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역사와 현실]이데올로기의 전쟁을 넘어서 - 경향신문
입력 : 2018.05.30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난맥상을 진보와 보수, 자주와 사대, 개혁과 수구세력이라는 식의 대립항을 가지고 설명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실 문제가 이분법만으로 명쾌하게 해명될 수는 없다. 평소 나는 그 점을 답답하게 여겼다.
얼마 전, 한 권의 책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윌리 톰슨이 쓴 <20세기 이데올로기>(전경훈 역, 산처럼, 2017)였다. 톰슨 덕분에 개안(開眼)을 하였다는 뜻은 아니지만, 모종의 시사점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윌리 톰슨(1939년생)은 영국 역사가이다. 에릭 홉스봄, E P 톰슨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학자이다. 그는 20세기의 역사가 이데올로기에 좌우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대사를 지배한 것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 등의 이데올로기였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독립성을 가지며, 배타성을 띠었다. 그러나 역사적 실상은 꽤 복잡하였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변수 때문이었다. 어디서든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결과적으로,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늘 복합적이었다. 특히 20세기에는 ‘민족주의’라고 하는 일종의 상수가 지구상 어디서건 맹위를 떨쳤다.
흔히 정치학자나 철학자들은 개별 이데올로기의 특징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사회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전형적인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일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역사가 윌리 톰슨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그는 각국의 실상에 주목해, 이데올로기의 복합적 성격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톰슨은 내부자의 관점을 중시하면서도, 그렇게 하여 자신이 얻은 결과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다시 확인하였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어느 사회든지 지배이데올로기는 문화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 같다. 나라마다 역사적 전통이 다르고, 국제적 정치 환경 또한 다르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도 차이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 톰슨은 멀고도 가까운 우리의 이웃 북한 사회에 대해서 무슨 주장을 했을까? 1980~1990년대의 북한 사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 정권은 크메르루주의 사이코패스와 같은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모델로 삼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북한의 국경에서 가하고 있는 고도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때문에 북한은 국가방위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또, 그 최고 지도자 김일성의 과대망상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북한에 비하면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오히려 느슨하고 자유롭게 보였다.”(481쪽)
인용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톰슨의 주장을 보다 큰 틀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의 네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 톰슨은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융합적인 것으로 보았다. 권위주의 또는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파시즘, 민족주의, 공산주의가 결합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주체사상’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사상적 혼합물이다.
둘째,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한 비교사적 인식도 흥미롭다. 크메르루주와 현대 중국 사회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고, 톰슨은 판단했다. 파시즘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평가로 볼 수 있다.
셋째, 북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 외부적 원인을, 톰슨은 미국의 책임으로 이해했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의 군사적 압박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대체로 우리는 북한의 침략위협을 강조하기만 할 뿐,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얼마나 큰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둔감하다.
끝으로, 오랫동안 북한을 지배한 김일성의 개인적인 성향도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의 과대망상이 북한 사회를 더 큰 곤경에 빠뜨렸다고 톰슨은 판단하였다. 톰슨의 주장에 우리가 무조건 동의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만일 톰슨의 분석틀을 우리 사회에도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군사독재자는 물론,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도 북한 정권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남쪽도 권위주의 또는 보수주의를 바탕으로 파시즘과 민족주의가 융합된 사회였다. 거기에 독재자들의 과대망상이 더해진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또, 북한 사회에서 정작 공산주의적 요소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처럼, 남쪽에서도 자유주의의 기운은 부족하였다. 묘한 일치가 아니었던가?
하나의 문화가 형성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데도 그에 못지않은 시행착오가 따른다. 좋든 싫든, ‘문화’는 한 사회의 성격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라 할 것이다. 북한 사회를 분석하면서 톰슨은 한국의 문화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말이 쉽지 그것을 학문적으로 정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문화야말로 남북한을 아직까지도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302111005&code=990100#csidxe2160d3303b3c07b7e678816b5efc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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