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8

李宇衍 동학농민전쟁 또는 농민란을 이 정부가 선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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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19 hrs ·

동학농민전쟁 또는 농민란을 이 정부가 선양, 현창하려 한다. 또 하나의 "민주화운동"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를 반대하는 논자들의 초점은 동학란이후 그들이 일진회를 중심으로 친일로 갔다는 점이다. 사실관계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정부와 그 지지자들에게 반론, 황당한 움직임을 저지하기에 크게 부족하다. 사후에 친일이 있었다 해도, “반제 반봉건” 저항운동, 근대를 지향하는 “시민혁명”이었다고 주장하면, 지금 국민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힘입어 끝까지 밀어부칠 것이다.

농민, 정확히는 小農(소작농이 아니며, 영어로는 peasant고, 또 farmer는 현대 기계화된 가족농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의 본질이 근대, 또는 근대시민혁명과 무관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마르크스는 이 농민을 설명할 수 없었고, 그래서 러시아 상황으로 말년에 골머리를 썩다 결국 그들에게 답을 주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그에게는 자본가, 농업노동자를 포함한 프로레타리아, 지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미스 또한 그들을 분석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영국 농업에서 자본주의적 자본-임노동관계가 중심이었으므로, 자유로운 소농 경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결여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농민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받아들이고, 당면한 중대 과제로 설정한 이는 레닌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근로대중 다수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도하에 볼셰비키는 결국 노동자계급이 농민과 손을 잡고, 노농농맹하여 일차 부르조아 혁명을 수행하고, 그 뒤에 가서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어 제2차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자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농민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 최초로 이론적 분석을 행한 이는 러시아의 차야노프였다. 그는 농민을 자본가겸, 노동자겸, 경영자겸, 지주(땅을 가진 경우)라고 보았다. 그로 인해 그들의 경제적 행동원리는 근대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에 의해 설명될 수 없고, 농업집단화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례닌도 그를 최대한 미루고자 했다. 스탈린은 달리 생각했고, 레닌 사후 바로 스탈리니 집권하자 바로 농업집단화를 추진하였고, 차야노프는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사망시기조차 알 수 없다. 정치, 이념적으로 농민은 “농민적 평등주의” 또는 “농민적 공산주의”로 성격지울 수 있다. 땅을 균분 소유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에릭 울프나 농민전쟁에 대한 여러 논저를 참고할 수 있다.

독일농민전쟁, 중국 태평천국의 난, 러시아나 프랑스 농민의 사회주의 혁명 참여 등, 이 모든 것이 농민적 평등주의내지 농민적 공산주의에 기초한 것이며, 농민반란은 그때그때 내외 상황에 따라 휩쓸려다녔고, 동학농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 근대나 근대시민혁명과 본질적으로는 무관했다. 동학란을 근대와 관련시키고 근대시민혁명으로 보고자 본격 저작물을 내기시작한 것은 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이태진이다. 이는 경제사 면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과 명실상부 짝을 이루었고, 지금도 학계 주류를 차지하고, 모든 교과서 서술의 뼈대를 제공, 오늘의 국민적 착각과 환상에 이르렀다.

그들이 동학란에 주목한 것이 이해될만한 구석도 있다. 그런 대규모 농민반란이 한국사에서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학란은 근대나 근대시민혁명과 본질적으로 무관했고, 절대왕정을 부정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유재산절대를 원칙으로 삼는 자유시장경제, 그것을 국기로 삼는 대한민국과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오히려 그에 반한다. 전근대 어느 나라에나 있던, 배고프고 지배층의 착취가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또 그 흐름이 자체적 동력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내외 상황에 따라 부류하던, 전근대적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이 정부의 또 하나 우민화 시도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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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좋은 공부하고 있습니다. 단락을 띄어 주셔서 느무 좋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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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원래 띄어요. 지난 번엔 한글 파일에서 옮겨 붙이느라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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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李宇衍 걍 칭찬함 하고 싶었어여..췟..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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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빈 그저 민란인데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씀이시죠? 일본군이 개입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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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일본 측에는 좋은 빌미였지요. 그렇게 국내외적 정서에 따라 쉽게 휩슬릴 수 있는 것이 전근대 농민반란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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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형 동학난에 아무리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대중을 혹세무민하는 정치권력을 방조하는 학계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할 겁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4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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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선생님이 좋다면 좋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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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형 李宇衍 이 글 <제3의 길>에 게재 좀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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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길도형 영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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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형 李宇衍 감사합니다^^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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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한사련에 올릴께요.감사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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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山 李宇衍 올려주시면 넘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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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 홍경래난,진주민란등 조선시대 농민반란은 많았지만 유독 동학이 각광받는 이유는 일본과 엮여 있기 때문이겠죠. 순수농민반란의 성격을 가진 고부민란 이후 1차와 2차는 대원군의 사주에 의한 정치적 성격이 있었고 3차는 순수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북접이 가담을 했으니 그 성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남접이 대원군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북접이 남접을 토벌할 계획까지 세웠다니 진압이 늦어졌으면 볼만했을 것입니다
9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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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저보다 자세히 아십니다. 다시 읽을께요. 선생님이 관련 글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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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옳은 말씀.

이미 이 내용은

이렇게 1990년대에 다 정리된 내용인데

이것들이 들고 나온 이유는

전라도란 지역성의 탈피를 위해

들고 나온 것.

한마디로 동학은 그냥 존왕양이 지요.
3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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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존왕양이, 그걸 사람들이 몰라요. 토지국유화 할려고 내논 것은 아닐까요? ㅋㅋ
2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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