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7

[새책]도올 김용옥 “여순사건 아닌 ‘여순민중항쟁’”… 극우반공체제의 기원 - 민중의소리



[새책]도올 김용옥 “여순사건 아닌 ‘여순민중항쟁’”… 극우반공체제의 기원 - 민중의소리




[새책]도올 김용옥 “여순사건 아닌 ‘여순민중항쟁’”… 극우반공체제의 기원

도올 김용옥의 ‘우린 너무 몰랐다-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발행 2019-02-13 00:00:22
수정 2019-02-13 00: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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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지난 8일 국회에선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김진태, 이종명) 주최로 ‘극우 논객’ 지만원을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극우세력들의 왜곡된 주장이 국회에서 펼쳐지면서 사회적 논란이 커졌다. 이날 공청회엔 이른바 ‘태극기부대’를 주축으로 한 극우단체 회원들이 함께했고, 극우세력들의 왜곡된 주장에 5월단체 회원들이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에서 수구단체 회원들은 항의하는 5월단체 회원들을 향해 “빨갱이 아니냐”, “간첩이다”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날 간담회에서 지만원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영웅”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어떻게 이들은 국회에까지 당당히 들어가 학살의 피해를 입은 광주시민과 그 가족을 향해 “빨갱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일까? 이들을 국회로 불러들인 ‘자유한국당’, 그리고 자유한국당이 국정농단과 헌정질서 파괴를 비롯한 각종 악행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바탕이 된 ‘분단체제’가 한몫했다. ‘분단체제’는 옳은 것을 옳다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옳지 않은 것이 힘을 얻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 힘을 지금껏 누리며 살아가게 만들었다. 최근 출간된 도올 김용옥의 ‘우린 너무 몰랐다’는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일어난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을 통해 흔히 우리가 ‘1948년 체제’라 부르는 ‘분단체제’의 기원, ‘태극기부대가 준동하는 우익친미기독교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강고한 우익 반공체제의 수립 과정을 마치 현장에서 강연을 하듯 생생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극우세력들이 정치적 반대세력, 혹은 진보세력을 향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빨갱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였다. ‘좌파’, ‘공산당’, ‘인민’ 등의 단어에 주홍글씨가 입혀진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제주4・3과 여순사건이 자리 잡고 있이다. 도올 김용옥은 두 사건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에 벌여졌던 최대의 비극이면서, 반공체제의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으로 꼽았다. 제주4・3사건은 특별법이 만들어져 진압과정에서 무리한 국가폭력이 인정되었고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기념일 제정까지 이루어졌하지만 여순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조치도 없다. 이 책은 재평가 작업을 통해 항쟁으로 인정받고 있는 제주4.3과 함께 여순사건을 ‘반란’ 혹은 ‘항명’, 가치중립적인 ‘사건’이라는 명명을 벗어나 ‘민중항쟁’으로 평가받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여순민중항쟁’이라는 명명은 ‘여순민중항쟁’을 ‘반란’으로 낙인찍으며 시작된 분단체제를 끝내는 시작이기도 하다.

여순민중항쟁 당시 토벌군과 봉기군ⓒ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 책은 제주와 여순사건의 근본적 배경인 해방이후의 정국을 남북한 전체를 포괄하여 이해시킨다. 그걸 위해 먼저 당시의 국제정세, 냉전질서의 주축인 미국과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을 이해해야만 한다. 결국 남북한의 역사는 미・소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분단으로 치달았지만, 강대국의 이해충돌 속에서도 현명한 대응으로 민족의 분열을 막고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이 상당했기에 도올 김용옥은 좌・우익 진영의 편가르기에 치우치지 않는 현실감각을 지닌 여운형,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못내 아쉬워한다. “자생적으로 발전한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연계되어 있었고, 여운형이라는 인물의 애국심, 사상적 포용성, 사심 없는 헌신, 기민한 대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일시에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방정부조직으로 승격되고, 보다 조직적으로 세련화된다. 바로 이 시점이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출발점이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한국을 통치했던 시기가 미 군정기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미 군정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다. 미군정은 국제전략에 따른 미국의 국익추구로 일관했고, 한국에 대해 철저한 무지한 상태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이 갖는 무지는 정황을 잘 파악하는 악의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단순히 점령지를 편리하게 통치하겠다는 발상은, 한국인 스스로 자치능력을 발휘한 건국준비위원회와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부정하면서 기존의 친일파 중심 질서를 온존시키도록 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는 단순히 추상적인 대의명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제통치의 치밀한 관리조차 사라진 해방 이후의 행정은 무질서와 부패, 모리배의 농간으로 민생의 파탄을 가져왔다. 미군정은 이에 따른 혼란을 바르게 해결하지 못했으며, 결국 좌익의 탓으로 돌리며 탄압하는 방식으로 처리되면서 민족의 분열과 갈등만 조장하고 말았다. 이러한 흐름의 참혹한 귀결이 제주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이라고 도올 김용옥은 강조한다. 두 사건이 없었다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 역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을 죽임). 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 경찰병력이 확대되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을 대거 정규경찰화 시켰다. 그리고 국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유숙계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를 구축하는 계기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감만 키웠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우리는 너무 조용했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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