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2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불령선인(不逞鮮人)』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불령선인(不逞鮮人)개인과 공동체의 연속성비연속성



이정희


1. 나카니시 이노스케와 작품의 평가


【자료1】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조선인이  등장하는  소설」(쿠와하라 다케오(桑原武夫)編『문학이론의 연구』이와나미서점, 1967 년 12 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이 조선인 것을 생각할 때, 조선을 무대로 한 소설이 메이지・ 다이쇼 ・ 쇼와에 걸쳐 패전 때까지 나오지 않는 것은, 일본 근대문학의 성격과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자료2】모리야마 시게오(森山重雄)「나카니시 이노스케론(中西伊之助論)」 (『인문학보(人文学報)』No.80 동경도립대학인문학부, 1971 년3월) 물론 쓰루미는 조선을 무대로 한 소설이 전무(皆無)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타카하마 쿄꼬(高浜虚子)의 수필소설『조선』(1911 년), 마에다가와  코이치로(前田川広一郎)의 실록(実録)소설『조선』(1921 년), 장혁주의 『권이라는 사나이』(1933 년), 다나카 히데미쓰(田中英光)의 『만취한 배(酔 い ど れ 舟)』(1948 년)등을 들고 있다. 쓰루미의 논문은 전후(戦後)까지 아루르고 있고 세심하게 고찰한 논문인데, 다이쇼시기(大正時代)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고〈중략〉내 머리 속에는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대표작『적토에 싹트는 것(赭土に芽ぐむもの)』(1922・2, 改造社)가 떠오르고, 조선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외에도 『불령선인』(1922 ・ 9,「改造)」), 『너희들의 배후에서(汝等 の 背後 より )』(1923・ 2, 改造社),『나라와 인민(国と人民)』(・6, 平凡社)등이 있다. 〈중략〉왕성한 작가활동을 한 것에 비해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주제가 가지고 있는 활력성에 비해서 예술적인 처리면에서 완벽하지는 못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그 자신도 자신을 작가라고 규정한 적은 아마 한 번도 없고, 노동운동가와 작가라는 두 길을 한평생 걸었다.

→나카니시 이노스케는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썼다는 평가는 받지 못했고, 다이쇼기에 조선을 무대로 한, 드문 작품을 쓴 작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자료3】안드레 헤이그( ア ン ド レ ・ ヘ イ グ )「나카니시 이노스케와 다이쇼기 일본의「불령선인」을 향한 시선」(『리쓰메이칸 언어문화연구 (立命館 言語文化研究)』

22 권 3 호, 2011 년1월)

1920 년대 초기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 나카니시의 인상적인 독자성은, 일관되게 조선의

식민지지배를 둘러싼 제문제(諸問題)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것이다.〈중략〉1920 년대 초반이라는 단계에서 아직 발흥기(勃興期)였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 작가는, 3 ・ 1 독립운동에 의해서 가시화(可視化)된 조선의 식민지문제나 「불령선인」언설 앞에서 일반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게다가 이시자카 코이치(石坂浩一), 림숙미(林淑美)나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가 이미 지적했듯이, 일반적으로 일본의 사회주의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은 ‘계급문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로 인해 해소되었어야 할 식민지주의 민족문제라는 맹점을 안고 있었다. 1922 년 2 월에 발표된 처녀작『적토에 싹트는 것』은 가쓰무라 마코토(勝村誠)가 지적했듯이,「조선소설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서 주목받았」다. 당시에도 미야모토 유리꼬(宮本百合子)는 〈중략〉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소설『적토에 싹트는 것』을 「제재(題材)에 있어서 이제까지의 작가가 다루지 않았던 영역에 진출했다」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작품으로서 취급하고 평가했다.

『불령선인』이 출판되었을 당시 에구치 칸(江口渙), 이쿠타 초코(生田長江), 야베 아마네(矢部周)등 문예비평가는 나카니시의『적토에 싹트는 것』과 비교해서 많은 약점을 지적했고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아마 『불령선인』은 ‘예술작품’으로서 약점이 있을지도 모른다.〈중략〉단순히 소설로서만이 아니라, 싹트기 시작한 일본탐정 ・ 추리소설의 요소를 넣은 소설의 형태로‘불령선인’언설의 표상 배후에 있는 의식을 고발하는 대항언설로서의 시도 ・ 실험으로서 봐야 하지 않을까. 또한, 1920 년대 당시에『불령선인』이 문학을 통해서 조선독립운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유일한 소설이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불령선인』에는 노동운동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형적인 요소가 적고,「계급」보다는「민족」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행연구에서 나카니시를 논할 때, 주로『적토에 싹트는 것』을 다루고 있고『불령선인』은 덧붙여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래에 들어『불령선인』에 대한 논문이 나오고 있다.



2.『불령선인』의 등장인물과 말의 언설

●첫 발표지:『改造』1922 년 9 월

(여기서 인용하는 본문은 쿠로카와 소(黒川創)編『〈외지〉의 일본어문학선 3-조선

(〈外地〉の日本語文学選3—朝鮮)』(新宿書房,1996)에서 발췌한 것이다.)

●소설의 내용

‘세계주의자’라고 표방하는‘우스이 에사쿠(碓井栄策) ’가‘불령선인’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하여‘불령선인’소굴에 들어가게 된다. 이야기는 그 소굴에 다다를 때까지와 소굴에 도착한 이후의 에피소드, 그리고 그 여정( 旅程)에서‘우스이’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본문 1】언제였을까, 어떤 관청직원이 구제금을 가지고 시골을 여행하고 있었는데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돈을 빼앗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근데 그 지방이 아마 이 근처였나라고도 에사쿠는 생각하곤 했다.

【본문2】“여보게, 이 뱃주인은 내가 내지인(内地人)이라서 태워줄 수 없다고 말하는 걸 테지……?”라고 했지만, 에사쿠는 그래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좋겠는데라고, 희박한 소망을 가지고 물어봤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보기좋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통역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불령선인’과 만나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강에서‘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배를 태워주지 않는 역차별을 받는다. ‘우스이’는 옷을 벗고 헤엄쳐서 강을 건너고‘통역자’는 배로 건너게 된다.

【본문 3】“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많습니다”라고 곧바로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되도록 주인의 마음을 그런 대화에서 이쪽 화제로 돌리고 싶었다. “아니, 별말씀을……(いや、 ……といたしまして……)” 이라고 주인은 억누르듯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조선인이 일본어를 말할 때, 아직 발음에 익숙치 않은 이는 탁음(濁音)이 청음(清音)이 되거나 또는 반탁음(半濁音)이 된다. 그리고 모음을 생략해 버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우스이’는 친구‘홍희규(洪熈桂) ’의 소개장으로‘불령선인 두목’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지게 되는데, 그 집‘주인’이 유창하지는 않지만 통역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일본어가 가능하다. 그러나「주인」이 말하는 일본어는 탁음과 장음이 자주 틀린다. 그것은 조선어가 모어(母語)인 사람이 틀리기 쉬운 발음이기도 하다. 일본어

본문에는‘주인’이 틀린 발음마다 거의 방점이 찍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했다.

조금 더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私,洪には長く会いませんが,としています。”←どうして

“あまり空想ばかりではためたと云ってやりました”←だめ

“碓井さんは洪をとして識っています……?”←どうして

“そてすか”←そうですか

→관동대지진 때, 적지 않은 조선인이 학살됐다1고 전해진다. 그 때,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분기준은 일본어의 발음이었다2고 한다. 『불령선인』이 지진이 일어나기 약 1 년 전에 발표된 점에서, 지진 이전부터 일본인 사이에서는 ‘불령선인’이라는 언설과 그‘불령선인’이 말하는 일본어의 발음이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적지 않은 일본인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본문 4】에사쿠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고 주인은 생각했던 대로 딸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약간 과장된 표정에다가 자신의 의분에 찬 어투를 섞어서, 바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문득 다시금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말을 상대방이 꽤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하는 불안이 가슴에 엄습해왔다.

“그렇습니까……(そてすか……)”

【자료 4】와타나베 나오키(渡辺直紀)「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조선관련 소설에 대해서—특히 표기언어와 인물 원근화(遠近化)의 관계를 중심으로—」(『일본학』 제 22 권,

동국대학교일본학연구소, 2003 년) 주인이 딸의 죽음에 대해서 떠오르는 대로 우스이에게 호소하는 모습은 그 발화의내용에 비해서 한층 더 비장하게 보인다.〈중략〉서툰 일본어를 구사하는 주인의 성격은 일본어로 잘라지고 형성된 것이다. 실제로 조선어로 말하거나 생각하는 부분을 일본어로 표기한다면 이렇게 서술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서툰 일본어를 이 주인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주인의 성격에는 소설의 문체나 표기에 나타나지 않는 잉여부분이 생긴다. 【본문 5】과연 자신이 오늘아침 상상하며 방문한 이른바 불령선인의 두목 집일까라고

생각해봤다. 뭔가 거짓말 같았다.

【본문 6】몸의 어딘가에 숨어있던 불안이 재빠르게 그의 가슴을 스쳤다. 이유도 없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자 다음 순간에 그가 자고 있는 발밑 언저리에서 지금의 살아있는 무언가가 달그락달그락 움직였다. 그의 몸이 충동적으로 확 움츠러들었다.〈중략〉마치 벽 한가득으로 보일 정도의 커다란 그림자가 확 비췄다. 그는 저도모르게 앗하고 비명을 지를 것 같았으나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중략〉즉 침입자는 그들의 의류나 소지품만을 훔치러 온, 흔한 밤도둑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본문 7】조금 고개를 들어 처음 침입자의 뒷모습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생각지도 못하게도 그것은 전날밤 주인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이다.〈중략〉지금 주인이 이

방에 온 것은 에사쿠 일행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알아보러 온 것이다.〈중략〉사랑하는 딸의 피를 빨아먹은 원수들을! 에사쿠는 홍희규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 안일한 세계주의자는 그대로 그들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다.〈중략〉오랜기간 도시의 소음에 노출되어 살았다고 해도 올빼미 우는 소리를 사람의 비명소리라고 잘못 들은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삶의 집착이다.〈중략〉“여보게, 지금 방에 들어온 사람은 말일세”라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기익’하고 방문이 밖에서 열렸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쫙 복도에서부터 두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는 발밑쪽으로 흘러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에사쿠는 흠칫하여 꼼짝못했고, 통역자는 허둥지둥 허둥대며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다. “……변소, 모르시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확실히 주인이었다. 깊은 인상을 남긴 어젯밤 주인의 친절한 말이, 같은 울림으로 에사쿠의 마음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본문 5 에서 7 까지는‘우스이’가‘불령선인’에게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긴장과 완화가 반복되고 있다. 그 때마다 ‘우스이’는 ‘세계주의자’에서 ‘불령선인’언설에 꼼짝못하는 한 일본인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자료5】야마기시 시게루(山岸秀)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와세다출판, 2002 년) 이 두 가지 예(『지진미담(震災美談)』中島姉,私家版,1924 년)에서, 조선인은 왜 살해되지 않았을까. 물론 문(文)씨의 집주인이나 쿠마야(熊谷)의 견직물회사 관계자의 인품과도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학살에 가담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보통 때는 상냥한 인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해당하지 않았던 이유로, 인품이상의 보다 중요한 것은 가령 차별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일정한 일상적인 인간관계가 성림되어 있었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중략〉제사여공(製糸女工), 그리고 죽지않게 도움을 받은 조선인으로 미담(美談)에 나오는 이들은 조선인으로서 차별자라고 해도, 일상적으로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같이 지내는 관계에 있었고, 행상인과는 달리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섞여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 해도 살해당한 자가 타지역에는 있지만).





1쿠도 미요꼬(工藤美代子)는‘런던의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발견된 모책자(謀略冊子)에서는

23,000 명, 「독립신문」은 6,400 명,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26,000 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고 했고, ‘지진 때, 동경에는 9,000 명의 조선인이 있었’지만, ‘800 명 전후가 살해 대상이 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조선인에 한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도 살해당한 것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사투리를 말하는 일본의 지방 출신자들도 잘못 살해되는 등, 당시의 혼란스런 사회정세를 엿볼수 있다. 그런 통계숫자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분열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의 진실』産經新聞出版、2010)고 말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지진 때에 조선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2 야마기시 시게루(山岸秀)는 지진 때, 조선인으로 오해받은 경험을 말한 일본인이‘‘아이우에오’를 말하라든가,‘교육칙어(教育勅語)를 암송하라’든가 ‘역대천황의 이름을 말하라’고 해서 힘들었습니다’라고 한 예를 들고 있다. 또한, 『전기(戦旗)』(壷井繁治 「一五円五〇銭」 戦旗者, 1928 년 9 월호) 에서‘쥬우고쥿센. 一五円五〇銭’의 발음을 들고 있다.(『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 와세다출판, 2002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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