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9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맹자(孟子)를 상우(尙友)로 삼다.

그때 학제로는 소학교를 3년 다녀야 졸업을 하는데 2년만 다니고는 다시 서당 공부를 시작하였다. 왜 다시 서당으로 가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하였어요." 이때 류영모는 13살의 홍안(紅顔)의 소년이었다. 한 과정을 마치고 다른 데로 옮긴 것이 아니라 도중에 그만두고 다른 데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류영모가 변덕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기에 놓이자 나라를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까, 저렇게 하는 것이 옳을까 갈팡질팡 헤맨 것이었다.

그때 이 나라의 운명은 길가에 버려진 여인이라면 청국·일본·러시아는 서로 차지하겠다는 짐승 같은 숫놈들이었다. 그리하여 저희들끼리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였다. 1894년에 청국과 일본이 맞붙어 싸웠는데 1년 만에 일본이 이겼다. 이것이 청일(淸日)전쟁이다. 그리고 10년 뒤인 1904년에 러시아와 일본이 맞붙어 싸웠다. 1년 만에 일본이 이겼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치욕스럽게도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러일전쟁이 끝나자마자 1905년에 사실상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으로 체결되었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10년 동안에 끊임없는 혼란의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쳤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894년에 동학란이 일어났고, 1898년에는 민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류영모가 1903년에 수하동소학교를 그만두고 서당으로 옮긴 것이다. 그 이유를 우국충정에서 그랬다기에는 너무 어리고 생존본능에서 그랬다기에는 너무 느슨하다. 그리고 보면 류영모의 대답이 함축성 있는 솔직한 대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다운 벗이 있고 재미있는 산수가 있는 수하동소학교를 버리고 새로 가기로 한 서당은 삼계동(부암동)에 있는 큰집 사랑방에 차린 글방이었다. 명절 때와 제사 때에 자주 온 큰집이다. 글방에 다닐 때 종로에서 용산까지 오갈 전차(電車)의 궤도를 시설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윤치호(尹致昊)의 별장이 서당 가는 길가에 있어 이따금 윤치호의 모습을 보았다.

1995년에 종교학자 양현혜(梁賢惠)가 '윤치호와 김교신'이라는 글을 썼다. 두 사람은 1945년에 죽었다. 김교신은 해방 전에 발진티푸스로 죽었고, 윤치호는 광복 뒤에 친일(親日)을 뉘우치며 자살했다. 양현혜는 허위의식에 의해 윤치호는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죽음을 뜻하고 김교신은 진실과 정직으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창조적 재생(再生)이라 하였다. 류영모·김교신·함석헌·송두용·류달영 등 「성조조선」집필자들은 진리로 민족정신을 지켰다. 이들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끝내 하지 않은 한국인(韓國人)으로 남았던 것이다.

류영모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서당에서 맹자(맹자)를 배웠다. 서당 선생은 이운(怡雲) 김인수였다. 류영모는 15살에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에는 어떤 신앙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니 전해오는 다신(多神)적인 미신을 여느 가정처럼 믿고 있었다. 류영모가 예수를 믿으면서 그러한 미신의 흔적을 부숴 버리고 태워 버렸다. 아우 영철(永哲)이 말하기를 "그때 형님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는지 몰랐어요"라고 하였다. 

종교의 경전으로는 『맹자(孟子)』를 맨 먼저 만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다만 학문으로 배운 것이지 신앙의 차원은 아니었다. 훗날에 가서야 유교의 경전으로 보았다. 그리고 『맹자』를 좋아하였으며 좋아한 만큼 영향을 크게 받았다.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의 정신은 모세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맹자로 영향된 것입니다." 

류영모는 맹자에서 발췌한 맹자초를 YMCA에서 가르쳤다. 맹자를 다 가르치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맹자의 진심하편에 나오는

"언(仁) 져 아바 아들, 옳게 하라 섬기(臣)오. 차리어(禮) 손(賓)맞이요. 슬기에 닦아난(賢)이요, 씻어 나기는(聖) 하늘 길이란, 시킨지라 바탈로 있겠거늘, 그이(君子)는 시킴(令)이라 이르지 아니한다"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 - 맹자 진심 하 24장)를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장자(莊子)·맹자도 다 성령(聖靈)을 통했다고 생각해요. 성령을 통치 않고는 그렇게 바탈(性)을 알 수가 없어요. 맹자·장자는 성령을 통한 이라 뚫어 본 이에요. 볼 걸 다 본 이에요. 어느 날 『맹자』를 펼치니까 이게 나오지 않아요. 한 번 보았더니 이렇게도 맹자가 깊었나 하고 섬뜩했습니다."

류영모는 맹자의 대장부(大丈夫)를 좋아하였다.

"맹자의 사나이(大丈夫)라는 소리는 참으로 시원한 말씀이에요.
사나이 살기는 누리 넓은 데,
서기는 바른 자리에,
가기는 환희 넓은 길로,
뜻대로 되면 씨알(民)과 함께 가고,
뜻대로 안 되면 나 혼자서 가련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 맹자 등문공 하 2장)

맹자의 이 말씀은 훌륭한 바이블입니다. 성경말씀 안 될 게 없습니다."

이 밖에도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야기(夜氣), 심조지(深造之)등의 류영모의 맹자 강의는 맹자가 와서 듣는다고 해도 빙그레 웃으며 흐믓해하였을 것이다. ▣


출처 : "진리의 사람 多夕 柳永模" 박영호 著 도서출판 두레 刊 (2001) 中에서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