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0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13)하층민 희생 강요한 농노제와 종교권력이 서구 중세의 ‘출발점’ - 경향신문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13)하층민 희생 강요한 농노제와 종교권력이 서구 중세의 ‘출발점’ - 경향신문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13)하층민 희생 강요한 농노제와 종교권력이 서구 중세의 ‘출발점’

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입력 : 2019.05.07

중세 정주세계를 되묻다



통치권과 종교권 융합의 상징인 이스탄불 하기야 소피아. 당대의 자랑거리였고 오늘날 이스탄불의 상징인 건물이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비용은 모두 하층 생산자계층에서 나왔다.


5월이 시작된 지금, 러시아 측 알타이에는 여전히 계절이 뒤섞여 있다. 남향의 너덜에는 거뭇거뭇한 돌이끼를 배경으로 진달래가 붉게 파도치고, 비탈 아래 평지에는 아지랑이가 넘실거린다. 계곡 가까이에는 하얀 자작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번갈아 가며 언덕을 꾸미고, 버드나무 숲 사이 강줄기로 고원에서 내려온 얼음덩이들이 이리저리 부대끼며 흘러간다.


좀 더 남쪽으로 몽골 국경 가까이에 이르면 알타이는 마치 티베트고원 같은 고산 평원으로 변한다. 넓은 품 안에 물줄기를 안고 있기에, 이곳은 최소한 4000년 전부터 유목민들의 황금 목장이자 이동로였다. 타샨타 초원에는 수백개의 자그마한 쿠르간(돌무지무덤)들이 평원에 흩어져 이정표와 경계 역할을 한다. 돌무지는 원래 높지 않은 데다 세월에 눌려 어떤 곳은 길이, 어떤 곳은 목동의 놀이터가, 어떤 곳은 심지어 쓰레기장이 되었다. 여전히 돌무지 아래 누워 있을 그 누군가에게 물어본다. ‘당신의 무덤 위에 길이 난 것을 아시오? 바람이 길을 흔드는 소리를 듣고 있소?’


3000년의 시간 동안 흙과 함께하여 이제 바람 자체가 되었을 이가 일어나 내게 대답해줄 리는 없다. 스산한 국경의 여관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상념과 악몽에 뒤척이다, 아침 일찍 다시 그 흙무덤으로 다가가 못한 말을 다시 전해주었다.


‘편안히 주무시오. 여전히 양과 소가 지나고 있다오. 그대들이 만든 표지를 따라 길이 나고 엔진을 단 수레들이 움직이고 있다오.’


■ 중세를 돌아보다


이 이야기(연재)는 벌써 중반에 달해, 역사학자들이 중세라 부르는 시절에 닿았다. 앞으로 우리는 돌궐이라는 부족이 선대의 흉노도 이루지 못한 거대한 동서의 유목벨트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볼 것이고, 멀리 남방 티베트고원에서 불꽃처럼 일어났다 물러난 티베트(토번)인들의 활약을 볼 것이고, 급기야 세계제국 몽골이 서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역사인류학과 정치사 위주의 기존의 역사학이 인간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정치사는 위에서 인간을 내려다보지만, 역사인류학은 아래에서 올려다본다. 무력을 행사하고 기록을 주도하는 단위인 국가는 탄생 이후 끝없이 스스로를 강화했으므로 역사인류학도 그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인류학은 인류의 여정이라는 초거시적 맥락에 서되 당대 대다수 인민의 삶이라는 미시적 기준으로 역사를 재평가한다. 그러므로 영웅의 이야기를 하되 찬가를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백 보 밖에서 화살로 적의 목을 꿰뚫은 영웅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대신, 그때 북방에서 양을 키우던 이들과 남방에서 곡식을 기르던 당대 인민들에게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고민한다. 이제 대략 5세기에서 1000년 동안 이어진 서방의 중세를 편의적인 기준으로 삼아, 정주세계의 중세를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중세를 화두로 두면, 눈앞에 복잡한 세력이 키를 두고 경합하는 사이 어느새 어두운 대양으로 내밀린 거대한 배가 떠오른다. 당대인들은 파도를 헤치고 그 세계를 지금까지 끌고 왔지만, 기록들을 검토할수록 정주세계의 중심에 살던 이들이 조상들보다 그리 행복한 삶을 산 듯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도 지식은 축적되었고 사회를 구성하는 몇몇 측면은 분명 발달했다. 하지만 1000년 이상 이어진 이 시간 동안 인간 사회는 기술적으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고, 이 근본적인 생산력 제약하에서 어떤 부분의 발달은 다른 부분을 희생시켰다. 확실히 돌출해서 발달된 부분은 중앙집권적 통치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사회의 근간인 생산자와 하층민을 다루는 데만 유독 특화되어, 끊임없이 그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 결과 서방에서는 마침내 ‘농노(農奴)’가 출현함으로서 강고한 중세가 성립한다. 처음부터 우리가 강조했듯이, 문명의 마지막 척도로서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농노의 삶은 문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때까지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류는 언어에 기반을 둔 기술을 통해 생물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토기를 만들면서 저장하거나 조리할 수 있었고, 관개기술과 야금술을 통해 농업 생산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문자를 도입해서 지식을 다른 시공간으로 전달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유목민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우마와 수레를 활용하여 인간의 활동 범위를 깊숙한 초원까지 넓혔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은 중세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꽃피었다. 중세에도 분명 기술과 생산력은 진보했지만 이를 상쇄하고 남을 파괴가 항상 뒤따랐다. 제국을 단위로 보아 외적인 파괴는 전쟁이었고 내적인 파괴는 상층부의 음모와 내전과 하층민 약탈이었다.


파이의 크기가 변하지 않으면 남이 사라져야 내 몫이 커지는 것이 상식이다. 이 경쟁에서 사라져야 할 이들은 물론 통치권과 거리가 먼 하층민들이다. 5000년 전 수메르의 지배자들은 문명과 통치권의 관계를 이미 깊이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크레머 교수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들이 문명의 지표로 제시한 첫 번째가 ‘통치권’이요, 그다음이 ‘고귀하고 영구한 왕권’이며, ‘왕좌’ ‘고귀한 홀’ ‘왕족의 기장’ 등이 이어진다. 간단히 통치권인 셈이다. 그다음 범주는 국가의 수호신들과 그의 신전을 관리할 사제들이다. 다시 말해 신권이다. 그 뒤를 전투 규범, 법, 예술, 도시, 건축기술 등이 따른다.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잡은 이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 중세가 도래할 무렵 로마인들도 이 예언서 같은 점토판의 명령을 대략 이행하고 있었다.



최소 4000년 전부터 유목민들의 황금 목장이자 이동로였던 러시아 알타이의 타샨타 초원. 쿠르간 위로 길이 났다.

■ 군국주의, 농노화, 그리고 종교


공화정 시기 로마는 정복전을 통해 벌인 살인의 대가로 계속 부유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원정에서 금광을 발견한 것이 수지 맞는 원정의 끝이었고, 정복이 대략 완성된 직후부터 방대해진 국경선을 지키는 데 제국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이웃들은 로마와 싸우면서 로마가 가진 군사기술적인 우위를 모두 흡수했다. 3세기에 이르러서도 카이사르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휘저을 때 썼던 장비와 전술을 갖추지 못한 이웃은 없었다. 로마가 제정으로 돌입한 근본적인 이유는 제국의 국경이 확장되고, 로마가 두드려 놓은 철이 칼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방의 적과 싸울 때 사회는 군사령관 황제를 원한다.


연속된 싸움은 인간의 품성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외적을 앞에 둔 제국 내부의 적이 생길 경우, 야비하게도 통치자들은 적이 충분히 제압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무자비해졌다. 5현제 중 하나라 불리는 하드리아누스도 그런 이였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로마 군단을 제압하고 독립을 내세우자, 하드리아누스가 파견한 세베루스는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킨 후 50만명을 죽였다 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135년 반란이 진압될 당시 팔레스타인은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황제권의 세습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군인들이 황제를 뽑았기에 황제는 수없이 바뀌었지만 군국주의와 전제정을 향한 추세는 변함이 없었다. 끝없는 전쟁과 내전과 동서의 분열 상황에서 이기적인 귀족들이 주도하는 공화정은 작동하지 못했다.


군국주의와 전제정에 돌입한 로마
엄청난 군비를 감당 못한 기층민은
하인이 되거나 토지를 버리고 유랑
소작농의 이동을 제한하는 조치로
농노제 탄생해 1000년 넘게 지속


이렇게 통치권이 일부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동안 중간층은 파괴되고 하층민은 대지주의 하인이 되거나 유랑했다. 엄청난 제국의 군비를 감당하지 못한 기층민은 직업과 토지를 버리기까지 했지만, 공화정 시기 이기주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귀족들은 그사이 대저택과 대농장을 꾸준히 늘렸다. 마침내 32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도망자를 막기 위해 소작농의 이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땅에 묶인 계급, 즉 농노가 탄생했으니, 인민(상층민)에 의한 인민(하층민)의 지배체제가 만들어진 셈이다. 농노제는 여러 부침을 겪었지만 대체로 강고해져서 중세의 대표적인 제도로서 1000년 이상 유럽 각지를 장악했다.


기독교는 황제들의 견제 받았지만
여성과 하층민 포용하며 계속 성장
정치권력은 종교의 수호자로 돌변
성당은 제국의 구심점 역할 했지만
위안을 얻기 위한 비용은 불평등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사회의 군국주의화와 함께 등장한 종교권력이다.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경전에 근거한 일신교 사상에 근거하여 순교도 불사함으로써 황제들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지만, 탄압을 받을수록 오히려 강력한 형제애에 기반한 교회조직을 강화하고, 여성과 하층민을 포용함으로서 계속 커졌다. 그러자 정치권력은 박해의 정점에서 돌연 태도를 바꿔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임한다. 이번에도 영민하게 움직인 이는 농노제의 시작을 알린 콘스탄티누스였다. 동방으로 옮긴 로마의 황궁이 커질수록 교회당도 따라 커졌다. 6세기 초 유스티니아누스 시절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중건할 때 일설에는 금 32만파운드를 썼다고 한다. 실제 비용이 설사 3만2000파운드라 하더라도 적어도 웬만한 전쟁 배상금 10년치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그렇게 만든 성당은 분명 제국의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여전히 생산을 위한 공장은 아니었고, 부담은 하층민에게 돌아갔다. 종교는 모든 이에게 위안이었지만, 문제는 위안을 얻기 위한 비용이 골고루 부과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자 그리스도의 본성을 논점으로 이단 논쟁이 벌어졌고, 교단끼리의 주도권 쟁탈전은 황궁의 암투 못지않게 잔인했다. 한때 그악스레 기독교를 탄압했던 정권은 이제 승리한 종단과 함께 이단이나 이교도 탄압에 나선다. 중세를 피로 물들였던 마녀사냥의 뿌리도 이렇게 깊었던 셈이다. 한참 동안 왕권과 신권은 상호 견제하며 공존했지만, 종교권력 하나만도 사회의 상상력을 가로막고 인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힘이 있었다. 로마에서 벌어진 종교 논쟁과 조선 시대 성리학 논쟁의 유사성을 보면, 생산력이 정체된 상태에서 형이상학적 논쟁들이 얼마나 쉽게 제로섬 게임에 근접할 수 있는지 통감한다.



바티칸 교황청의 담. 이 거대한 벽을 보면 왜 방어용 황궁의 성벽과 근위대가 떠오를까. 두 권력조직이 길항하면서 서로를 배워왔기 때문이다.

■ 알타이에서 길을 묻다


물론 일부 정주세계는 로마보다 운이 좋았다. 동방에서 물품을 사들이는 구조에서 로마는 끝없이 은화를 내보내야 했지만 동쪽의 페르시아와 인도는 그 은을 챙길 수 있었다. 중국의 중세는 확실히 서방보다 안정적인 생산을 이어갔다. 하지만 고전기 인도는 처음에는 계급과는 비교적 무관했을 법한 카스트를 계급제도로 고착해 나갔고, 페르시아는 곧 영토의 통일성을 상실한다. 흔히 중국에 제도적인 노예가 없었다고 하지만, 진(秦)은 농병(農兵)제를 만들어 농민의 이동을 엄격하게 금했고 한(漢)이 이 제도를 이었으니 실질적인 농노제는 오히려 서방보다 빨랐던 셈이다.


중세에도 기술·생산력 진보했지만
상쇄하고 남을 파괴가 늘 뒤따라
중세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농노와 대지주의 격차 이상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차이 늘어나



루브르 박물관의 함무라비 법전 석비. 법률에 따르면 노예는 물건이다. 정주 문명은 노예를 필요로 했다. 문자 역시 권력이다.

중세의 끈질긴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현대세계는 중세의 고질병인 생산력 지체를 해결했지만, 성을 국경선으로 바꾸고 말과 화살을 전투기와 미사일로 대체한 것 외에는 파괴적 대치를 완화할 방안을 창출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 당시 농노와 대지주의 격차가 벌어졌듯이 오늘날 임노동자와 자본가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차이는 미증유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그동안 유목사회가 세계를 이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전과(前過)와 그들의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미한 생산력과 노동력을 나누어 사회를 꾸려왔던 그들의 행보를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필자는 인공물 없이 시원스레 뻗은 광대한 이 공간을 유목세계의 중세 이야기로 채워나갈 것이다.

■ 필자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072134005&code=960100&fbclid=IwAR0zMRV4jpyqzKbc0vDVph06QiC8vxmw3lUAraHzut6MybLJ28Cm0A2qt4w#csidx4c6fcef7e48e8b1b70e07162712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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