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극(生剋)의 한반도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조동일의 ‘생극론’
입력시간 : 2018. 06.21. 21:00
전남일보 - jnilbo.com
중고생 재외동포들이 지난 2016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열린 ‘Peace Korea, DMZ 자전거 평화 대행진’에서 임진각 통문을 지나 철책을 지나고 있다. 뉴시스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은 무엇인가? 오행만큼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전통 이론도 없을 것이다. 철학 혹은 인문학, 아니 우리의 삶 자체를 오행으로 해석해왔기 때문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 시간과 공간, 우주 만물 삼라만상에 이 의미를 갖다 붙인다. 몸에도 맛에도 멋에도 그 어떤 것들도 예외이지 않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다섯 가지의 맛(五味)이니 다섯 가지의 소리(五聲)니, 오장(五臟)이니 오방(五方)이니 하는 생각들이 여기에서 나왔다. 오행은 태극에서 온 것이고 태극은 무극에서 온 것이다. 알기 쉽게 태극기가 전형적인 물증이다. 한반도의 위상을 음양오행을 빌려와 태극기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오행(五行)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이자 물질이다.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로 나누고 상관관계를 설정한다. 행(行)은 에너지의 흐름 곧, 순환을 말한다. 순차적으로 서로를 돕는 기운을 상생이라 한다. 선행하는 것에서 해당 요소가 생성된다는 뜻이다. 한 요소씩 건너뛰면서 서로를 극복하려는 기운을 상극이라 한다. 선행하는 요소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이런 관념은 동아시아 전반을 관통한다. 발생은 고대 시기라 한다. 그만큼 오래된 생각이다.
조동일의 생극론(生剋論)이란 무엇일까? 한국문학통사를 쓴 조동일이 이를 주장한지 오래되었다. ‘음양생극론’을 줄여서 한 말이니 음양오행 이론이다. 그가 생극(生剋)을 말했던 이유가 있다. 동아시아 문명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문학이론가이니 응당 인문학문과 자연학문(자연과학)의 상관관계를 소재 삼는다. 양자가 서로 상생하거나 상극한다는 취지다. 예컨대 인문학문과 자연학문은 양극이라 하고 사회학문은 그 중간이라 한다. 양자 간에 상극이 심각하면 상생을 이루는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우열이 심하면 균형을 잃게 되어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대학의 인문학과는 침몰해가는 데 비해 사회 전반적으로는 인문학 열풍이 있다고도 한다. 자연과학의 천대니 우대니 하는 언설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자기가 속한 입장에서 우열과 선후를 문제 삼는다. 시간적으로 보면 근대학문과 현대학문이 그러하고 한국의 학문과 다른 나라의 학문이 그와 같다. 이들의 균형과 조화가 생극론의 요체다. 후진이 선진되고 선진이 후진되는 이치가 생극론의 기본이라는 취지다. 성경의 복음서에도 유사한 구절들이 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16)”.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도 같은 구절들이 있다. 적어도 생극을 이해하는 세계관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서로 통하는 모양이다. 조동일은 이것으로 동아시아 문명을 설명하려 했다. 그뿐일까? 원천의 제공자들은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많아진다.
원효의 화쟁론(化爭論)으로부터원효의 사상이 대표적이다. 해골바가지 사건은 삼척동자도 알 만큼 유명하다. 원효와 의상이 선진학문을 배우려고 당나라로 가다가 하룻밤 토굴에 묵게 되었는데 목이 말라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는 것. 모르고 마셨을 때는 시원하여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그것이 해골인 것을 알고는 구역질을 하게 되었다. 원효의 깨달음을 대개 이 장면으로 해석 한다. 평택에 있는 수도사는 이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을 만들어두기도 하였다. 어쨌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 아닌가. 현상만 그러할까? 근원으로 돌아가면 세상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다고 말한다. 원효의 기행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이를 말해준다. 깨달음을 얻었으니 당연히 당나라 유학은 불필요하게 된 것. 이때부터 무애(無碍)의 노래와 춤을 추면서 저자에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설법을 했다는 것 아닌가. 무애는 모든 형식과 내용에 구애됨이 없다는 뜻이다. 화엄경의 “일체무애 일도 출생사”에서 따온 말이다. 한마디로 원효의 사상을 갈무리하기는 어렵겠으나 대개 화쟁(化諍)사상으로 압축시켜 설명한다. 불교의 대승, 소승, 모든 경전의 교리와 학파들 간의 논쟁을 성찰하여 만법이 일여(一如)하다고 주장했던 것. 장면을 바꾸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삼라만상 에너지의 순행과 역행이 모두 생극으로 회통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시기와 공간을 두어 서로 보(保)하거나 제(除)하는 것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서 있는 시기와 공간을 잘 성찰하여 ‘존재’의 심연을 깊게 하는 것 아닐까.
김용운의 ‘한(恨)의 미학’과 남도 정신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상고할 학문의 조상들이 주마등을 이룬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뛰어넘는 사람들은 없을까?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사실은 분과학문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적다. 자연과학과 철학과 문학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최근의 예를 봐도 그렇다. 한 예를 들어본다. 김용운이 ‘역사의 역습’이란 화두를 들고 나타났다. 잘 알려져 있듯이 광주일고 교사를 역임한 수학자다. 수학의 카오스 이론을 빌어 오늘의 동아시아와 한반도를 해석하는 탁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지금 세계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핵 위협 등으로 인류절멸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19세기가 서구 세력에 의한 동아시아 침략의 역사라면 21세기는 그에 대한 역습의 시대다. 그 중심에 한반도의 희생과 고뇌가 있다. 이것을 지정학적 숙명과 민족의 집단 무의식적 구조에서 찾고 있다. 이른바 ‘한’의 미학이다. 소쉬르의 언어 구조학,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등 역사와 풍토, 사회구조, 정치, 외교 문제 등이 원형사관이라는 것.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마치 프렉탈구조처럼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4차 산업혁명에 돌입한 지적 영역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구별 없이 하나의 학문(science)으로 융합되어 간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그의 원형사관만을 놓고 백제의 백강전투 이후 이어지는 프렉탈 구조로 한반도의 지정학을 결정짓는 것은 오해다. 열강에 희생당해왔던 집단 무의식에 대한 추적도 마찬가지다. 이 복잡한 구조를 파헤쳐갈 대안을 예컨대 한국적 가치와 원형 승화론 등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른바 한반도 영세중립국론이다.
한반도 영세중립국 가능할까?김용운의 견해를 다시 빌려본다.
한반도가 공생하며 살아나갈 길은 평화다. 군비감축과 문화공동체 의식의 함양, 현실적으로는 핵 위협과 미, 중 대립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안중근도 이미 호혜평등의 주권을 부르짖었다. 평화는 어떻게 올까? 서로 싸우지 않고 공생하는 길은 비핵화와 영세중립화뿐이라고 말한다. 영세중립국안은 근자에 돌발된 제안인가? 그렇지 않다. 조선 말기에도 서양외교관들과 일부 조선 지식인들에 의해 제안된 바 있다. 1898년에 고종은 매킨리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조선의 영세중립화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00년에는 러시아가 조선중립안을 들고 일본과 협상했지만 불발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직전 조선은 독자적으로 중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어떤 나라도 응해주지 않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국을 지킬 힘도 없으면서 무슨 중립이냐”고 힐난했다고 한다. 그렇게 분단 73년이 흘렀다. 환경도 변하고 조건도 변했다. 은둔의 나라로 알려져 있던 북한이 미국과 당찬 협상을 벌이며 세계의 무대 위로 올라섰다. 우리 또한 미국에 예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국격이 높다. 김영운의 표현대로 말하면, 남북 공히 어느 나라도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균형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영세중립화 조건이 조성된 환경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글쎄다. 내 답은 나중으로 미룬다.
한(恨)의 한반도를 생극(生剋)에서 재생(再生)으로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곧이어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조바심 내며 회담 결과를 지켜봤다. 역사적 사건이었고 세기적 사건이었다. 나도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생방송되는 싱가폴 카펠라 호텔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실상은 남과 북이 당사자인데 그러하지 못함이 서글펐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원형인 한(恨)의 구조가 여실히 재연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구나. 상생과 상극의 이론을 놓고 보니 저간의 백년은 우리 스스로를 죽이는 상극의 시간이었다. 만법이 일여임을 성찰하지 못한 채 상대를 제거하거나 죽여야 하는 죽임의 시기였다. 친인척끼리 죽창으로 쑤셔 죽이고 총칼로 죽이던 시기였다. 무엇이 우리를 이런 끔직한 죽임의 기운으로 가득 차게 했던 것일까? 핑계도 많고 자성도 많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한반도가 아직도 죽임의 시간이어야 하는가에 있다. 결단코 아니다. 한(恨)의 원형이 한반도의 전 기간을 관통하는 것도 아니다. 상극론과 재생론의 재해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의 시기가 있다면 신명의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세계사의 흐름은 이미 한반도를 주목하며 꿈틀대고 있다. 상극의 에너지가 상생의 에너지로 바뀌는 시점이다. 죽임의 시간에서 살림의 시간으로 죽임의 한반도에서 살림의 한반도로 거듭나는 경계에 진입해 있다. 조동일이 말한 생극의 시기다. 내가 꾸준히 말해왔던 재생의 시기다. 갈등을 넘어 화해로 죽임을 넘어 부활과 거듭남으로 한반도의 에너지가 바뀌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 시기 이 땅에 우리가 태어나 존재하는 자체가 무한한 축복이자 역사적 책무다. 후세들은 우리 시대를 끊임없이 말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가 견인하는 생극의 에너지를, 세계평화의 기점이 될 3.8선과 한반도에서 발산하는 재생과 거듭남의 기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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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인문학 TIP
조동일의 생극론에 대하여그가 저서 ‘학문론’에서 밝힌 바를 인용하여 공부자료로 삼는다.
생극론은 동아시아 학문의 오랜 원천에서 유래했으며 이른 시기 저술에 산견되는 발상이다. 공자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하고, ‘주역’에서 “一陰一陽謂之道(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을 일컬어 도라 한다)”라 하고, ‘노자’에서 “有無相生(있고 없음이 상생한다)(제2장)”, “萬物負陰而包陽 沖氣以爲和(만물은 음을 품고 양을 껴안아 텅 빈 기로써 화를 이룬다)(제42장)”라고 한 것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천지만물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음과 양의 관계 외에 도라고 할 무엇이 별도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첫째 원리다.
없으므로 있고, 있으므로 없는 상생의 관계가 음양에서 구현되어, 음과 양은 있음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싸우면서 없음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화합한다는 것이 둘째 원리다. ‘상생(相生)’과 ‘화(和)’만 말하고, 그 반대의 개념은 말하지 않았으나 보충해 넣을 수 있다.
첫째 원리만이면 ‘음양론’이고 둘째 원리까지 갖추면 ‘음양생극론’이다. 음양생극론을 ‘생극론’이라 줄여 말할 수 있다.
생극은 힘을 만들어 내다. 음양이 상생하는 것도 힘이고, 상극하는 것도 힘이다. 천지만물은 상생과 상극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다양한 힘을 빚어 낸다. 그 양상을 언어나 수식으로 온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 어느 측면에 관한 예증을 드는 것은 가능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음전기(-)와 양전기(+)의 관계, 구심력과 원심력, 핵분열과 핵융합이 모두 생극에서 생겨나는 힘이다. 생극론은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자연학문에서 제시하는 어떤 이론보다도 포괄하는 범위가 더 넓은 상위의 메타이론이 생극론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사)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 이사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전남도 문화재전문위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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