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3

나 홀로 평양에 | 북한 주재 스웨덴 외교관의 삶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나 홀로 평양에 | 북한 주재 스웨덴 외교관의 삶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나 홀로 평양에 | 북한 주재 스웨덴 외교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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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 News북한 전문 외신





외로움, 불편함 그리고 좌절감으로 가득했던 시간

미국과 북한이 소통하는 외교의 창은 어디일까요?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관은 미국과 북한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며, 북한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관을 지키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입니다. 그 둘 중 한 명인 아우구스트 보리씨는 얼마 전 스웨덴 공영 라디오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북한 주재 외교관과 평양 시민과의 접촉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매일 외로움, 불편함 그리고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북한 인민을 돕고 북한과 자국의 문화 교류를 성사시킬 꿈으로 가득한 외교관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북한의 관료주의적 장애물과 불신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둠속에 나 홀로

"어둡습니다. 칠흑 같이 깜깜하죠." 아우구스트 보리씨의 사무실에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불빛은 평양시 전차의 전선에 달린 등에서 새나오는 약한 불빛뿐이었습니다. 30살 외교관 보리씨는 희미한 불빛 아래서 청년들이 어울리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숙제를 하며 책과 인쇄물을 읽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보리씨는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 Torkel Stiernlöf 아래에서 이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가 평양에서 살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는 어디를 가든 손전등을 지니는 것입니다. 보리씨의 집은 자주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나마 전기가 공급되는 날에도 130와트에 불과하여 그다지 밝지 않았습니다.

보리씨는 이 정도 전기로는 "컴퓨터 사용이나 텔레비전 시청이 불가능했고 스피커 2개를 켤 수조차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전구는 어두침침했고 오븐을 200도로 달구기 위해선 두 시간 이상이 필요했으며 물 한 주전자를 끓이기 위해선 자그마치 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생각해보니 물이 안 나왔을 땐 주전자에 물 끓일 걱정도 없었네요..." 보리씨의 집에선 수도가 끊긴 적도 있었습니다. 집에서 물을 구할 길이 없으니 샤워는 어쩔 수 없이 사무실까지 가서 해결했습니다.

불편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평양 시민과 완벽히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고 그가 만난 북한사람이라곤 사무실에서 마주친 직장 동료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매우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시원한 맥주 한두 잔을 할 수 있는 그런 환경도 아니었습니다. 참 막막하죠, 같이 맥주나 들이켰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보리씨는 평양 근무 기간 도중 단 한 명의 북한 친구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의 집에 타인을 초청하기 위해선 외무성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고 싶은 사람은 만날 길이 없었지만, 그를 보는 사람은 도처에 있었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제 대문 앞에 항시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고 나갈 때, 그리고 누구와 동행하는지를 매번 기록했습니다. 병사들은 무언가를 끄적이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보리씨나 대사가 평양 밖을 방문하려고 하면 북한 통역사와 운전기사가 길을 잃지 않게 '보호' 한다는 명목아래 자동으로 따라 붙었습니다.

사무치는 외로움은 보리씨가 안고 가야했던 가장 큰 괴로움 중 하나였습니다. 스웨덴 대사가 출장이나 휴가 때문에 자리를 비우면 보리씨는 홀로 평양 사무실을 지켜야 했습니다. 평양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는 외로움이 가장 극대화된 시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평양에서 보낸 스칸디나비아 사람은 저뿐이었을 겁니다." "부모님이 저를 만나러 오기를 희망했지만 에볼라 방역에 대한 걱정이 심했던 북한 당국 때문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됐죠."

산더미 같은 계란

에볼라 방역이 한창일 때 보리씨는 자신이 평소에 가던 외교관 전용 식료품점에도 들르지 못했습니다. 독일산 캔 통조림과 각종 냉동 식품을 파는 식료품점은 북한 주재 외교관을 위한 다양한 식품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보리씨는 그 가게에서 굳이 고기를 살 필요를 느끼진 못했습니다.

"육류는 어떤 동물의 고기인지만 표시되어 있을 뿐 어느 부위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보리씨는 그 고기들마저 잦은 정전으로 인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해 신선한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리씨의 단백질 섭취를 도운 식품은 다름 아닌 계란이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양의 계란을 먹었습니다." 어느 국제구호단체 직원이 말했듯이, 위생적인 고기를 얻을 수 없는 지역에서는 계란이 가장 안전한 단백질 공급원입니다.

점심은 주로 근처에 있는 유로화를 받는 10여개의 식당에서 먹었습니다. 그는 북한 돈은 사용은 물론 본 적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불편이 있지만 보리씨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방문도 허락되지 않는 평양에 살 수 있는 건 일종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차에 타고 지나다니다보면 몇 대 되지도 않는 차를 통제하는 교통경찰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위대한 지도자나 양식업 생산성 향상 등의 문구가 붙어 있는 집들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만나본 김정은

그는 김정은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작년 김정일의 기일에 그로부터 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김정은이 있었습니다. 약 3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 앞에 집결했고 북한의 최고 권력층들도 모두 모인 순간이었습니다. 보리씨는 금수산태양궁의 연단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김정은은 미디어에서 보아왔던 것과 굉장히 비슷했습니다. 큰 키, 검정 옷, 특이한 머리와 약간의 연민을 자아내는 분위기가 그랬죠."

12월 17일, 보리씨는 김정일의 기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칼바람이 불고 섭씨 -14도에 달하는 강추위 속에서 떠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기억에 따르면 최고위 정치 엘리트들이 추위를 가장 많이 타는 듯 했다고 합니다. "아마 나이가 많아서 그런게 아닐까요?"

텅 빈 고속도로

보리씨의 취미는 자전거 타기입니다. 그는 평양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 '끝내줬다고' 표현했습니다. "스웨덴 고속도로보다 넓은 도로에서 차 한 대 마주칠 걱정 없이 마음껏 자전거를 탈 수 있었어요."

외교관들에게 평양의 가장 특별한 곳을 보여주는 것은 북한 정부의 목표입니다. "과학기술자 주거단지인 '은하과학자거리'가 기억납니다. 모든 것이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었고 놀이터는 중국제 장난감으로 가득했죠. 하지만 단순한 일용품마저 부족한 삶과 회색으로 가득 찬 평양의 모습은 제가 봐서는 안 되는 금기 중 하나였습니다."

평양 외의 지역에서는 상황이 훨씬 열악했습니다. "평양에 거주하는 소수 엘리트와 시골에 사는 대부분 인민들의 삶의 질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버스, 자가용 또는 기차로 움직일 만한 거리를 걷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보리씨와 대사 둘 다 북한 주민과 스웨덴 주민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보리씨는 북한 당국이 그와 같은 시도의 필요성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스웨덴 측의 호의를 원하지도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새로운 생각과 계획에는 매번 의심이 뒤따랐습니다. 심지어 스웨덴 정부가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서도 사전에 예약을 해야 했습니다."


덜 가난하고 더 품위 있는 삶

보리씨는 비자 업무와 스웨덴 외무부를 위한 보고서 작성 등 일상업무 외에도, 스웨덴 문화와 가치를 전파하는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현재 그는 스웨덴 어린이책 작가의 북한 방문을 성사시키려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인터뷰 직전에 북한 여행당국과 만나 그 여행작가가 북한 방문 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의 에볼라 방역이 끝나면 보리씨는 북한 곳곳을 여행하고 싶어 합니다. 그가 가고 싶어 하는 곳 중에는 스웨덴 정부의 지원으로 수도시설이 설치된 보건소 세 곳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리씨의 북한 근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한 인민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보다 덜 가난하고 더 품위 있는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리씨가 북한에 근무하며 바란 것은 스웨덴 대사관이 북한 정부와 전 세계를 이어주는 소통의 창으로 남아있는 것 이었습니다. 비록 그 대화가 "거친 언사로 인해 무익하게 끝나버린다 해도"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작자 욘 올슨(Jon Ohlson)은 홍콩대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스웨덴 작가입니다. 안재혁이 번역하였으며, 본문에 등장하는 사진은 아우구스트 보리(August Borg)의 소유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NK News 한국어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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