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2

일본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의 평화와 종교 -안도 쇼에케(安藤昌益 '703-62)의 평화론을 중심으로- < 한국종교교육학회 < KISS



일본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의 평화와 종교 -안도 쇼에케(安藤昌益 '703-62)의 평화론을 중심으로- < 한국종교교육학회 < KISS



일본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의 평화와 종교 -안도 쇼에케(安藤昌益 '703-62)의 평화론을 중심으로-

日本の「周辺」から見た東アジアの平和と宗教 :安藤昌益(1703-62)の平和論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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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한국종교교육학회
간행물 : 한국종교교육학회 학술대회자료집 2018권2호
간행물구분 : 프로시딩
발행년월 : 2018년 11월
페이지 : 69-84(16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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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보고에 있어서 ‘주변’이란 일본 동북지방을 의미한다.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62)는 18세기 일본 동북지방의 사상가이며 의사다. 본 보고는 쇼에키의 평화(비폭력)과 종교(‘신비주의’적 경향)의 관계를 고찰한다. 쇼에키가 살아있던 때 동북지방에서는 대기근이 일어나 6만명이 넘는 아사 · 병사자가 발생했다. 쇼에키는 그 원인을 동북지방의 식량공급기지인 토쿠가와 시대의 지배구조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러한 구조가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에는 스스로 농작을 하지 않고 식량을 독점하려는 ‘중심’의 욕망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그 욕망을 토대로 세워진 국가 종교가 주장하는 평화(전쟁 승리에 의한 지배의 산물로서의 경제적 · 정치적 등의 이익)가 오히려 ‘주변’의 평화(민중의 문화적인 생활기반의 보호)를 파괴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쇼에키는 단순히 피억압자인 ‘주변’을 선으로 보고 억압자인 ‘중심’을 악이라고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는 상하 차별을 중심으로 하는 이분법적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데, 쇼에키는 서로 대립하는 두 항은 실제로는 상호 의존, 상호작용(호수, 互酬)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을 한다. 따라서 억압자의 구조적 폭력은 피억압자의 직접적 폭력을 발생시키며 그것이 나아가 억압자의 폭력을 발동시켜 폭력의 연쇄를 증폭시킨다.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쇼에키는 생 / 사의 상호의존, 상호작용적인 관계에 주목한다. 거기서 생 / 사의 대립을 넘은 생명의 연속적 활동 안에서의 유한한 생명존재의 삶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부부의 밤일과 수면, 가정에서의 의식(衣食)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생업과 휴식과 같은 자연활동 그 자체인 삶이다. 이러한 인간의 생활과 자연 활동을 일관하는 생명의 진실성을 쇼에키는 신(카미, 神)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은 삶의 힘이며, 죽음을 이겨내는 힘이고 동시에 스피리츄얼(spiritual)한 힘인 것이다. 쇼에키의 평화론은 그러한 생명의 진실성에 대한 각성에 의해 ‘주변’민중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생명의 깊은 상처’를 치료하려고 한 것이었다.

本報告における「周辺」とは、日本の東北地方のことを指す。安藤昌益(1703-62)は、18世紀の東北地方の思想家であり、医師である。本報告は、昌益における平和(非暴力)と宗教(「神秘主義」的傾向)のつながりを考察する。 昌益在世時の東北地方では大飢饉が起こり、6万人を越える餓死·疫死者を出した。昌益はその原因を、東北地方を食糧供給基地とする徳川時代の支配構造自体にあると考えた。また、そうした構造を生み出した根本的な原因に、みずから農耕しないで食糧を独占しようとする「中心」の欲望があるとし、その上に立った国家宗教の説く平和(戦争の勝利による支配の所産としての経済的.政治的等の利益)が、むしろ「周辺」の平和(民衆の文化的な生活基盤の保護)を破壊していると見た。 しかし、昌益は単純に被抑圧者である「周辺」を善とし、抑圧者である「中心」を悪として批判したわけではなかった。抑圧/被抑圧の関係は、上下の差別を中心とする二分構造によって起こるが、昌益は相い対立する二項は、実は相互依存、交互作用(互酬)的な関係にあると考える。したがって、抑圧者の構造的暴力は、被抑圧者の直接的暴力を呼び起こし、 それがさらに抑圧者の暴力を発動させ、暴力の連鎖を増幅させる。 この負の連鎖から脱するために、昌益は生/死の相互依存、交互作用的な関係に目を向ける。そこから生/死の対立を越えた生命の永続的活動の中における、有限な生命存在の生き方が見出される。 それは、日常的な夫婦の性の営みと睡眠、家庭における衣食と、それを産み出す生業と休息に代表されるような、自然の活動そのものである暮らしである。このような人間の生活と自然の活動を貫いている生命の真実性を、昌益は神と考えた。それは生の力であり、死にうちかつ力であり、spiritualな力である。 昌益の平和論は、そうした生命の真実性への覚醒によって、「周辺」の民衆に顕著に現れる「生命の痛手」を治療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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