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7

기사 - [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9: 이승만이 팔아버린 여성들

기사 - [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9: 이승만이 팔아버린 여성들

[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9: 이승만이 팔아버린 여성들

2019-03-0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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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UN군을 상대로 한 양공주들은 어떻게 됐을까? 분명한 건 전쟁 중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수일 내로 시내에다 연합군의 노고에 보답하는 연합군 위안소 5개소를 신, 구 마산에 설치하기로 되어 이의허가증을 이미 발부했다."

1950년 9월 부산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연합군의 노고에 보답하는’이라는 대목에 주목해 봐야 한다. 위안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성인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언론은(정부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주는 UN군과 미군을 위해서는 기꺼이 여자를 갖다 바쳐야 한다는 논리가 상식이 됐다(혹은, 그렇게 포장해야 했다).

이 논리대로라면, 양공주들은 애국자였다.






나라를 김일성에게 빼앗길 뻔 했는데, 연합군이 들어와 이를 막아줬다. 그리고 이 연합군이 잘 싸울 수 있도록 그들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양공주들은 전선에 나가 싸우는 병사들만큼이나 나라를 지키는데 일조한 애국자들이다. 게다가 이들은 외화획득의 첨병이자, 국가 핵심 수출상품 중 하나였다(빈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일반 성매매 여성에 대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50년 당시 성매매 여성의 수는 약 15만 명에 이를 것이란 주장이 있다. 이들 중 약 절반이 미군을 상대로 했다는주장이 이어진다. 최소한 7만 5천명 이상의 여성이다.



미군정 당시 남한에 주둔한 미군의 숫자는 77,600명이었다(최대로 주둔했던 당시).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숫자는 무의해 진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미군은 30만이 넘어서는 병력을 파병했고, 휴전 직후의 조사를보면 8개 사단 36만 명의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급한 불이 꺼지자 이승만 정부는 이 미군과 미군을 상대로 한 여성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승만 행정부의 후속조치는 임진왜란 직후의 선조의 그것과 똑같았다(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의 모습을 쫓아했던 이승만이었기에 이런 것도 쫓아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정숙한 일반 여성과 더러운 양갈보를 분리해 구획화 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양공주들을 관리 감독할 수 있다.”



관리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병 관리였겠지만, 이들은 다른 명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양공주들을 통해 더러운 퇴폐문화가 한국에 유포된다. 이를 막아야 한다.”



“양공주들 때문에 한민족의 순수혈통이 망가진다. 이들을 철저히 격리시켜야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선조와 양반 사대부들은 흐트러진 민심과 사회규범을 다잡기 위해 성리학을 교조화시켰다. 오늘날의 비뚤어진 가부장제와 유교문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친가에자식이 없다면, 외손에게 재산을 물려줘 제사를 지내게 했고(율곡 이이 선생도 재산을 물려받는 대가로 외가댁 제사를 지냈다), 아들딸 구분하지 않고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했던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로는 성리학을 ‘무기’로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미군은 필요했지만, 그 상황을 만든 자신들의 책임을 쏙 빼버렸다.마찬가지로 나라를 지키는 미군들의 노고를 위로해 주고, 그들의 달러는 필요로 하지만, 이를 위해 몸을 파는 성매매 여성들은 한민족의 순수혈통을 망치는 ‘화냥년’ 취급을 했다.



이 당시 이승만 행정부는 이들 성매매 여성들의 관리감독을 정책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이는 레토릭이아니라 사실이다.



휴전 직후인 1955년. 양공주의 숫자는 110,642명으로 파악 됐는데, 이들 중 미군을 상대로 한 여성들의 숫자는61,833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발표됐다(1956년 4월 29일 한국일보 기사를 발췌했다). 이들의 관리와 통제는 국가의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당장, ‘미군의 노고’에 보답해야 했고, 성병을 관리해야 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더 이상 연합군들의 노고에 보답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당시 한국은 미국에 의해 그 존재가 유지되던 나라였다. 당장 미국의 구호물자가 아니면, 경제 자체가 돌아가지 않았고(경제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할정도였다), 별다른 외화 획득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 양공주들은 한국이 내놓을 수 있고의 수출품이었다.



특히나 외화획득 부분은 눈여겨봐야 하는데, 전쟁이 끝난 지 10여년이 흐른 1966년의 통계를 살펴보면. 이 당시 한국이 수출을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가 약 2억 5천만 불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전국에 흩어져 있는 190개의UN군 전용 홀에서 나오는 외화만 연간 1천 만 불에 이르렀다. 이는 전용 홀에 한정된 이야기였고, 무허가나 기지촌여성들에게 음성적으로 건네지는 외화까지 합쳐지면 그 액수는 추정불가였다(추정이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움직이는 외화의 5%, 최소 5%이상은 기지촌 여성들이 번 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60년대 중반에도 이럴진대, 전쟁이 막 끝난 1950년대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매일경제 1970년 7월 11일자



이승만 정부는 위안부들이 필요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녀들이 벌어들이는 외화가 필요했을 뿐이지 나머지는필요하지 않았다. 나라를 구해 준 미군의 노고에 보답만 하면 될 일이고, 이들이 사회에 나오는 것은 막으려 했다.



이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이었다. 1957년 2월 28일부터 시행된 이 시행령의 핵심은 ‘강제적 성병관리’였다. 성병이 의심되는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검사를 받게 하는 게 이 시행령의 골자였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건강검진 대상자였다.



“위안부 또는 매음행위를 하는 자.”



국가 시행령에 명확하게 ‘위안부’라 표기 된 사람들. 바로 미군에게 몸을 파는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미군에게 몸을 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주일에 2회 강제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했고, 성병이 걸린 경우 감금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박정희 정부 시절 외화획득 수단의 유지와 미군과의 상호우호관계유지를 위해 위안부들에 대한 강제적인 성병검진과 감금치료는 더 혹독하게 시행됐다. 이때 박정희 정부가 내세웠던 명분이 바로 ‘국인’이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에게 ‘손님’을 빼앗기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했었고,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하고 나서는 판로개척을 위해 일본 ‘기생관광’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런 제도정비와 함께 위안부들의 ‘영업장소’를 한 군데로 모으기 시작했다. 일반인과의 격리, 그리고 관리의 용이성 때문이었다. 이 당시 이런 조치는 정부 주도하에서 이루어졌는데, 보건사회부 차관회의 석상에서 위안부들을 일정지역에 집결시켜 성병관리를 용이케 하고, 산아제한을 통해 한민족의 순수혈통을 어떻게 지켜낼 건가를 토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게 차관회의의 공식 의제였다(심지어 이 안건들은 제30차 차관회의에서 통과됐다).



그 결과 1957년에 43개소의 성병 진료소가 미군기지 근처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된다(전국적으로 89개소였으니,절반 가까이가 미군기지 근처에 만들어진 셈이다). 이와 동시에 서울에 10개, 인천에 12개, 부산에 2개 등 미군 전용시설이 설치된다.



공창제는 폐지됐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폐지였다. 한국 정부는 미군들을 위해 조직적으로 여성들을 관리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를 위해 싸워 준 미군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우리 정부의 작은 ‘성의’였다. 그들의 논리는 그랬다. 그 논리로, 이승만은 한국의 여성들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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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문화사, #성매매역사, #한국전쟁, #연합군, #연합군 위안부, #양공주,#이승만,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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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3: 세계대전 속 성매매와 일본군 '위안부'의 시작


2018-08-1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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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이 근대를 만들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의 힘을 확인한 전쟁이었다. 인류는 그때까지 이뤄놓았던 모든 산업역량과 잠재력을 쏟아부었다. 사상 최대의 병력, 사상 최대의 화력과 물자를 동원해 전투에 뛰어든 것이었다. 전투 한 번을 하기 위해 며칠 동안 사전포격하는 건 일상이었고, 백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는 건 예사였다.



사상자 숫자가 천만 단위를 우습게 넘어가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상’이었던 평범한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포로와 섹스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포로는 있었다. 전쟁이 있는 한 포로는 당연히 발생한다. 문제는 이전까지 전쟁과는 확연히 다른 ‘규모’였다. 전투 한 번에 몇 만의 포로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각국은 포로 관리에 골머리를 앓는다. 그 결과 한없이 ‘방목’에 가까운 관리가 이루어졌다.



독일에서는 장교 출신 포로들에 대해 ‘수용소로 다시 돌아올 것을 맹세한다.’란 서약서만 쓰면 주말 외출을 허용할 정도였다. 모든 국가는 이 정도 규모의 포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무런 ‘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고, 이는 전쟁 역사상 가장 ‘인도적인’ 포로 대우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볼 수 없는 인도주의였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칙’이 포로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를 학습시켜 준 거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서 ‘성매매’는 흔한 광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군인의 ‘단위’가 달랐다. 독일제국만 보아도 병력이 1천 3백 만을 훌쩍 넘었고, 최소 2백만 명 이상이 성병에 걸렸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은 뒤에 '제국성병박멸법(das Gesetzz ur Bek mpfung der Geschlechtskrankheiten)'을 만든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성병으로 인한 병력손실의 아픔을 알았던 거다.



독일 뿐 아니다. 참전국 중 성병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2년도 되지 않았던(19개월) 참전기간, 고작(?) 470만 명 내외를 파병한 미국이지만, 성병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미국 스스로 성병에 대한 대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매춘부와 섹스할 정도로 바보 같은 병사라면 성병에 걸리는 게 낫다.”



참전군인들에게 콘돔을 나누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미국사회위생협회에서 반대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미군은 가장 심각한 성병 피해를 입었고, 귀환한 병사들에 의해 미국 전역에 성병이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성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성병의 대규모 유입도 유입이었지만 ‘프랑스식 섹스’ 즉, ‘오럴섹스’가 전파되었다. 이 때까지 미국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금욕적이었다. 대부분이 ‘선교사 체위’만을 알고 있던 때 오럴섹스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무작위로 콘돔을 뿌려댔다. 당시 고무는 전략물자로 분류돼 사용이 제한됐지만, 군인에게 보급되는 콘돔만은 무제한이었다. 한 달 평균 5천만 개의 콘돔을 뿌렸다. 병사 1인당 한 달에 8개의 콘돔을 보급 받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아무리 콘돔을 뿌려도 성병을 100% 막지 못했다. 1943년 미군 사령부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4개 보병 사단에 대해 전수조사를 했는데, 전투에 의한 사상자 숫자보다 성병에 의한 사상자가 더 많았다. 미군 전체 병력의 5%가 성병에 걸렸던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은 실질적인 참전 없이(유럽에 파병하지 않았다) 전승국의 이득을 챙겼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쳤다. 1918년 시베리아를 침공했던 것이다. '10월혁명'으로 혼란스러웠던 러시아를 '볼셰비키 정권을 붕괴시킨다'는 명분을 대며 치고 올라갔다.



연합국 내에서도 시베리아 침공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애초 블라디보스토크까지만 진격하겠다고 약속했던 일본이지만, 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를 넘어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동부까지 밀고 올라갔다(최종적으로 바이칼호 서쪽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했다). 문제는 이 때부터였다. 일본군은 '대규모 파병을 했다'고 하지만, 7개 사단 수준이었다. 이 병력으로는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교통의 요지들을 ‘점’으로만 연결해 점령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이를 소련군과 파르티잔이 치고 들어왔다.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병력피해가 막심했다. 동원된 7개 사단 병력 중에서 사상자가 5천여 명이었다(별다른 큰 전투 없이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2천여 명이 성병에 감염돼 전투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비전투 손실로 보기에는 너무 컸다.



시베리아 침공으로 ‘성병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직후부터 일본군 ‘위안부’를 보낸다.





육군용 ‘군용콘돔’인 ‘돌격일번(突擊一番)’과 성병 예방 연고인 ‘성비고(星秘膏)’는 전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일본에게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만주사변 이전에 이미 ‘위안부’가 있었다.



시작은 홋카이도 개발이다. 아이누족의 땅이었다가 일본으로 편입된 홋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불모지였다. 남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앙행정부가 방치하다시피 버려놓은 땅을 메이지 유신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일본은 홋카이도 거주민의 병역까지 면제해주며 개발을 지원했는데, 미국의 서부개척과 비견할 만한 대장정이었다.토착민들을 쫓아내거나(강제이주) 착취하고 수탈했다. 문제는 토착민 뿐 아니라 이주민들도 힘들었다는 거다. 아이누족이 북극 문화권의 최남단 민족인 걸 생각한다면, 홋카이도가 어떤 땅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혹한의 날씨, 생활이 곧 목숨을 건 생존이었다. 벼농사도 거의 불가능했기에 늘 굶주렸다.



여기에 ‘위안부’가 투입됐다. 대상이 군인이 아니었을 뿐이다. 공식적인 첫 ‘위안부’는 일본군이 아닌 탄광 노동자를 대상으로 했다. 탄광 노동자들을 고용한 산업체가 장소를 제공하면, 포주가 섹스를 공급하고, 관공서나 경찰, 보건소 등이 행정적 편의를 봐주고 성병검사를 했다. 민과 관이 이것을 육성하고 보호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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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4: 팡팡걸에서 입욕보조자, 변종 매춘의 등장


2018-10-2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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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중에 <제로의 초점>(1959)이란 소설이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소설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이 어떤 느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수작이다. 기존의 추리소설이 어떻게 죽였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의 소설은 ‘왜’ 죽였는가를 쫓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 추적 속에서 사회의어두운 구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 <화차>로 잘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가 스스로를 ‘세이초의 장녀’라 부르며 그를 따르는 걸 보면 일본에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위상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제로의 초점>의 핵심주제는 여성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살인을 저지른 여성은 ‘팡팡걸’이었다. 팡팡걸의 어원은 영어나 프랑스어가 아니고 중국어다. 중국에서 매춘부를 '팡팡눌랑(伴伴女郞)'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팡팡'이 나왔고, 뒤에 영어 '걸(Girl)'이 붙었다.



“미군을 상대하는 여자”



라는 의미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과 뒤이은 미군의 일본 주둔 앞에서 일본인들은 패닉에 빠졌다. 민간인들 사이에 미군이 일본 여성들을 강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퍼졌고, 여자들은 남장을 하기 시작했지만, 곧 해프닝으로 끝났다. 미군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답게 ‘인권’에 대한 개념이 잡혀 있었다. 일본군과는 다른 군대였다.



당시 일본은 당장 먹을 게 없었다. 미군을 상대로 달러를 벌어야 했고 이 달러로 미군의 물자를 사야했다. 이 때 일본을 먹여 살린 게 팡팡걸이었다.



RAA(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 레크레이션 및 오락협회)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단체의 일본명은‘특수위안시설협회’였다. 내무성 관료가 입안했고, 대장성의 예산지원으로 조직된 이 단체의 목적은 미군을 상대로한 매춘이었다. 이 당시 일본 사회 분위기는 대단했다. 신문에 광고를 냈고, 이에 따라 모집된 이들은 황궁 앞에서,



“신일본을 세우는 초석이 되기 위해 멸사봉공의 자세로 일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문제는 이런 매춘은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달랐다는 점이다. 미국은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 생각이었다.이런 나라에서 ‘공창제’를 운영한다는 건 언어도단이었다. 결국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주도하에 1946년, ‘공창제’가 폐지된다.



(후술하겠지만, 한국과 일본에 주둔한 미군은 ‘성매매’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는데,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가 ‘성매매’, 그 중에서도 ‘성병관리’였다. 한반도 도착 사흘만인 1945년 9월 11일군 의무대를 개소한 뒤 곧바로 성병진료소를 개설했다. 그리곤 성병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도공창제를 폐지했지만, 자신들이 드나드는 성매매 업소는 공식적으로 관리했다. 다양한 업소를 가지고 있었고, 직접관리했다. 이들은 일본이 체계화 시킨 공창제와 성매매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했다)



공창제가 생긴지 4백년이 넘어가는 일본은 쉽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게 '적선지대(赤線地帶 :홍등가)'다. 말 그대로 일본 경찰들이 관할구역의 지도에 붉은 선을 그어 구역을 나눴다. 즉, 경찰이 비공식적으로집창촌을 인정한 거였다(일본 영화의 거장인 미조구치 겐지의 대표작 ‘수치의 거리’에 잘 나와 있다).





1953년 신주쿠 2쵸메의 적선지대



적선지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8년 4월 1일 매춘방지법이 통과되면서부터 공식적인 사창가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 일본에서 매매춘도 사라진 걸까? 아니다. 여기서 '터키탕'이 나온다. 공식적인 사창가가 사라짐에 따라새로운 형태의 , 즉 ‘변종’ 매매춘이 등장한 거다.



일본에 처음 '도루코(トルコ : 터키의 일본식 표기)탕'이 등장한 건 1951년 4월이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한참 일본경기가 살아나던 그때, 도쿄 히가시긴자(東銀座)에 '도쿄온천(東京溫泉, 도쿄온센)'이라는 대형 목욕탕이 생긴다. 사우나 시설에 대형 욕탕까지 구비한 신개념 목욕탕이었다. 세간의 화제였다. 석간 <내외타임스>에서 이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 기자(터키의 목욕 문화를 경험한 적이 있던 것 같다) 순수한 의도로 평가를 내렸는데, 여기까지는 건전했다.





'도쿄온천'이 성공하자 이듬해 후쿠오카에 ‘하카타온천 도루코'가 생겼다. 이 목욕탕은 이후 40여 년 간 두고두고 터키 외교부를 괴롭히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하카타온천은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했다. 그들이 내놓은 '새로움'이란 ‘입욕보조자’를 가리켰다. 목욕하는 걸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당시 선전 포스터를 보면 이들은 수영복을 입은 상태로 손님(미군)들의 목욕을 도와줬다. 이런 겉치레가 사라지는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욕보조자는 곧 일본 성매매 산업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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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5: 미군이 눈 감은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


2018-11-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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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8월 15일 식민지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변한 건 없었다. 얼마간의 혼란 뒤에 찾아온 건 과거의 답습이었다. 일본이 떠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섰고, 부역자들은 일본어 대신 영어를 쓴다는 것 빼고 달라진 게 없었다. 반민특위와 특경대가 노덕술의 군홧발에 짓밟혔다는 사실이 당시의 정국을 웅변했다.



세상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다면, 집창촌은 어떻게 됐을까? 역시나 달라진 건 없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장군의 지휘하에 미군들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들의 가장 시급한 주제는 ‘일본군 무장 해제’와 ‘소련군의 남하 저지’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문제였다. 국제 정치는 장군들이나 워싱턴 DC에 있는 정치인들이 고민하면 될 문제였다.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역시나 ‘성병’이었다.



미군정 시기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의 숫자는 공식적인 통계로만 77,600명이었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건 성욕 해소였다. 군 지휘부에서는 이들을 막을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다만,



“제발 성병에만 걸리지 마라.”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만 일어나지 않게 해라.”



라는 전제가 붙을 뿐이다. 35년간 일본 식민지로 살아오다 이제 막 해방된 나라에게 어떤 ‘발언권’이 있었을까? 미군 병사가 사고를 치더라도 어지간한 건 다 넘어갈 수 있었다. 1966년 조인된 주한 미군 지위 협정. 즉, SOFA 이전의 사건 사고들을 보면 미군을 막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하나, 미군들의 ‘호의’ 뿐이었다. SOFA가 체결된 이후에도 미군들에 대한 처벌은 쉽지 않았다.







‘집창촌’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사건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게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에서 벌어진 윤금이 사건이다.



당시 20살이었던 이병 케네스 리 마클 3세(2사단 1연대 의무병)는 윤금이를 잔인하게 살해했다(콜라병으로 가격하고 음부에 콜라병을, 항문에 우산을 쑤셔 넣었다). 이후 살해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세제를 뿌렸다.



마클 이병은 15년 형을 받았고(미군 당국이 윤금이 유가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는 이유였다), 잔여 형기를 1년여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된다. 한국 교도소에 수감됐던 마클 이병의 수형 태도는 꽤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형 생활은 꽤 괜찮았다. 스스로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는 배려를 받을 정도로 그는 나름 ‘대우’를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직후 SOFA 개정에 대한 반대 의사를 개진한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효순 미선이 사건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물론, 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지금은 주한미군이나 그 가족들의 사건에 대해서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이빨이 안 먹히더라도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미군 측에 항의를 할 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 그러나 SOFA 이전의 미군 범죄. 특히나, 주한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피해자인 범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쉬쉬하며 이들의 범죄를 은폐했었다고 보는 게 맞다. 당시 미군은 우리나라를 일본에게 해방시켜 줬고,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구해 준 천조국이었다. 아울러, 우리의 주요한 외화 획득 창구였다. 이런 미군을 함부로 대할 수 있었을까?







2.



수차에 걸쳐 강조했지만,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 성병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였다. 이후 참전한 전쟁에서 미군이 가장 신경 썼던 것이 ‘성병 예방’이었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11일. 한반도 도착 사흘 만에 미군정은 서울에 군 의무대(Office of corps surgeon)를 개소했고, 뒤이어 성병 진료소들이 문을 열었다. 이들은 군 의무대의 통제 아래 유곽 지역과 술집을 비롯한 ‘화류계’ 업소들을 면밀히 조사했고, 미군 의무장교들은 유곽을 찾아가 매주 성병 검사를 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당시 집창촌은 미군 출입 금지 지역이었다.



출입 금지 구역이었음에도 미군 의무대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군인이 있고, 그 옆에 집창촌이 있다. 그러면, 집창촌에 들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군 의무대들은 곧 있을 미군들의 ‘방문’과 뒤이은 ‘성병 감염’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당시 한국은 ‘섹스’에 있어서만은 나름의 시스템을 가진 나라였다. 일본이 지배하는 동안 공창제를 도입했고, 전쟁을 겪으면서 군인을 상대한 경험까지 더해졌기에 꽤 ‘체계적인’ 형태의 성매매가 가능한 나라였다. 시쳇말로 일본이 남긴 유산을 미군이 그대로 접수만 하면 됐다. 문제는 당시 한국의 ‘위생 수준’이었다. 당시 미군 의무대 표현을 빌리자면,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위생 수준”



이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병 위험 지대”



였다. 미군은 남한에 주둔한지 채 20일도 되지 않아 미군정령 제1호(Ordinance No.1) ‘위생국 설치에 관한 건’을 발표한다. 남한 주둔 미군의 ‘성병’을 관리하기 위한 첫발을 뗀 거다.



미군정령 1호로 설치된 위생국은 이후 복지 기능이 추가돼 ‘보건후생국’이 됐고, 1946년 3월이 되면 보건후생부로 확장된다. 이후 각 지역에 보건후생국이 설치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던 미군의 의료 체계는 1947년 5월, 보건후생부 산하에 ‘성병 통제과(Section)’를 설립하며 성병 진료 체계를 완성한다.



이렇게 대외적인 성병 예방에 힘쓰는 한편으로 미군 병사들의 단속에도 힘을 썼다. 부대 지휘관, 군목(軍牧), 헌병 사령관 및 의무부, 특별 업무 사단(special service division : 미군 병사들에게 오락이나 시설들을 제공한다) 등등이 모여 성병 예방을 위한 테스크포스 팀을 꾸리게 된다.



『성병 통제 위원회(VD Control Councils)』



이들은 매달 회의를 열고, 각 부대 단위로 성병 감염 추이를 확인했다. 더불어 병사들의 성욕을 억제하는 금욕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성병에 대한 교육 자료도 배포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뿐이었다. 성욕을 통제하는 건 어려웠다.



성병 통제 위원회의 가장 큰 ‘업적’은 ‘안전한 업소’를 지정하고 이를 알려주는 거였다. 가급적 성적인 접촉을 최소화하고 성병 걱정 없이 관계할 수 있도록 미군이 미리 업소들을 확인하고 지정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성병 걱정 없는 업소를 어떻게 확인했던 걸까? 1946년 3월 미군은 명월관, 국일관 등에서 일하는 서울시 내 4대 권번 기생들을 대상으로 채혈 검사를 했다. 성병 통제과(Section) 설립 이후에는 기생을 비롯해 창녀, 대선, 웨이트리스 등등 ‘성 접촉’이 예상되는 여성 접객원들에 대한 정기적인 검진과 건강증명서 발급을 ‘강요’했다.



문제는 성병 검사 후 병이 발견됐을 때 이 여성들이 어떻게 됐냐는 거다. 성병 통제과(Section)가 설립되자마자 미군들은 한국의 윤락 여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 1947년 5월부터 1948년 7월까지 약 14개월 동안 14,889명의 성매매 여성들(혹은 성매매가 의심되는 여성들)에 대한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놀라웠는데, 이들 중 60%가 성병에 감염된 걸로 확인됐다.



이 여성들은 어떻게 됐을까? 미군은 이 여성들을 '국립성병센터'로 보내거나 아예 교도소에 집어 넣어 치료를 시켰다. 어느 정도 증상이 호전돼 감옥에서 나오더라도 완치가 의심될 경우에는 추적 조사해서 강제적인 치료를 시행했다.







후술하겠지만, 1960~70년대 동두천에서 이름 모를 윤락 여성들이 ‘페니실린 쇼크’로 죽게 된 근간에는 이런 역사가 숨어 있다. 이때부터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이나 건강권에 대한 ‘권리’는 미군들에게 넘어가 있었던 상황이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미국이지만, 그 민주주의가 허리 아래까지 내려가지는 못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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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6: 공창제 폐지와 사창의 등장


2018-12-1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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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61년 인천 부평 미군기지 기지촌 풍경



일본 대신 한반도에 등장한 미군. 이미 일본에서는 공창제가 폐지됐고, 한국에서도 공창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미군은 일본군이 남겨놓은 ‘공창제’를 버리기 싫어했다(이에 대한 반응은 패전국 일본에서와의 것과 달랐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부녀자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를 법령으로 제정, 발표한다(법령 70호). 이와 함께 정치적인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부연설명’이 따라붙는다.



“부녀자의 인신매매만을 금지할 뿐 공창제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군정청 장관이었던 아서 러취(Archer L. Lerch)의 발언이었다. 미군은 공창제를 없앨 생각이 없었다.



법령 70호의 '매매의 금지와 매매계약의 금지'는 원치 않는 성매매를 하던 여성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성매매 여성은 늘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생계’였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기술도 없었던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 상황과 경제 문제도 한 몫 했다.



또 하나 '머릿수'를 채워야 했다. 집창촌은 그대로 있는데, 그 집창촌에 있던 여성들 중 상당수가 빠져나갔다. 패전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간 일본 여성들이었다. 그 빈자리를 한국 여성들이 채워야 했다.



이 시기 대대적인 권력 교체가 일어났다. 일본인 포주와 여성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한국인 포주와 여성들이 채웠고, 일본식으로 불리던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뀌었다. 익히 들어온 집창촌의 이름은 다 이 시기에 등장했다. 한 때동양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집창촌으로 유명했던 '완월동 집창촌'의 원래 이름은 '미도리마치(綠町)'였고, 대구'자갈마당'의 원래 이름은 '야에가키초(八重垣町)'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생각하던 때 성매매 여성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아이러니. 미군정이 미적거리면서 공창제 폐지를 뒤로 미루자(아예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성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인권을 말하는나라의 군대가 거꾸로 성매매를 조장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럴만 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무렵 각 신문 사설도 ‘공창제 폐지’를 외치고 있었다.



“일본은 공창제를 폐지했는데, 우리는 어째서 유지하고 있는가? 미군정은 우리를 차별하고 있는 건가?”



미국은 1947년 10월 ‘부녀자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에 ‘공창제 폐지’를 덧붙인다.



공창제 폐지됐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나 이를 단속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초반에는 꽤 의욕적이었다. 집창촌이 있는 지역의 유지나 독지가들이 ‘공창폐지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지원이 효과가 있었을까? 성매매 여성들은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성매매로 버는 돈은 일반적인 기술로 버는 돈에 비해 많았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또 성매매 산업에 관련된 수많은 이익 관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포주’들에게 공창제 폐지는 날벼락이었다.



그들은 즉시 행동에 나선다. 포주들은 '대석업자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정치적 발언을 하기 전의 수순을 그대로 밟았다),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공창제 폐지와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실시 일정이 너무 촉박하다.급박하게 정책을 시행하다 보면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나 관계 산업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이 전직(轉職)을 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시간을 달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원칙적으로 합의하지만, 업계종사자들을 위해, 산업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유예기간을 달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1940년대 중반에 나온 말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정도면 전가의 보도라고 말해야 할까?



대외적인 입장을 정리한 성매매 업계는 또 다른 ‘전통적인 방법’도 실행했다. '로비'였다.



입법위원과 고위관리들에게 개인적으로 건네는 뇌물은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심각한 문제는 ‘조직적인' 모금과뇌물 지급이었다. 당시 포주들은 공창제 폐지를 유예시키거나 무효화시키기 위해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성매매 여성에게 1인 당 2천 원 씩 거뒀던 거다. 이렇게 700만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뒤 로비자금으로사용했다.



(1940년대의 쌀값 평균을 보면 '1인 당 2천 원'이 어떤 액수인지 이해가 될 거다. 당시 쌀 한 가마(80kg)가 22.68원이었고, 1945년 8월에 비해 물가가 30배 이상 폭등한 1946년의 공무원 평균 월급은 425원이었다. 따라서 2천 원이란 꽤 큰 돈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로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공창제는 폐지되었다.



이후 한국은 성매매 없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됐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야겠는데... 적어도 ‘성매매’에 한해서는 더 나빠졌다.



최초 ‘공창제 폐지’의 핵심 명분은,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

“성매매의 근절”



이었지만, 변하기는커녕 상황은 더 꼬였다.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문제였다.



“가정 파괴자.” “조선여성의 수치.”



낙인 찍힌 여성들이 사회에 정착할 수 있을까? 물론 이를 극복하고 사회에 정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를 위해선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해방 직후의 혼란한 사회에서 그들이 홀로 생계를 유지할 만한 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인천 1946년



성매매 여성들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공창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이들은 여관이나 카페, 바 등에 취직해 밀매춘을 했다. 공창제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특정한 장소에서 성매매가 이루어졌으나, 공창제가 폐지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진 것이다. 단속은 물론 관리에도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은 결국 이들에게 성병 검진과 함께 허가증을 발부하는 형태로 ‘사창’을 인정했다.



사창의 등장은 영업 형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창은 기본적으로 밀매음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선전방식이 필요했는데, 이 때 택한 게 인력거꾼이었다. 인력거꾼이 거나하게 취한 이들이나 성매매하길 원하는 이를 모셔가는거였다(인력거꾼들은 사창가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렇게 사창은 독버섯처럼 일상으로 파고들었고, 어느새 공창의 규모를 넘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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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7: 한국 전쟁이 바꾼 성매매의 역사


2019-01-0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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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동두천의 기지촌 풍경. 구와바라 시세이(눈빛 아카이브) 제공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은 어떤 식으로 성매매를 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성매매’ 하나만 놓고 봤을 때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은 축복받은 존재였다. 이미 일본이 길을 닦아 놓은 상태에서 미군은 달리기만 하면 됐다. 이들은 번거롭게 현지인들을 섭외하고, 흥정하고, 성매매 장소를 물색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게 갖춰진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찾아가는 서비스’까지 연결됐다.



당시 미군의 성매매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최초 한국에 주둔한 ‘부평’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21세기 현재 미군이 주둔한 지역과 한국군이 주둔한 주둔지 중 상당수는 일본군이 식민지 시절 건설한 곳이 많다. 군사적 요충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거의 다 엇비슷하고, 이미 만들어진 기반 시설에 그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미군도, 한국군도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군사 시설을 활용했다(우리나라 공군 기지, 해군 기지 중 태반이 이런 식이다).



일본군이 빠져나간 뒤(이때까지 일본군이 완전히 빠져나간 건 아니다. 한동안 일본군과 미군이 같은 기지에서 생활했던 경우도 많았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건 미군이었다. 부평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인천은 항구 도시다. 항구란 곧 대규모 물자 하역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자연스럽게 대규모 창고가 건설될 수밖에 없는 입지 조건이다. 그 결과 일제 시대 때 부평에 대규모 창고가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미군의 병참 기지가 주둔하게 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군대에 가장 중요한 건 보급이다. 먹고, 입고, 싸우기 위해서는 보급이 보장되어야 한다.



미군은 기본에 충실했다. 한반도에 발을 내딛자마자 부평에 보급 기지를 건설한 거다. 약 4천여 명의 미군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했는데, 이들은 남한 전역의 미군에 대한 병참, 보급, 수송 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곧 여성들이 몰렸다. 1,000여 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미군 부대 앞으로 몰려 들었고, 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기 시작했다. 기지촌의 시작이다. 이런 움직임은 부평만의 모습은 아니었다. 외국 군대 주둔지의 성지였던 용산(몽골군, 일본군, 명나라군, 미군 등등)에도 기지촌이 생겼고, 군산 비행장(K-8)부터 시작해 미군이 주둔한 곳은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기지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미군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병사들이 갈 곳이 정해져 있으니 군대를 통제하기에도, 여성들을 관리하기에도 용이했다. 미군은 성매매 여성들을 통제했고, 이들의 성병 검사를 강제했다. 여성들도 일제 시대를 겪었기에 정부의 통제와 성병 검사에 별다른 반감이 없었다.



1945년 후반부터 미군은 미국 병사들에게 ‘출입 허가 구역 on limits’에 대한 정리와 병사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미군 지휘부들은 병사들의 통제와 성병 예방 차원에서 좁은 구역의 기지촌과 몇몇 미군 전용 클럽을 인정하고 이곳을 관리한다는 정책 방향을 결정했다. 이는 헌병들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서울 시내 전역, 혹은 부대 인근 도시 전체를 순찰하는 것보다는 몇몇 출입 가능 지역만 관리하면 되는 거였다. 미군 병사들은 이때부터 출입 허가 구역을 방문해 자신들의 성욕을 배출했다. 미군 지휘관들, 헌병들, 군의관들, 병사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는 공창제가 폐지됐음에도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군의 다양한 성매매를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군은 부대 주변 기지촌은 물론, 부대 안의 클럽 하우스에서도 여자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 당시 미군은 다양한 형태의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형태를 보면,



첫째, 미군이 군부대 안에서 직접 운영하는 장교클럽, 사병클럽



둘째, 부대 주변의 기지촌. 관리 주체는 한국인 민간업자였고, 이들을 군의관과 헌병들이 나서서 성병 검사 및 행정지도를 받았다



셋째, 부대 근처에 한국인 민간 업자가 만든 미군 병사 전용 클럽



넷째, 이런 클럽 형태가 아닌 댄스홀, 카바레, 바, 카페 등등 성매매가 가능한 업장



불과 1~2년 사이에 미군은 다양한 형태의 성매매를 즐길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제 시대 공창제와 군 위안부를 운영했던 일본군의 경험을 그대로 이식받았고, 한국인들의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당시 미군이 주둔한 지역이 일본군이 주둔했던 지역과 겹치면서 이미 있었던 ‘시설’들을 재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애교’였다.





기지촌 내 두 연인, 서울 북부(1965). 그린비 제공



우리나라에서 ‘양공주’란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됐고, 이게 공식 문서에 등장한 게 언제일까? 지금은 많이 쓰지 않는 말이지만,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양공주’란 말은 미군을 상대로 성을 파는 여성들의 대명사로 치부되던 단어였다(‘위안부’, ‘UN마담’, ‘양색시’, ‘양갈보’란 단어들이 병용됐는데, 결국 양공주란 말이 대세가 된다). 이 ‘양공주’란 단어가 언제부터 대중화됐을까? 다들 예상했겠지만 바로 6.25 한국 전쟁 때부터였다.



한반도의 성매매 역사는 한국 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레토릭이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 거다.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고 반문할 거 같은데, 되묻고 싶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성매매가 없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집에서 나와 5분 거리 안에 성매매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성매매 자체가 불법인 나라에서 이렇게 손쉽게 성매매를 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성매매의 업태도 다종다양하다. 안마방, 오피방, 여관바리, 룸살롱, 풀살롱, 다방레지, 대딸방 등등 언뜻 떠오른 종류만 해도 한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다. 전통적 개념의 ‘성매매’를 제외하고도 새로운 형태의 성매매 산업은 계속해 등장했고, 성장일로로 뻗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더 음란한 건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도덕성이 더 낮은 걸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에 대해 더 개방적인 걸까?”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해답이 돼 줄 순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성매매란 개념이 전국으로 확산된 시초는 알고 있다.”



바로 한국 전쟁이다. 한국 전쟁은 우리나라 성매매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에 촉매제가 돼 주었다. 언뜻 이해가 안 가겠지만, 한국 전쟁은 우리의 성매매 역사를 획기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크게 두 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사회의 붕괴.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김수영의 시다. 이 시는 김수영이 그의 아내 김현경에 관해 쓴 시인데, 그 배경을 알고 나면 시 자체가 다시 보일지도 모른다.







김수영과 김현경이 결혼한 건 1950년이다. 당시 김수영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문단의 샛별이었고, 김현경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던 재원이었다. 당시 김현경이 그 포지션(문단에서 아이돌 대우를 받았다)을 유지했다면, 여러 문인들의 뮤즈가 됐던가 살롱의 마담이 되어 많은 예술가들을 거느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현경은 김수영을 택했고, 이들은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터진 얼마 뒤 김수영은 인민군으로 강제 차출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수영이 의용군을 탈출했다는 정도?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군에게 다시 체포된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건 1952년 12월이 돼서였다.



그사이 김현경은 어떻게 지냈을까? 그녀는 김수영의 선배 이종구와 살림을 차렸다. 김수영의 생사를 몰랐던 김현경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당시 멀쩡한 남자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기에 생계를 유지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나온 김수영은 김현경과 이종구가 살림을 차린 걸 확인하고, 이들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말한다. 내게로 돌아오라고... 김현경은 이를 거부한다(2년 뒤 다시 김수영에게 돌아간다).



김수영과 김현경의 관계는 문학적으로 ‘잘’ 포장된 『전쟁의 비극』이었다.



(김수영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심지어 어린 아들이 지켜보는데 김현경을 우산으로 두들겨 팼던 적이 있다. 이때의 심정을 ‘죄와 벌’이란 시로 토로했던 적이 있다. 그들은 같이 살았지만, 이미 부부의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쟁은 모든 걸 뒤바꿔 놓았다. 도덕이나 윤리, 상식 같은 건 사라진 상황. 살기 위해서는 짐승이 돼야 했고, 사회적 가치나 규범에 앞서 ‘생존’이 우선시 되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이런 사연 하나 없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 생존의 옆에는 ‘원초적 욕망’이란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사회 규범, 법, 도덕이 무너진 자리에 욕망이 채워졌다. 세계가 붕괴되면서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됐다.



둘째, 시스템의 전파.



이전까지는 대도시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집창촌과 윤락 여성들이 전쟁통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아니, 퍼져 나갔다기보다는 한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새로운 문물을 쉽게 접하게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넘쳐났다. 작은 공터만 있으면, 천막을 치고 깡통을 엮어 양철 지붕을 만들었다. 부산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피난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게 반복됐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욕망은 더 거세게 불타올랐고, 시스템을 처음 접한 이들은 기꺼이 성매매에 돈을 썼다.



당시 부산의 주요 간선도로에는 성매매 여성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당시 가장 확실한 ‘소비자’였던 미군과 UN군들에게 몸을 팔았고, 한국 남성들도 이에 질세라 여자들을 끌어안았다. 어느새 부산은 성매매의 천국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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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18: 한국전쟁 위안부


2019-02-11 14:38
어깨걸이극락조추천19 비추천0












전쟁이란 극한상황에서 기존의 가치관은 붕괴됐다. 생존에 내몰려 몸을 팔아야 하는 여성들이 폭증했다.



대도시에 한정됐던 ‘성매매 시스템’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되었다. 6.25 전쟁 기간 동안 부산, 마산, 대구, 포항 등에집창촌이 새로 생기거나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피난행렬에 밀려 낙동강 전선 이남으로 밀려났던 피난민들이임시 정착지에서 ‘성매매 시스템’을 알게된 거다.



여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정부’였다.



우리는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를 말하며, 그들을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이들로 규탄한다. 맞는 말이다. 일본군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욕할 만큼 결백할까?



명백히 말하지만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논리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게 아니다. 우리 역시 여성의 성을 팔았다는 걸 말하려는 거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말이다. (심지어 전쟁이 끝나자 그들에게 주홍글씨를 붙이고 돌팔매질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동원된 위안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군을 상대로 조직된 위안부고, 나머지 하나는 미군을포함한 UN군을 상대로 한 위안부.



첫째, 국군을 상대로 한 위안부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했다.”

-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중 발췌



“사단 휼병부대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려 여자 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 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 침실에 수용되었다고하며 다른 중대 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하였다고 하였다.”

- 차규헌 장군의 회고록 『전투』 중 발췌







6.25 당시 우리 군이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두 장군의 증언 말고도 수많은 전쟁 참여 인원들이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 여성들이 어디서 왔는가 의문이 생긴다. 이들이 정부나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구성돼 보내진 것이라면 이야기가달라진다. '우리나라가 국군을 위해 위안부를 조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여성들의 기록이 위안부에 대한 기록으로 와전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그런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고).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은 조직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했고, 운영했다.



1956년 정부자료에 의하면 한국군이 서울과 강릉 등 4군데에 위안소를 설치/운영했다. 위안소 운영기록은 상당히구체적인데, 확인된 위안부의 숫자만 79명이었고, 1952년 한 해 위안소를 방문한 국군의 수만 20만 4,560명이었다.성병검진과 치료에는 군의관이 개입했었는데, 이는 위안소에 군이 깊숙하게 관여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미군과 UN군을 상대로 한 위안부



미군정 체제 하에서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채 8만이 되지 않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폭증했다. 1951년 한국전에투입된 외국군(UN군)의 숫자는 20만 명을 넘어섰고, 1953년엔 32만 5천명으로 늘어난다.



한국 정부는 외국군을 위해, 특정 장소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등록제를 실시했다. 1950년 여름에 부산 위안소를 설치했고, 뒤이어 마산에 연합군 위안소 5개를 설치했다. 위안소는 전선이 고착화되며 폭증하기 시작한다. 1951년엔부산에만 74개소의 위안소가 설치됐으며, 1952년엔 UN군 위안소 78개가 설치됐다. 외국군을 상대로 한 비공식 업소는 6~700개에 달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적극적으로 위안소 마련에 나섰다. (후술하겠지만 UN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는 한국 정부의 주요 외화 획득 수단이었다) 당연히 법적, 제도적 지원이 뒤따랐다.



1951년 10월 10일에 통과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청 추가지시에 관한 건』(보건부 방역국 예규 제1726호)엔 ‘위안소’와 ‘위안부’란 말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예규에 따르면, 위안소는 UN군 주둔 지구에 외국군이이용할 수 있는 지역에 한해 설치되었고, 한국인은 출입이 금지되며 오로지 연합군만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명시돼 있다. ‘성병검진’의 절차와 결과 역시 외국 헌병대에 보고(연락)해야 할 사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직형태와 운영방식이 일본군 ‘위안부’와 거의 비슷했다.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여러 행정 조치가 있었지만, 일단 정부 자체가 뒤로 물러서 있는 모습. 국가의 필요는 있지만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모습.



...그 뒤의 행보도 비슷했다. 일본에 팡팡걸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양공주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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