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8

02 재벌간 혼맥구조는 '기득권 재생산의 통로'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기획] 재벌간 혼맥구조는 '기득권 재생산의 통로'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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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재벌간 혼맥구조는 '기득권 재생산의 통로'

2004년 02월
2004.0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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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참여사회연구소는 인하대 산업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한국의 재벌 : 기초자료 수집.분석 및 평가’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1987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신용평가정보가 발표한 30대 재벌기업(재벌 순위 변화에 의한 총 52개 재벌 포함)을 대상으로, 한국 재벌에 대한 DB를 구축해 그 결과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참여사회연구소 재벌연구팀은 최근, 한 언론사와 함께 ‘한국사회 지도층의 혼맥도’를 작성,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이번 ‘혼맥도’를 통해 드러난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아주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은 모든 사회의 최고의 가치였던 것 같다. 논어 리인(里仁)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와 귀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이지만, 정도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머물지 말지니라.” 참 멋스러운 말이다. 군자의 용모가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부의 무한축적이 하나의 구조처럼 자리잡은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경구는 왠지 지나치게 도덕적이어서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근자에 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사업 일환으로 ‘한국의 재벌’을 연구하는 (사)참여사회연구소 재벌연구팀은 인하대 산업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재벌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52개 재벌가의 친인척과 3000여 명의 정관계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국사회 지도층의 혼맥도’를 조사했다. 대중매체를 통해 발표한 이 ‘재벌의 혼맥도’가 제법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어느 나라든 상류계층간의 통혼은 일상적인 문화현상의 하나인데 그것이 무슨 중요한 성과라고 호들갑을 떠느냐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사생활침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또 표면적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이면에 은폐된 전통적 계급사회의 구조를 밝혀주는 쾌거라고 칭찬을 마지않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거의 모든 매체에서 제법 중요하게 다루고있지만 유독 조선.중앙.동아일보만은 함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대표적인 혼맥도에 그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기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겠다.

재벌연구팀에게 혼맥연구는 실질적으로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상이한 두 반응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연구팀의 주된 관심사도 아니다. 다만 수많은 연구주제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주제일 뿐이다. 혼맥도를 공개한 시점도 연구진행계획상 사전에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혼맥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방송매체가 기획하고 있던 신년 프로와 맞아떨어졌을 뿐,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님을 밝혀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구축해 온 인적 네트워크

이제 사설은 접어두고, 혼맥연구의 목표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시작해보자. 재벌연구팀의 연구목적은 한국재벌에 대한 수량화된 기초자료 수집을 제1목표로 하고 있다. 탄탄한 기초자료가 확보된 위에서 분석이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재생산될 수도, 축적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개별 연구자는 많아도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으는 데는 모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연구팀은 수량화된 자료를 최대한 정리하면서도, 수량화되지 않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들에 대한 정리도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즉, 재벌들이 역사적으로 구축해온 인적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그리고 재벌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혼맥연구다.

혼맥연구는 재벌.정계.관계.언론계의 사슬에서 가장 분명한 하나의 요소이다. 그 사슬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고, 확인 불가능한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혼맥으로 연결된 고리만큼은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부와 권력의 복잡한 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물증이 없는 자료들도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자료들은 너무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십거리는 될 수 있어도 연구대상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과거 정경유착이 한국경제의 큰 틀을 좌지우지하던 시기, 혼맥이 가지는 의미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주요 산업에 대한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밝혀진 선정 주체와 대상 사업자, 그리고 그 이면에 깔린 혼맥관계는 과거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재벌들의 성장과정, 사업확장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끝으로 오늘날 포괄적 의미에서의 권력계층이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오해가 제법 팽배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도 흥미롭다.

시대 흐름에 따른 정략결혼의 추이

지금까지 진행된 혼맥연구의 내용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혼맥의 특징에 대한 시기구분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분석결과 1960~1970년대에는 재계와 정계사이의 정략 결혼이 대세였으나 세대를 거칠수록 재벌끼리의 결혼이 늘어났고 특히 IMF 이후는 재벌 3세대간의 혼사가 증가하는 추세로 특히 9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변화가 뚜렷하게 포착된다.

또 연령별 혼인 상대는 20~30대는 정.관계 16%, 재계 60%, 40대는 정.관계 14%, 재계 37%, 50대는 정.관계 23%, 재계 29%, 60대는 정.관계 13%, 재계 26% 등으로 나타났다.

재벌가의 일원이 소위 지도층 아닌 사람과 결혼한 비율은 20~30대 13%, 40대 27%, 50대 33% 등으로 재벌가 일원과 보통사람과의 혼사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우선 한국사회에서 경제영역의 독자성이 문민정부 이후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물론 최근 대선불법자금의 천문학적 규모를 볼 때, 과거의 관행이 존속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감안해야겠지만, 90년대 재벌과 정.관계의 혼사는 적극적 의미보다는 소극적 의미가 더 크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즉, 혼맥관계를 통해 적극적으로 지대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방어적 함의가 더 크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포괄적 의미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들간의 통혼이라는 좀더 보편적인 형태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 재벌 지배력의 힘은 탄탄한 인맥구조

다음으로, 포괄적 의미에서의 권력층간의 통혼이 일반화되면서,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지배계층이 나름대로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흔히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성이 한국사회의 빠른 성장의 원동력이고 한다. 역동성 개념은 다의적이지만, 계층간 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지배계층의 고착화 현상은 한국사회의 역동성을 둔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IMF 이후의 계층간 소득불균형 심화는 한국사회의 통합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이 어느 정도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면, 기업지배구조개선문제는 단순한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제 전체적인 활력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들만의 혼인’이라는 다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문구가 일반인들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지만, 이제 그것은 엄연히 하나의 사회문화현상으로 일상화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 마샬(A. Marshall)은 오래 전에 기업의 생명력이 경영세습을 타파하고, 끊임없이 유능한 피고용자를 전문경영인으로 흡수하는데서 나온다고 설파했다.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났을 때, 과거의 전통이 더 이상 안전한 지침이 아닐 때, 그리고 과거의 직원들을 단결시켰던 결속이 해체되었을 때, 그 사이에 회사의 파트너로 등장한 새로운 사람들에게 사업 경영이 실질적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사업은 거의 필연적으로 박살이 날 것이다.” 이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끝으로, 혼맥연구 과정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한국의 3대 중앙일간지들이 모두 핵심재벌과 그리고 정계, 관계와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간단한 예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의 차녀와 결혼한 것에서부터 노신영 전 국무총리, 현대그룹,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LG그룹을 거쳐 결국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장남에게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또한 이한동 전 국무총리와 동아일보와도 혼사로 연결되어 결국 삼성을 중심으로 ‘조-중-동’ 주요언론3사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르게 조선일보도 태평양, 롯데(농심), 조양상선, 김치열 전 내무부 차관, 대전 피혁, 효성그룹을 거쳐 이명박 현 서울시장의 자녀에게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아주 놀랄만한 것이다. 재벌이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인 정계, 관계, 언론계를 전략적인 혼인관계로 연결하고, 그것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면, 오늘날 한국재벌의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독보적 특이성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백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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