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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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mile l 2017-07-0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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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시대 -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5월
평점 :








우리의 삶은 서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장 내 몸에 걸친 것들을 살펴 보면 옷, 신발, 모자, 시계, 목걸이 할 것 없이 불과 120여년 전에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것들 투성이다. 가마를 타던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은 서양에서 처음 만든 자동차를 타고 있다. 구멍을 다섯 개 뚫은 한지로 된 책들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다. 천 년 이상 한문으로 된 문장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자신의 사상을 펼쳤지만 그 후손들인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소리내어 읽어내지도 못한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전방위적인 전통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잘먹고 잘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출발점은 ‘서세동점’이라는 근대사의 엄청난 사건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0년간 이 땅에 살던 최고 엘리트들이 평생을 걸고 연구했던 유학은 일시에 야만의 대표성을 띠고 우리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잊혀지는 정도가 아니라 무슨 문제만 생기면 조상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인 유학에 정신을 파느라 개방이 늦어져서 그렇게 됐다는 성토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진다. 거기엔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열등하다는 오리엔탈리즘이 바탕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양화, 서구화를 향해 쉴새 없이 달려왔다. 90년대 중반에 한창 유행했던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구호도 미개한 동양을 벗어던지고 앞선 서양 문명에 당당하게 동참하자는 외침으로 들린다. 정치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공 이후 한국인들은 산업근대화와 정치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이 역시 열등감에 근거한 서양 따라잡기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병한 씨는 당당하게 민주주의는 인류의 종착역이 아니며 민주주의야말로 인류 전체 역사에서 아주 일시적인 예외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서구의 번영은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와 그로 인한 약탈 덕분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가 그리스에서 아주 잠깐 꽃피웠다가 2,500년간 자취를 감췄었다는 사실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가장 안정적으로 기능했던 정치체제가 천하에 기반한 중화질서였다는 점을 예리하게 끄집어낸다.


일관된 흐름으로 작성된 학술서적이 아니라서 독해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병한 씨의 주장을 아주 거칠게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화질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치체제였으며 그것을 뒷받침한 유교 사상은 유럽에 전파되어 전제군주를 계몽군주로 뒤바꿀 정도로 콘텐츠 면에서 손색이 없었다. 다만 근대의 짧은 시기에 서양의 산업혁명은 백인에 의한 약탈 경제(자본주의)를 성립시켰고 그 약탈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민주주의였을 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인류의 종착역이 아니며 조만간 백인 중심의 약탈 경제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정치 체제가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경멸하고 무시해왔던 중화질서일 가능성이 크다.


일단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데는 성공했다. 서양식 복장과 서양식 어휘, 서양 영화, 서양 음식, 서양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 미개하고 야만적인 중화질서가 다시 찾아온다니! 놀랠 노자다. 더구나 아시아 유럽을 넘나드는 저자의 활동 범위가 주는 설득력 또한 매우 크다. 중국의 양회가 열릴 동안 북경에 머무르고 있었다니!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는 점이다. 의문이 생길 때마다 연필로 필기를 하며 읽었지만 워낙 하나의 관련 논리들이 책 안의 이 글 저 글에 산재(散在)해 있고 논리 자체가 난마처럼 얽혀 있어서 독자로서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찾아내기 힘들었다. 처음엔 세 가지 큰 주제로 나누어 저자의 논리를 정리하고 그에 대한 나의 의문점이나 반박을 제시하려 했으나 두서없이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저자의 논리를 정리하는 일 자체가 고된 노동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저자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시간에 따른 순서를 무시한 채 주제별로 모아놓으면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여기에선 민주주의에 관한 쟁점만을 대상으로 논의를 해보려 한다.



저자의 말대로 분명히 중화질서는 하, 은, 주 삼대 이래 아편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에 비하면 정말 일천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로부터 ‘중화질서로 반전할 것이다.’ 혹은 ‘중화질서로 반전해야 한다.’는 예측이나 당위가 도출된다는 것은 나를 무척 당혹케 했다. 그런 식이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만민평등사상이 역사에 등장한 건 불과 몇 백년 전이고 훨씬 더 오랜 기간 노예제가 존속했으므로 결국 인류는 다시 노예제로 돌아갈 것이다. 혹은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가 나와도 할 말이 없다. 오래되면 성공인가?


물론 저자의 논리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보편적 민주주의란 것이 서구에 의해 만들어진 서구 우월주의의 한 돌출된 모습이라는 것과 근대 경제 발전은 사실 식민지 지배와 약탈 때문이지 민주주의와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지적은 따끔하게 느껴진다. 즉, 서양식 보편적 민주주의를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으며 각 국가와 지역마다 역사적 맥락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풍토에 맞는 복수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움츠러든다. 첫째, 그런 얘기는 왠지 익숙하다. ‘한국적 민주주의’. 바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보편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에게 박정희는 유신 헌법을 내밀며 “이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강변했다. 사실상 변태적 강변이었다. 둘째, 민주주의가 보편성을 띠는 이유가 서양의 우월주의와 식민지 약탈 경제의 폭력성을 은폐하려는 목적을 띠었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보편적 민주주의엔 순기능이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동등하며 평등하다는 이상과 이념을 그 보편적 민주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혼동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이다. 현실의 사태를 근거로 반전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상도 이야기해야 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민주주의가 진실로 자본주의 식민지 약탈 경제를 은폐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민주주의에서 희망을 거는 부분은 그러한 현실이 있지 않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가치는 그것이 지향하는 이상에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그 이상이 지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결국 모든 역사와 지역, 국가, 민족을 넘어서 하나의 형태로 드러나며 하나로 수렴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모든 인간이 과연 똑같고 동등하고 평등하구나! 라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저자는 그것을 저잣거리 개밥그릇 차버리듯이 가볍게 걷어 차버렸다.


저자가 중화질서로의 회귀(반전?)를 이야기하는 근거는 또 있다. 베스트팔렌(1648) 체제로 형성된 국제법과 근대적 주권 사상이 전세계에 폭력적, 일방적으로 적용되면서 국제질서가 국가간의 규모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구 13억의 중국과 인구 2천만의 스리랑카가 주권 국가로서 대등한 권리를 행사할 때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13억의 삶과 2천만의 삶이 동등하게 다루어지는 현실에 대해 저자는 부당함을 토로한다.


사실 분명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국민주권시대라면 더 많은 국민을 가진 국가가 더 큰 주권을 갖는 게 맞는 것 같다. 특히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아도 더 큰 국가에게 더 큰 주권을 인정할 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부합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점으로부터 “중화질서로의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넌센스다.


과거 봉건시대의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왕조와 왕조 사이에서 이루어졌을 뿐 백성의 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중화질서를 떠받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백성의 수가 아니라 중국이 생산해내는 문화적 컨텐츠와 철학 사상인 것 같다. 물론 역사를 통틀어 중국이 주변국에 비해 월등히 인구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떤 문헌에도 중국의 종주국 지위를 인구수에서 도출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중화와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인구수가 아닌 공맹의 도에 있었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소중화를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화질서로의 반전”을 말하려면 다시 중국의 문화 컨텐츠와 철학 사상이 세계 중심으로 우뚝 선다는 전제 조건부터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최근 중국 당국이 공자학당을 전세계에 세우고 유학을 국가적으로 연구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잘 설명된다. 저자는 이 연결 고리를 아예 통째로 누락해 버렸다.


다시 저자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13억과 2천만의 삶을 1:1의 주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혁신적인 주장의 바탕에 깔린 개인주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각 개인의 존엄함을 인정해야 13억이 2천만보다 더 비중이 크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저자는 역사 발전의 방향이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통념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민주주의가 개인의 가치를 발견해내고 그것을 정치 시스템으로 구성해 내는 정치 이념이었다는 점만은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지니려면 ‘개인’의 존엄함을 보장하는 정치이념이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선언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선언이 이루어지는 순간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라는 말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다. 그냥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면 된다.


쉽게 말하면 저자는 의도한 것은 아닐지언정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개인의 가치와 존엄을 오늘날 현실에 살려놓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는 사실은 도외시하고 그것을 식민지 약탈 경제를 은폐하려는 도구인 것처럼 왜곡하려 시도했다. 보편적 가치인 ‘개인’을 인정하는 순간 역사와 지역을 반영한 다양한 민주주의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이슬람의 여성 매매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긍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정리하자면 저자의 말대로 오늘날 민주주의가 한계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과거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중화질서와 유사한 형태로 수렴될 가능성이 있다고는 해도 본질적으로 봉건 시대의 중화질서와 앞으로 찾아올 그것과 유사한 새로운 정치체제는 완전히 다르다. 저자의 오해를 여러 곳에서 숱하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저자가 유학의 여러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분법적으로 적용하여 개인과 사회를 구분한다. 이것은 서양 문화가 유입된 근대 이후의 독법일 뿐 결코 유학에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나는 가정의 구성원이자 국가와 천하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내 몸을 닦는 것은 곳 가정을 닦는 것이고 나아가 천하를 닦는 것이다. 수신(修身)이 곧 제가(齊家)이며 곧 치국(治國)이며 평천하(平天下)다. 그러므로 유학에선 개인의 수양이 곧 세상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 원리가 거경궁리(居敬窮理)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학에서 정치(政治)란 공적 영역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이었다. 왜 임금에게 그토록 경연을 강조했는지 모르겠는가.


중화질서로의 반전이 결국 유학 개념에 대한 오독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반전이 아니라 왜곡과 혼란일 수 있다. 왜냐하면 중화질서라는 껍데기를 입은 서양 정치이념 및 정치철학의 적용에 지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의(仁義)에 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유학에선 “군신 간에는 오직 ‘의(義)’가 있을 뿐이었다(p204)”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仁과 義는 분리할 수 없는 개념으로 이 둘이 태극의 음과 양처럼 조화되고 어울려야 비로소 현실을 바르게 하는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仁義를 내적으로 인식하는 영역이 知이고 그것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영역이 禮이다. 이렇게 仁義禮知가 완성된다. 義와 利를 대척점에 놓는 것은 맹자에서 연유한 것인데 그 논리는 왕조 중심의 관점에서 백성 중심의 관점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맹자에서 利는 왕조・군주 중심의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개념이었으므로 국회의원과 유권자가 利로 연결되었다는 저자의 해설은 利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맹자의 利는 왕조・군주의 利일 뿐이고 저자가 말하는 利는 유권자와 국회의원을 모두 만족시키는 利이다. 이 둘은 같은 글자이지만 내포하는 의미와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중화질서가 민주주의라는 예외적 현상을 거쳐 다시 중화질서로 반전한다는 설명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논점이 많다. 전자의 중화질서에는 ‘개인’이 담겨 있지 않지만 후자의 중화질서에는 명백히 ‘개인’ 담겨 있다. 그건 분명 민주주의의 공헌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반전이 아니라 바로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발전이다. 반전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어(혹은 매혹되어)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지 저자에게 진지하게 반문한다.


그러므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 도래할 중화질서(이렇게 이름 붙이는 게 적당할지는 별개의 논의로 친다)는 단순히 과거의 중화질서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저자의 직관이 탁월하여 정확하다면 봉건 중화질서와 민주주의를 모두 겪은 문화권에서 바로 그 새로운 중화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겠는가? 바로 한국이 아닌가?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도 않은 중국 학자들이 미국에 모여 민주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논의한다는 소식을 비판적으로 전하지 못하는 저자에게 안타까움을 전한다.


우리는 중화질서와 민주주의를 모두 경험해 본 역사적 자원이 있다. 그 사실로부터 새로 다가올 시대를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한다. 그것은 반전의 시대가 아니라 법고창신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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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쉬운 논리적 파탄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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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mile l 2016-04-1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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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위해서 - 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개정증보판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6월
평점 :






박유하씨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일본 바라보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 객관이란 한국과 일본이 모두 사실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주장에 대해선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이 책이 과연 한국과 일본이 모두 사실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지에 대해선 지극히 부정적이다. 짧은 리뷰를 통해 몇가지 박유하씨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치명적 오류가 존재함을 밝히고 싶다.

일본만이 사악하고 악랄한 나라였다고 말한다면 편파적일 것이다. 한국 역시 베트남에서 "한국인도 악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열렬히 증명한 바 있으니까. 그러나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한일 관계에 끌어대어 "그러니 우리는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에두르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오류다. 마치 2005년 중국에서 남경대학살을 비난하며 격렬한 반일시위가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이 "중국인도 티벳인을 학살했다"며 "중국인은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오류다. 쉽게 말하면 중국인이 티벳인을 학살했다고 해서, 한국인이 베트남인을 학살했다고 해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아니, 일본의 전쟁범죄를 논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경우를 끌어대는 것 자체가 논점 일탈의 오류에 불과할 뿐이다.

박유하씨는 우리 내부에도 가해자의 모습이 존재한다며 일본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논리적 파탄이다. 이 문제의 쟁점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범죄에 관한 것이지, 조선인과 일본인이 등장하는 '민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안부를 모집하고 수송한 실무자 가운데 조선인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가해자인가? 여기에서 우리란 누구인가.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박유하씨가 언급한 '조선인'이란 사실은 '일본인'이다. 박유하씨는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한 민족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자고 끊임없이 외치면서도(그녀의 다른 저서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참조) 사실은 일본에 세금을 내고 일본 국적을 갖고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믿고 있던 일본인 가운데 특정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임의로 '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떼어내어 '우리'와 동일시해버린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 근거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인데 그녀는 이미 '민족' 개념 자체를 부정했으므로 결국 논리적 파탄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착각은 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어서 여간해선 구별해내기조차 쉽지 않다. 박유하씨 자신이 "식민지 젊은이로 하여금 군대에 지원하여 일등 시민이 되기를 열망하게 만든 일본이라는 국가 체제의 폭력성"에 대해 비판한다고 말하면서도 위안부 문제에선 슬그머니 민족이라는 틀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정작 "일본이라는 국가 체제의 폭력성"을 은폐해 버렸다. 박유하씨 자신도 이것이 "국가"의 문제인지 "민족"의 문제인지 혼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만일 혼동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면 이보다 비열하고 악질인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나는 위안부 문제를 논의할 때, 일본인과 한국인의 민족적 대립으로 귀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가해자 일본인과 피해자 한국인이라는 도식은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을 드러내어 일본이라는 국가로 하여금 철저한 반성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나라도 일본의 반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해자 가운데에는 '조선인(엄밀히 말하면 조선지역 출신자)'도 있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오히려 가해자 일본인과 피해자 조선인(한국인)이라는 도식을 조장하여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논리다. 문제의 본질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에 있는데 박유하씨는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민족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민족을 지워버리면 그 가해자 '조선인'도 사실은 일본인이다. 결국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이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가가 그 폭력의 피해자에게(한국 정부에게 말고) 한번도 공식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분노를 촉발하게 된다.

그런데 박유하씨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라며 집요하게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정대협 관계자들을 공명심에 사로잡힌 협잡꾼이라고 몰아부친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그러하니 설사 일본인 가운데 침략을 부정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매도하는 무리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문제 제기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처구니 없게도 갑자기 박유하 씨는 위안부 기금에 성금을 보내온 일본인들의 편지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본 시민사회 차원에서라도 이렇게 위안부 피해자에게 성금을 보내고 있으니 만족하라는 것인가?

'침략은 없었다'는 일부 일본시민단체의 발언 보다 '침략을 반성한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저자는 겨우 몇 페이지 뒤에선 위안부에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오만한 태도 대신에 일부 일본시민들의 자발적 성금 모금 움직임에 주목하라며 감동을 받을 것을 독자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어떤 부분은 정부의 공식 입장이 중요하고, 어떤 부분은 시민들의 움직임이 중요해지는가?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 한 권 안에서 도무지 원칙도 일관성도 찾을 수가 없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에서 저자는 무지에서 비롯된 허투른 비판을 하고 있는데 하나 하나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지적하는 그녀는 정작 조선총독부 때문에 훼손되고 망가진 경복궁의 역사적 가치외 의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곳에 지어도 되었을 총독부 건물을 굳이 궁궐을 파괴하며 그 복판에 지은 그 악랄한 일제의 의도성이라는 걸 박유하씨 자신만 모르는 것일까?

어떤 부분에선 배울 점도 있는 책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이러한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 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을 땐 이런 사람이 대학 교수를 하고 있구나 싶어 한숨만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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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는 지적 대화가 어려워 보인다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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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mile l 2016-04-1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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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반양장) -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 편 ㅣ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1월
평점 :






일반인에게 교양이란 것이 너무 어렵고 난해해서 멀게만 느껴진다면 문제다. 그래서 이런 책이 나온 것 같다. 저자는 넓고 얕은 지식이 지적 대화를 위한 기본 전제라고 하는데 그 말이 성립하려면 그 넓고 얕은 지식이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오해의 시작은 같은 사태(사물)에 대한 다른 해석(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확한 지식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정확한 것은 둘일 수 없으며 그래서 근대 철학에서 추구한 진리란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일치하는 것' 즉, 인식론적 진리였다.



이 책이 다루는 지식이 정확한 지식인가 하는 우려는 48p에서 벌써 현실화되는데 저자는 중세 봉건사회를 설명하면서 "국왕과 노예 사이에 성직자, 영주, 귀족, 기사, 농노, 노예가 생긴다."라면서 친절하게 피라미드 그림까지 곁들여 주었다. 그러나 성직자가 국왕 아래 위치하는 건 절대왕정 시대에 가서 발생한 현상이고 중세 시대엔 국왕은 성직자(교황)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 일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카놋사의 굴욕'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에 성이 있는 것은 그들이 중세를 거쳤기 때문이다. 반면 영주들에 의해 지방으로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국왕 중심의 집권적 체제를 유지했던 한반도에는 거대한 성이 없다.(50p)"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성의 평균 높이는 10m였다고 한다. 웬만한 중국의 성에 뒤지지 않는 규모다. 다만 이후 성벽이 자연적으로 무너져 내려도 문치주의 강화에 의해 무너진 높이에서 더 높이 쌓지 않고 방치하거나 그대로 보수를 하면서 오늘날 거대한 성이 남아있지 않았을 뿐이다. 저자가 전문가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 전문가가 아니어서 부정확한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저런 확정적인 표현으로 대중을 호도해선 안 되었다.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했다.(55p)"

"왕이 죽는 순간인 동시에 신이 죽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중세가 끝나는 순간이었다.(58p)"



참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부르주아는 무신론자인가? 그냥 문학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까? 신의 역할을 대체했다는 건 관대하게 봐주겠는데 '완벽하게'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데카르트도 인간 이성은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을 저자도 알고는 있겠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가 1900년에 죽었는데 중세가 19세기 말에 끝난 건가. 중세의 종말인 14세기와 이성의 시대인 19세기가 묘하게 버무려진 정체불명의 비빔밥이 연상된다. 뭘 그런 걸 문제삼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부정확하고 모호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는 지적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더구나 158p의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설명은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설명이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하부구조에 해당하는 경제체제가 왕-노예, 영주-농노, 부르즈아-프롤레탈리아와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적 유물론'의 도식에다가 떡 하니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줄여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진리(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이 일치하는 상태)를 얻기 위해 사람은 사물과 실천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관념을 실천에 알맞게 형성함으로써만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념과 실재의 일치 즉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은 사회적 실천뿐이라고 한다. 왕-노예, 영주-농노.....등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저자의 가장 큰 오류는 진보-보수의 구분을 좌파-우파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일단 아래 본문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진보' 혹은 '좌파'라고 한다..................오늘날 일반적으로 진보라 할 때 그것이 지칭하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다. 하지만 이렇게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동시에 진보로 분류된다는 언어적 문제는 한국 근현대의 비극을 만들어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후기 자본주의자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로 불리기도 한 것이다."(198~199p)



이 부분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나 빨갱이가 아니라는 취지이지만 어쨌든 이들은 저자의 분류에 의하면 '진보'혹은 '좌파'다. 그런데 208p에 가면 도표에서 민주당은 떡하니 보수에 배치되어 있다. 대통령은 '진보'인데 그가 몸담은 정당은 '보수'인가?



우파와 좌파의 구분은 1792년 프랑스 민중이 왕궁을 습격해 루이 16세와 왕비를 죽이고 국민공회를 수립하는데 이때 의회당의 좌측엔 자코뱅파가, 우측엔 지롱드파가 앉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롱드파는 부유한 부르주아를 대변하여 자유주의, 지방분권주의를 주장했고 자코뱅파는 소시민과 민중을 대변하여 강력한 중앙집권과 통제경제 및 복지강화를 주장했다.



반면 진보와 보수는 현재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을 '진보', 현재 체제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근본적 변화를 거부하고 점진적 변화를 꾀하는 것을 '보수'라고 한다. 이런 내용을 저자도 알고 있는지 책 여기저기에서 잘 서술해 놓았는데 정작 그 개념을 정확히 사용하지 못하고 '진보'를 '우파'와 같은 것으로, '보수'를 '좌파'와 같은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진보는 일제시대를 거치며 한국 지배층에 문제가 생겼으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역사주의적 시각을 보이며, 보수는 일제시대는 근대화 과정의 소중한 시기였으므로 일제시대의 성과를 이어받은 한국의 정체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역사주의적 시각을 보인다. 이들이 뉴라이트다. 이것은 부르주아 중심의 자유주의 성장 중심 경제정책을 펼지, 복지를 중시하는 분배 중심 경제정책을 펼지에 따라 갈리는 우파, 좌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둘을 헛갈리면 지적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저자는 238p에서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실제와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실제 사회는 예상치 못한 외부적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라고 썼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의 가장 큰 문제는 개념을 정확히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과 개념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엄연히 별개인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유물론적 변증법을 혼동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300p에서 A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B도시를 희생시키는 상황과 열 명의 병자를 살리기 위해 건강한 Z씨를 희생시키는 사례를 제시하며 "(3) 두 사례가 논리적으로 동일한 구조가 아니라는 근거제시"라고 써놓고 "이 중 (3)은 불가능해 보인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의아했다. 저자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두 사례가 같다고 강변하는데 어떻게 국가의 공적 결정과 개인의 사적 결정이 똑같을 수 있는가. A도시와 B도시를 선택해야 하는 대통령은 국가의 공적 기관으로서 수많은 변수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고 Z씨를 죽여 그 장기로 살려는 열 명의 병자는 결국 자기가 살려고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숫자가 열 명이니까 전체가 된다는 논리인가? 그런 개같은 소리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부분이 많이 있지만 책을 후루룩 넘기며 눈에 띄는 곳만 적어 보았다. 이 책이 아주 나쁜 책이라거나 쓰레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이런 아이템을 생각해 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저자가 6p에서 말했듯이 지적 대화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이란 내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다. 그러나 그 이해는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리뷰 시작부에 썼듯이 대부분 오해의 시작은 같은 사태(사물)에 대한 다른 해석(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정확함'이란 '정확한 개념'을 사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개념을 정확히 사용하지 않는 사례가 이렇게 많이 나왔다면 그건 저자가 자신의 말을 배신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너무나 명백한 오류와 엉터리 내용에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좋아요", "재미있어요"라고 하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양 수준이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가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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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쉬운 논리적 파탄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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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mile l 2007-06-30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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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위해서 - 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박유하씨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일본 바라보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 객관이란 한국과 일본이 모두 사실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주장에 대해선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이 책이 과연 한국과 일본이 모두 사실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지에 대해선 지극히 부정적이다. 짧은 리뷰를 통해 몇가지 박유하씨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치명적 오류가 존재함을 밝히고 싶다.

일본만이 사악하고 악랄한 나라였다고 말한다면 편파적일 것이다. 한국 역시 베트남에서 "한국인도 악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열렬히 증명한 바 있으니까. 그러나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한일 관계에 끌어대어 "그러니 우리는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에두르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오류다. 마치 2005년 중국에서 남경대학살을 비난하며 격렬한 반일시위가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이 "중국인도 티벳인을 학살했다"며 "중국인은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오류다. 쉽게 말하면 중국인이 티벳인을 학살했다고 해서, 한국인이 베트남인을 학살했다고 해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아니, 일본의 전쟁범죄를 논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경우를 끌어대는 것 자체가 논점 일탈의 오류에 불과할 뿐이다.

박유하씨는 우리 내부에도 가해자의 모습이 존재한다며 일본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논리적 파탄이다. 이 문제의 쟁점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범죄에 관한 것이지, 조선인과 일본인이 등장하는 '민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안부를 모집하고 수송한 실무자 가운데 조선인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가해자인가? 여기에서 우리란 누구인가.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박유하씨가 언급한 '조선인'이란 사실은 '일본인'이다. 박유하씨는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한 민족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자고 끊임없이 외치면서도(그녀의 다른 저서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참조) 사실은 일본에 세금을 내고 일본 국적을 갖고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믿고 있던 일본인 가운데 특정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임의로 '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떼어내어 '우리'와 동일시해버린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 근거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인데 그녀는 이미 '민족' 개념 자체를 부정했으므로 결국 논리적 파탄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착각은 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어서 여간해선 구별해내기조차 쉽지 않다. 박유하씨 자신이 "식민지 젊은이로 하여금 군대에 지원하여 일등 시민이 되기를 열망하게 만든 일본이라는 국가 체제의 폭력성"에 대해 비판한다고 말하면서도 위안부 문제에선 슬그머니 민족이라는 틀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정작 "일본이라는 국가 체제의 폭력성"을 은폐해 버렸다. 박유하씨 자신도 이것이 "국가"의 문제인지 "민족"의 문제인지 혼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만일 혼동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면 이보다 비열하고 악질인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나는 위안부 문제를 논의할 때, 일본인과 한국인의 민족적 대립으로 귀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가해자 일본인과 피해자 한국인이라는 도식은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을 드러내어 일본이라는 국가로 하여금 철저한 반성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나라도 일본의 반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해자 가운데에는 '조선인(엄밀히 말하면 조선지역 출신자)'도 있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오히려 가해자 일본인과 피해자 조선인(한국인)이라는 도식을 조장하여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논리다. 문제의 본질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에 있는데 박유하씨는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민족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민족을 지워버리면 그 가해자 '조선인'도 사실은 일본인이다. 결국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이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가가 그 폭력의 피해자에게(한국 정부에게 말고) 한번도 공식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분노를 촉발하게 된다.

그런데 박유하씨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라며 집요하게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정대협 관계자들을 공명심에 사로잡힌 협잡꾼이라고 몰아부친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그러하니 설사 일본인 가운데 침략을 부정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매도하는 무리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문제 제기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처구니 없게도 갑자기 박유하 씨는 위안부 기금에 성금을 보내온 일본인들의 편지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본 시민사회 차원에서라도 이렇게 위안부 피해자에게 성금을 보내고 있으니 만족하라는 것인가?

'침략은 없었다'는 일부 일본시민단체의 발언 보다 '침략을 반성한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저자는 겨우 몇 페이지 뒤에선 위안부에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오만한 태도 대신에 일부 일본시민들의 자발적 성금 모금 움직임에 주목하라며 감동을 받을 것을 독자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어떤 부분은 정부의 공식 입장이 중요하고, 어떤 부분은 시민들의 움직임이 중요해지는가?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 한 권 안에서 도무지 원칙도 일관성도 찾을 수가 없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에서 저자는 무지에서 비롯된 허투른 비판을 하고 있는데 하나 하나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지적하는 그녀는 정작 조선총독부 때문에 훼손되고 망가진 경복궁의 역사적 가치외 의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곳에 지어도 되었을 총독부 건물을 굳이 궁궐을 파괴하며 그 복판에 지은 그 악랄한 일제의 의도성이라는 걸 박유하씨 자신만 모르는 것일까?

어떤 부분에선 배울 점도 있는 책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이러한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 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을 땐 이런 사람이 대학 교수를 하고 있구나 싶어 한숨만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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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정한론의 서곡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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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mile l 2007-06-2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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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부활
마스다 도시오 지음 / 당그래 / 2006년 11월
평점 :






일본인들은 은폐적 어휘를 사용하여 진실을 감추길 좋아한다. 전차(戰車)가 일본의 침략전쟁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특차(特車)라고 바꿔 부르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속할 정도다. 저자는 미국이 정보를 '창조'하여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날조'이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정보를 '창조'하여 실리를 추구했다는 저자의 주장에선 잠시 이 인간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마저 하게 된다.

페이지를 넘기면 점입가경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저자는 일본인의 문화적 수준이 매우 높기 때문에 언젠가 미국과 중국을 구하게 될 거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중국인은 문화적 수준이 매우 낮아서 절대로 아시아의 패자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일본인의 문화적 수준이 높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너무 웃긴다. 미국인들도 자신들의 건국 역사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감추는데 일본인은 자신감 있게 미심쩍은 자신들의 건국 역사를 공개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오랜 일본의 역사에서 우러나온다는 자부심은 원맨쇼를 보는 것 같은 실소를 자아낸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위안부와 731부대 등 부끄러운 역사는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하는 일본인들이야말로 문화적 수준이 대단히 낮은 셈이다. 게다가 일본의 역사가 2천년이라는 주장에선 저자의 기본 상식마저 의심하게 된다. 일본이 세계사에 통일국가로 등장한 것은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였다. 7세기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에 비하면 900년이나 뒤쳐진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것조차 10세기 무렵이다.

나는 역사가 길다고 해서 문화적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부족국가 상태로 섬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왜, 류큐, 야마토, 아이누를 아무런 근거 없이 '일본'이라는 범주에 집어넣어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을 근거로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우긴다. 만약 한반도가 독립하지 못했다면 단군 왕검까지 일본의 조상으로 집어넣어 5천년 역사를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논리다.

결국 저자의 주장은 하나로 귀결된다. 일본은 미국의 속국 상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일본은 다시 아시아의 패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 그 패권의 시작은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것이라는 것. 일본이 한반도를 영향력 아래에 두는 시점은 한반도가 통일되는 바로 그 시점이라는 것. 중국은 일본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상대이므로 미국과 중국의 충돌을 부추겨야 한다는 것. 이때 일본은 미국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려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것이 성취될 때 비로소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

책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일본인 특유의 은폐적 어휘가 많이 사용되고 있으므로 그것에 곧이곧대로 속아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통일로 휘청거리는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표현도 앞뒤 맥락을 보면 그것은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만약 한국을 일본의 대등한 파트너로 유지시켜야 한다는 뜻이라면, "한국을 돕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부지런히 번영하고 재물을 축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리가 없다. 여기에서 번영과 재물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리킨다. 자!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일본이 이렇게 한반도 지배의 꿈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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