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2

알라딘: 가라타니 고진 (지은이) 세계공화국으로



알라딘: 세계공화국으로




세계공화국으로 |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은이),조영일 (옮긴이)비(도서출판b)2007-06-01



책소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트랜스크리틱>등의 저서로 일본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에 대한 모색을 담은 저작. 
전작 <트랜스 크리틱>에서 칸트와 마르크스를 그만의 방식으로 비평하고 다시 성찰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 성찰을 바탕으로 또 다른 대안을 내놓는다.

‘자본주의=민족(Nation)=국가(State)’라는 등식을 강조해온 지은이는 이 책에서 '자본제 사회의 극복은 곧 근대 국민국가의 극복'이라는 논지를 일관 되게 펴고 있는데,
 '국가가 공동체 내부에서 개인이나 지배계급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형성된다고 보는 것은 
근대주의적 착각'이라며 오히려 '국가는 주변의 공동체에 대해 지배나 방어하는 것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개별 국가는 그 주권을 세계공화국에 서서히 양도해야 한다는 지은이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집약된 문제인 전쟁, 환경 파괴, 경제적 격차 등을 가장 긴급한 해결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트랜스 크리틱>에 이은 고진 특유의 칸트, 마르크스 독해와 그외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 둘을 넘어서려는 고진의 또 다른 시도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목차


일러두기
한국어판 서문

<서론> 자본=네이션=국가에 대하여

1. 이념과 상상력이 없는 시대
2. 19세기에서 본 현재

제Ⅰ부 교환형식

1.'생산'에서 '교환'으로
2.'교환'의 현재적 의미
3. 다섯 가지 사회구성체

제Ⅱ부 세계제국
1장 공동체와 국가
2장 화폐와 시장
3장 보편종교

제Ⅲ부 세계경제
1장 국가
2장 산업자본주의
3장 네이션
4장 어소시에이션이즘

제Ⅳ부 세계공화국
1. 주권국가와 제국주의
2. '제국'과 광역국가
3. 다중의 한계
4. 세계공화국으로

후기
옮긴이 후기

접기


책속에서



내가 이 책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길, 바꿔 말하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 네이션,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 네이션, 국가는 각기 간단히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지양하려고한다면 먼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 합니다.-p27-28 중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연의 은밀한 계획'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의에 의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악의나 공격성을 통해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리 비참한 상태라 할지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궁극적으로 '자연의 간지'가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대로 좌시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카타스트로프가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칸트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실현가능한 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p224 중에서 접기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와 대립되는 국가사회주의자로 생각됩니다.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회주의이념은 명확히 프루동의 것입니다.(...) 프루동은 경제적 계급 대립을 해소하면,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면 국가는 소멸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그 자체가 자립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사고도 계승했습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국가권력을 잡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자본제경제와 계급사회를 지양한다는 블랑키의 전략을 승인했던 것은 국가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결함은 국가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보지 않은 아나키즘에 있는 것입니다. -24-25쪽 접기 - 로쟈

(1990년 이후) 국가사회주의가 쇠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도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이즘)가 단순히 이념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본, 네이션,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소시에이션이즘은 자본, 네이션, 국가를 거절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충분히 사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결국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령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가 부활한다고 해도 자본, 네이션, 국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27쪽 접기 - 로쟈

내가 이 책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길, 바꿔 말하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 네이션,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 네이션, 국가는 각기 간단히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지양하려고 한다면 먼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것들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자본이나 국가의 현실성을 승인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이념'을 조소하게 될 뿐입니다.-27-28쪽 접기 - 로쟈

내가 가장 공감하는 사람은 칸트와 프로이트다. 이든 든 모두 60살이 지나서 이루어진 훌륭한 작업들이다. 나도 내 생각이 정리된 것은 60살을 먹은 이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극이 된다. 그들은 80살 정도까지 살았다. 나는 100살까지 하고 싶다. 내 작업은 이제부터다.('옮긴이 후기'에서 재인용)-235-236쪽 - 로쟈


추천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 혁명 선언'
- 고명섭 (<한겨레> 문화부장《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저자)




저자 및 역자소개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이다. 1941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나 동경대 경제학부와 동경대 대학원 영문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9년부터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マルクスその可能性の中心≫ (1978),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日本近代文學の起源≫ (1980), ≪은유로서의 건축隱喩としての建築≫ (1983), ≪내성과 회고內省と遡行≫ (1985), ≪탐구 Ⅰ探究 Ⅰ≫ (1986), ≪탐구 Ⅱ探究 Ⅱ≫ (1989) 등이 있다.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과 ≪은유로서의 건축≫이 영어로 잇... 더보기


최근작 : <윤리 21>,<헌법의 무의식>,<제국의 구조> … 총 115종 (모두보기)

조영일 (옮긴이)


문학평론가. 2006년 <비평의 빈곤: 유종호와 하루키>를 <문예중앙>에 발표하며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2008), <한국문학과 그 적들>(2009), <세계문학의 구조>(2011)를 쓰고, <세계사의 구조> 등 12권의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과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 등을 번역했다. 일본의 문예지 <문학계>, <겐론>, <스바루> 등에 비평이 소개되었고, <세계문학의 구조>가... 더보기


최근작 : <직업으로서의 문학> … 총 12종 (모두보기)
가라타니 고진(지은이)의 말
이제까지 작업에서 나는 칸트나 마르크스의 가능성을 그들의 텍스트 독해를 통해서 제시하려고 했다. 즉 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보다 타자의 텍스트로 하여금 그것을 말하도록 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트랜스크리틱>은 문학비평(크리틱)의 연장으로서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술한 것은 더 이상 칸트나 마르크스의 텍스트 내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와 같은 작업을 하기 시작함과 더불어 이전보다도 더욱 칸트나 마르크스가 각기 직면한 문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마이리뷰

구매자 (5)
전체 (12)

리뷰쓰기

공감순





고진과 함께 춤을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는 폭스트롯이다.(왜 있지 않은가 '사교댄스'의 대명사.)폭스트롯은 192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춤이다.주로 래그타임이나 스윙재즈의 발랄한 리듬에 맞추어 춘다.어원을 살펴보면 재미있다.폭스 트롯(fox trot)을 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여우의 빠른 걸음'정도가 되겠다.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골머리를 싸고 계신 예비 학자분들께서는 자신들을 심각하게 만드는 텍스트를 그딴 가당치도 않은 춤에 비유한다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하지만 가라타니 선생은 이 비유를 좋아할 듯 하다. 고진은 분명히 이 텍스트가 제기하고 있는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폭스트롯의 경쾌한 스텝을 음미하는 마음으로 읽혀지길 바랬을 것이기때문이다.

고진은-그가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 이 책을 '수능 앞둔 학생들이 보는 100일 마무리 총정리 하이라이트 버전으로 썻다'고 밝힐 법 하다.(물론 고진이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고진은 이 책이 고딩이나 직딩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했다.(이건 고진이 직접한 말이다.) 정리하자. 이 책<세계공화국으로>는 고진이 <트랜스크리틱>이후 만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가라타니 고진'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저자 스스로 요약 정리해주기 위해 만든 책이다.영화로 비유하자면 '반지의 제왕 따라잡기 디렉터스 버전'이다.

이 책이 대중을 염두에 둔 감독의 배려 섞인 책이라고 할 지라도 굳이 사교댄스가 될 필요는 없다.하지만 가라타니 선생은 한번 더 친절을 배푼다.책의 한 장 한 장이 폭스트롯의 스텝처럼 경쾌하다.강의투의 편안한 어법에 애써 애둘러 말하지 않고 요점과 핵심만을 탁탁탁 소리를 내며 찍어내는 문체다.그러니 독자의 손이 래그타임을 따라하듯 책장과 만날 수 밖에 없다.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현재의 체제를 '자본=네이션=국가'가 '세가지 교환양식의 접합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 삼자 연합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서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국가 해체로 가는 라인과는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먼저 사적 유물론의 '생산양식'을 '교환양식'으로 파악하여 역사를 재구성한다.교환 양식은 크게 호수(증여와 답례)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상품교환(화폐와 상품)으로 나뉜다.그리고 마지막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념으로 존재하는 네번째 교환양식(교환양식D)을 설정한다. 그리고 이 양식에 대응하는 사회구성체를 갖는다.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에서는 지배적 교환양식이 상품의 교환(교환양식C) 이다.(물론 각 양식은 단계적이지 않으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비중이다.) 하지만 반대로 여기서 벗어나려는 내적 움직임을 갖는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어소시에이션'이라고 하고 이것이 칸트의 '규제적 이념'으로서만 역사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주장한다.(실제로 없으면서도 있는 '초월적 가상'이다)

정리하면 가라타니의 작업은 사회구성체를 '교환양식'으로 파악하여 구분하고 이후 자본,네이션,국가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맥락에서 각자 자리매김하는지 그리고 이 셋이 어떻게 견고하에 손발을 맞잡고 실체성을 갖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가라타니는 마르크스가 괄호쳤던(등한시했던) '국가와 네이션'의 성립과정에 대해 많은 장을 할애한다.그는 국가가 기본적으로 공동체 사이에서 약탈-재분배(교환양식B) 사이에 기초한다고 본다.또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국가를 타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에 반대한다.쉽게 말하자면 국가는 다른 국가의 존재를 실존의 토대로 갖는다는 것이다. 일부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듯 단순히 국가가 지배계급을 위한 봉사 기관이라는 주장에도 선을 긋는다. 통속적인 마르크스의 혁명론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후 국가는 소멸해야한다는 당위론은 부정된다.

가라타니는 국가의 기원을 동양적인 전제국가,즉 동양적인 세계제국에서 부터 찾는다.이집트,메소포타미아,중국과 같은 고대제국들이다.이 제국들은 전제적인 권력과 관료지배를 형성하지만 공동체의 호수원리를 훼손시키지 않고 유지되었다.반면 이후 주변에서 분화하게 되는 국가들(그리스나 로마같은)은 제국 문명의 여러가지 것들을 받아들이지만 집권적 국가체제는 수용하지 않는다.이것이 역사적으로 가장 정점에 이른 것이 서유럽의 봉건제 시기이다.이 시기는 쌍무적 계약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집권적인 중앙화 대신 분산과 다중심화가 목표인 시점이었다.이 시기는 호수관계(교환양식A) 에 바탕을 둔 교환관계가 지배적인 양식을 갖는다.

유럽에서는 절대왕권기 들어와서야 비로소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진다.이것은 도시 발달과 밀접하다.절대 왕권은 도시와 부르주아의 결탁의 결과이다.이러한 정치적 변화과정은 결국 상품교환과 화폐경제 원리의 승리라는 형태로 결론지어진다.자본과 국가의 결합은 결국은 절대왕정기를 기점으로 해서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점에 이루어진것 이다.

네이션에 대해서서 가라타니는 이것이 세계제국의 분절화나 근대 제국주의의 분절화과정에서 생긴것으로 본다.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처럼 그저 네이션을 환상으로 보고 깨어나야만 할 대상으로 파악하는 계몽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가라타니는 네이션의 실체에 대해 존중한다.그리고 네이션이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이라는 형이상학적 기반 위에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가라타니에게는 어떤 해방의 가능성,또는 상상력이 있는가? 가라타니가 생각하는 해방의 힘이 벌어질 수 있는 장은 '생산' 영역이 아니라 '소비'영역이다. 가라타니는 기본적으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자본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그러면서 노동자의 힘을 소비자의 힘에서 찾는다.노동자는 종속적인 반면 소비자는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서 자본과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업장을 떠나면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그는 소비사회에서 옛날 방식의 계급투쟁은 무효화되어간다고 말한다. 그는 소비자란 프롤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 나타났을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이 논리로 보자면 소비자운동=프롤레타리아 운동이 된다.그리고 소비자의 비폭력적인 보이콧 운동이 파괴력을 갖출 것이라고 보는 듯 하다.나는 이 지점이 영 석연치 않다. 소비자라는 존재는 파편화 되어 있다.일종의 음모론 처럼 보이지 만 자본은 프롤레타리아를 소비자로 탈취시켜 버린다.최소한 그런 이데올로기적 작업은 자본의 현명함 속에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원도 이마트가면 전부 소비자일뿐이다.또한 현대 사회에서 소비를 한다는 행위 자체에는 단지 사용가치의 구입뿐 만이 아니라 차이나 신분상승이나 하는 심리적인 요인들이 많이 내재해 있다. 소비자라는 층을 프롤레타리아라는 애매모호하지만 정치적 개념으로 묶어낼 수 있는 계급으로 치환한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그런 질문이 생긴다.자본주의가 이미 소비자를 포섭해낸 단계에서 과연 소비자가 변혁의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자본 자체에 흠결을 내는 방식보다는 기업의 도덕성을 독려하는 도덕주의운동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결국 가라타니식으로 말해도 '도덕주의적 소비자운동'으로는 '교환양식의 변화'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것은 아닌가?

가라타니의 사회구성체에서 네번째인 어소시에이션은 자발적인 상호교환 네트워크이다.이는 삼자연합의 교환양식에 대항하는 전선을 갖는다.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이 개개인이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장적 사회를 닮아 있고 동시에 시장경제의 경쟁이나 계급분석에대해 상호부조적인 교환이라는 점에서 공동체와 닮아있다고 밝힌다.그는 이러한 '어소시에이션'의 가치가 보편종교에 기원한다고 말한다.초기 기독교 사상을 사회주의와 연관짓는 연구들을 떠올려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역사적으로 보편종교가 사회운동을 낳고 자유의 호수성이라는 윤리적 이념을 펼쳤다고 말한다.물론 보편종교가 정치적,사회적 변혁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가라타니는 '자본=네이션=국가'가 완결체이며 영속체다.그러므로 국가의 사멸을 꿈꾼다거나 자본에 대한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에 대해 경계한다.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궤적하에 있다.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어소시이세이션'을 이루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칸트를 인용한 가라타니는 국가의 본성이 '반사회적인 사회성'에 있다고 말한다.이런 속성은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서 입증된다.가라타니는 이러한 자기실현적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현실주의적 타협안을 세계연합 같은 것에서 찾는다.칸트가 그러했던 것 처럼.그는 각 국의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하는 방안을 제시한다.이것은 일종의 '위로부터'운동의 양상을 띄며 그 결과 새로운 교환양식에 의한 새로운 사회가 구축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세계공화국으로>는 칸트의 아이디어와 마르크스의 비판적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그는 그의 주요 주장들이(어소시에이션 같은)것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규제적 이념'이라는 말로 현실성문제를 피한다.그러므로 주장들이 현실성이 있네 없네 따지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그렇지만 마르크스를 재구성하면서 마르크스 이론의 실천성 문제들까지 재구성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그의 주장과 논증 하나하나를 비판할 능력은 내게 없다.그렇지만 가라타니가 전개하고 있는 자본=네이션=국가의 연결고리와 그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의미에서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내용 또한 손도 못 댈만큼 어렵지는 않다.춤추듯 읽자.거대한 주제이며 알려고 들면 한 챕터마다 논쟁과 공부거리가 넘쳐나는 것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즐거운 자극 아닌가..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 접기
드팀전 2007-09-06 공감(24) 댓글(2)
Thanks to
공감




사적유물론의 후퇴, 교환양식의 전경화




사적유물론의 후퇴, 교환양식의 전경화

<언어와 비극> 학술문고판 후기의 마지막에서 고진은 "옛날에는 추상적인 사고실험으로 보였을 사항이 구체적인 결론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 술회는 <트랜스크리틱2>로 명명되었던 바인, 도서출판b의 고진 컬렉션 <세계공화국으로>,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으로 이어져 지극히 젊은 이동의 비평 공간을 창출해낸다.

그 첫 권이며 고진이 "그때까지 써온 것을 콤팩트하고 알기 쉽게 정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완성된 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으로>이고, 이는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이라는 트랜스크리틱 후속작의 트레일러 내지는 소아용(청소년용) 아이템인 셈이다.

때문에 여러모로 <세계공화국>은 <언어와 비극>을 심심찮게 들춰보게끔 만든다. 해체적 수사학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듯 짐짓 정석적인 수사를 사용, 적절한 반복을 통해 눈깜짝할 새에 해체해내는 것과 세계사의 구조를 정초하는 단계에서 구성적 이념을 동원하면서도 규제적 이념으로 회유해 내는 비평전략은, <언어와 비극>에서 사용되었던 강연문투(문체)에서 감지되었던 조곤조곤하면서 동시에 확신에 찬 청중의 수용을 강제하는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가장 반발이 거셀 것이라 예견되는 지점은, 마르크스가 프루동의 경제학에 대한 순진한 이해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국가'에 대해 순진했다는 오류를 밝히면서 사회구성체의 '생산양식'을 '교환양식'으로 이동시킨 지점이다. (그가 사적유물론이나 가치법칙으로부터 사상된 '국가'라는 이념을 구해내기 위한 이러한 규제적 이념형은 전적으로 베버에 대한 숙고에서 탄생했다고 혼자 생각해보지만, 그럼에도 일견 비약으로 받아져 반발이 심할 것이라 예상된다.)

역사의 진행을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계급투쟁에 대응하는, <보이지 않는 교환>이면서 동시에 교환으로 존재하는 약탈-재분배의 국가적 교환양식을 목표로 하기에 이런 전략의 장점이란 규정되고 구성되었던 그간의 이념형들을 재배열 하는 강력한 효과를 가져온다.

"경제과학이 모든 생산약식에 대한 일반과학이 아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특수과학이다" 라는 구절이나, "소비자 운동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고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인 투쟁이다"라는 일견 당연해보이는 주장이 강한 환기력을 가지는 이유는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세계사적 구조의 재편성의 뒷받침을 단단히 받고 있기 때문인데, '교환양식' '소비자 운동' '교환' '국가' 등은 광범위한 새로운 의미망에 둘러싸인 귀환을 거듭 촉구받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탄생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것의 재발견과, 흥미로운 '화폐'에 관한 통찰은 비교적 고진의 '아주변'적 독자라 자평하는 나에게 이전의 관념들을 싹 잊게 만들 새롭고 기분좋은 강제력을 선물해주고 있다.

새롭게 눈에 띄는 현상(?)은 그가 국가를 내부에서 보는 것을 지양하는 방법으로 칸트의 세계공화국에 눈을 돌리듯, 마르크스가 경제학에 몰두하는 동안 사상된 국가의 이념을 가치 중립성과 소심할 정도의 진중함으로 악명높은(?) 베버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구조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마르크스의 외부를 통해 마르크스를 비판-지양해 나가기 위해 동원된 철학자-사상가들이 세계사의 재배열을 위해서도 열심히 동원되는 것 또한 매번 고진 읽기의 흥을 부추기는 지점이 아닐 수 없는데, 월러스틴, 사미르 아민, 폴라니, 아렌트 앤더슨 등 그가 자주 인용하는 사상가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홉스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칸트가 말한 '자연의 간지'를 선취해냈으나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던 맹아적 홉스가 구수한 이스트가 첨가되어 시원하고도 걸죽한 향취의 고진하우스 맥주로 재탄생한 것.

허나 나와같은 '아주변' 독자 말고라도 고진하우스의 주메뉴를 기다리는 분들이 더욱 많을 듯싶으니, 하루 빨리 시음회에서 음용된 저 숙성한 와인의 진면목과 '향연'하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

덧붙여 고진의 이러한 시도가 일견 명백하게 보이지만 해결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전쟁, 환경, 양극화 등 전지구적 문제를 염두해두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모든 이념을 이야기로 부정하는" 니힐리즘이나 시니시즘의 자기경멸적 아이러니, 혹은 자기기만의 수사학과 정면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충분한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과연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 내 안에, 내 안에 자리잡았구나!






- 접기
rattlebag 2007-06-07 공감(22) 댓글(0)
Thanks to
공감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선 가라타니 고진의 출사표!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선 가라타니 고진의 출사표!





현재 한국맑스주의학계에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들도 있으리라. ‘맑스주의학계’가 아니라 ‘문학계’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논문이 2004년 『문학동네』겨울호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당시에도 그 파장이 만만찮았지만, 그 글이 다시 작년 4월에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이라는 책의 표제작으로 실려 출간되면서, 대부분의 문학잡지들이 ‘문학의 종언’ 테제를 특집 타이틀의 일부로 삼거나 ‘소설’과 ‘비평’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담은 기획들을 경쟁하듯 실었던 점을 볼 때, 일본 출신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한국 문단의 위기논쟁을 더욱 가열시킨 주범이라 할만하다. 가라타니 자신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것이 바로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넘쳐나던 한국문학계에 그의 존재와 언설이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근대문학의 기원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밝혀낸 그 근대문학의 종말까지도 선언해버린 가라타니가 문학을 그렇게 떠나 버린 후, 몰두해왔던 작업이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2005년에 『트랜스크리틱』(한길사)이 출간되었을 때부터 이미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 책의 번역 출간 후 얼마 못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가 문단에서 워낙 강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작 그의 새로운 혁명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제4의 교환양식으로서 ‘어소시에이션’의 구상은 상대적으로 담론의 장(場)에서 묻혀 버린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근대문학의 종언’이 문단에서 일으켰던 파문만큼, ‘세계공화국’도 맑스주의학계에서 논쟁의 불씨를 지필 수 있기를 바래본다.


자, 그럼 이제 가라타니 자신의 말대로 『트랜스크리틱2』의 압축판으로서 “고등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좀 살펴보자. (그런데! 과연 어떤 고등학생이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가라타니의 책을 지속적으로 읽어온 대학생인 나도 그 내용의 이해가 만만찮아 수도 없이 그의 전작(前作)들을 다시 읽어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책에서, 가라타니는 국가를 수탈(약탈)과 재분배라는 교환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국가는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국가 없이 자본주의는 없으며, 자본주의 없이 국가는 없다고 까지 말한다. 이를테면 아메리카의 기업은 다국적 기업이지만 배후의 아메리카라는 국가 없이는 기업행위를 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자본, 네이션(=민족=국민), 국가(state), 어소시에이션의 구조가 그려지는데 이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다. 바로 어소시에이션 X는 자본, 네이션, 국가의 연관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어소시에이션 X는 무엇인가.


가라타니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세 가지 형태의 교환이 있는데 이는 상품교환, 호수제(reciprocity), 수탈(재분배)이라고 말한다. X란 유토피아이다. 그것이 제일 처음 나타난 것은 보편종교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부정하고, 또 시장사회를 부정하는 것에서 나왔다. 물론 그것이 발전함에 따라 반드시 공동체나 국가의 종교가 되어버리지만 X는 국가와 자본의 ‘지양’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나는 초월론적 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X는 종교적인 또는 이념적인 것에 매우 가깝다. 전술한 바와 같이 X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에 대한 대항 속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자본제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제 안에서 그것을 만들 계기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투쟁’이나 그가 실제로 벌였던 NAM(New Association Movement)과 그 속에서 실험되었던 ‘지역통화(LETS)’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생산과정에서가 아니라 유통과정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시민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추상적인 ‘시민’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소비만 하는 소비자는 어디에도 없으며 시민이나 소비자도 노동자로서는 스스로 환경을 파괴하는 물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잉여가치가 늘 서로 다른 가치체계의 차액에서 발생한다면, 노동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잉여가치는 소비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자본가의 입장에서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자가 실제로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 사이의 차액에 있다면,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것을 스스로 다시 살 때, 그 차액이 총자본의 잉여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진정한 계급의식은 생산지점에서는 무리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를테면 노동자로서의 국제적 연대는 곤란하지만, 소비자로서의 연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X란 제4의 교환형태의 공간으로서 상품교환, 호수제, 수탈-재분배라는 자본주의의 교환형태를 교란하고 이에 대항하여 결국 이것들을 ‘지양’하는 새로운 ‘교통공간’인 것이다.


여기서 가라타니가 제시하는 ‘교통’의 개념은 자신의 출세작인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부터 『탐구』1, 2와 『은유로서의 건축』을 지나 『윤리21』에서 그 맹아를 드러내고, 마침내 『트랜스크리틱』과 『세계공화국으로』에 이르러 만개한 개념으로서, 그간 맑스주의자 내부에서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맑스의 'Verkehr'라는 단어에 새롭게 의미부여를 하고 이를 바흐친,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칸트, 스피노자, 홉스, 들뢰즈&가타리 등이 이룩한 사유의 성과들과 결합시켜 마침내 “교환=교통=커뮤니케이션=진정한 공동체(사회적 공간)=어소시에이션”의 등식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하는 바, 종래의 ‘생산자=노동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소비자=노동자=시민’의 입장에서, 곧 유통과정의 입장에서 국가와 자본을 지양하는 어소시에이션의 혁명 전략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그 판단은 책을 다 읽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대안을 창출하는 적극적인 비전에 목말라 있는 자들은 거두절미하고 일단 읽어 보시라.

- 접기
흔적을 찾아서 2007-07-28 공감(8) 댓글(0)
Thanks to
공감




비평가의 정신


+ 더보기
로쟈 2007-06-11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고진의 새로운 전망 찾기





1. 교환형식의 구분에 대하여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트랜스크리틱> 이후로 발표한 일종의 개론서인 이 책에서, 그는 크게 4가지로 구분되는 교환 양식을 제시한다.


그 교환양식은 아래와 같다.


A - 호수(증여와 답례), B -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C -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D - 교환 X(이상적 교환)


이 네 가지 교환 양식은 각각의 자본제 사회구성체와 어울리게 된다.


A - 호수(증여와 답례) - 네이션
B - 재분배(탈취와 재분배) - 국가
C -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 자본
D - 교환 X(이상적 교환) - 어소시에이션


가라타니 고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D양식, 즉 '어소시에이션'이지만 그것의 실현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그 양식이 일어날 단초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으로서 1870년 파리 꼬뮌이나 1960년대 신좌파에서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100쪽까지 이 책을 읽었을 때 보이는 것이며,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보편 종교와 사회주의 간의 유사성'이다.


"사회주의는 보편종교로서 개시된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편종교가 개시한 것은 국가나 공동체에는 없는 '윤리'인데 그것은 바로 새로운 교환양식(어소시에이션)을 말합니다."(100쪽)



2. 왜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인가?


가라타니 고진의 이 책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관계가 '노-자 관계'로 정립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역시 교환양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물론 그것은 나의 해석이긴 하지만).


"영국에서 산업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것은 생산수단을 갖지 않아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지만, 그것은 단순히 (...) 중요한 것은 이 프롤레타리아가 노동력을 팔고 얻는 임금으로 생산물을 사는 소비자라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소비=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의 증식과정의 일환으로서 있는 것입니다."(145쪽)


결국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과 그의 소비가 교환하는 양식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자 관계'가 지배적인 것이 된다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견해가 아닌가 한다.


한편, 노동자가 곧 잉여가치를 실현하게 만드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자본가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춘다는 견해가 나타난다.


"노동자는 개개의 생산과정에서는 예속된다고 할지라도 소비자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본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에 대해 '예속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151쪽)


아마 여기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하는 '소비자 운동'이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한다.



3. 자본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소비자로서의 대항'을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혁명은 이미 유효성을 상실했다.


"그것들은 자본주의를 그 선진적,중핵적인 장에서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그것들은 결국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자본제의 발달과 더불어 자본과 경영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 경영자와 노동자는 더 이상 신분적 계급이 아니라 계급적인 위계제가 됩니다. (...) 개별기업에서 경영자와 노동자의 이해는 일치합니다. 때문에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경영자와 같은 의식을 가지며 특수한 이해의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 그에 반해 예를 들어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소비자,주민 쪽이 민감하며, 곧바로 세계시민적인 관점에 섭니다."(160~161쪽)


--> 이미 계급적인 위계는 그 명확성이 희미해졌으며,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존의 혁명론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큰 논란이 따를 것이다.


"노동자는 유통과정에서 소비자로서 나타납니다. 그때 그들은 자본에 대해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 산업자본이 노동자가 만든 것을 스스로 소비자로서 다시 서는 시스템으로서 확립하게 되면, 바꿔 말해 소비사회가 되면 옛 계급투쟁이 무효가 되어가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 소비자란 프롤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서 나타났을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비자 운동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고, 또 그와 같은 것으로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유통과정에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를 강제할 수 없습니다. (...) 구입하는 것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통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말하자면 보이콧입니다."(161~162쪽)


-->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곧 소비자라는 상식적인 논의에서 출발하여, 자본가 측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소비자로서의 행동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투쟁이 될 수 있을 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기존의 소비자 운동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소비자 운동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인식한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다.
이에 따른다면, 이랜드에 대한 민주노총과 시민단체 등의 불매운동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새로운 호혜의 공동체, 네이션(민족)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민족)이 기존의 원초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교환양식(호수적 교환)이 회복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이션은 시민혁명에 의해 절대적 주권자가 타도되고 개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할 때에 성립합니다. (...) 프랑스 혁명에서는 자유,평등,우애라는 슬로건이 주창되었습니다. 그 경우 '우애'는 개개인 간의 공동성을 의미합니다. 네이션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애'라는 말로 제시되는 감정입니다. (...) 감정이라는 형태로밖에 의식되지 않는 '교환'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67~168쪽)


"농업공동체 경제에서는 단지 살아가는 자들의 호수뿐만 아니라 죽은 자(선조)와 이제부터 살아갈 자(자손) 사이에도 상호적인 교환이 상정되어 있었습니다. (...) 농촌공동체의 쇠퇴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선조와 자손 사이에 둠으로 얻을 수 있는 영속성이라는 관념도 절멸합니다. (...) 그것을 상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네이션인 것입니다. (...) 그것은 네이션이 상품경제와는 다른 타입의 교환, 즉 호수적 교환에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71쪽)


--> 이에 따른다면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에서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네이션(민족)과 같이 영속적이고 통시적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계급은 공시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통시적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지는 못한다.



5. 네이션은 인간의 어떠한 측면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민족)'의 개념이 감성과 결합되면서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역시 일종의 교환(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것입니다. (...) 홉스는 계약이란 권리의 상호양도라고 말하지만, 그가 근저에서 발견하는 계약은 폭력에 의해 강제된 계약인 것입니다."(125쪽)


"홉스는 주권자에 대한 복종이 그것에 의해 안녕을 획득하는 교환이라는 것을 간파했습니다."(128쪽)


--> 근대 서양사상사에서 영국의 홉스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은, 국가의 안정보장과 시민의 권리양도라는 교환에 의해 국가라는 게 성립되었다고 하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설명이다. 아마 '네이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네이션'의 개념은 바뀐다고 한다.


"헤르더는 근대의 주관철학에 대항해 풍토, 언어, 그리고 언어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는 감정적 존재에서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 국가는 홉스나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론에서 보이는 국가와는 다른, 말하자면 '감정'에 입각한 것 즉 네이션이 되는 것입니다."(180~181쪽)


--> 원래는 상상물에 지나지 않는 네이션이, 감정적인 것과 결합하면서 실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서 상상적인 것(네이션)은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6. '다중'은 왜 아닌가?


가라타니 고진은 네그리에 대해 비판적이다(참 반갑다~).
하긴 네그리의 주장이 가지는 허술함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시장'입니다. 여기서 국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역사적으로 1848년 혁명은 민족이나 국가의 무화이기는커녕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국가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불러왔던 것입니다."(215쪽)


-->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이제 국가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전혀 실증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는 내 생각과 비슷하다. 특히 가라타니 고진은 국가와 자본은 태생이 다르다는 점에서(왜냐하면 국가와 자본주의는 교환 체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상부구조로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을 극대화시킨 이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밝히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스피노자에게서 다중이라는 개념을 끌어왔지만, 이것은 억지스러운 다시읽기입니다. 왜냐하면 다중은 원래 홉스가 사용한 말이고, 그것은 자연상태에 있는 다수의 개인을 의미합니다. 개개인이 각자의 자연권을 국가에게 양도하고 다중의 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시민 또는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스피노자도 같은 의견입니다."(217~218쪽)


--> 네그리와 하트는 자신들의 '다중'론을 스피노자에게서 끌어왔지만, 실제로 스피노자는 다중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7. 세계 변혁은 어떻게 이룰 것인가?


국가의 자립성 테제는 현재 변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주제이다. 마치 네그리가 그런 것처럼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자립성을 배제한 생각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강해짐을 생각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국가를 생각해야 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제시하는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변혁'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의 압력', 즉 각 국가의 권력 양도를 통한 세계공화국 수립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으로 가는 길이라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국가는 단순히 내부 국민들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다른 국가와도 상대하는 '자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의 운동만으로 국가를 바꾸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국가의 강해짐을 이끌 수도 있다(대혁명 직후의 프랑스,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가 그런 것처럼).

- 접기
pak018 2008-03-02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