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2

이극로 박사의 인생철학



그분을 그리며
이극로 박사의 인생철학

고영근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 교수

 새국어생활 제23권 제2호(2013년 여름)


올해는 고루 이극로 박사가 태어난 지 일백스무 돌이 되는 해이다. 고루 이극로 박사(이하 아호인 ‘고루’라 부름)는 1893년 8월 28일 경상 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태어났다. 고루는 갖은 고난을 무릅쓰 고 독일 유학길에 올라 드디어 ‘중국의 생사 공업’을 주제로 베를린 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 다. 고루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 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말(민족어)과 우리글(한글)을 수호하고 발 전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귀국과 동시에 ‘조선어학회’에 입회 하 으며 동시에 우리말사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 다. 다른 한편 고 루는 동지들과 함께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고 우리 민족의 표준말을 사 정(査定)한 바탕 위에서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마무리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 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민족 어문에 한 연구 와 보급 운동을 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우리의 어학자들을 체포하여 갖은 고문을 가하면서 3년 동안 감옥살이를 시켰다. 일제는 고루를 민 족 어문 운동의 주모자로 간주하고 징역 6년을 언도했다. 우리 어학자 들이 해방 전에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을 정리해 놓지 않았더라면 해방 을 맞이하 을 때 우리의 민족어 교육이 정상적으로 가동(稼動)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해방되기까지는 우리 민 족 사회의 공용어는 일본어 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교사가 우리말로 수업을 하다가도 ‘고초센세이(‘교장 선생’의 일본말)’ 가 교실 앞을 지나가면 얼른 일본말로 바꾸어 버리던 것을 생생하게 기 억하고 있다.

고루는 독일에서 돌아오는 길로 민족어 수호 운동을 주도하면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 일간지와 ≪신동아(新東亞)≫, ≪조광(朝光)≫(월간 ≪조선(朝鮮)≫의 전신) 등의 민족어 월간 잡지 에 우리 민족의 결함을 극복하는, 사회사상에 관련된 소품(小品)을 많 이 발표하 다. 이를테면 풍수지리, 미신, 조혼 폐습의 타파, 공중도덕 의 선양, 민족 고유의 운동 경기의 현 화와 중화, 씨름 장려, 유치원 교육의 활성화, 언론 자유의 신장 등을 들 수 있다. 고루의 사회사상은 이미 개화기의 유길준과 주시경, 박승빈 등 애국 계몽 사상가들의 연장 선상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세계 여러 나라를 견 문하면서 터득한 사상 체계란 점에서 그 가치를 새로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사회사상 밖에도 자신의 인생철학에 관련된 소품도 적지 않게 발 표하 다. 이를 중심으로 고루의 인생철학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고루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서거에 즈음하여 ≪조광 (朝光)≫(1936. 4.) 특집호에 <서간도 시 의 선생>이라는 회상기를 기고하 는데 여백을 이용하여 ‘나의 경구(警句)’라는 계명(誡命)을 공 개하 다.

첫째, 육체의 안락을 위하여 정신의 고통을 사지 말라. 둘째, 매사에 제 책임을 다하라.

셋째, 시간 약속은 근 식으로 정각을 지키라.

넷째, 사람마다 장처(長處)와 단처(短處)가 있는 것이니 매사에 남

의 단처는 관계하지 말고 장처만 취하라.

다섯째, 개인 일생의 활동이 사회 생(永生)의 번 에 일점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니 제 생전에 무슨 결과를 보려고 구구하지 말라.

네 번째 계명은 단재와의 교우에서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고루는

단재 신채호를 1914년 서간도 환인현에서 처음 만났고 1919년 상해에 서도 만났다. 그는 앞의 회상기에서 단재의 장단점을

1. 글은 잘 쓰지만 글씨는 잘 못 씀(能文 不能筆)

2. 이야기는 잘하지마는 연설은 잘 못함(能座談 不能演說)

3. 문에 능통함

4. 강직한 사필(史筆)

의 네 가지로 열거하 다. 단재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든지 장단점 을 지니고 있다. 고루가 민족 어문에 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어학 자들을 규합하여 민족어 규범을 성사시키기까지는 장점을 수용하고 단 점을 덮어 두라는 위의 경구를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은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어떤 어학자는 자신의 견해가 수용되지 않는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고루는 “민족의 업을 성 취하는 마당에 자기의 고집을 부려서야 되겠는가”라면서 다독거려 회 의를 원만하게 이끌어 나갔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 다. 사실 고루와 같은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민족어 규범 정리가 성사되기 어려웠다고 한다. 시간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라는 경구는 독 일 유학을 통하여 터득한 사례로 보인다. 독일 사람의 전형적인 성격이 ‘pünktlich(시간을 엄수하는)’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은 고루 의 좌우명은 민족어 규범 제정 과정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루는 성공의 세 가지 덕목으로 다음을 들었다.

첫째, 원 한 이상과 희망을 가질 것 둘째,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인내력을 가질 것

셋째, 분투하는 용기와 열성을 가질 것

≪학등(學燈)≫ 1936. 3.-자구 수정

위의 세 덕목은 고루가 베를린 학에서 학위 증서를 쥐고 나올 때 그 나름 로 확립한 것이다. 위의 덕목은 십 시절의 무단가출에서 시작하여 은단 장수를 하면서 마산 창신학교를 다니고, 중국 환인현에 서 잠깐 머물다가 하얼빈을 거쳐 러시아의 치타까지 가서 머슴살이를 하고, 상해로 와서 동제 학 예과를 다니고, 베를린 학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고발하고, 브뤼셀의 약소 민족 회에 참석하여 일제를 성토하는 등의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고 마침내 베 를린 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고루에게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고루는 반생을 살아오는 동안 실패는 없고 성공만 있었으며 구사 일생(九死一生)에서 목숨을 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든지 계획을 세워 놓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여기면 바로 물불 을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는 것이다. 뜻을 세우고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 이었다. 고루가 자신의 호를 ‘물불’이라 지은 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철 학을 변하는 것이다.

먼저 고루는 1937년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에서 우선 조선어학회

의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것을 들었다(≪조광(朝光)≫ 1937.

1.). 여기서 말하는 조선어학회의 사업이라는 것은 1937년부터 시작된 ≪조선어 사전≫(뒤의 ≪우리말 큰사전≫의 원래 이름)의 편찬을 가리킨다. 다음으로는 고루 자신이 수년 전부터 기획하여 오던 ‘조선기 념도서’의 출판을 들었다. 이는 변호사 이인(李仁)이 양친의 회갑 축하 비용을 절약하여 김윤경의 ≪조선문자급 어학사≫의 출판을 가능하게 하 다는 일화를 가리킨다. 김윤경의 저서 출판의 이면에 고루의 노력 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고루는 이 밖에도 자기 손으로 처마 밑 공간을 이용하여 서재를 만들고 장롱을 실용에 적 합하게 개조한 것도 성공 사례로 들었다.

다음으로 고루가 구사일생(九死一生)에서 살아난 사례를 보기로

한다. 고루는 1914년 백두산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냥을 하다가 마적단 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에 직면하 다. 마적 두목은 고루를 사냥꾼 일행 의 총수(總帥)로 지목하고 나무에 달아 맨 채 철창에 불을 달구어 발을 지지는 등의 극형을 서슴지 않았다. 고루는 총살을 당하기 직전에

“당신이 내가 되었다면 죽음의 최후를 당하여 그 총 몇 자루와 웅담 얼마를 생명과 바꾸려 하겠소”

와 같이 마적 두목을 향하여 고함을 치면서 전후 사정을 사실 로 실토 하 다. 고루의 하소연을 들은 마적 두목은 드디어 고루 일행을 풀어 주었다(≪조광(朝光)≫ 1937. 3.).

또 한 가지는 고루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세계 일주를 하는 도중에 겪은 일이다. 고루는 1928년 6월부터 한 달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서재 필 박사와 이승만 박사도 만나고 홍인종 보호 구역을 시찰하기도 하 으며 동포들을 상으로 하여 한글에 관한 강연도 하 다. 그러면서 고 루는 미국의 국립 공원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을 답사하 다

(≪동아일보≫ 1937. 7. 18.). 폭이 50리이고 길이가 천여 리에 달하

으며 비행기도 이착륙(離着陸)할 정도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

다. 말이 지하이지 그 속에는 강과 산이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거 한 별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고루는 지하 동굴을 답사하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우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뻔하 는데 요행히 바위를 부여잡 고 간신히 살아났다.

끝으로 고루가 장진호 뱃놀이를 하다가 겪은 일화를 소개하기로

하겠다. 고루는 세계 일주를 마치고 귀국과 동시에 조선어학회에 입회 하고 8개월 동안 한반도를 비롯하여 북간도와 서간도를 둘러보았다. 고루는 지방 유지와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장진호에서 뱃놀이를 하

다. 그런데 출항하자마자 풍랑이 일어 배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침몰하기 시작하 다. 그때 고루는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가루를 비롯한, 배에 실었던 모든 짐을 물속에 던지고 쓰고 있던 맥고모자를 벗 어 배 안에 고여 있던 물을 퍼내어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았다. 같이 배 를 탄 사람들은 죽는 줄 알고 체념하고 있었는데 고루의 기지 발휘에 힘 입어서 모두 목숨을 건졌다. 고루는 어떤 경우, 어떤 사선(死線)에 처 하더라도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면서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을 인용하 다(≪조광(朝光)≫ 1936. 8.). 고루의 인생철학은 두 편의 옥중 수양 표어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 다(≪고투 40년(苦鬪四十年)≫, 1947).

사도삼소(士道三素) 선비 도의 세 가지 근본

1. 감천지성심(感天至誠心) 하느님이 느끼는 정성스러운 마음

2. 연성전능력(硏成專能力) 힘써 이룬 오로지 능한 힘 3. 공 공덕(共榮大公德) 함께 잘 사는 큰 공중도덕

도생잠일(道生箴一) 도로써 산다

1. 경사득도(經事得道) 일을 경험하여 도를 얻었으니

2. 시위진도(是爲眞道) 이것이 참 도가 되고

3. 득도자생(得道自生) 도를 얻어서 절로 사니

4. 시위진생(是爲眞生) 이것이 참 사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루는 조선어학회사건에서 징역 6년 형을 언 도받았다. 동료들과 함께 3년간의 악형에서 목숨을 부지해 낸 것은 ‘사 도삼소(士道三素)’에서 설파한 로 ‘공 공덕(共榮大公德)’으로 귀 일하는 선비의 도를 지키고, ‘도생잠일(道生箴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1950년 전반 진주와 의령 일 에는 “이극로 박사는 짚신을 신고 축지법(縮地法)을 쓰면서 걸어서 독일 유학을 갔다.”라는 신화가 퍼져 있었다. 이는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루가 ‘구 사일생(九死一生)’의 험로를 걸어온 역정을 단적으로 변한 일화로 해 석된다. 고루는 1913년 민족 해방에 헌신하고자 군사학을 공부하러 러 시아로 가다가 치타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중에 춘원 이광수를 만난 일 이 있다. 당시 이광수는 ≪정교보(正敎報)≫ 편집차 치타에 와 있었는 데 자기가 입은 외투를 고루에게 벗어 주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 다(박계주 ‧ 곽학송, ≪춘원 이광수≫, 삼중당, 1962). 이광수는 그의 자 서전에서 조선어학회를 수십 년간 지켜 온 그 인내력으로 볼 때 걸어서 독일로 갔으리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라고 하 으니(≪나의 고백≫, 1949), 진주-의령 지방에서 위와 같은 신화가 탄생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루는 해방 전에는 독일 유학 시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귀국하

여서는 민족어 규범과 사전 편찬에 혼신(渾身)의 정력을 바쳤다. 해방 후에는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민족 어문의 회복과 발전에 큰 공을 세 웠으며 ‘세종 임금 한글 펴니 스믈여덟 글자……’로 시작하는 한글날 노래를 짓기도 하 다. 고루는 김구의 남북 협상 때 북으로 가서 그곳 에 머물러 북한의 민족어 연구를 이끌고 특히 문화어 운동을 일으켜 민 중과 같이 숨 쉴 수 있는 고유 어휘의 발전과 쉬운 글쓰기에 많은 공적 을 쌓았다. 고루가 이런 어려운 일을 해내기까지 죽을 고비를 수많이 겪었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가 거울로 삼아야 할 교훈을 많이 남겼

다. 이러한 고루의 업적과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우리 후손의 몫이며 이는 동시에 끊어진 민족의 핏줄을 하나로 이어 주어 민족 통합의 기틀 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탄생 120돌을 맞아 다 시 한 번 고루 이극로 박사의 활동과 업적을 되새기기를 바란다.

2013. 5. 31.

관악산 기슭 명예 교수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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