 싶다.. 이런 외형적 결과가 나오기이전에, 흐르는 역사앞에서 가가오 도요히코는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묵묵히 걸어온 듯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나 또한 점점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보수화 기질을 버리고, 또한 교회들은 개인 구원만을 가르치는 이원론적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 바른 경제관속에서 약자들을 위한 배려를 위한 공동체를 위해 달려가야 함을 느낀다. 사회에 대한 관심, 사회변혁에 대한 관심을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한 애정 어린 관심으로 바른 경제적 공동체를 꿈꿔본다.


(사진은 고베 생협 매장 모습과 저자가 꿈꾼 협동조합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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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애에 기반한 협동조합 국가를 꿈꾸다 좋음 ㅣ 2016-07-07 ㅣ 공감(8) ㅣ 댓글 (0)


#우애의 경제학 #가가와도요히코



이 책의 저자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서 기도의 사람이었고, 일본 근대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린 기독교 사회주의자이며 목사”였던 ‘가가와 도요히코’다. 5년에 걸친 빈민가 생활을 한 저자는 미국에서 유학 후, 일본으로 돌아와 노동조합을 만들기도 했고, 농민 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경제구조의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빈민가를 변화시키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만 명이 넘는 시위를 일으켜 보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감옥에도 수차례 다녀왔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던 이유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사회 구원을 이루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저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기독교의 진정한 실천은 경제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종교개혁자들은 개인의 믿음의 영역에 대해서 많이 강조했는데, 저자는 바로 이점의 지나친 강조 때문에 경제적인 공동체성을 크게 잃어버린 역사가 있다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신교회들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오며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많은 기독교 운동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그러한 모습이지만, 그 영향력은 신자 한 사람의 개인적인 영역이나 개 교회에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종교 밖의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종교적 신념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 조차 이것이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큰 오류라는 것을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이어서 말하기를 심지어 교회 조직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부당 이득 사회의 특권 계급에 의존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저자는 이렇게 기독교가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 교회들이 자본주의 구조에 기대어 있는 모습에 대해서 크게 안타까워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러한 일들에 관심이 없고 행동하지 않는 이들의 신앙은 미신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기 까지 한다.



교회들이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을 이 사회 가운데 이루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저자는 바로 인간 의식의 변혁에서 답을 찾는다. 신앙을 개인의 영역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미신을 변혁하여 신앙이란 개인을 넘어 이웃과 함께 누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고 실천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실천을 점점 사회화 할 때 기독교적인 경제혁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인의식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형재애’, ‘우애’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 심지어 교회의 암흑기라 불리는 중세 시대에도 멈추지 않고 존재했던 형재애를 바탕으로 한 운동들이 있어왔다. 안타깝게도 개신교 역사 이후 자유가 강조되면서 형제애가 점점 약해졌는데, 이러한 상황 중에 유럽과 일본에서 일어난 협동조합 운동은 개인의 자유와 형재애가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며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저자가 반복해서 이 책에서 언급하는 협동조합은 로치데일 생협 운동과 독일의 프리드리히 폰 라이파이젠운동이다. 물론 이러한 협동조합 운동들과 이후에 나타난 현대의 협동조합에도 특정 지역이나 사람들의 복지만 강조하는 폐단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자는 사회 전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개인의 의식각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협동조합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이것을 기반으로 한 사회, 국가, 이를 바탕으로 한 세계 평화까지 자신의 논의를 밀고 나간다는 점이다. 협동조합들이 연맹을 맺고, 이들에게서 대표를 뽑아 의회를 조직하고, 이들만의 대표는 이들만의 이익을 반영하기 십상이므로 이들 외에서 대표를 뽑아 사회 의회를 따로 조직하고, 이 두 가지 의회에서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국가들이 세계에 확산되면 평화도 함께 확산 될 것이라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저자가 이렇게 각 나라들이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사회를 조직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빈곤으로 몰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경제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먹거리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인구과잉 때문에 위협받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탐욕이다. 저자는 이 탐욕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뿐이고, 이렇게 치유 된 사람들이 힘을 모아 형재애에 바탕을 둔 새로운 경제를 만들기 위해 힘을 써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회 안에서 고립된 교회. 아니 고립을 자처한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고민한다. 기존의 교회의 틀은 이제 더 이상 순기능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존의 교회들이 이러한 평가를 받는 큰 이유가 신앙을 개인의 영역으로 국한 시키며 사회 안에 작은 자들, 즉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책은 80여 년 전의 협동조합에 대한 논의를, 그것도 아주 러프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은 꾀나 지겨울 수도 있을 것 같다.(솔직히 나도 좀 그랬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는 교회의 모습, 즉 신앙을 개인의 영역에만 축소시켜 사회에 대하여 무관심한 모습은 내가 속한 지금의 한국의 많은 교회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이러한 점만으로도 읽는 내내 마음에 지적당하는 것 같은 불편함도 있었지만,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도 같은 것을 발견한 희열? 같은 감정도 있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이 책에 대한 논평이 너무나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인용하며 마무리한다.



“협동조합이 대안인가? 라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애의 정신에 기초한 연대와 협력의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대다수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이 자본주의 사회가 타인의 눈물과 고통 위에 일부의 풍요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의 현실이 극복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자유롭고 해방된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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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살림살이, ‘생협’ 숲노래 ㅣ 2009-05-07 ㅣ 공감(4) ㅣ 댓글 (0)


이 책 하나 103 - 가난한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살림살이, ‘생협’
: 가가와 도요히코, 《우애의 경제학》


- 책이름 : 우애의 경제학
- 글 : 가가와 도요히코
- 옮긴이 : 홍순명
- 펴낸곳 : 그물코 (2009.2.10.)
- 책값 : 9000원


(1)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옆지기 어머님이 지난해께였나, 인천 관교동에 다녀오실 때 그곳에 빼곡하게 들어찬 술집으로 이루어진 거리마다 자동차가 촘촘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안 그런 사람도 많’은 듯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노동자날부터 어린이날까지 징검다리 쉬는날이 이루어졌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하는 어느 아주머니가 모처럼 나들이를 해 보려고 차편을 알아보는데 닷새에 걸쳐 예약이 꽉 차 빈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며,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하나도 안 그런’ 듯하다고 말씀을 잇습니다.

이런 말을 따로 듣지 않더라도 배부른 사람들은 그야말로 배부른 삶을 이어갑니다. 배부른 사람이 몇 퍼센트이고 배곯는 사람이 몇 퍼센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라살림이 기우뚱하더라도 배터지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나라살림이 넉넉하더라도 배고픈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우리 세상은 고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이웃과 고르게 나누려는 마음이 적습니다.


.. 오늘날 가난은 물질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풍부에서 생기고 있다. 물질이나 기계의 과잉생산, 과잉노동이나 지식층의 존재에서 오는 고통이다. 우리들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부는 아주 작은 한 줌 사람들의 손에 쌓여 있고, 사회의 일반 대중은 헛된 외침을 부르짖고 있다. 물자가 넘치는 창고 밖에는 한없이 많은 실업자가 굶주리고 있다 … .. (14쪽)


자전거를 타고 인천과 서울을 가끔 오가곤 하는데, 이때마다 길거리를 가득가득 누비는 자동차물결을 구경합니다. 전철을 타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동안에도 한강을 따라 이어진 찻길에는 자동차가 빼곡합니다. 때때로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볼일을 보러 움직이노라면, 버스가 많이 막혀 제대로 못 가곤 합니다.

기름값이 하늘 모르게 치솟는다 하여도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기름 먹는 자동차만 달리는 길’을 새로 닦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지구자원을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제 살림을 줄이면서 모자라거나 어려운 이웃을 보듬으려는 마음 또한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씀씀이와 이웃이 함께 사는 씀씀이를 헤아리는 눈썰미를 찾기 힘듭니다. 내 살림을 즐기거나 누리자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살피는 눈매를 찾기 어렵습니다. 내 앞날을 걱정하며 돈을 쌓아두는 손길은 있으나, 바로 오늘 걱정스러운 삶을 가까스로 잇는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 우리는 형제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날 도시 생활을 비참하다. 도시가 크게 될수록 범죄가 많아진다. 법률만으로 범죄자나 빈민가 소년들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일본에서 우리들이 농민조합을 만들고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도둑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좋은 협동조합이 있으면 도둑질 하려는 욕망이 사라진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도 그렇다. 그들 나라에는 도둑이 적다. 그러나 미국에는 많은 경찰관, 감옥 그리고 범죄자가 있다. 좋은 국민실업보험, 노령연금, 큰 도시가 있으면 연기로 뒤덮인 문명이 있다. 그리고 좋은 협동조합운동이 있으면 그 나라에 절도가 사라진다 .. (32쪽)


그래도 이웃을 보듬는 손길을 아예 못 찾지 않습니다. 배부르거나 배터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찾기 어렵습니다만, 똑같이 배고프거나 배곯는 사람들 사이에서 손쉽게 찾아보곤 합니다. 이랜드 일반노조 사람들 목소리가 담긴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같은 책에도 나옵니다만, 예배당에 몇 억도 아닌 수십 수백 억에 이르는 돈을 척척 갖다 바칠 줄은 알아도,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안 쓰고 비정규직으로 쓰다가 내치려고 하는 기업주들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말해요 찬드라》 같은 책에도 나옵니다만, 똑같이 힘겨운 일을 하는 노동자 사이이지만,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가볍게 손찌검을 하고 자연스레 일삯을 떼먹는 일이 버젓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더 안쓰러운 일이라 한다면, 우리 스스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목아지까지 날아가 길거리로 쫓겨나기까지는 이런 얼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아니, 있는 그대로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정작 나 또한 길바닥에 내팽개쳐질 그때가 되어서야 ‘그렇구나. 이런 일이 거짓이 아니구나. 이렇게 길바닥으로 내몰리니까 악을 쓰며 내 권리를 찾으려 하고, 평등과 평화를 바라게 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진작 우리 스스로 정규직 자리에 있을 때부터 비정규직을 보듬으며, 어느 누구라도 똑같은 일에 똑같은 대접을 받는 평등과 평화를 이루려는 마음을 못 품습니다. ‘정규직이라는 이름이라지만 나 또한 당신처럼 힘들다’는 핑계 한 마디로 고개를 홱 돌릴 뿐입니다.


.. 중세의 길드는 착취 없는 경제활동의 조직화를 이루었지만, 그 조직은 비조합원까지 형제애를 미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현대 협동조합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그 서비스를 지역사회 전체에 확대하는 것이다. 옛 조합은 서비스를 자기 조합에 한정하였다 … 조합의 기본 신조의 하나는 정치와 종교 양쪽에서 중립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현대의 협동조합은 단일한 조직 속에 일정한 사회집단의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런 단일 조직은 어느 땐가는 기능을 계속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 강제 협동조합에서는 개개인이 비밀 매매로 협동조합의 본질에 어긋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다 보면 시스템 전체가 헛돌게 되고, 계획경제는 무너지게 된다. 다른 한편, 자발적인 조직에서는 이런 유혹이 없을 것이다. 협동조합 경제의 진정한 모습은 착취 없는 계획된 경제체계라는 데 있다 … 소비자협동조합은 단지 먹을거리 잡화를 사기 위한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협동조합이란 새 사회의 경제 단위이고, 조합원은 거기에 충실히 협력해야 한다. 설령 서비스가 조금 늦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조합원은 그 이익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 노동으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목적의식적인 견실한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은 암초에 부딪쳐 버린다 … 조직된 조합 사회에는 형제애가 필요하다. 자본가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그들이 교정되도록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 (94, 100, 105, 108∼109쪽)


홍세화 님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같은 책에도 썼지만, 고리끼 같은 분은 일찌감치 《러시아 이야기》나 《이탈리아 이야기》 같은 책에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제 권리를 되찾고자 주먹 불끈 쥐며 어깨동무를 할 때에, 옆에서 이들이 손을 놓은 일 때문에 전차도 못 타고 가게에조차 못 가게 되더라도 얼굴 찡그리지 않고 똑같이 어깨동무를 해 주는 노동자 벗’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못 느끼는 일이지만, 지난날 이 나라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민란’이나 ‘소작쟁의’ 같은 일 또한,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어깨동무’가 아니었으랴 싶습니다. 지난날에는 낮은자리 사람들 이야기를 역사책에 적바림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까닭이라든지 이 움직임은 어떠했는가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품앗이나 두레와 같은 모둠일을 헤아리면서, ‘있는 사람이 나누어 주는 고마움’보다 ‘없는 사람이 종이 한 장 맞잡는 나눔’이 훨씬 오래도록 이 땅 구석구석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과 낮과 저녁 사이 골목길 쓰레기를 줍는 할매와 할배 같은 손길이 바로, 없는 가운데 낮은자리에서 이웃을 생각하며 서로 돕는 매무새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 현재 노동조합은 소비자협동조합에 아무 주목도 하지 않고, 신용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조합이 그와 같이 근시안적인 정책을 유지하는 한, 설령 정치권력에 아무리 이기더라도, 자본주의적 압제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자본가가 파산을 하고 노동자가 실업에 빠졌을 때, 노동자들은 수요자인 자본가로부터 공장을 맡아 자기 임금을 조정하는 권리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체제와 비교하여 수입은 줄었지만 실업은 벗어날 수 있었다 … 만일 사람들이 새 지하철 건설에 도시 공채 발행보다 협동조합 자본을 이용하면, 자본가들이 합법적 이익을 도시에서 빨아들이는 것을 막을 것이다 … 현재 시스템에서는 예를 들면, 철도나 항만, 시장이나 해운 등 자체 공익사업은 정치의 돈잔치가 된다. 정권과 정당이 바뀐다 해도 다음 선거 뒤에는 포기할지 모르는 계획이 세워지게 된다 .. (116, 118, 132∼133쪽)


새 살림집 보증금을 빌리려고 은행에 찾아가며 느꼈는데, 나라에서는 우리 식구 같은 사람한테 도움을 준다면서 ‘저소득자 전세자금 대출’이나 ‘무주택자 전세자금 대출’ 같은 제도를 마련했다고 합니다만, 정작 저소득이든 무소득이든 무주택자이든 영세민이든, 우리 같은 사람은 대출을 받을 수 없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저소득자라 하여도 ‘돈 좀 있고 정규직으로 느긋한 일자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싼 대출, 이를테면 전세돈 천만 원이나 오백만 원을 빌릴 수 있었고, 다문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조차 빌려 주는 대출이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 광고에서 수없이 떠드는 ‘대출 대부업’이 그토록 판치고 넘치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없는 사람은 은행문을 두드릴 수조차 없음을 익히 알기에 그런 대출 대부업이 넘칠 테지요.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은 그 같은 대출 대부업에 손을 뻗게 되면, 그날부터 죽는 날까지 빚잔치 하느라 살아가는 즐거움을 싹 잊고 주름살이 늘어갈 테고요.


(2) 베푸는 삶, 나누는 삶


자전거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안이나 부평 둘레에만 가도 우람한 예배당 건물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 중ㆍ동구 옛 도심지에도 비죽비죽 뾰족탑 높이 올린 예배당이 꽤 많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받이 꼭대기마다 천주교회나 성공회교회니 감리교회니 장로교회니 안식일교회니 또 무슨무슨 교회니 하면서 우람한 건물이 지붕 낮은 집을 내려다봅니다. 구멍가게 숫자와 맞먹는, 어쩌면 구멍가게 숫자를 훨씬 뛰어넘을 만한 예배당 숫자입니다.

집없는 사람 많으나 예배당 어느 곳도 이들한테 사랑을 베풀지는 않습니다. 드넓는 예배당은 하느님 사랑을 노래하고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비손을 올리지만, 예배당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쳐다보지 않습니다. 길 가는 사람한테 티슈꾸러미를 안기며 교회 나오시라며 꾸벅하고 절을 할 줄은 알아도, 집집마다 어떤 근심과 걱정으로 하루하루 실낱 같은 삶을 붙잡는 줄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예배당한테 가난한 사람들 눈높이에 서라고 하는 일은 처음부터 잘못이었을까요.


.. 일본에는 1800개 교회가 있지만 그 대부분이 도시에 있다. 시골에는 3천만 명의 사람이 있고 9천 개의 마을이 있지만, 그 사람들을 위한 전도소는 겨우 170개가 있을 뿐이다 … 예수 종교의 위대함은 그의 가르침이 우수한 데 있지 않고, 그의 의식이 하나님의 그것과 하나라는 것,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끝마친 짧은 삶에서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정신적 발달을 체현한 데 있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완전한 융합을 보인 것이다 .. (23∼24, 38쪽)


낡고 헐어 새 건물을 지어야 한다든지, 신자 숫자가 늘어 큰 건물을 지어야 한다든지 하는 말은 옳습니다. 거룩한 집을 새로 지어야 하기에 신자들이 돈을 바쳐야 한다는 말도 옳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집에 바쳐지면서 거룩한 집이 지어진 다음에, 이곳은 누구한테 문을 열어 놓습니까. 그 넓디넓고 따뜻하거나 시원한 거룩한 방 한 칸쯤 우리들한테 내어주면서 다리를 쉬고 몸을 뉘일 수 있게끔 열어 놓고 있습니까. 또는, 예배당에 쌓이는 돈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몇 해 앞서 몇몇 재벌회사 우두머리 되는 분들이 몇 천 억씩 턱턱 ‘사회에 바치겠다’고 내놓은 돈을 보면서, 그만한 돈을 일찌감치 나눌 수 없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돈이란 우리한테 입이 쩍 벌어지는 크기이지만, 그이들한테는 그리 큰돈도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이들은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할까요. 너무 많지만 너무 많은 줄 모르고, 탱자탱자 써도 다 쓰지 못할 그 끔찍한 돈에 갇혀 사람을 못 보고 사랑을 못 느낀다고 할까요.


..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의 실천에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귀의하는 데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 신앙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이 가능성을 믿는 그 자체가 인간의 행동을 요구한다 … 만일 하나님만 생각하고 인간을 무시한다면 종교는 무의미하게 되고 인간을 창조한 이유도 없게 된다 … 사실 사랑은 인간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 신앙이란 언뜻 봐서 약하게 보이는 사랑의 힘이 인간 폭력의 힘보다 위대함을 믿는 데 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일은 같은 일, 하나의 일이 되어야 한다 … 그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 개신교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을 제한한다. 한편 가톨릭은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한다 … 신앙을 단지 이론적인 것으로 알고, 삶 전체의 문제로 삼지 않는 신학자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 햇볕을 받으면서 그것을 통과시키지 않는 유리창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 (40∼43, 46쪽)


사랑을 베풀라고들 하지만, 사랑은 베푸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사랑은 나누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나눌 수 있으니 사랑이요 믿음이지, 베풀 수 있다면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나한테 넉넉히 있기에 베풀 수 있는 사랑이나 믿음이 아닙니다. 내 온몸으로 함께하고 싶기 때문에, 내 온몸으로 함께하는 삶이기에 나누게 되는 사랑이요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이면서 얼마든지 나누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난하면서 조금도 안 나누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조금 베푸는 척 시늉을 하지만, 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닌 자랑이 되기 때문에 이름을 팔고 얼굴을 팔 뿐인 겉치레로 그칩니다. 베푸는 사람은 저한테 넘치거나 많은 무엇을 덜어내지만, 나누는 사람은 ‘나누어 받을 사람한테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를 온마음으로 느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돈을 쥐어 주어야 할는지, 일을 거들어야 할는지, 밥상을 나란히 마주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할는지를 그때그때 알맞게 느낍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사랑이란 돈으로만 할 수 있지 않거든요. 이웃집 꽃그릇에 물을 주는 일도 사랑이요, 이웃집 할매 다리를 주물러 주어도 사랑이며, 이웃집 할배한테 책을 읽어 주어도 사랑입니다.


.. 오늘날 방탕에 쓰이는 막대한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에서 공인 매매춘과 사적 매매춘에 쓰이는 금액은 연간 10억 엔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쌀의 연간 소비는 15억 엔으로 그 금액의 1.5배에 지나지 않는다(1936년) …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기 위하여 종교단체가 늘어나, 미국에서만 건물 유지를 위하여 약 70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사용되고 있는가. 그 총액은 아무도 계산할 수 없다 .. (60∼61쪽)


하기는. 지나온 제 삶을 돌아보니, 먹고 입고 쓰고 마시고 하는 모두를 아끼거나 줄이면서 악착같이 살림을 꾸려 몇 천만 원짜리 전세집에서 산 적이 있는데, 이렇게 아끼고 전세집에서 살 때에는 이만한 ‘집크기’를 지키거나 ‘조금 더 큰 집자리’를 알아보려고 내 자리만 더 돌아보게 되지, 좀더 값싼 전세집으로 옮기면서 ‘그만큼 덜어진 돈’으로 이웃과 나누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저 한다는 생각이라면, 한 달에 십육만 원 벌면서 살던 때에는 오백 원이나 천 원을 동냥그릇에 넣으면서 나눈다고 하다가, 한 달에 백만 원 넘게 벌면서 지내니 만 원짜리나 오천 원짜리도 넣으면서 나눈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십육만 원 벌며 천 원을 내는 푼수라면, 백육십만 원을 벌 때에는 만 원을 내는 일이 ‘손 떨리는’ 일이 아닐 텐데, 손이 떨렸습니다.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참말 그러했습니다.

이제 다시 아주 작은 살림을 꾸리고, 벌이 또한 아주 낮아진 이즈음에는, 때때로 만 원이나 이만 원 거들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손 떠는’ 일이 없습니다. 척척 바칩니다. 돈을 바쳐야 할 때에는 돈을 바치고, 몸을 바쳐야 할 때에는 기꺼이 자원봉사를 합니다. 더 있다고 베풀 수 없는 사랑이며, 아무것도 없다 하여 나누지 못하는 사랑이 아님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 일반적으로 현대의 입법부는 설령 사회민주주의 성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대중이 프롤레타리아트화하는 것을 막거나 그들을 공황과 불황에서 구출하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의회의 기구가 주로 입법의 여러 문제에만 관심이 있고, 산업이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인 직업의 기본적 사항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으로 생활의 여러 문제를 파고들지 못한다 … 산업조직은 윤리 의식이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의원들이 자기중심의 이윤 추구자가 되어, 국내 문제에는 공정한 법안을 가결하지만 국제관계에는 지나치게 국가주의가 되는 수가 있다 … 소는 잡초가 40퍼센트 이상이면 먹이로 할 수 없으나, 염소는 90퍼센트 잡초 사료로도 훌륭하게 자라난다. 덴마크에서는 젖 짜는 염소의 대규모 사육장이 72군데 있지만, 일본에는 한 군데도 없다. 사람이 염소 키우는 법을 알고 젖을 식재로 받아들이면 일본의 식량 공급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농업과 낙농 제품의 새로운 계획을 무시해 왔다. 우리가 현재 군비에 쓰는 돈을 그런 사업에 투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 군인들은 이런 경제의 문제를 잘 모른다. 그들은 칼만을 절거덕절거덕 울리고 싶어 한다 … 유일한 해결은 경제 기획에 쓰는 돈을 더 늘리고 군사비를 줄이는 것이다 … 가난한 나라의 경제 상태를 개선해 가려면, 현재 군사비로 낭비되는 몇 백만 파운드 돈을 가난한 나라의 경제 상태 개선에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 (140, 147, 166∼167, 174쪽)


새로 옮길 달삯집에 아침에 찾아가 계약서를 쓰는 자리에서, 집임자 할매는 ‘십 년 전에도 월세를 30만 원 받았고, 이제도 35만 원 받는데, 더 달라고 하기가 힘들다’고 말씀합니다. 30이든 35이든 달삯을 낼 사람한테는 만만하지 않은 돈이지만, 두 어르신은 그렇게 삯 사는 사람이 쥐어주는 돈으로 고만고만하게 살림을 꾸립니다. 집임자라고 하나 자가용도 없고, 2층과 3층에 삯을 놓고 1층에서 마흔 해 남짓 살아오면서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집을 돌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말씀을 가만히 들으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당신들이 처음 이곳에 자리잡고 지낼 때에 둘레는 죄다 풀집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써 마흔이 넘은 딸아이도 이 집에서 키웠고 적잖은 사람들이 당신 집을 거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홉 달짜리 갓난쟁이가 밤에 빽빽 울어댈지 모른다 하여도 ‘사람 사는 데에 다 그러하지 않느냐’면서 ‘삯집이 비니까 허전하고 심심하다’면서 ‘손주 뻘 애들 구경하는 일이 즐겁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도장을 안 갖고 가 손으로 이름을 적으면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로서는 달삯 35만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랄 수 있지만, 골목집을 곱게 가꾸면서 뿌리내려 온 이분들한테 앞으로도 튼튼하고 즐겁게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하면서 내어드리는 선물로 여긴다면 아무것 아닌 돈이라고도 여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우리 주제에 무슨 베풂이 있겠느냐만, 그저 이만큼이라도 나누면서 우리 어버이를 떠올리고, 우리 어버이와 비슷한 또래인 할매 할배를 생각하면서 하루 한삶을 고맙게 맞아들이자고 생각합니다.


(3)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길을 말하는 《우애의 경제학》


1888년에 태어나 1960년에 세상을 떠난 ‘가가와 도요히켜(賀川豊彦)’ 님이 1936년에 내놓은 책 《우애의 경제학》이 나라안에 처음으로 옮겨졌습니다. 자그마치 일흔 해나 묵은 책입니다만, 여느 ‘고전’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묵은 세월’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깊고 너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책이 천 해가 훨씬 넘은 세월을 ‘묵었’으나, 참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에 두루 읽히듯, 《우애의 경제학》 또한 사람이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흔 해가 넘은 책임에도 기꺼이 옮겨서 읽을 만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 내 조상은 봉건사회에서 19개 마을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커다란 집과 많은 하인을 두었다. 그러나 아무 사랑도 없는 커다란 집에 사는 일은 내게는 지옥이었다. 내 가족은 부자였으나, 그들의 행동양식은 가혹한 것이었다. 나는 밤낮으로 울면서 세월을 보냈다 .. (18쪽)


가가와 도요히코 님은 목사이면서 사회운동을 하는 분이었고, 가난한 이웃한테 전도를 하는 가운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때에는 반전운동을 하면서 옥살이를 했고, ‘가난을 떨치자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만으로는 안 된다’고 깨달으면서, ‘올바른 소비자-생산자 운동’을 일으키고자 ‘생활협동조합’을 만듭니다.

이 책 《우애의 경제학》은 바로 낮은자리 사람들이 어떻게 생협(생활협동조합)을 꾸려 서로 돕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밝힙니다. 생산은 어떻게 소비는 어떻게, 그리고 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생협은 어떤 마음과 뜻으로 해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돈이 많다고 이룰 수 없는 생협이요, 또한 돈을 벌자고 하는 생협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생산자 스스로 참다이 생산을 하면서 일하는 보람을 얻고, 소비자 스스로 올바르게 소비를 하면서 제 삶을 한껏 넉넉하게 꾸리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있다고 더 잘할 수 있는 생협이 아니요, 빈손이라 하여 못할 수 있는 생협이 아님을 들려줍니다.


.. 우리들은 부자만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자선과 교육에 관심을 갖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의 지원 기초는 더 굳건하게 된다 … 우리가 있어야 하도록 생활하면 식량 결핍의 위험은 없다. 큰 위협이 되는 것은 탐욕이다. 사람은 사치와 미식을 갈망하고 돈을 갈망한다. 그것이 투쟁과 알력을 일으킨다 .. (160, 167쪽)


나라안에는 ‘우찌무라 간조’라는 이름은 제법 알려지기는 했으나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름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알의 밀》이나 《신과 걷는 하루》 같은 책, 또는 《사선을 넘어서》 같은 책이 알려지고 읽히면서 ‘하느님과 예수를 따르는 믿음을 바탕으로 저마다 제 삶터에서 바른 길을 찾아 즐겁게 어우르는 일’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조곤조곤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1990년대 접어들어 처음으로 《우애의 경제학》이 나오기는 했습니다만(1993년에 《사선을 넘어서》가 다시 옮겨진 뒤로는 이번이 첫 책).

그리고, 이번에 나온 《우애의 경제학》은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분이 ‘하느님 사랑’만 외친 분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외치는 까닭’을 보여주는 첫 책이라 손꼽을 수 있고, ‘하느님 사랑은 어떻게 외쳐야 하는가’를 들려주는 첫 책이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 사랑을 참되이 이루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첫 책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을 키우는 믿음이 아닌 사람을 키우는 믿음이어야 하며, 모든 독재권력을 물리치는 믿음이어야지 사람을 억누르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보여주는 첫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신조만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신조나 교리와 함께 사회에서 속죄애를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 20세기에는 물질주의적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적 공산주의는 다함께 포기해야 한다 .. (6∼7쪽)


지금 우리 식구는 두 군데 생협에 회원으로 들어가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있습니다. 쌀은 홍성 풀무학교생협에서 받아 먹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생협 먹을거리를 먹지 않았습니다. 옆지기가 생협 물건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깨우쳐 주어, 뒤늦게 알아차리라 함께하고 있습니다.

으레 생협 물건은 ‘비싸다’고 여기곤 하지만, 비싼 물건이 아니라 ‘생산자한테 알맞는 대가를 치러 주는 값’이 붙은 물건입니다. 우리 스스로 생산자한테 알맞는 대가를 치르면서 ‘싼 물건을 억수로 쟁여 놓고 먹지 않게 되’니, 몸이며 마음이며 살림살이이며 한결 넉넉하고 따뜻해진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알맞는 만큼 밥을 먹으면 되며, 우리 식구들한테 알맞는 만큼 돈을 벌면 됩니다. 조금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즐기고, 어느 만큼 넘치면 넘치는 대로 나누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더 먹으려 하고 더 가지려 하고 더 쓰려 하니까 생협 물건을 쓰기 어렵다고 느낄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더 나누려 하고 더 함께하려 하며 더 흐뭇하고자 한다면, 저절로 생협 회원이 되거나 생협 물건을 가까이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종교가 가르치는 슬기이기도 하지만, 종교 없는 사람 스스로도 옳고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참된 종교란 종교라는 울타리가 없고, 참된 사람이란 종교가 있건 없건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이란 가난한 자리에 나란히 서면서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즐거움을 언제까지나 누리고 싶기에. (4342.5.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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