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3

17 서평 반전의 시대 | 동학(東學)은 미래학이다


반전의 시대 | 동학(東學)은 미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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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5월 28, 2017





반전의 시대. 이병한. p416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



#진보의 종언, 역사의 소생

『전환시대의 논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987년 전후로 한국의 ‘민주화’. 허나 그로부터 30년, ‘반동의 세월’에 봉착했다. 왼쪽 날개는 재차 부러졌다. 그러나 좌우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것만으로는 ‘역사의 반복’에 그치고 말 것이다. 반동도 반복도 아닌, 반전을 궁리하는 까닭이다. 후학의 고민이다.



좌우의 날개만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다. 관건은 양날개짓으로 날아가는 방향이었다. 개발파도 개혁파도 서쪽으로 내달렸다. 한쪽은 산업화로, 다른 쪽은 민주화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정작 당도하여 목도한 것은 아뿔싸, ‘서구의 황혼’이다. 겨우 따라잡았나 했더니, 근대문명 자체가 저물고 있다. 좌도 우도 100년의 북극성을 상실하고 망연자실이다. ‘다른 백 년’의 논리를 갈고 닦는 것이 후학의 책무일 것이다. 좌우 합작만큼이나 동서 합작, 고금 합작을 연마한다.



#전환의 시대에서 반전의 시대로

다시 세상이 크게 바뀌고 있다. 그 변화의 폭과 깊이는 40년 전보다 한결 더하다. 전환에 전환을 보태 반전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스승들과는 전혀 다른 신세계를 묵도하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1979)은 중국이 사회주의를 대신하여 자본주의로 갈아탔다고 여길 성질의 사건이 아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말미암아 세계체제가 개조되고, 근대가 뒤집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한층 적확하다. 동아시아에서는 중-일의 반전이, 세계적으로는 중-미의 반전이, 문명적 차원에서는 동-서의 반전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대신하는 ‘반전시대의 논리’가 긴요하다.



하여 ‘반전시대의 논리’를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와 집단의 출현이 갈급하다.



#동학 : 2014, 갑오년 역사 논쟁

우파를 개발파라고 한다면, 좌파는 개혁파라 할 수 있다. 전자는 경제적 근대화(자본주의)를 추앙하고, 후자는 정치적 근대화(민주주의)를 옹호한다. 개발파가 시장만능주의에 빠졌다면, 개혁파 또한 민주 만능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닮은 구석이 없지 않다…양쪽 모두 개혁파의 적자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120년 전, 갑오경장은 개화의 출발이었다. 개화파가 공유하는 불문률이 있다.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를, 일본을, 미국을 따랐다. 특히 대안은 이 땅에 없다고 했다. 이 땅의 역사와 문명에는 대안이 없었다…우파가 일본과 미국을 섬기는 만큼이나, 좌파 또한 동구와 서구를 흠모했다. 최근에는 북구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동방 문명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오리엔탈리즘 못지 않다.



갑오년에 값하는, 그에 걸맞은 역사 논쟁을 해야겠다. 작금 한국의 위기와 혼란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적이고 지구적이다. 갑오경장 이래 개화 백 년의 결과이며, 개화를 강요했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결국이다. 마침내 1984년 개시되었던 ‘장기20세기’의 결말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야말로 지난 세기 금과옥조처럼 배우고 외웠던 언어와 개념과 발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백 년의 개화에 대한 총제적 재평가도 수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고(古)’를 ‘구(舊)’로 타박하고, ‘금(今)’을 ‘신(新)’으로 대신했던 백 년의 습속부터 바로잡아야 하겠다. 다시금 관건은 정명(正名)이다. 좌/우는 부차적이다.



갑오경장은 획기적이었다. 말이 크게 바뀌었다. 사람의 도리보다는 개인의 권리가 중요했다. 예치는 법치로 바뀌었다. 언어적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점차 국문이 한문을 밀어냈다.



고(古)와 금(今)

예 것은 한때의 새 것이며, 오늘의 새 것은 훗날의 옛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은 온통 새 것뿐이다. 새 것의 역사를 조율할 역사의 중력이 없다…오래된 것을 배려하지 못하고, 옛 것을 존중하지 못한다. 독선적이며 독단적이다. 고약한 마음씨다.



일일신우일신. 이 창조적 가능성이 꺽이고 만 결정적 계기는 역시 식민지화이다. 이로써 신이 구를 압도해 버렸다. 더군다나 일본은 동방 문명의 정수를 실천해본 경험이 미천한 나라였다. 인문학의 훈련을 통해 자기구원에 이르는 지식기반국가의 이상을 알지 못한다.



반전시대는 고/금의 날개로 비상한다. 본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동방형 혁명의 본령이다.



동과 서

고금합작의 단서는 다시 갑오년에 있다. ‘동학(東學)’이 일어났다.



나는 개화기의 새 말들 가운데 ‘동학’을 으뜸으로 친다.



동학운동은 계급투쟁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학습운동’이다. 그 학습의 범위가 농민들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학이시습지…’로 출발하여 배우고 익힘을 최상의 기쁨으로 여겼던 동방 문명의 하방으로 동학이 개창한 것이다.



동학은 모두가 선비가 될 수 있는 나라,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는 국가를 염원했다. 유학의 혁명이자, 혁명적 유학이었다.



2014년, 새 경장이 필요하다. 소학(小學)은 무너졌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大學)은 시시해졌다. 치국과 평천하를 배우지 않는다. 민도는 민도대로 떨어지고, 자질과 자격을 갖춘 지도자도 키우지 못한다. 군자가 사라지자 소인천하가 도래했다. 대중사회라고도 한다. 소인들이 1인1표제와 접속하자 정치는 저열해졌다. 권력만 남고, 권위는 사라졌다. 삿된 추구가 공공성을 잠식해버렸다. 그래서 한 원로 정치학자의 일갈처럼,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질적으로 나빠졌다.’ 그리고 스노비즘(snobbism)이 창궐한다.



동학은 백 년간 고독했다. 20세기가 좌우 합작이라면, 21세기는 고금 합작이다. 새 말로는 하이브리드이고, 옛 말로는 법고창신이다. 서학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유학의 민주화를 꾀했던 동학을 모시는 마음으로 되새기는 까닭이다.



#동아시아 문화 : 개화와 심화



20세기가 개화라면 21세기는 심화이다.



외부로 열린 만큼이나 안으로 깊어져야 한다. 한글은 개화의 방편이었다. 한문을 잃은 한글은 초라했다. 고작 백 년 한글로 축적된 문화 토양이 원체 옅은 탓이다. 영어의 공세 앞에 한글이 무력한 근본적 까닭이다. 대학(大學)에는 대가(大家)가 없고 소가만 남은 것도 한학의 결여가 십중팔구이다. 만사지탄일망정, 천 년의 유산과 재접속하고 재점화할 때이다.



천자문을 출발부터 독특하다. 하늘 천, 땅 지, 집 우, 집 주, 천지와 우주부터 배운다. 너는 누구니? 나는 누구야, 를 앞세우는 외국어 교육과는 퍽이나 다르다. 너와 나를 알기 전에 천지부터 깨우쳤다. 너와 나 이전에 하늘과 땅이 있었다. 그래서 천·지·인이라 했다. 그렇게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고분하고 겸손한 존재였다. 너와 내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다투며 천지를 정복하는 세상과는 판이한 세계관이다.



한학의 복원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한학은 중국 중심. 서학은 서구 중심. 국학은 또 자국 중심이다. 한문, 한글, 알파벳,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아니 되겠다. 셋을 아울러 동학(東學)으로 크게 회통할 일이다. 그래야 동아시아의 르네상스가 가능하다.



천주(天主)를 대체하고 천하를 해체한 민주(民主)가 여전히 21세기의 등불인지 나는 몹시 주저된다…혹 민주는 천주와 천하 앞에 엎드려 절하고, 경거망동을 자숙하고 겸손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외람되게도 동아시아는 전면적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여긴다. 제차 김수영을 빌자면,



”선생님, 그건 옛날 얘기지요.”



동학은 개화파의 서학에 굴복하지도, 위정척사의 유학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유학의 조선화, 민주화, ‘내재적 발전’으로 동학을 탐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



#동방 사상과 지구 이론

참가자들이 공유하는 더 큰 문제의식은 ‘민주주의 쇠락’이었다. 그리스 아테네로부터 미국의 워싱턴까지 민주주의의 오작동이 여실하다는 것이다. 선거는 미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심판에 그치기 일쑤다. 의회가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기관으로 전락한지도 이미 오래다…민주주의는 어느덧 공산주의만큼이나 경직된 도그마가 되었다. 다른 정치에 대한 상상력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갱신과 혁신에도 무디고 더디다. 반면 중국은 공산주의 탈피와 더불어 실용주의를 회복했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말했다…더 높고 더 나은 수준의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이다. 백년지대계의 발상이다. 1인1표의 선거제가 정착된 것은 채 백 년이 되지 않는다.



무릇 제도는 짧고, 역사는 길다.



포스트모던 운운하며 세련된 폼을 취할 것도 없다. 동방 사상은 진즉에 천하위공을 앞세우며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를 지향했다. 토박이 동학이 부재하니, 뜨내기 수입상들이 판을 칠 따름이다.



동(아시아)학은 더 이상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 생산에 그치지 않는다. 21세기 지구 문명을 재건하는 평천하의 방편이다. 고로 동(아시아)학은 미래학이다. 옛 것을 익혀 새 천하를 일구는 새 천 년의 ‘실학’이다. 그러한 자각이 있어야 동방 문명을 독식하고 독점하려는 중국의 독선도 떳떳하고 꼿꼿하게 타박할 수 있다. 소국의 예로서 대국의 덕을 이끄는 것이다.



#’다른 백 년’, 대반전의 길을 묻다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은 명백하게 일제에 있다. 개항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었고, 식민지가 됨으로써 전면화되었다. 부끄러워할 일이 전혀 아니다. 조선이, 동방이, 내발적으로 자본주의로 이행할 까닭이 전혀 없었다. 필연보다는 우연이었다. 교통사고 같은 것이었다. 역사도 울퉁불퉁, 돌발의 연속이다. 매끈한 진보사관은 과학이 아니다. 근대의 주술이다.



고로 진보도 보수도 올바르지 못하다. 올드레프트도 뉴라이트도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삼는 도깨비 놀이를 반복한다. 교통사고를 낸 쪽을 따지기보다는 도리어 따르려고 한다. 이 도착과 당착의 기원에 개화파가 있다. 동방 문명에 무지한 새파란 선무당들이었다. 개발파와 개혁파도 개화파의 맹점을 답습했다. 산업화에 성공하고 민주화를 성취했다며 각자 뻐겨댄다. 겉으로는 앙숙이지만, 실제로는 짝꿍이다. 산업화+민주화=근대화의 대서사시를 공유한다…’근대 문학의 종언’에 이어 근대 사학도 종언을 고한다.



민주화는 세계화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독재를 허무는 ‘민주화’가 자본이 천하를 통일하는 ‘평평한 세계’의 전조이자 전제였음이 더욱 확연해진다.



동방의 등불

도래하는 유라시아의 세기에 한반도가 부응하는 길은 20세기형 분단을 종식하는 것이다…통일은 대박이고 축복일 것이다. 표류하는 한국호의 (아마도 유일한) 출로일 것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다른 백 년’을 ‘도둑처럼’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_윤여준(전 환경부 장관)

지난 100년간 우리는 서구의 근대화가 씌워준 안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1인1표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의 출발의 기저에 상업자본주의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 안경을 쓰고 지난 100여 년을 오로지 앞만 보며 살아온 탓에 우리는 서구가 제시하는 문명화, 근대화, 민주화를 삶의 궁극적 목표로 내면화하였다…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양심이나 인성은 사리 판단의 틀에서 밀어냈다.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닌, 오로지 돈의 원리가 잘살고 못사는 삶의 윤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은,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인가? 정신적 폐허다.



서구가 20세기 전반을 군사력으로, 20세기 후반을 경제력으로 승승장구했던 지난 백 년의 ‘예외적 시기’가 저물고 있으며 다시금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문명사 학자들의 중론이다.



71년 전의 해방이 마치 ‘도둑처럼’ 왔듯이 앞으로의 백 년을 또다시 ‘도둑처럼’ 맞이한다면, 이 앞으로의 백 년은 지난 백 년과 다르기는커녕 더 괴로운 백 년이 될 것이다.



#근대의 덫에서 벗어나_김기협(역사학자)



#여기 신청년이 있다

신청년은 주눅 들지 않는다. 이 책의 과감한 주장들이 일부 거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 틀리기’ 위주의 수능식 공부법으로는 절대 떠올릴 수 없는, 시원스러운 발상이 이 책에는 많다. 신청년의 사고는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리란 오히려 바르게, 크게 틀리는 방법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과 배움의 요체이기도 하다. 신청년은 소수의 입장에 서거나, 기성의 길 밖에서 길을 찾고, 새 길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래는 바로 이러한 신청년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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