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진보의 원동력은 종교가 아닌 과학이다”
yjkim@kyunghyang.com
입력 : 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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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도덕의 궤적
ㆍ마이클 셔머 지음·김명주 옮김
ㆍ바다출판사 | 768쪽 | 4만8000원
1571년 마법을 행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안네킨 헨드릭스의 화형 장면. 바다출판사 제공
이 책은 격론의 대상이 될 만한 몇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상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장 도덕적이며, 인간 또한 점점 더 도덕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도덕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종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 오직 과학과 이성만이 진정으로 힘을 발휘했다.
<도덕의 궤적>에서 마이클 셔머가 펼치는 주장들은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현실은 테러, 분쟁, 폭력, 범죄, 환경 파괴로 얼룩져 있다. 날마다 인간의 야만성을 확인해도 모자랄 판에 인간이 도덕적으로 나아지고 있다니.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이 ‘킬러로봇’ 탄생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나치게’ 발달한 과학기술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종교에 대한 평가절하도 그렇다. 회의주의 과학저널 ‘스켑틱’의 발행인인 셔머가 사이비 과학과 미신에 맞서 싸우는 ‘과학의 전사’이자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와 함께 과학계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라는 점을 이해하더라도, 적어도 종교가 인간의 ‘선함’을 갈고 닦는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들린다.
저자도 인정한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책의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망상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심리적 ‘현재’로 여기는 3초에서 수십년까지의 시간만을 느낄 뿐, 수백년 또는 수천년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나 기후변화, 도덕적 진보 등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본문만 640여쪽에 이르는 책은 과학과 이성으로 도덕의 진보가 이룩됐다는 점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노예제도’ 하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미국과 영국 등으로 실어나르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노예제도는 약 1만년 전 농업혁명 시기부터 인류와 함께했고, 수천년이 넘도록 아무런 문제제기도 되지 않았다. 노예 소유를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보는 인식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무렵, ‘계몽의 시대’가 열리면서다. 몽테스키외는 노예가 노예 주인에게도 나쁘다고 주장했고, 디드로는 노예무역이 자유를 박탈하기 때문에 인권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1776)과 프랑스 인권선언(1789) 등이 발표되면서 노예무역 폐지에 대한 이성적 논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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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 노예제가 폐지되기까지는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미국은 1861~1865년 벌어진 남북전쟁으로 65만명이 숨졌고, 영국은 1807년 노예제를 법으로 금지한 후에도 60여년 동안 노예무역을 단속하며 15만명의 노예를 풀어줬다. 그러나 저자는 노예 해방이라는 ‘도덕적 진보’는 “무기의 힘보다는 생각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노예제도 같은 개념은 조금씩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좋은 일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로, 거기서 다시 의심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부도덕한 일로, 불법인 일로,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에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로 바뀐다.”
잠시 ‘도덕의 진보’의 개념 정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도덕을 ‘감응적 존재의 생존과 번성’이라고 본다. 감응적(sentient)이란 “감정, 지각, 감각, 반응, 의식이 있어서 느끼고 고통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덕의 진보는 감응적 존재가 더 나은 상태나 조건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노예제도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이 자기결정권을 누리면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을 가로막으며, 생존과 번성이라는 ‘진화한 본성’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노예 해방을 주장한 링컨은 “나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 주인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도덕 과학의 핵심 원리인 ‘역지사지 원리’에 근거한 논증이다. 역지사지 원리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서 속 ‘황금률’, 또는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진화의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19세기 노예제에 대한 과학적 반론은 다른 소수자들을 위한 권리혁명으로도 이어졌다. 여성은 출산 도구나 재산으로만 취급받았지만, 과학과 이성의 발달에 힘입어 남성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지닌 인격체로 존중받는 근거가 마련됐다. 유전자나 태아 시기 호르몬 발달 등에 의해 성적 지향이 결정된다는 과학적 지식이 확립되면서 동성애는 더 이상 정신질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호모포비아는 인종차별만큼이나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도덕의 영향권은 인간이 아닌 동물도 아우르는 추세다. 종교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시해왔지만, 종차별주의라는 공고한 벽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실험동물들에 대해 관리·감독이 엄격해졌고,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제기가 확산되면서 동물권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저자는 500년 전 과학혁명으로 인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실험이나 추상적 사고, 합리주의 등 과학의 방법론이 보편화되면서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도 분명 달라졌다. 무엇보다 더 이상 재난의 원인이나 불행을 마녀나 신의 분노 탓으로 돌리지 않게 되었다. 성서나 권위있는 문헌에만 의지하지 않고, 직접 책을 읽으며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인체 해부도를 보는 대신 인체를 직접 해부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자연권 개념을 수용했고, 신성한 왕권에 대한 초자연적 믿음이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택했다.
그 결과 삶의 많은 분야에서 도덕적 진보가 나타났다. 전쟁은 줄어들고, 경제적 번영은 늘어났다. 물론 도덕의 진보가 ‘완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피임, 임신, 낙태 등 여성의 생식에 대한 권리를 남성과 사회가 통제하고 있으며, 강제노동이나 성노예 등의 형태로 현대판 노예제도 존속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앞으로 인류가 더욱 도덕적으로 진보한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도덕적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고 한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신봉’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정의는 물론 진리와 자유를 향해서도 도덕의 궤적이 구부러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적잖은 논란의 소지를 담은 책이다. ‘프로토피아’에 관한 비전이나, 불평등 심화를 둘러싼 우려를 심리적인 측면의 일로 치부하면서 자발적 자선이나 ‘깨어있는 자본주의’를 처방으로 주목하는 것은, 저자가 사회과학자나 정책결정자가 아닌 과학자라고 해도 낙관적으로 들린다. 성경 구절을 편의적으로 인용한다는 의심도 지울 수 없다.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경 속 여러 대목들을 인용하지만, 같은 성경이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라’고 적고 있다는 사실은 빼놓는다.
하지만 과학적 탐구 정신과 논증의 방법론, 매끄러운 글쓰기로 자신의 주장을 집요하게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저자의 내공이 엿보이는 저작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속편을 원했다면 바로 이 책이다”라고 극찬했다. 인류 역사상 폭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을 보여준 핑커의 책과 함께 현대 필독서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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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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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도덕의 궤적
ㆍ마이클 셔머 지음·김명주 옮김
ㆍ바다출판사 | 768쪽 | 4만8000원
1571년 마법을 행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안네킨 헨드릭스의 화형 장면. 바다출판사 제공
이 책은 격론의 대상이 될 만한 몇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상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장 도덕적이며, 인간 또한 점점 더 도덕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도덕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종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 오직 과학과 이성만이 진정으로 힘을 발휘했다.
<도덕의 궤적>에서 마이클 셔머가 펼치는 주장들은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현실은 테러, 분쟁, 폭력, 범죄, 환경 파괴로 얼룩져 있다. 날마다 인간의 야만성을 확인해도 모자랄 판에 인간이 도덕적으로 나아지고 있다니.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이 ‘킬러로봇’ 탄생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나치게’ 발달한 과학기술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종교에 대한 평가절하도 그렇다. 회의주의 과학저널 ‘스켑틱’의 발행인인 셔머가 사이비 과학과 미신에 맞서 싸우는 ‘과학의 전사’이자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와 함께 과학계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라는 점을 이해하더라도, 적어도 종교가 인간의 ‘선함’을 갈고 닦는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들린다.
저자도 인정한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책의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망상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심리적 ‘현재’로 여기는 3초에서 수십년까지의 시간만을 느낄 뿐, 수백년 또는 수천년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나 기후변화, 도덕적 진보 등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본문만 640여쪽에 이르는 책은 과학과 이성으로 도덕의 진보가 이룩됐다는 점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노예제도’ 하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미국과 영국 등으로 실어나르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노예제도는 약 1만년 전 농업혁명 시기부터 인류와 함께했고, 수천년이 넘도록 아무런 문제제기도 되지 않았다. 노예 소유를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보는 인식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무렵, ‘계몽의 시대’가 열리면서다. 몽테스키외는 노예가 노예 주인에게도 나쁘다고 주장했고, 디드로는 노예무역이 자유를 박탈하기 때문에 인권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1776)과 프랑스 인권선언(1789) 등이 발표되면서 노예무역 폐지에 대한 이성적 논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보험의 바른이치 굿리치 보기
물론 실제로 노예제가 폐지되기까지는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미국은 1861~1865년 벌어진 남북전쟁으로 65만명이 숨졌고, 영국은 1807년 노예제를 법으로 금지한 후에도 60여년 동안 노예무역을 단속하며 15만명의 노예를 풀어줬다. 그러나 저자는 노예 해방이라는 ‘도덕적 진보’는 “무기의 힘보다는 생각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노예제도 같은 개념은 조금씩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좋은 일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로, 거기서 다시 의심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부도덕한 일로, 불법인 일로,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에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로 바뀐다.”
잠시 ‘도덕의 진보’의 개념 정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도덕을 ‘감응적 존재의 생존과 번성’이라고 본다. 감응적(sentient)이란 “감정, 지각, 감각, 반응, 의식이 있어서 느끼고 고통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덕의 진보는 감응적 존재가 더 나은 상태나 조건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노예제도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이 자기결정권을 누리면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을 가로막으며, 생존과 번성이라는 ‘진화한 본성’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노예 해방을 주장한 링컨은 “나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 주인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도덕 과학의 핵심 원리인 ‘역지사지 원리’에 근거한 논증이다. 역지사지 원리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서 속 ‘황금률’, 또는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진화의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19세기 노예제에 대한 과학적 반론은 다른 소수자들을 위한 권리혁명으로도 이어졌다. 여성은 출산 도구나 재산으로만 취급받았지만, 과학과 이성의 발달에 힘입어 남성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지닌 인격체로 존중받는 근거가 마련됐다. 유전자나 태아 시기 호르몬 발달 등에 의해 성적 지향이 결정된다는 과학적 지식이 확립되면서 동성애는 더 이상 정신질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호모포비아는 인종차별만큼이나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도덕의 영향권은 인간이 아닌 동물도 아우르는 추세다. 종교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시해왔지만, 종차별주의라는 공고한 벽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실험동물들에 대해 관리·감독이 엄격해졌고,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제기가 확산되면서 동물권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저자는 500년 전 과학혁명으로 인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실험이나 추상적 사고, 합리주의 등 과학의 방법론이 보편화되면서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도 분명 달라졌다. 무엇보다 더 이상 재난의 원인이나 불행을 마녀나 신의 분노 탓으로 돌리지 않게 되었다. 성서나 권위있는 문헌에만 의지하지 않고, 직접 책을 읽으며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인체 해부도를 보는 대신 인체를 직접 해부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자연권 개념을 수용했고, 신성한 왕권에 대한 초자연적 믿음이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택했다.
그 결과 삶의 많은 분야에서 도덕적 진보가 나타났다. 전쟁은 줄어들고, 경제적 번영은 늘어났다. 물론 도덕의 진보가 ‘완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피임, 임신, 낙태 등 여성의 생식에 대한 권리를 남성과 사회가 통제하고 있으며, 강제노동이나 성노예 등의 형태로 현대판 노예제도 존속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앞으로 인류가 더욱 도덕적으로 진보한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도덕적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고 한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신봉’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정의는 물론 진리와 자유를 향해서도 도덕의 궤적이 구부러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적잖은 논란의 소지를 담은 책이다. ‘프로토피아’에 관한 비전이나, 불평등 심화를 둘러싼 우려를 심리적인 측면의 일로 치부하면서 자발적 자선이나 ‘깨어있는 자본주의’를 처방으로 주목하는 것은, 저자가 사회과학자나 정책결정자가 아닌 과학자라고 해도 낙관적으로 들린다. 성경 구절을 편의적으로 인용한다는 의심도 지울 수 없다.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경 속 여러 대목들을 인용하지만, 같은 성경이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라’고 적고 있다는 사실은 빼놓는다.
하지만 과학적 탐구 정신과 논증의 방법론, 매끄러운 글쓰기로 자신의 주장을 집요하게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저자의 내공이 엿보이는 저작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속편을 원했다면 바로 이 책이다”라고 극찬했다. 인류 역사상 폭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을 보여준 핑커의 책과 함께 현대 필독서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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