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6

나는 왜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1]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기사승인 2018.10.27 19:16:28


- 한국교회 에큐메니즘의 전개와 李信 신학 1


이 글은 원래 작년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해서 그 전해 돌아가신 지 35주기가 되는 선친 이신(李信, 1927-1981) 목사님을 기리면서 펴낸 글을 근간으로 한다(김성리 외, 『환상과 저항의 신학: 이신(李信)의 슐리얼리즘 연구』, 동연, 2016). 이렇게 1년이 지나서 다시 여기에 가져와서 약간의 보완과 더불어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 성찰된 생각들이 또 다른 5백년을 향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좀 더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물론 개인적인 선친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꺼려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에 그분의 묘소를 일산기독묘지에서 충청도 괴산의 소수로 이장하면서 그의 생과 사상이 한국적 신학의 유산으로서 좀 더 보편적으로 해석되고, 다양하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

이 책이 나온 후 1년간의 변화를 생각해 보면 나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재직하던 대학을 조금 일찍 떠나서 한국여성신학자로서 ‘聖․性․誠의 여성통합학문’을 염두에 두면서 여러 궁리 끝에 <한국信연구소>라는 이름을 내세우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는 ‘信’이라는 이름을 가져왔는데, 그것으로써 육신의 아버지 이신(李信)을 기리고 이어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오늘 우리 시대 인류 삶의 문제가 바로 이 ‘믿음’과 ‘신뢰’, ‘공감’과 ‘상상’, ‘환상’의 문제에 집약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보다 통합학문적인 탐구와 성찰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가능성을 다시 찾아내는가 라는 점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제 오늘 우리의 ‘신학’(神學)은 ‘신학’(信學)의 물음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서로 간에 좀 더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깊이 공감하고, 또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고 환상하면서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의 물음을 묻고자 하는 의식이다. 나는 이신의 삶과 신학, 시와 그림이 바로 이와 유사한 생각 속에서 배태되었고,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 문제의식과 탐구의 길이 결코 녹슬지 않았다고 본다.

▲ 이신 목사/신학박사(1927.12.25-1981.12.17)


오늘 한반도의 삶에서 남북의 통일과 평화가 절체절명의 관건이 되었다. 그 일에서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우리 시대 최고 강국들의 각축이 심하다. 이미 이 한반도에서 그 각축이 일제식민지와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불러왔고, 잘못하면 다시 한 번 유사한 위기 앞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천주교는 로마의 교황을 찾아가고, 개신교는 미국 교회에게 SOS를 친다. 그런 노력의 한 편에서 남한의 한 정당은 정부가 9월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합의서를 의결한 것에 대해서 위헌소송을 제기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우리의 이러한 행보들이 앞으로 어떤 열매를 맺어낼 것인지 매우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런 모든 일을 염두에 두면서 이신의 신학을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었다. 물론 당시 그의 시대는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과는 많이 다르고, 그 시대적, 신학적 한계에 이어서 또한 나의 해석에도 치우친 면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함께 공유하며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이 시작하는 말의 마무리로서 나는 지난 2011년 이신의 30주기를 기리는 말로 썼고, 지난 여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의원을 생각하며 다시 패북에 올렸던 언어를 가져오고자 한다. 이 말의 원 출처는 스위스의 페스탈로치인데, 그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민중의 고통을 가장 근본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는 토대로서 바로 우리 인간성 안에 내재한 초월에 대한 깊은 믿음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것으로써 그는 당시 국가교회로부터 파면을 당했고, 모두로부터 배척과 비웃음을 받았지만 그는 그 믿음과 저항, 환상의 행보를 고독으로 맞서면서 나아갔다.
“나는 여기 그 이상을 원했던 한 인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순진과 무구의 기쁨이 놓여 있었고, 아주 소수의 죽을 운명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친절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사랑과 신뢰는 그의 본성이었으며, 가장 은밀한 내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의 작품이 아니었고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발견하고서 그의 죄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를 쇠망치로 부숴버렸고, 마치 미장이가 쓸모없는 돌을 보통인 돌로 쓰려고 깨는 것과 같이 그렇게 깨버렸습니다. 그는 깨어지고 죽어가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죽을 운명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한 목적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소용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또한 그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바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미주 1)


1. 이신의 ‘믿음’(信)에 대하여

이신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했던 것은 ‘믿음’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이름을 부모님들이 지어준 이름(李萬修)에 더해서 ‘믿을’ 신(信) 자(字)의 이신(李信)으로 할 정도로 ‘믿음’을 사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한 말이 “신뢰의 그루터기”라는 말이었다고 생각하는데,(미주 2) 그는 왜 그렇게 ‘믿는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우리가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일제 강점기에 부산에서 상업학교를 마치고 은행에 취업했다가 그만두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믿음의 학인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믿음을 찾아 나선 그의 행보는 더 이어져서 6.25가 발발하고 고향 전라도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만나면서는 속해있던 감리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후일 1980년경 『기독교백과사전』을 위해서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라는 역사서술에 보면, 그는 이러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도 한국 가톨릭교회의 시발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스스로의 선행된 자각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그 서술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신앙에서 다양한 교파나 그 교파에서의 신조를 따르기 보다는 원래 초대 교회의 순수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보고, 그것을 깨달은 소수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혹독했던 상황에서 감리교회나 구세군에 속해있던 소수 목회자의 자각이 있었고, 그것이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과 연결되면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본격화되었다고 밝힌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일제 말기에 집단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것을 가까스로 면하고서 해방 이듬해에 이때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일치를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기독(基督)의 교회 합동선언문」)을 발표했다고 한다(1946.8월).
“우리 기독의 교회는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신 교회로 돌아와서 각각 분열된 기독교에서 신약 시대의 기독의 교회로 같이 돌아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聖旨)를 순응하여 합동 통일 운동을 선언하노라. 신자는 말씀에 비추어 각각 교파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인데 각각 속한 단체의 헌법 규칙을 존중시하고 분열됨으로 다투고 있으니 성 바울이 기록한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구구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 다시 조선 교회의 실정을 살펴보면 우리 조선 각 교파가 악마 왜정 시대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日本 基督敎 朝鮮敎團)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통일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면 악마에게 굴복하여 신사 참배의 합동 통일은 하면서도 주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각 교파 신도의 통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만일 부인한다면 성경 말씀인 주님의 성지를 반역하는 일이다. 삼가 조심하라. 그런즉 합동 통일함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 신약 시대의 교회를 찾으면 신약성경에서 찾자.”(미주 3)


여기서 분명히 서술된 대로 어떻게 이제 막 식민지 처지에서 벗어난 변방의 한 미약한 나라의 교회가 그것도 그 복음을 전해 받은 지도 얼마 안 되는 어려운 처지에서 교회 전체의 2천여 년 역사를 모두 뒤로 돌리는 일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들은 기독교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창하게 되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쳐준 대로 다시 그 본래적 하나 됨과 교회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호소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일은 오늘 한국 개신교가 오랜 분열과 갈등을 뒤로 하고 다시 여러 형태의 에큐메니즘을 말하는 시점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과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더 이상 서구 교회나 교파나 교단 등에 좌우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개체 교회의 존재 가능성이 훨씬 커진 상황에서도 힘든 일인데, 이신은 이 일을 이루는데 온 힘을 쏟으면서 자신의 믿음의 일을 수행해 나갔다.

그래서 더욱 묻게 된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신약성서 히브리서의 유명한 언명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가 지시하는 대로 몸은 현재에 있으면서 그의 의식으로는 과거의 어떤 ‘선험’이나 ‘원형’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지금 뚜렷이 보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일에 대한 확고한 상(像)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 애쓰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이렇게 지금/여기에 있으면서 과거와 미래, 이미 있음과 아직 아니의 공간을 통합하고, 아니 그보다 그 시공간 자체를 창조하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인류 동서의 많은 성찰적 지성들은 이 믿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 고유의 일이고, 마치 ‘언어’처럼 인간에게 고유하게 ‘선험적’으로 놓인 어떤 “선험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간 존재의 “신적 속성”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겠다.(미주 4) 그래서 이 믿음을 가리키는 동아시아의 언어인 ‘신’(信)도 ‘인간’(人)과 ‘언어’(言)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믿음의 일은 여느 보통의 인간사의 일과는 달리 현재를 떠나는 일이기 때문에 주로 현재에 몰두하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잘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배척을 당하고, 미움을 받으며, 몰이해와 배타 속에서 소외를 겪는다. 이신은 인간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일이 ‘믿음’을 지니는 일이고, 그것이 인간 삶에서 그렇게 근본적인 일(“그루터기”)이기 때문에 거기서의 자유, “신앙적 주체성”을 찾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긴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고독하고 빈한한 삶을 살았다.

그의 딸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보니, 특히 오늘날과 같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의 유무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질적인 유물론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초자본주의 시대에 살다보니 사람들이 그 드러나는 것 이전 또는 너머에 있는 ‘진실’을 위해서, 아직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어떤 ‘뜻’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다. 오늘의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러한 믿음의 일을 위해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돌아올 물질적 이득과 소득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삶을 반추해 보면서 나 자신은 그러한 믿음을 거의 못 배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생전에 그가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주저 두 권을 번역해내기까지 한 러시아의 사상가 N. 베르댜예프(1874-1948)에 따르면 오늘 우리 시대는 온통 부르주아지의 노예성에 사로잡혀 있는 시대이다. 그것은 ‘돈’과 ‘자아’에의 노예성인데, 여기서 인간은 세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스스로 서 있는 이 세상에 만족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세계의 허영과 허무함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경제적 발전의 무한을 인정하나, 그가 인정하려는 무한은 그가 인식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것일 따름이라고 지적한다.(미주 5) 이신은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의 깊이 없음과 불신, 자아에의 집중을 비판하면서 다시 인간 존재의 선험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며 그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냈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면서 나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까를 묻는다.

인간 의식의 고양을 한껏 추구했던 20세기의 인지학자(人智學者)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는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인식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어린 시절에 너무 일찌감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공부에 내몰린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오히려 더 물질에 집착하고, 믿음과 상상력이 떨어지고, 빈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고 지적하였다. 몸과 선한 의지로 세상에 튼실하게 발을 딛고 서기 전에 서둘러서 추상의 세계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셨던 아버지 이신은 어린 시절, 특히 그 어머니로부터 몸과 마음과 감정을 잘 배려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해졌는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조금이고, 그 분은 원래 할아버지의 첫 부인이 낳은 아이들이 모두 죽자 속임수로 다시 결혼한 할아버지로 인해서 힘든 삶을 사셨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4남매의 양육을 위해 혼신을 다하시다가 6.25 전쟁의 와중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분이었고, 그 속에서 첫 자손으로 태어나신 아버지가 성인이 되어서 믿음의 전회를 감행했던 일들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러한 질문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인간 ‘언어’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것도 나라는 주체의 능동성보다는 그보다 먼저 내가 믿어지는 선험성과 수동성이 함께 하는 것이고, 이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고, 강요당하면서도 자유로운 두 가지 속성, “서로 반대되는 두 성질의 통일성”이기 때문에 믿음이 “신적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여겼다.
“믿음은 우리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갖기 이전부터 이미 믿음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대상이 되었던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믿을 수 있다.”(미주 6)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앞서 주어진 자유로 인해 자유로운 존재다.”(미주 7)


이신은 이 믿음으로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택했고, 6.25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를 잃고 가족이 흩어지는 경험 속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갔으며, 그 교회에서도 외국 선교사들과 성서해석과 성령 이해의 차이로 그나마 안정된 자리를 떠나야 했다. 40대의 늦은 나이에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일, 돌아와서도 여전히 안정과 안위대신에 산동네 무허가촌의 궁핍한 삶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그 거처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산골로 내려가신 일. 이런 모든 일들이 그의 믿음의 선택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미국 유학까지 한 박사였지만 주변에는 항상 가난한 민중과 학벌이 높지 않은 변방의 목회자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병이 들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지만 병원에 가는 대신 기도원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의 한 좁고 허름한 방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은’(天恩)을 말하며 가족들에게 잘 지낼 것을 당부하고 기쁜 모습으로 가셨다.

어디에서 그런 믿음의 지속하는 힘이 나왔으며, 어디에 근거해서 그는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읽고, 쓰고, 선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또 동료들을 모아 세상의 달라짐과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그의 믿음이 단순한 그의 의지가 아니고 ‘신의 의지’이고, 그 믿음이 ‘신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비록 오늘날의 우리는 이 기원을 갖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 앞에 먼저 주어진 것에 대한 의식을 잘 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자아의 주관으로 돌리고, 그래서 신도, 전통과 권위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 믿음이 하나의 ‘기적’(a miracle)처럼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인간 삶을 어쩔 수 없이 ‘조건 지어진 존재’(the human condition)로 보지만 그 삶의 활동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행위”라고 하면서 그 행위는 “결과의 예측불가능성”과 “과정의 환원불가능성”, 그리고 “작자의 익명성”이라는 불행한 요소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

미주
(미주 1) J. H. Pestalozzi, Auswahl aus seinen Schriften, Bd.1, Hrg. von A.Bruelmeier, Bern/Stuttgart 1977, p.278-279.
(미주 2)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이은선․이경 엮음, 동연, 2011, 300쪽.
(미주 3) 같은 책, 346쪽.
(미주 4)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3, 17쪽.
(미주 5)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늘봄, 2015, 244쪽. 이 책은 원래 이신이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79년 가을에 번역 출간되었던 것을 2015년 필자에 의해서 다시 수정 보완되어서 출판사 늘봄에서 재간되었다.
(미주 6) 막스 피카르트, 같은 책, 33쪽.
(미주 7) 같은 책, 100쪽.


이은선 명예교수(한국信연구소, 세종대)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