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2

알라딘: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알라딘: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조경란 (지은이)삼인200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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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서/외국어/컴퓨터/전문서적 - 봄 에코백/미니 마이보틀/마스킹 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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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반양장본
266쪽
152*223mm (A5신)
372g
ISBN : 9788987519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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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근현대 사상사 연구서. 백수십여 년동안 중국이 모색해온 사상의 궤적을 살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중국은 봉건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체제와 각 체제를 작동시키는 메커니즘(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을 단시간에 경험해야 했다.

근대 서양이 300년 동안 쌓아 올린 사상의 흐름을 단시간에 흡수해야 했기 때문에 사회사상은 일상에 녹아들지 못한 채 사상과 주의에 머물렀다고 지적했다. 또, 서구의 시각에 맞춰 스스로를 계몽해야 하는 부담과 서구 사상 추수주의라는 수동적인 이론 지형 때문에 학문적 압박감 또한 심했다고 결론지었다.


목차


일러두기
머리글-중국의 근현대 사상 연구에 대한 잡감

캉유웨이의 <대동서>이해
중국과 일본의 서양 철학 수용
중국에서 사회 진화론의 인식과 그 특징1
중국에서 사회 진화론의 인식과 그 특징1
중국 근대의 자유주의 문제
사회주의 시기 사적 유물론 논쟁의 재검토
중국 지식인의 학문적 고뇌와 21세기의 동아시아
유교.민족.인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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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조경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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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국가, 유학, 지식인≫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신유가, 자유주의, 신좌파≫ 등이 있다.



최근작 : <유학과 동아시아>,<차이나 인사이트 2018>,<국가, 유학, 지식인> … 총 20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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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남자, 여자를 읽다>,<유일신 야훼>,<교양인은 무엇을 공부하는가>등 총 242종
대표분야 : 한국시 23위 (브랜드 지수 17,9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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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푸와 사회진화론




얼마전부터 중국 근대 지식인들에 관한 책과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모으고 있는데, 계기가 된 건 옌푸(엄복)의 <천연론>(소명출판, 2008)과 <정치학이란 무엇인가>(성균관대출판부, 2009)를 지난달에 뒤늦게 발견한 때문이다. <천연론>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지만지, 2009)의 중국어 번역이다. 그러니까 그걸 다시 우리말로 옮기는 건 '중역'인데, 그럼에도 이 중역이 의미가 있는 건은 옌푸의 번역이 갖는 역사적 의의 때문이다(때문에 '고전 번역'에 해당한다).



구한말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량치차오(양계초)의 강권론적 자유론을 다룬 박노자의 논문에서 그 의의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서구적인 담론에 포획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에 1896년부터 또 하나의 이론적인 조건이 가미됐다. 1896년부터 그(량치차오)가 중국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히는 옌푸(1858-1921)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이다. 옌푸가 번역한 헉슬리의 <진화와 도덕>(중국 서명 <천연론>, 1898년 발간)의 번역문 초고를 이미 1896년에 읽은 량치차오는 그때부터 옌푸식 사회진화론을 토대로 그가 현실론적으로 체득한 서구 중심주의적 담론을 이론화.이념화하기 시작했다.(<우승열패의 신화>, 132쪽)



박노자는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긴 했지만 옌푸의 사상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에 끼친 영향에 있어서는 량치차오가 더 앞서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량치차오의 경우는 <이태리 건국 삼걸전>(지식의풍경, 2001)을 1903년에 저술한 바 있고 이것은 다시 신채호에 의해 1907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되었다. 옌푸보다는 더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엄복'이란 이름으로만 어설프게 기억하던 옌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서양의 근대사상을 중국어로 옮긴 '최대 번역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1877년부터 2년 반동안 영국의 해군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옌푸는 부강한 영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청일전쟁에서도 패배한 중국의 현실에 낙망한다. 그는 중국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국의 사회사상가 허버트 스펜서의 자유사상과 사회진화론에서 그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스펜서주의자이긴 했지만 저작이 너무 방대해(우리는 아직도 번역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 먼저 번역한 것이 헉슬리의 <천연론>이었다(그는 스펜서의 입장에서 헉슬리의 진화론을 비판한다). 이 번역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연이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1873), 밀의 <자유론>(1859), 에드워드 젠크스의 <정치학사>(1900),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 밀의 <논리학 체계>(1843) 등을 모두 번역한다. <천연론>을 옮긴 양일모 교수의 지적대로 "혼자서 번역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번역이었다."



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업에 나선 것이고, 그것이 끼친 영향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간략하게 참조가 되는 건 조경란의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삼인, 2003)이다. '중국에서 사회 진화론의 수용 양상'이란 논문이 포함돼 있어서인데, 이 글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간추린 것이다(이 학위논문은 <중국근대와 사회진화론>(문학과지성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언급돼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은 중국에 체계적으로 수용된 최초의 서양사상이며, 옌푸와 량치차오가 사회진화론을 소개하고 대중화에 힘쓴 사상가였다면 장빙린과 루쉰은 사회진화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을 극복해보고자 애쓴 인물들이었다(조선의 경우엔 유길준과 윤치호가 사회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며, 만해 한용운이 이를 극복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참고할 수 있는 책이 '옌푸와 서양'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벤저민 슈워츠의 <부와 권력을 찾아서>(한길사, 2006)이다. <천연론>의 역자 서문에는 역자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미국의 중국 연구를 대표했던 하버드대학의 고 슈워츠 교수의 위어난 엄복 연구를 배워가면서, 동양의 고전으로만 장식된 동양철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바로 그 '엄복 연구'가 바로 <부와 권력을 찾아서(In search of Wealth and Power)>(하버드대, 1964)이다(알라딘에서는 1983년에 나온 재판본을 구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선 출간시에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었지만 책을 구하지 않은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먼댓글로 링크해놓았다). 다행히 아직 절판되진 않은 상태여서 바로 구하긴 했는데, 번역이 유려하진 않다. 물론 이런 책 자체가 번역소개된 점은 일단 고무적이면서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루이스 하르츠 전 하버드대 교수가 붙인 서문의 제목이 '서양과 중국을 향한 새로운 시선'이 옌푸 사상이 갖는 의의를 요약하고 있는데, 첫문단은 이렇게 나간다.
재능 있는 학자라면 자신이 연구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모국 문화와 비교되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 나라 사상의 표상적인 면들을 밝힐 수 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자기발견의 경이감 때문이다.(35쪽)

원문은 이렇다.
It is the genius of the foreign critic to bring to the surface aspects of thought implicit in the life of the nation he stduies but explicit for him because of the contrasts supplied by his own culture. It is a shock of self-discovery which makes Halevy interesting to the English, Tocqueville to the Americans.

이방인이라서 외국의 비평가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사상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고 할레비와 토크빌이 그 사례라는 것. 그런데, 번역에서 두번째 문장은 주어와 목적어 관계가 뒤바뀌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끄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자기-발견의 경이(충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할레비'란 이름이 생소해 찾아보니 프랑스 역사가 엘리 알레비(Elie Halevy, 1870-1937)이다. 백과사전엔 "19세기 영국 역사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19세기 영국인의 역사>(6권, 1913~47)의 저자이다. 이 대작은 1815년 이후 영국의 정치·경제·종교 발전을 추적한 것이다."라고 소개된다. 토크빌은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인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 알렉시스 토크빌(1805-1859)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인 옌푸도 서양인들에게 그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동시대의 사례로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가졌던 의미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슈워츠 교수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영국의 고전적 자유주의 저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서양사상을 바라본 중국인 엄복이다. 그는 세기의 전환기에 유럽 사상가들의 저술을 중국어로 옮긴 인물이다.


옌푸의 번역 작업이 왜 서양인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그가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같은 당대 사상가들의 자기 이해를 제쳐놓고 '집단적 힘(collective energy)'이란 주제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서구의 비평가들로선 한번도 주목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자기-이해'에 해당한다.
아직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 위치에 있었던 엄복은 당시 유럽 사상가들이 말한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등은 차치한 채, 근대세계로 접어드는 유럽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에너지를 다룬 그들의 저작에 매료되었다.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러한 주제를 표헌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개념들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물론 'energy'의 번역이긴 한데, '에너지에 관심을 갖다'는 말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들린다. '힘'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는 "그 주제에 관심이 없었는데"로 교정돼야 한다. 여하튼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 하버드 학자들이 본 옌푸의 의의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적에 따르면, 지금에 와서는 옌푸의 시각이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으며 서양의 자기 이해에 포함될 것이다. 유감스러운 건 이런 내용을 말하는 6행이 번역본에서 누락됐다는 점. 아래가 빠진 대목이다.
But the West has drifted into a new position now, where its involvement with nations overtly experiencing the issue of 'modern history' cannot fail to inspire it to review that issue in its own intellectual past. It is likely that the perspective of Yen Fu will, in significant part, become in the end our own.



<부와 권력을 찾아서>는 이제 손에 들었기 때문에 언제 완독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책들, 동아시아와 미국에서의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이 더 나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몇자 적었다.

11. 06. 12.



P.S. 박노자의 <우승열패의 신화>는 영어판으로도 출간됐다. 한국어판의 부제인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가 제목이다(애초에 <우승열패의 신화>에 실린 글의 절반 이상이 영어 논문을 번역한 것이었다). 더 소개됐으면 싶은 책은 <유럽과 미국 사상에서 사회진화론>과 <사회진화론과 미국사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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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1-06-12 공감 (38)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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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서구 문물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대응


<2013년 1학기 중국현대철학연습 발표문> 아편전쟁(1,2차 중영전쟁)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근대의 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을 전후해서 중국과 동아시아 세계는 본격적으로 전세계적 시장경제체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반대로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이 사건은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중화주의적 이념, 사회, 정치적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자리잡는 계기였다. 특히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념적 기반... + 더보기
박효진 2013-04-1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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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열과 중국 문화의 정체성 재건


<2013년 중국현대철학연습 숙제> 1. 문화열 현상의 역사적 배경과 문제의식 문화열은 1980년대에 '문화' 개념을 중심으로 벌어진 다양한 학자들의 논쟁을 뜻하는 단어다. 문화 개념의 복잡함 만큼이나 이 논쟁 역시 80년대 전체에 걸쳐서 벌어졌는데, 중국의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 더보기
박효진 2013-08-0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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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마르크스주의의 대두와 발전




<중국현대철학연습 발제>



1. 간략한 중국공산당사 – 중국 공산당 창당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5.4운동의 의의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농민 등 민중과 학생, 지식인 등이 연합해 전국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공산당의 창당 배경을 이야기할 때에는 노동자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중국의 경제가 어느 정도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그러므로 공산주의적인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을 거쳐서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지고, 이 여파는 전세계에 미쳤다. 5.4운동을 이끌었던 잡지 『신청년』에서도 이 시기를 전후해 공산주의 특집 등을 마련하여 그 이념을 소개했다. 1920년을 전후해 코민테른은 보이틴스키와 마링을 차례대로 중국에 파견해 진독수, 이대조 등 공산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을 만나 중국 공산당을 만들고 공산혁명을 주도할 것을 주문했고, 1921년 7월 상해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중국 공산당의 설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들은 각 지역의 노동자들을 조직해 파업을 선동하며 제국주의와 매판자본, 군벌들에 대항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들의 힘은 미약했고 따라서 각지에서 탄압, 와해당하기도 했다. 반면 광동 지역의 국민당 정부는 민주적 정치체제가 확립된 덕분에 다른 지역에 비해 공산당에 우호적이었으며, 또한 전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에 착안한 코민테른은 ‘민족자본과 결합하여 민주연합전선을 구축하라’는 지령을 중국공산당에 내렸고,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이를 수용했다. 손문 또한 이들을 국민당 당원으로 받아들이고, 코민테른으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1924)이다.


그러나 손문이 사망하고 국민당이 북벌을 완수해감에 따라, 자본가와 결탁해있던 국민당 지도부는 공산당 출신들을 껄끄러워하게 되었다. 결국 1차 합작은 결렬(1927)되었고, 이후 국민당의 지도자가 된 장개석(蔣介石)은 ‘안내양외(安內攘外)’를 내세워 공산당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지도부들은 뿔뿔이 흩어져 얼마 남지 않은 잔존세력을 이끌고 산간벽지로 들어가 처음부터 다시 당을 만들어야 했다. 이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이 모택동(毛澤東)의 정강산(井岡山) 근거지다. 각 지역 공산당 근거지에서는 붉은 군대(紅軍)가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3대 기율과 6대 주의사항을 앞세워 근거지 주변 지역 민중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일제가 만주지역 철도 폭파 사건의 책임을 중국에게 뒤집어 씌우며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일본인 피격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며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범했으나, 장개석은 이들과의 전면전은 회피하면서 4차례나 공산당 소탕 작전(圍剿)을 벌인다. 당시 공산당 중앙에서는 크게 싸우자는 러시아 유학파와, 유인과 습격 중심의 지구전을 주장하는 모택동파가 논쟁을 벌였는데, 코민테른은 러시아 유학파를 지지하는 지령을 내린다. 중국 공산당은 이에 따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했고, 잔존 공산당 세력은 장개석군을 피해 대장정(1934~1935)을 시작한다. 이 와중에 모택동파는 준의(遵義)회의에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전면전을 주장했던 러시아 유학파들을 상당수 축출하고, 모택동 자신이 군사를 담당함으로써 붉은 군대의 실권을 장악했다.


중국 본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중국 민중 전체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었고, 공산당은 여기에 호응해 항일연합전선 구축을 당의 방침으로 정하고 여러 차례 국민당에 이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여전히 공산당 토벌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토벌군 대장 장학량(張學良)이 자신을 격려하러 온 장개석을 감금하고(西安사변), 항일투쟁을 비롯한 8개 항목에 동의할 것을 강요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제2차 국공합작(1937)이 성립되었다.


모택동은 농촌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지구전을 주장하였고, 이 전략을 통해 중일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공산당의 영향력을 키워갔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당 내부의 일치단결을 위해 정풍운동(1942)을 전개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사상을 중국 공산당의 표준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코민테른과 러시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독재체제를 강화해갔으며, 중일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공산당과 붉은 군대를 공격하는 작전을 폈다. 이는 국민당 내부에서도 심각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일당독재를 성토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 와중에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비극 끝에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1945).





2. 사상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분화



(1) 중국 공산당 창당 전후의 3대 논쟁



5.4운동을 전후한 시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민중의 삶이 매우 피폐했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이런 혼란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전통사상 뿐만 아니라 외국의 다양한 정치사상들을 수용하고 이들을 중국에 적용해보려 했다. 당시에 중국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사상사조에는 자유주의 뿐만 아니라 사민주의, 조합주의(생디칼리즘), 길드사회주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 등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 혁명은 이상적인 사회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 가운데서 실제로 특정한 이론에 기반해 공식적인 국가가 세계에 등장한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이들은 그 혁명을 통해서 중국의 미래를 보았고, 마르크스주의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여기에 반대하는 지식인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중국의 미래사회가 공산주의적으로 바뀌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거나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해 반-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중국 지식인의 이론적 지형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잡아나갔다. 이 과정에서 벌어졌던 세 논쟁은 각각 ‘문제와 주의’ 논쟁, ‘사회주의’ 논쟁, ‘무정부주의’ 논쟁이라고 요약된다.


‘문제와 주의’ 논쟁은 호적이 「문제를 더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더 적게 연구하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이념이나 사상, 즉 ‘주의’는 단지 현실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를 간단히 이해할 수 있게 도식적으로 설명해주는 틀일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문제’이고 여기에 실증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의 지도를 받아서 현실문제를 인식하는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공격이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던 이대조와 남공무(藍公武)는 여기에 반발해 ‘주의’는 ‘문제’를 인식하게 해주는 판단의 기준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진독수는 여기에 대해 ‘주의’가 현실개혁의 방향을 지시해주기 때문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 논쟁에서 당시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계의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혁명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 이해는 중국 공산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된다.


‘사회주의’ 논쟁은 장동손(張東蓀)의 「내지 여행에서 얻은 하나의 교훈」이라는 글에서 시작됐다. 여기에서 그는 중국은 아직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며, 당면한 과제는 생산력을 높여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진독수는 이에 반박하는 글을 통해서 상업이 발달한 해안과 양자강 유역의 항구 도시에는 충분히 공업화된 도시들이 있으며, 여기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회체제의 변혁 없이 생산력만 높이는 것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이는 중국 사회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사항은 무엇인지 논의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중국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일어난 무정부주의자들과의 논쟁을 ‘무정부주의’ 논쟁, 또는 아나볼(아나키즘-볼셰비키) 논쟁이라고 한다. 무정부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구성백(區聲白)은 코민테른 모델을 따르는 사회, 즉 계급투쟁에서 승리한 무산계급에 의한 (과도기적) 독재는 결국 또 다른 정부를 구성해 억압을 부를 뿐이기 때문에 그 모델을 따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적인 인간관에 입각해서, 생산수단은 자유롭게 관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독수는 이에 반발해서 계급투쟁은 현재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며 조직된 노동자의 힘만이 현재 사회를 헤쳐나갈 동력이라고 반박했다.




(2) ‘과학과 현학’ 논쟁과 진독수의 정리



‘과학과 현학’ 논쟁은 5.4운동 전후에 중국 학술계에서 벌어진 논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다. 이 논쟁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데, 우선 과학과 민주라는 두 가지 목표를 향해 진행된 5.4운동이 사상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그리고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으로 유입된 서양 사상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또한 이 논쟁을 기점으로, 아편전쟁 이후 중국 사회에 자리잡은 폐단의 원인으로 지목되던 전통적 사상에 대한 재평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계승으로 볼 수 없는데, 이런 재평가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서양철학의 사조와 관련짓는 방식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장군매(張君勱)의 「인생관」이라는 강연록이 출판되면서 시작됐다. 그는 과학과 인생관을 나누고, 과학은 객관적/논리적/분석적/인과적/현상적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비해 인생관은 주관적/직관적/종합적/자유의지적/인격적이라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과학으로 인생관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반대한 정문강(丁文江)은 장군매를 ‘현학하는 귀신(玄學鬼)’이라고 비난하면서 과학을 옹호하고, 호적 역시 정문강을 옹호하는 「손오공과 장군매」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후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문제에 매달려 잡지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 글들이 모여 『과학과 인생관』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호적과 진독수가 이 책에 서문을 썼다. 또 『인생관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장군매가 서문을 썼다.


이것과 비슷한 논쟁은 서양에도 있었으며, 특히 인문주의와 과학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오늘날에도 계속 변주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양 진영이 그들의 철학적 근거로 삼은 사람들 역시 중국의 전통이 아닌, 서양의 철학자들이었다. 인생관 진영에서는 베르그송이나 칸트의 영향이 많이 배어나며, 과학 진영에서는 콩트와 밀 등의 실증주의 그리고 러셀이나 마하 등의 논리실증주의를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서양철학에 관한 중국 지식인들의 이해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과학에 관한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이해방식이다. 이들은 과학을 자연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태도 내지는 이념으로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과 현학 논쟁의 진실한 내면적 의의는 진정으로 과학의 인식이나 평가, 과학적 방법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주로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이나 신앙을 수립하는가에 대한 논쟁에 있었다. 즉 과학으로 인생과 사회를 지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형이상학으로 인생과 사회를 지도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학술토론은 사상으로서의 의의가 학술로서의 의의보다 컸으며, 사상으로서의 영향이 학술로서의 성과보다 큰, 실질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발전과 관련해서, 과학에 관한 이런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적 성과를 통해 인생과 사회를 지도한다는 이념은, 실증주의적 분석만으로는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독수는 과학에 관한 이런 이념을 충족시켜줄 ‘지도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웠다.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은 과학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인생관과 인생관적인 특성들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과학의 모든 인생관에 대한 권위를 설명”할 수 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요소 가운데서 다른 모든 것보다도 역사적 유물론을 가장 중요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포함되는 다른 요소들은 지나치게 실증주의적이거나(잉여가치설) 또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반면 혁명 강령으로서의 역사적 유물론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도 쉬울 뿐 아니라, 현재 중국의 발전 단계를 규정하고 여기에 맞는 행동의 지침과 목표를 내려주기 때문이다.





3. 중국 마르크스주의 수용 초기의 주요 인물



(1) 20년대



진독수는 5.4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식인 공동체에 처음 등장했다. 과학과 민주를 모토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개혁적 지식인의 색채가 훨씬 강했다. 그러나 1920년 즈음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했다. 그의 이런 변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처리에서 나타난 강대국들의 추악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보편적 법칙(公理)으로서의 과학과 민주에 대한 그의 낭만적 인식은 국제관계에 관한 낭만적 인식으로 이어졌다. 국제관계 역시 과학과 민주에 기반한 국제법(公理)에 따라 처리될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중국은 열강의 손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로 재탄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에 관한 처리는 열강의 공동관리로 마무리되었고(워싱턴체제),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은 더욱 심해졌다. 지식인으로서 그가 느낀 충격은 매우 컸으리라고 추측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뒤 진독수는 민주에 대해 “부르주아지의 부적”, “부르주아지의 전유물”, “종전에는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도를 타도할 때 사용한 무기였으며, 지금은 세상 사람을 기만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는 간사한 속임수”라고 평가하며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강조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만큼 역사적 상황이 무르익어야 한다는 것 또한 뜻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 상황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고도로 발달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몇몇 주요 도시를 제외하면 농업의 비중이 대단히 큰 국가였다. 따라서 노동자만을 조직해서 일으키는 투쟁은 당연히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물론 인구가 워낙에 많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동자가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5.4운동 당시 3파 투쟁을 비롯해 파업투쟁이 일부 성과는 거두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현실에 맞는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서는, 혁명의 주체로서 인구의 대부분인 농민을 끌어들이는 이론적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진독수는 일반적으로 이런 부분에서 실패했다고 평가받는다. 즉 역사적 유물론을 교조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농민은 거처가 흩어져 있어 집중시키기 쉽지 않고, 문화적 생활 욕망이 간단하여 보수로 나아가기 쉬우며, 중국의 토지가 광대하여 난을 당하면 옮겨 다니면서 일시적인 안일만을 탐하기 쉽다.”


이대조 역시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물사관, 그 가운데에서 계급투쟁설”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진독수와는 다르게, 계급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의 투쟁의지를 더욱 강조하였다. 계급투쟁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발전단계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조직된 민중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유물론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을 상당히 경계했고 이런 면은 반대로 인민의 의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급적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혁명의 의지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결국 각 개인의 인성 또는 정신적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또한 이대조는 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국의 현실에 맞게 혁명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삶과 고통을 알아야만 한다. 그들이 가장 많고 또 그들의 고통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농업국이며 대다수 노동계급은 바로 그들 농민이다. 그들이 해방되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 전체가 해방되지 못하며, 그들의 고통은 우리 국민 전체의 고통이다.” 이는 그를 포함해 이후 정식화되는 중국의 공산주의가 지니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된다.





(2) 30년대



진독수, 이대조 등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모택동을 이어주는 이론가로서 주목할만한 사람은 구추백(瞿秋白)과 채화삼(蔡和森), 유소기(劉少奇)다. 구추백은 러시아 유학파로서, 1923년 귀국해서 중국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진독수, 이대조 등이 일본이나 유럽 자료로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것과는 달리, 러시아 자료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엥겔스-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에서 플레하노프-레닌-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로 변화하고 발전한 것을 나타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공헌한 것은 역사적 유물론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적 유물론 그리고 계급투쟁과 동일시하던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르게 구추백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열심히 설파했다. 역사적 유물론은 인간들의 행위에 관한 설명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역사적 유물론의 형식를, 운동을 매개로 한 우주 전체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다. “사회과학에서 근본의 방법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이는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법칙이고, 따라서 이 법칙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법칙이고 또한 자연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채화삼은 혁명 운동 속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확보될 수 있는지 문제를 제기했다. 당은 엄격한 기율에 의해 언제나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의 대오가 언제 흐트러질지 모르며, 그 때문에 혁명이 실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기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 둘을 양립시켜야 하는 것이 이론가로서 채화삼에게 남겨진 과제였다.


유소기에 와서는 개인의 역량의 강조라는 중국 공산당의 이론적 경향이 완전히 자리잡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의식과 도덕품성을 모델로 수양해야 한다. 당 내 단결을 지키고, 비판과 자아비판을 진행하며, 규율을 준수하는 수양이 있어야 한다. 고난 속에서도 분투하는 공작작풍의 수양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우리가 항상 말하는 ‘당성’ 또는 ‘당관념’, ‘조직관념’의 표현이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도덕의 최고표현이다.” 라고 언급했다. 공산당원, 마르크스주의자가 해야 하는 수양이란 땀흘려 일하고 노동자 의식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내 이익을 앞세우는 것은 절대 안될 일이다.






4. 1930년대 중국 사회 성격 논쟁



중국에 마르크스주의가 들어온지 10년 쯤 지난 뒤, 중국 공산당의 활동 범위와 목표를 정하기 위한 논쟁이 벌어진다. 공산당의 활동과 범위는, 역사적 유물론에 따라 중국 사회가 현재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므로 지금 중국 사회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당의 활동의 향방을 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 벌어진 논쟁이 이른바 ‘중국 사회 성격’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여러 지도자와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얼마만큼 이해했는지, 그리고 중국에 알맞은 혁명이념을 선택했는지를 평가해볼 수 있다.


“논쟁의 주제는 당시 중국의 사회가 도대체 자본주의 사회인가 아니면 봉건주의 사회인가 하는 것으로 이것에 초점이 모여 있었다.” 여기에서 입장이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신생명』이라는 잡지에서 활동한 도희성(陶希聖) 등의 생명파다. 이들은 중국에 자본주의가 상당히 성숙한 상태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중국은 내부적인 토착적 상업자본주의가 춘추전국시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융자본에 의한 자본 축적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예전에는 금융자본에 의해 생긴 이득이 귀족에게 갔고 지금은 이득이 민족, 매판 등 자본가에게 투자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부분이다. 이만큼 금융자본이 발달한 곳을 봉건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며, 또 옛날과 지금 사이에 큰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신사조파는 왕학문(王學文), 반동주(潘東周), 오계평(吳黎平) 등이 기반을 두고 있는 『신사조』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들은 중국이 아직까지 봉건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직도 농촌 공동체를 지배하는 조직은 향촌이며, 사람들의 생산량이 상품경제가 시작되지 않고 아직 자급자족에 머무르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성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사항은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여 나눠주는 일이었다.


엄령봉(嚴靈奉)과 임서(任曙) 등이 내는 잡지 『동력』파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중국 사회가 현재 자본주의 단계에 막 들어서고 있지만, 이것은 아편전쟁 이후 서세동점의 시기로부터 시작됐으며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그 전에 중국 인민은 봉건적 생활태도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또한 계급론을 극한으로 밀어붙여서, 민족자본가와 매판, 친외세적인 자본가를 구분하지 않고 부르주아지라면 모두 타도의 대상이 된다. 대신 이런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속에서 봉건세력은 저항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반면 다른 두 파는 민족자본가에게 다소간 긍정적이면서, 봉건세력이 군벌-외세와 연계하여 민중을 핍박하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이론적 분석을 투쟁과 결합시키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리고 이 공통점은 공산당 지도부와 여기에 우호적인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깊게 공부하고, 중국의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택후는 이들 가운데 신사조파가 중국의 현실을 가장 잘 분석했다고 평가하며, 이들의 분석과 모택동의 혁명전략이 일관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참고문헌



이택후(李澤厚), 『중국현대사상사론』(김형종 옮김), 한길사, 2005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소 편, 『강좌중국사Ⅵ』, 지식산업사, 2006

조경란, 『중국 근현대 사상의 모색』, 삼인, 2003

코지마 신지(小島晋治)·마루야마 마츠유키(丸山松幸), 『중국근현대사』(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1998

풍우란(馮友蘭), 『현대중국철학사』(정인재 옮김), 이제이북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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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진 2013-05-1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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