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의 무상(無想) 무상(無償) 단상(斷想)](11)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에 대해
이종찬(문화평론가)
12/18
오래 전 유재하가 <우울한 편지>에서 "서로를 믿어요"라 했다면, 지금의 조윤석은 <서울의 새>에서 "길고 긴 비가 그치면 우리 젖은 날개를 맞대 볼까"라 한다. 시간의 낙차를 극복한 두 뮤지션의 태도가 퍽이나 닮았다. 다시 말해 한쪽이 "나를 믿어요"라 하지 않는다면, 다른 한쪽은 "내 날개에 기대요"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신 서로가 서로를 믿고, 또 서로가 서로의 날개에 기대는 삶. 그런 관계(사랑), 관계의 어느 한 항 대신 관계 그 자체인 관계를 꿈꿔보게 되는 것이다. 휴머니즘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문제는 휴머니즘 자체가 아니라 '어떤' 휴머니즘이냐가 아닐까.
12/20
내 낡디 낡은 스마트폰 뮤직 플레이어에는 가장 많이 들은 곡의 횟수가 카운트 되어 뜨는 기능이 있다. 아이유와 김창완님이 같이 부른 <너의 의미>. 무려 1447회. 질려버렸다는 표정의 친구에게 던진 나의 첫 번째 농. "같은 곡을 여러 번 듣다 보면 사운드의 구조가 감지 돼. 그 이후에도 그 곡을 계속 찾아 듣게 된다면 그것이 정말 좋은 곡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지 않을까. 그때가 그 곡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일 거야." 그리고 덧붙이기를, "아무래도 '슬픔이 코스모스로 피는 간이역'이란 노랫말에 대한 개인적 매혹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 '산울림'의 원곡을 처음 들었던 학창 시절, 그야말로 충격이었거든.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말이야, 성에 처음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의 감흥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말이야. 말하자면 유사 ‘비타 섹수알리스’(vita sexualis)의 체험이었달까." 다시 한번 친구 왈, "슬픔이 간이역에 코스모스로 피는 마음이라. 그래, 그게 어떤 기분이었는데?" 나의 두 번째 농. "글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통진당 해산 판결 소식보다는 훨씬 더 슬픈 기분이었지." 모처럼 만난 친구가 보자마자 근 한 시간을 통진당 이야기로 일관하던 태도에 다소 심술이 나 있던 차였다. 어두운 시국에도 불구 이런 되도 않는 나의 짓궂은 허언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하얀 미소로 내 생일을 축하해주던 나의 소중한 벗 S. 헤어질 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구나. 나의 말은 자주 이렇게 한 박자 늦곤 한다. 고맙다, 나의 소중한, 대체할 수 없는 친구.
12/21
개콘의 <렛잇비>란 코너가 인상적이다. 비틀즈의 동명 곡에 한국 직장인들의 비애를 담은 웃픈 가사를 붙여 4명의 코미디언이 번갈아 노래를 부르는 형식의 포맷인데, 사실을 말하자면 울컥하는 순간이 적지 않았다. 개그 프로에서 눈물이라니.
오늘 처음 이 코너의 존재를 알고 한참을 유튜브를 뒤져 지난 방송분을 찾아보았다. 매주 새롭게 바뀌는 노랫말도 노랫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원곡의 멜로디 자체가 가진 감각의 보편성이랄까, 그런 측면이 도드라져 보인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게 된다.
매회 가사가 바뀌지만 항상 동일하게 반복되는 노랫말이 있다. 바로 원곡의 후렴 부분에서 그러한데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에 해당하는 바로 그 선율 말이다. 이 부분을 해당 코너의 코미디언들이, 그리고 어느새 방청객들마저 합류, 매주 다음과 같이 떼창 한다. "여러분 힘내요 여러분 웃어요 힘들고 지쳐도 웃어요."
이토록 단출한, 심지어는 이제 약발을 다한 ‘힐링’적 주체를 양산하려는 듯한, 그 자체로는 새롭지도 별다른 감흥을 주지도 못하는 노랫말 앞에서 이상하게도, 기이하게도 매주 시청자들은 한 손으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어느새 비어져 나오는 삶의 고단함을 달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은 아마도 그렇게 가혹한 2014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자신을, 친구를 그리고 이름 모를 타인들을 잠시나마 어루만지고 또 자신 또한 어루만짐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얽힘-교차'(모리스 메를로-퐁티). 예술의 힘이란 그런 것이지 않을까. 로고스(언어)의 차원으로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실재의 풍경과 무차별적으로 마주치는, ‘동사적’이고 ‘음악적’인 순간.
12/22
근자에 역사적 책임의 문제,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전후 책임 문제와 관련한 문헌들을 읽어나가고 있다.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두 선생의 글들을 통해 나는 이 주제에 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유해볼 기회를 얻었던 바 있다. 이번에는 그에 더해 박유하, 우에노 치즈코, 와다 하루키, 니시카와 나가오 그리고 권명아 다섯 선생의 저작들을 통해 이제까지의 나의 생각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볼 기회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가장 먼저 우에노 치즈코 선생의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을 손에 쥐었다. 이전에 출간된 바 있는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대폭 개정 및 증보한 판본인데, 신판 서문에는 눈길을 끄는 코멘트가 실려 있다. '위안부' 문제로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섰던 이답게 그는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해도 피가 철철 흐를 듯한 상태"로 남아있다 고백하고 있다.
서경식 선생이 우에노 선생의 입장을 비판한 글을 먼저 접한 바 있는 내게 우에노 선생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논쟁의 지형도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음을 실감케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로부터 일본 국민은 남녀를 불문하고 가해자로 고발되었다. 국가가 범한 전쟁범죄에 관해 여성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일까. 원래 국가에 대해 여자는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여자는 원래 국민일까. 국민이 되기를 요구했던 것일까. 국민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대목이 이어진다.
"초판에서는 '여성의 국민화'의 두 가지 하위유형을 '참가형'과 '분리형'으로 유형화했지만 이 책에서는 '통합형'과 '분리형'으로 바꾸었다. (...) 책을 낸 후 분리형도 '참가'의 한 형식이라는 것, 따라서 통합형만을 참가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통합형도 분리형도 여성의 국민화, 즉 국민국가에 참가하는 방식의 다른 유형이다."
역사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지난한 시간을 요하는 일인지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작성일 : 2015.08.03
저자 소개
이종찬
1977년생. (상임) 편집동인. 문화평론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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