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2

Namgok Lee - 지금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선진화’와 ‘인간화’

Namgok Lee - 7년 전 어떤 자리에서 한 이야기다. 요즘 무어를 좀 준비하느라 옛 자료들을 검토하다가 좀...

7년 전 어떤 자리에서 한 이야기다.
요즘 무어를 좀 준비하느라 옛 자료들을 검토하다가 좀 낡은 이야기지만 공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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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선진화’와 ‘인간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화란 물신(物神)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의미와 동물계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존재로 인간이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화의 내용이 인간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저는 새로운 시대의 진보를 위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려볼까 한다.
첫째는 폭력혁명에 대한 끌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폭력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잔재가 이념뿐만 아니라 정서 속에 남아 있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또 다른 단정(斷定)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새로운 세계는 ‘지적(知的) 혁명’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폭력을 수반하는 혁명이 아닌, 인간의 질적 진보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혁명이다.
대단히 더뎌 보여 갑갑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물질적 ‧ 사회적 변화들은 사실 지적 혁명의 기초를 닦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혁명의 주체는 ‘지식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과거 시대에 회색분자로 비아냥받던 계급으로서의 인텔리겐챠가 아니다.
‘세계가 즉 자연과 인간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 그리하여 독점이나 자기의 폭을 넓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어지는 인간’ ‘자신의 생각은 사실과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이 진정한 지식인이다.
저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나 계급 · 민족 속에서 이런 지식인 즉 새로운 시대의 혁명 주체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이런 주체들이 그 생산과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있는 현상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어떤 임계점(臨界點)에 이르면, 급격하게 변화할 것이다.
진정으로 혁명을 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개인이나 집단은 스스로를 지적 혁명의 주체로 준비해야 한다.
둘째는 ‘민주집중제’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부르죠아 민주주의의 위선과 기만에 반대해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위해서 민주집중제가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었던 때도 있었고, 아직도 일부에서 이념이나 정서 속에 또는 습관이나 관행 속에 남아 있는 것도 같다.
민주집중제는 ‘민주’보다는 ‘집중’에 방점(傍點)이 찍히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것이다. 즉 독재를 낳게 되어 있다.
저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시대였다면, 이런 말은 반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더 나아가 지금과 같은 ‘누가 옳은가’하고 토론해서 결국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런 방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진보가 선두에 서야 한다
‘무엇이 옳은가?’를 연찬해서 가급적 전체가 일치한 견해에 도달하는 방식의 ‘연찬민주주의’(적절한 명칭이 없어서 假名으로 사용한다. 화백민주주의라고 하면 그 내용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해서.)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우선 진보적인 정당 안에서 이런 시도를 하고 이것이 문화로 자리잡으면, 이것은 민주주의 역사에 획기적인 일로 될 것이다.
이것은 우성(優性) 인자이기 때문에 이런 정당이라면 처음에는 비록 소수당일지 몰라도 정치를 ‘권력쟁탈의 장으로부터 사람의 자유를 확대하는 조화의 예술로’바꾸게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요즘 아무리 ‘통합’과 ‘상생’을 이야기해도 이런 내용이 없으면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비록 소수당이라도 ‘조화의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무슨 ‘조화’나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굴종이나 예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록 사회경제적 약자이지만, 미래 사회의 주체라는 주인의식으로 약자의식이나 피해자의식을 넘어 ‘합작(협치)이나 연정’을 견인하는 능동적 주체로 되는 것이 진보정당의 도덕적‧ 실질적 힘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억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러다보면 어느덧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될 것이다.
셋째 계급투쟁론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야 한다.
계급 발생을 비롯한 계급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원시공동체 사회를 지나면서 계급제 사회로 되고,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그 투쟁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되어서 역사가 진보해 온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이 된다.
지금도 계급이 있고, 투쟁이 있다. 또 그 사회의 계급구조나 제도가 사람들의 의식(意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거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단정(斷定)하는 것으로 과학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회의 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옳지도 않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이루고 싶어 하는 진보주의자들이라면, 낡은 사상이론의 주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주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정서나 욕망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무산자 혁명’은 역사적으로도 실패했지만, 이치상으로도 불가능한 허구에 불과하다.
저는 ‘계급조화론’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맞다고 본다.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실 분들도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계급적 모순을 호도하여 투쟁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음모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면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라면 자본가까지도 견인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과 도덕적 힘을 가지고 계급조화론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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