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5

알라딘: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



알라딘: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
고토 히데키 (지은이),허태성 (옮긴이)부키2016-10-07
원제 : 天才と異才の日本科學史―開國からノ-ベル賞まで、150年の軌迹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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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쪽
152*224mm
821g
ISBN : 9788960515635


책소개
교토 대학 출신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데 도쿄 대학은 왜 그러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이 일본에서 한때 화두가 되었다.그렇다면 거꾸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일본은 노벨상을 받는데 우리는 왜 받지 못하는가.일본 과학의 발전 과정은 우리와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지금까지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개인적 능력 때문인가, 연구 환경 탓인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일본이 1854년 개국하고 나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과학 보급에 나선 이래 2012년 야마나카 신야가16번째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기까지 일본 과학자들의 150여 년 분투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일본 노벨 과학상 1호 유카와 히데키를 동경해 물리학자를 꿈꾸었고 실제로도 물리, 원자핵 공학, 의학을 전공하며 연구자로 살았던 저자의 과학에 대한 열정과 연구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가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녹아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1부 일본 과학의 여명: 1장 국가 전략과 이과학/ 2장 의사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닌/ 3장 백호대에서 살아남아 물리학자가 되다
2부 전쟁과 과학자: 1장 서양으로부터 존경받은 일본인/ 2장 전쟁도 국경도 초월한 사람들/ 3장 노구치히데요를 끌어안고/ 4장 둘이서 성게알을 바라보며
3부 패배로 빛나다: 1장 게이오 대학 의학부/ 2장 교토의 푸르른 계절/ 3장 패전국의 에이스/ 4장 꿈의 원자력/ 5장 예지가 빛나다
4부 의사 대 과학자: 1장 세계의 근육 연구를 선도한 에바시세쓰로/ 2장 평면해파리는 왜 빛나는가
5부 일본인과 노벨상: 1장 천재도 괴롭다/ 2장 일본인 네 명 노벨상 동시 수상
맺음말 후쿠시마를 너머서
후기/ 주요 인명/ 인용 문헌·참고 문헌/ 일본 근현대 과학사 연표/ 인명 찾아보기


책속에서



P. 162~163 다테야마시고 야쓰 도 삼면이 나지막한 언덕에 둘러싸여 논밭이펼쳐져 있다. 아침에는 안개가 뿌연 대나무숲을 향해 농부가농사일을 하러 가고, 저녁이 되면 나무 밑동에 쌓아둔 짚더미에서 피어나는 불꽃이 흔들리며 한 줄기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을 더듬어가면 파르스름하게 안개 낀 산 위로 커다란 달이옅은 홍조를 띠며 스며든다. 마치... 더보기
P. 187 까다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필자는의학부 학생에게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비유를 했다. “어느 아가씨는 노는 걸 좋아했다. 엄격한 부친이 그 딸내미를 감독했다. 아버지는 시세 포이며 딸내미는 양극 세포다.부친으로부터 억제가 없어지면 딸은탈 억제해서 흥분하게 되므로 제 맘대로 논다.”
P. 211 유카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어서 수업 중에 학생들을제대로 보지 못해 늘 칠판으로 얼굴을 돌린 채 수업을 했다. 그래서 자기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인 스미는 유카와 보다 세 살 연하였지만 대외관계는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 부러졌다. 젊은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스미에게 속삭였다. “아픈 걸로... 더보기
P. 265~266 1965년에도 모나가, 슈윙거, 파인만이 노벨물리학 상을공동 수상했다. 미국인 두 사람은 도모나가에게 경의를표하며 공식 수상 기록에 도모나가 이름을 첫 번째로 올렸다. 자신들보다 훨씬 앞서 이론을 완
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용할 때에는 도모나가의 이름이 맨 앞에 놓인다.
노벨상 수상의 통보를 받은 도모나가는 이렇... 더보기
P. 267 언젠가 한 번은 나중에 나라 여자대학교수가 된 후배 바바가증오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는 지금 벽에 부딪혔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전에 니시니 선생과 마찬가지 말로 조언했다.
“연구가 잘 되고 안 되는 것은 머리가 좋고 나쁜 것과는별개라네. 양자역학을 만든 사람 중 하나인 슈뢰딩거도 파동역학 이외에는 사류 연구밖에는 못했으니까. 매우 박식하고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도 독창적인 연구는전혀 못하는 사람도 있지. 각오를 단단히 하되 희망을 버리지 말고 인생을 전력으로 달리는 것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어.”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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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6년 10월 8일자 '책 속으로'



저자 및 역자소개
고토 히데키 (後藤 秀機)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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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일본 혼슈 서부인 시마네 현 마쓰에 시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에서 응용 물리학을 전공하고 도쿄 공업대학 대학원에서 원자핵 공학 과정을 마쳤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연구원과 런던 대학 연구원을 거쳐 요코하마 시립대학 의학부와 이와테 의과대학 등에서 일했다. 신경 생리학을 전공한 의학 박사인 저자는 지금은 과학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신경과 화학 전달』, 『오징어의 신경과 사람의 뇌』, 『뇌 과학자의 1개월 간단 영어회화 뇌 훈련』 등이 있다.


최근작 :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총 5종 (모두보기)

허태성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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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화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카를스루에 대학에서 세 차례 교환 교수로 있었다. 유기 화학을 전공한 저자는 가톨릭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았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학을 좀 더 많은 사람이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과학 책 번역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유기화학실험』(공저, 2001), 『물리유기화학』(1996) 등 화학 관련 전공 서적이 있고, 『일본 화학의 개척자들』(2012), 『유기화학(F)6/E』(1999)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작 : <유기화학실험>,<유기화학실험>,<물리유기화학> … 총 1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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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건강의 배신>,<나는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바람난 유전자>등 총 295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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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21명의 노벨상 수상자 배출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일본 과학의 발전 과정을 진솔하게 그린 에세이

교토 대학 출신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데 도쿄 대학은 왜 그러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이 일본에서 한때 화두가 되었다.그렇다면 거꾸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일본은 노벨상을 받는데 우리는 왜 받지 못하는가.일본 과학의 발전 과정은 우리와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지금까지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개인적 능력 때문인가, 연구 환경 탓인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는 일본이 1854년 개국하고 나서 후쿠자와유키치가 과학 보급에 나선 이래 2012년 야마나카신야가16번째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기까지 일본 과학자들의 150여 년 분투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이 책에는 일본 노벨 과학상 1호 유카와히데키를 동경해 물리학자를 꿈꾸었고 실제로도 물리, 원자핵 공학, 의학을 전공하며 연구자로 살았던 지은이의 과학에 대한 열정과 연구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가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녹아 있다. 지은이는 과학자들의 삶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그린 이 책으로 제62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수상했다.

출판사 서평

교토는 되는데 도쿄는 왜 안 되는가?
일본은 받는데 우리는 왜 못 받는가?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예측해 온 학술 정보 서비스 기업 톰슨 로이터가 2016년 9월 2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수상 후보 21명 가운데 일본인 과학자가 생리· 의학에 1명, 화학에 2명 등 총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해까지 일본의 과학 분야 수상자는 총 21명이다.
그중교토 대학 출신이 6명으로 가장 많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과학계에서는 한때 교토 대학 출신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데 도쿄 대학은 왜 그러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이 화두가 되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일본은 노벨상을 받는데 우리는 왜 받지 못하는가.
일본이 노벨상을 처음 받은 것은 1949년으로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만 81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고 해도 1876년 개항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교육 체제를 정비한 지도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물론 일본은 시기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서양의 과학 지식을 흡수했다. 1860년대부터 서양 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했고, 유학에서 돌아온 야마카와겐지로가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888년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물리학자로 알려진 최규남이 1933년 미국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에 비해 45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67년 전 최초의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은 그런 노력에 힘입어 1900년 무렵 화학자 다카미네조기치가 아드레날린을 발견하고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1회 노벨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20세기 초반부터 서양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가 설립된 이후에는 물리학 분야에서도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고, 패전 직후인 1950년 무렵에는 세계를 선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개인적 능력 때문인가, 연구 환경 탓인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이 책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는 일본이 1854년 개국하고 나서 후쿠자와유키치가 과학 보급에 나선 이래 2012년 야마나카신야가16번째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기까지 일본 과학자들의 150여 년 분투 과정을 그린 책이다. 물리학, 화학, 생리 의학, 원자력 공학 등 각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연구 업적과 뒷이야기가 메이지 유신, 러일 전쟁, 태평양 전쟁, 패전과 전후, 그리고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은이는 일본 과학자들의 삶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그린 이 책으로 제62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수상했다.

일본 과학의 발전 과정은 무엇이 달랐는가?

-후쿠자와유키치의 독려에 일본 엘리트층이 응답하다
"동양에 없는 것은 두 가지다. 유형으로는 수리학, 무형으로는 독립심이다."(378쪽)
개국 당시 일본에서는 화학과 의학에 비해 물리와 수학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그때 후쿠자와유키치는 물리학이 서양 학문의 왕자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물리 교육에 힘썼다. 1868년 그는 『훈리궁리도해』 즉 '도해 물리 입문'이라 할 만한 책을 출판하여 붐을 일으켰다. 일본 최초의 과학 입문서로 당시 소학교에서 이과 교과서로 쓰였다. 『서양사정』도 펴냈는데 15만 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야마카와겐지로는후쿠자와가 쓴 『서양 여행 안내』를 읽으며 유학을 준비했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근대화에도 관심을 보여 김옥균을 게이오 의숙에 받아들였다. 그는 세균학자인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에게 연구 장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후쿠자와는오늘날 일본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다수 수상하는 데 최대 공헌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물리를 강조한 후쿠자와의 노력에 일본의 사족(士族) 출신들이 대거 부응했다. 일본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사족 즉 사무라이(무사)였고, 최다 계급인 농민, 상인, 승려, 신관 등이 연구자가 되는 예는 드물었다. 물리학자 도모나가신이치로의 아버지도 오무라 번의 학자였으며, 유카와히데키도와카야마 번의 한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유학생 파견을 통해 서양 학자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다
일본은 1871년 이와쿠라견구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때 배에 동승했던 40여 명의 뛰어난 유학생들이 귀국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들 중에는 이 책에 나오는 주요 과학자와 그 가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이토히로부미는 이 당시 영국인 지인에게 공학자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제안이 글래스고 대학의 윌리엄톰슨 즉 켈빈 경에게 전해졌고, 이를 계기로 스코틀랜드의 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일본을 방문했다. 켈빈 경의 제자인 물리학자 제임스유잉도그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일본에 와서 난생처음 지진을 경험한 다음 지진계를 개발하고 지진학회를 창설했다.
그 후로도 일본은 유학생을 파견하여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왔다. 일본 최초의 물리학자 야마카와겐지로는 제자 나가오카한타로를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볼츠만 교수에게 보냈고, 나가오카는 제자 니시나요시오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어니스트러더퍼드 교수에게 보냈다. 니시나는러더퍼드 교수에게 2년간 공부한 후 그의 소개로 덴마크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실에 머무르면서 하이젠베르크나 디랙 등 수많은 천재들과 인연을 맺었다.
훗날 니시나는 이화학연구소의 핵물리학자들을 미국의 석학에게 보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미일 관계가 최악이었다. 하지만 물리학자 어니스트로런스는 국제 정치와 학술 연구는 별개라면서 일본 학자들에게 사이클로트론 제작에 대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로런스는 컬럼비아 대학도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거기에서 일본 학자들은 그 대학의 사이클로트론을 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귀국해서 설계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때 도움을 주었던 컬럼비아 대학 교수 이시도어라비는니시나의 보어 연구실 동료였다.

-과학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기초 연구의 산실을 일궈 내다
"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 쪽을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44쪽)
응용 화학자 다카미네조키치는 이화학연구소(리켄, RIKEN)의 설립을 주도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드레날린을 추출한 것으로 유명한 다카미네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사립 연구소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서양에는 민간 연구소로 독일의 카이저빌헬름 연구소(현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미국의 록펠러 연구소가 있었다.
1917년 출범한 이화학연구소는 이후 100여 년 동안 일본의 기초 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패전 후 과학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기 전에는 연구원 1000여 명에 관련 기업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나요시오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크게 활약했고, 그의 제자로 둘 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신이치로와유카와히데키도 이 연구소와 관계를 맺었다. 200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노요리료지도 이 연구소 출신이다.

-수직적인 상하 관계를 없애고 한몸으로 연구하다
니시나요시오는1920년대 이화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그가 공부했던 보어 연구실은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보어의 독창성과 인품에 매료되어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연구실에는 독일의 발터고르돈과카를 하이젠베르크, 스웨덴의 오스카르클레인, 영국의 폴 디랙 등이 있었는데, 훗날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폴링도니시나의 연구 동료였다.
보어 연구실은 팀플레이로 연구를 했는데 외부의 반대파가 나오면 팀 전원이 일치단결해서 싸웠다. 연구실에서는 국적이 없었고 모두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었다. 니시나는 그런 코펜하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일본으로 가져왔다. 상하의 구별 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코펜하겐 정신'을 이화학연구소에 불어넣은 것이다.
1950년 이후 여러 대학에서 소립자론 그룹이 만들어졌을 때 이러한 '코펜하겐 정신'은 봉건적인 학계 풍토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유카와히데키의 첫 번째 제자인 사카타쇼이치가 부임한 나고야 대학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그때까지 전근대적인 계급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던 강좌제를 연구실 제도로 바꾸어 그 연구실 회의에서 모든 사항을 결정하도록 했다."(263쪽)
도쿄 지역 대학들의 연구실도 나고야 대학과 마찬가지로 선생과 학생 사이에 상하가 없었다. "학생이 선생을 '○○ 교수'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었고 '○○ 선생님'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보통은 '○○ 씨'라 불렀다. 학생의 그러한 말투가 교수 부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적 세계에서 자유롭게 일하는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상하 질서에 의한 강압적인 태도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264쪽)

-끈끈한 사제 관계로 괴로움을 이겨 내다
유카와히데키는1934년 중간자 이론이라고 알려진 첫 논문을 발표하고 2년이 지난 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유카와의 대학 동급생이자 평생의 라이벌인 도모나가신이치로는 독일 유학 시절 동료 연구자들이 유카와를 칭찬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자기 친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처지를 생각하면 초조해질 뿐이었다. 몸도 비쩍 말라서 가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절망스런 마음을 담아 스승 니시나요시오에게 편지를 썼고 이런 답장을 받았다.
"연구의 성과가 오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운이라고 생각하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 삶이지. 나중에 현격한 차가 생기더라도 그런 일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네.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운도 찾아와 좋은 일도 생기겠지. 나는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 생활하고 있다네. 부디 여유를 찾고 건강에 유의하면서 운이 찾아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네."(248쪽)

-각자가 잘하는 일에 집중해 노벨상을 수상하다
도모나가신이치로의 제자 고시바 마사토시는 1951년 도쿄 대학을 졸업했을 때 성적이 부진했다. 특히 수학이 약해서 강의에 나오는 방정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급생에게 물어보면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풀어내는 문제를 수주일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실험에서 탁월했다. 동료들은 실험 장치를 망가뜨려 교수에게 꾸중을 들을까 봐 무서워했지만 고시바는 그들이 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고 나서 장치를 척척 움직여 데이터를 만들어 냈다.
대학원에 들어간 고시바에게 어느 날 선배가 우주선(宇宙線) 실험을 해 보라고 권했다. 마침 이론이 최전성기를 맞이한 일본의 물리학계에서 실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이었다. 그는 우주선 연구에서 세계 최고인 뉴욕 로체스터 대학에서 유학한 다음 귀국하여 폐광이었던 가미오카 광산의 지하 1000미터로 아래로 들어갔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서 가미오칸데라는 실험 장치를 만들어 중성미자를 검출했고, 이를 통해 200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2012년 줄기 세포 연구로 노벨 의학 생리학상을 수상한 야마나카신야도수련의 시절 수술실에서 선배들의 방해가 될 정도로 서툴렀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 임상을 버리고 연구자의 길을 택해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 과학자들은 어떻게 고난을 극복했는가?

-일본 과학자의 서양 콤플렉스 극복기
"나가오카한타로는 도쿄 대학에 입학 후 의문이 들었다. 전혀 다른 종인 것처럼 보이는 모당인(서양인)의 머릿속이 자신과 똑같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들은 일본 고대의 시가집인 『만엽집』의 시대부터 일본인의 마음을 노래해 왔는데 그리스 시대부터 수천 년에 걸쳐 구축해 온 물리학을 연구할 만한 능력이 있을까."(77쪽)
나카오카한타로는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서양 학문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열등감은 그의 제자인 니시나요시오도 가지고 있었는데, 니시나는 스승 보어와의 만남을 통해 이를 해소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일본의 과학이 서양의 수준에 도달하는 건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도 과학에서 일류가 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어는 니시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인종의 차이라든가 유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전통뿐이다."(97쪽)

-시기, 질투를 이겨내고 각기병 치료제를 만들다
"스즈키의 약은 엉터립니다. 하찮은 것도 믿으면 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그런 걸로 낫는다면 소변을 마셔도 낫습니다."(57쪽)
1910년 농학자 스즈키우메타로가 일본의 국민병인 각기병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를 시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도쿄 대학 의학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사도 아닌 농학부 출신인 스즈키가 병을 고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즈키는 쌀겨에서 각기병에 효과를 내는 성분인 오리자닌을 추출해 냈다. 요즘의 비타민 B1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1929년 영국의 생화학자 홉킨스와 네덜란드의 병리학자 에이크만이 비타민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스즈키는 왜 받지 못했을까.연구 성과를 대부분 일본어로 발표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도쿄 대학 의학부가 스즈키의 라이벌인 홉킨스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농민의 학부에 노벨상을 빼앗기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학문적 자세를 끝까지 지킨 세균학자 기타사토
"과학자인 이상 인정 때문에 학문적 태도를 바꿔서는 안 되네."(31쪽)
고민하고 있던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에게 독일의 뢰플러 교수가 충고했다. 기타사토는 1885년 유학을 떠나 베를린 대학 로베르트코흐 연구실에 있었는데, 마침 도쿄 대학 위생학 강좌 교수인 오가타마사노리가 환자의 혈액에서 각기균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기타사토는 이에 대한 반론을 국제 잡지에 발표했는데 문제는 오가타가 동급생이자 유학을 주선한 은인이라는 것이다. 기타사토는 뢰플러 교수의 말에 따라 오가타와 논쟁을 계속 벌였다.
1892년 기타사토는 귀국했지만 연구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다. 오가타가 있는 모교 도쿄 대학과의 관계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도교 대학 측은 도리를 모른다며 기타사토를 비판했는데 그는 학문과 개인적인 문제는 착각하면 안 된다고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위생 국장 나가요 센사이와후쿠자와유키치의 도움으로 전염병연구소를 열게 되었고, 이 연구소에서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협력하고, 저항하고, 무죄로 풀려나고…
1945년 9월 도쿄 대학교 전염병 연구소. 오카모토히라쿠 조교수가 "어리석은 남편 비겁한 아버지를 가엾이 여기고 마지막까지 살아 남거라."(121쪽)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콜레라균 권위자였는데 세균을 인공적으로 증식시킨 다음 독성이 있는지 중국인에게 먹이는 인체 실험에 협력했다. 손을 떼고 싶었지만 육군은 이등병으로 전선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베이징 대학의 의학부. 생리학을 강의하는 소화기 전문의 요코야마쇼마쓰에게 어느 날 소집 영장이 배달되었다. 입대하자 부대장이 충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중국인 포로의 배를 쏴서 복막염이 생기지 않도록 치료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명령에 거부하자 최전선으로 발령을 냈다. 전쟁이 끝난 후 간신히 처자를 찾아 일본으로 복귀했다. 그는 생전에 아내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야."(139쪽)
교토 대학 이시카와다치오마루 조교수는 731부대에 지원 입대했다. 이시카와는 페스트, 콜레라, 파상풍 등 20종의 세균을 실험했고 800명을 희생시킨 실험을 통해 8000장의 슬라이드 표본을 제작했다. 패전이 임박하자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즉시 소각하라!"(141쪽)라는 명령을 어기고 표본을 빼돌린 다음 그것으로 미군과 거래해서 무죄로 풀려났다.

-노벨상의 꿈을 키우고 패전의 잿더미에서 연구에 매달리고
"유카와히데키는 야행성이었다. 하지만 전등을 켜면 아이들이 잠을 깨기 때문에 스미는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겨울밤에도 우는 아이를 등에 업고 교토 분지의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 서성이곤 했다."(196쪽)
유카와히데키는 아내 스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에게서 외국에 노벨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본인은 받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스미는 결혼하자마자 남편에게 일본인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는지 물었다. 남편이 자신의 야망을 말하자 그녀가 방침을 세웠다. "나는 집안일을 전부 할 테니까 당신을 노벨상을 꼭 받아 주세요."
패전 후 도쿄에 있던 도모나가신이치로의 집은 모두 불타 버렸다. 그는 육군이 쓰던 임시 거처에 연구실을 마련해 '재규격화 이론'을 완성했고 친구 유카와히데키가 발행하는 영문 잡지 『이론 물리학의 진보』에 발표했는데, 이 논문이 서양에 알려지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1965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60년 전 도쿄의 겨울은 매서웠다. 게다가 도모나가 하우스는 콘크리트로 지어졌기 때문에 바닥이 차가워서 그는 어릴 때처럼 열이 났고 아이들은 설사를 했다. 일본 육군이 만들었기 때문에 생활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난방도 화장실도 없었다. 겨울에는 전원이 외투를 입은 채 세미나를 하면서 건물 밖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개최된 도모나가의 세미나에 전국에서 30여 명의 이론 물리학자가 모여들어 열기로 후끈거렸다."(253쪽)

-과학자에게도 사회적 책임이 있는가
2006년 일본 원자력안전위원회. 고베 대지진 이후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 방침을 재고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새로운 내진 방침을 만들기 위한 분과회'를 설치하고 수십 차례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사무국의 관료들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침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같은 해 8월 분과회에서 고베 대학의 이시바시가쓰히코 교수가 지침안을 수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위원직을 사임했다. "사회에 책임을 다할 수 없다. 이 분과회의 본성을 잘 이해했다. 일본의 원자력 행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359쪽) 5년 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그때의 지침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보여 준다.
일본의 핵물리학자들은 원자력 발전은 안전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원자로는 경제산업성이 아니라 문부과학성에서 기초 연구부터 총괄해야 하며 원자력 발전을 외국으로부터 신중히 들여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행정도 난맥상을 보였는데,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이 사임 후 원자력연구개발기구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규제하는 쪽과 추진하는 쪽을 오락가락했다. 접기









일본이 과학부문 노벨상을 많이 받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배경과 역사를 자세하고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 선진국이라기보다는, 선진국이라서 노벨상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노벨상 다수 수상국가가 되려면 국가, 사회, 제도가 어떻게 뒷받침해야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col1983 2017-02-2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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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과학의 역사




‘士’라고 쓰면 보통 우리는 글 읽는 선비, 즉 ‘문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일본은 ‘士’를 보통 ‘무사’라고 받아들인다. 사실 무사도 ‘士’이다. 문반, 무반 합쳐서 양반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士는 문사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문사는 아무래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에 치우치기 쉽다. 반면 무사는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문사는 방안에서 글을 읽지만 무사는 전장에서 적과 마주친다. 글을 읽다가 죽는 일은 흔치 않지만 적과 싸우다가 죽기는 쉽다. 우리는 문사 우위의 사회였고 일본은 무사 우위의 사회였다. 결국 이러한 차이가 양국이 근대 서양과학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도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부터 시작한다. 유키치하면 보통 일본의 계몽사상가이며 1만 엔권 지폐에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키치 역시 하급 무사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1858년 네덜란드 학문을 배우는 난학숙蘭學塾을 세웠으며 이는 이후 명문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學이 된다.


1868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훈몽궁리도해訓蒙窮理圖解>, 요즘 말로 하면 ‘도해 물리 입문’이라 할 만한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궁리열窮理熱’이라 불리는 출판 붐을 일으켰고 이후 수십 권의 물리 입문서가 잇따랐다. (20 페이지)


일본은 유사 이래로 모든 것을 중국에서 배웠다. 그러한 대국 중국이 아편 전쟁으로 영국에 유린당하자 유키치는 물론이거니와 마쓰시로松代의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조슈長州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도사士佐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한학은 사상성에서는 뛰어나지만 새 시대의 역할을 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한시라도 빨리 사이언스(물리 등 실학)를 배워 일본도 서양의 군함인 흑선黑船을 가져야만 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개화파가 근대화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파 김옥균 등을 게이오 의숙에 받아들었다[원문 오타].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쿠데타 갑신정변은 청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인이 학살되고 제자도 무참하게 처형된 사실에 유키치는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태도를 바꾸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했다. 아시아 동포를 도울 여유 따위는 일본에 없다, 그들을 동포로 생각할 게 아니라 서양 열강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일본도 제국 열강의 식민지 쟁탈에 나서지 않으면 자신들이 제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일본 국내외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일본을 둘러싼 현실에 직면하여 휴머니스트인 유키치는 이상주의자이기보다는 현실주의자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 그 때문에 무장을 뒷받침하는 물리학이 필요했다. 유키치가 물리에 주목한 데에는 그러한 불가피한 사정도 있었다. (21 페이지)




유키치가 물리를 공부하고 책을 펴낸 동기가 인상 깊다. 자연에 대한 이치 탐구가 아니라 부국강병, 무엇보다도 강병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했다는 변명.) 결국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현대물리학의 태동기부터 그 발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책에 나오는 초창기의 일본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야마카와 겐지로山川健次郞: 1871년 예일대학에 입학, 3년간 물리학을 배운 후 이학사가 되어 귀국. 도쿄 대학에서 가르치며 물리학에서 첫 번째 일본인 교수가 됨. 일본 최초로 방전 램프와 뢴트겐 선 실험.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郞: 오스트리아 빈 대학 볼츠만 교수 연구실로 유학. 1904년[Wikipedia에는 1901년으로 나옴] 귀국해 도쿄 대학에서 원자 물리학 연구. 우리가 보통 러더포드 모형이라고 알고 있는 원자 모형을 나가오카가 먼저 주장했다고 나온다(‘나가오카의 토성 모델’). 러더퍼드는 토성 모델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나가오카 한타로의 제자. 1921년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의 지도로 실험물리학 공부. 2년 후 러더퍼드의 제자인 덴마크의 보어에게로 가 6년간 양자역학 공부. 이화학연구소 최연소 정규 연구원. 1937년 일본 최초로 입자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 완성.




그 이후 세대는 우리가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郞,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등이 나온다. 도모나가는 1938년부터 하이젠베르크 밑에서 2년간 유학을 했다.




일본 물리학자들이 유학해서 배운 학자들의 이름이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어땠나 찾아보니 연희전문에 수물과가 생긴 것이 1915년 4월이고 1919년에 최초로 4명이 졸업했다고 한다[1]. 이중 이원철은 192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26년 미시간 대학에서 천문학 전공으로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된다. 일제시대에 이공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10여 명 밖에 안 된다는데, 이중 물리학과 천문학 분야는 단 4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는 평양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미국 퍼듀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조응천, 연희전문 수물과를 1926년 졸업하고 1932년(1933년?) 미시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가 된 최규남, 연희전문 수물과를 1930년 졸업하고 1940년 교토 제국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박철재가 있다. 경성 제국대학은 1924년 설립되었는데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있다가, 중국과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1938년 이공학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교수진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우리가 처음 서양물리학을 받아들인 시기가 일본과 약 50년이 차이 나고 연희전문에 수물과가 생긴 이후 식민지배가 끝날 때까지 또 30년이니, 제대로 된 물리학의 시작이 일본보다 약 80년은 뒤처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은 1949년에 유카와가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그렇게 보면 우리가 아직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것이 이상하지 않다.




책에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넘쳐난다. 일본인들은 정말 자신들이 ‘아시아의 유럽’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배에 나선 과거 때문에 경계심과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일본 역사와 버무려져서 워낙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앞에서 나온 인물들을 자꾸 잊어 버리게 된다(그래서 책 뒤에는 간단한 인명사전도 있다).




우리 물리학도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적어도 발전이 30년은 당겨지지 않았을까. 다른 과학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까지 있었으니 우리 과학기술계가 제대로 된 고민과 발전을 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봐야 60년 정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이제 이만큼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과학기술도 적어도 겉으로는 외국에서 무시 못할 정도는 됐으니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겠지만…




재미있는, 하지만 현실적인, 교수 유형 구분이 나오는데 방목형과 군대형이 그것이다(79~80 페이지). 뜻은 말 그대로다. 야마카와 겐지로, 유카와 히데키, 난부 요이치로南部陽一郞는 방목형 교수였고, 나가오카 한타로,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군대형 교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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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201205N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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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7-12-03 공감(18)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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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과학의 저력을 통해 보는 우리의 미래, 그리고 과제






과학 분야에서 일본의 노벨상 수상 업적은 대단하다.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등 분야도 고르다. 원자핵 공학을 공부한 뒤 신경 생리학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의 연구자인 고토 히데키의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는 노벨상 수상자를 중심으로 일본 과학의 위상과 저력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일본 과학의 위상에 감탄하는 수준을 넘어 그들이 뿌리고 거둔 과학 발전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과학의 여명, 전쟁과 과학자, 패배로 빛나다, 의사 대 과학자, 일본인과 노벨상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도 시사적이다.

책의 앞 부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등장한다. 물리를 통해 서양 사고를 공부하게 한 의사 출신의 지식인으로 이상주의자보다 현실주의자의 길을 간 선구자이다. 그가 서양 학문에 주목한 것은 부국 강병 차원이었다. 일본은 개국에 즈음해 서양 기술과 학문을 배우며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혼신을 다했는데 이는 주변 국가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법률, 어학, 광산학, 건축, 야금학, 화학, 축산, 의학,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신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받아들였다. 국위와 국력과 직결되는 것들이었다. 아드레날린을 발견한 다카미네 조키치, 각기병에 효과를 내는 오리자닌(Oryzanin)이란 쌀겨 추출물을 만들어냈지만 노벨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스즈키 우메타로 등의 이야기도 읽을 만하다.

‘벽암록’에 출처를 둔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있듯 과학 발전에도 사제 관계는 중요하다. 줄탁동기란 알 안에서 쪼는 줄의 시간과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알을 깨트리는 탁의 시간이 같아야 온전한 병아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의미의 말이다.

저자는 사제 관계를 방목형과 군대형으로 나눈다. 방목형은 소수파이지만 제자에게 원하는 연구로 자유롭게 하는데 의외로 제자가 크게 성장하는 경우가 있다. 방목형의 대표는 일본 최초(1949년)의 노벨상(물리학)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와 2008년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난부 요이치로 등이다.

군대형은 제자를 엄격하게 단련시키고 제자를 통해 업적을 쌓는다.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가 대표적이다.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하이젠베르크와 폴 디랙을 평가한 부분도 흥미 있게 읽힌다. 하이젠베르크는 열정적인 엘리트가 예상되었지만 밝은 스포츠맨 유형이고 디랙은 과묵하고 항상 생각이 많은 철학자 유형이었다고 한다.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길러낸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니시나 요시오는 원자핵이 플러스인 양성자와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자가 모여 있기에 같은 플러스 전하끼리 반발해 흩어지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을 보고 새로운 소립자를 가정했다. 이것이 중간자(meson)의 시초이다.

히틀러의 적대(敵對) 정책으로 독일에서 쫓겨난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에 거주하며 우라늄 농축에 성공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일본은 이 점에서 생각을 잘못한 것이었다. 만주 731 부대에 파견되어 아이들을 상대로 동상(凍傷) 실험을 해 물의를 일으킨 요시무라 히사토 이야기도 나온다.

당시 한 대학에서 “의과는 병과(兵科)여야 한다. 사람 죽이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말도 나왔었다. 731 부대에서는 물만 마시고 얼마나 살 수 있는지도 실험했다. 포로들인 마루타는 수도물의 경우 45일을 살았지만 미네랄이 없는 증류수로는 33일만에 사망했다. 어떤 군인은 유행성 출혈열에 걸린 환자의 혈액을 중국인에게 접종해 병에 감염되게 했다. 의사 뿐 아니라 과학자 대부분이 군 연구에 종사하고 있던 시대였다.

유카와 히데키는 공부에 몰두하면 중얼중얼하면서 몇 시간이나 연구실 안을 곰처럼 어슬렁거렸다. 이 버릇이 시작되면 도모나가는 도서관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유카와 히데키는 오카와 히데키였다. 그런 그가 유카와 히데키가 된 것은 유카와 집안의 데릴 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히데키의 아내인 스미(スミ)가 일본인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냐고 묻자 히데키는 자신이 노벨상을 받을 계획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다. 스미는 집안일을 전부 할 테니까 당신은 노벨상을 꼭 받아 주세요란 말을 했다.

일본은 레이더, 원폭, 페니실린 등 전쟁의 국면을 좌우하는 개발 경쟁에서 미국에 모두 패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에 의하면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을수록 그것을 중개하는 입자는 가벼워 먼 거리를 재빨리 날아간다. 전기적인 힘의 경우 두 전하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약하지만 서로 당긴다. 전기력은 가장 멀리까지 작용하는 힘이다. 그에 부합해 광자는 무게가 없다.(203 페이지)

유카와 히데키는 첫 논문을 쓸 때 군더더기를 싫어해 문장을 계속 간결하게 수정했다. 심지어 문장에 적합한 단어는 단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단어 선택에 극도로 신중을 기했다. 유카와는 시퍼렇게 간 칼날 같은 날카로운 문장을 썼다. 유카와는 이론은 관계가 있는 모든 현상을 설명해야 하며, 아름다워야 하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실험을 논문에서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8년 유카와는 미국 동부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초청을 받아 일본을 떠났다. 저자는 이를 두뇌 유출(brain drain)이라 말한다. 유카와 부부를 보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원리(질량 에너지 등가이론)를 발표했기 때문에 원폭이 개발되어 당신 나라의 두 곳에서 많은 살상자가 발생했다며 자신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유카와는 원자핵에서 매력적인 문제를 발견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여 있기 때문에 플러스라는 같은 전하를 가진 양성자들의 반발 작용으로 흩어져야 하는데 결합되어 있다. 유카와는 전자기력, 중력 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 뒤 그것을 해명하고자 했다. 유카와는 불확정성 관계에 의거해 핵력을 중개하는 새로운 입자의 무게까지 산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동양인이 양자역학의 핵심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카와는 이론만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첫 물리학자이다. 유카와의 이론은 당시까지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 계산만으로 소립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류에게 명확하게 제시했다.(225 페이지)

도모나가 신이치로에게 늘 뒤져있던 유카와가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중간자 이론 발표로 인해서이다. 1965년 도모나가는 노벨상을 수상했다. 슈윙거, 파인만과 함께. 물론 두 미국인은 도모나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공식 수상 기록에 도모나가의 이름을 첫 번째로 올렸다. 훨씬 앞서 이론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드물지 않았지만 일각에서 의학생리학상은 무리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런데 1987년 도네가와 스스무가 그 상을 탔다. 20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시모무라 오사무는 제약회사 면접에서 당신은 회사에 맞지 않습니다란 말을 들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물리 연구는 이론과 실험으로 나뉜다. 유카와는 손재주가 없었고 도모나가는 손재주가 좋았다. 볼프강 파울리는 이론 물리학자 동료들이 무서워할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빨랐다. 실험을 하지 않더라도 조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서 귀찮은 실험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손재주는 너무 없었다. 극단적인 기계치였다.

문제에 착수할 때 이론물리학자들은 영향이 작은 것을 전부 없앤다. 그런 미미한 요소를 식에 포함시켜 풀어보면 복잡해질 뿐이고 결론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모델을 만들어 대략적인 풀이를 생각하는 것을 정성적(定性的) 연구라 한다. 이 정성적 연구에는 고도의 이론적 감각이 필요하다. 이론 물리학자에게는 수식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수식 자체는 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것은 아인슈타인 한 사람이다.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도 수식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중간자를 설정해서 그것의 주고받음으로 힘이 발생한다는 아이디어가 훌륭했던 것이다.

양자(量子)라는 아이디어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했다. 그는 빛이 광자라는 입자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양자에 확률 해석을 가해 양자역학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확률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에 반대했다. 난부 요이치로는 끈이론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초끈이론의 시초가 되었다.

난부는 대칭의 세계(물질과 반물질의)라면 빅뱅 당시 에너지로부터 같은 수로 탄생한 입자와 반입자가 합쳐져 전부 사라져야 하는데 한쪽의 세계만이 현재 남아 있다는 것은 자발적인 대칭 깨짐(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현대의 서양 기술은 그 밑바탕에 있는 생각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적의를 드러내며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라 말한다. 이익의 논리에서 이치의 논리로 중심을 옮겨 직시하지 않으면 비극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377, 378 페이지)

후쿠자와 유키치(19 세기 일본의 계몽 사상가, 교육자)는 일본이 외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유형의 학문 가운데 물리를 특히 중시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밑바탕에는 학생들에게 무형의 사상성을 키우려는 생각이 있었다. 저자는 유카와 히데키를 동경해 이론 물리학을 공부했다. 흥미와, 그 이상의 의미와 교훈을 주는 책으로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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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7-03-25 공감(10)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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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학기술이 세계수준에 오르기까지


2016년 노벨상 수상자가 모두 결정되었습니다. 금년에 선정된 수상자 가운데 문학상부문의 밥 딜런이 단연코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문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 요시미 요시노리가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것에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처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 금년까지 22명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2007년, 2009년 그리고 2011년, 201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2014년과 2015년에... + 더보기
처음처럼 2016-10-24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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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일본인으로 노벨 과학상을 최초로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를 동경하여 물리학자를 꿈꾸고, 실제로도 의학박사이자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인 고토 히데키. 그는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라는 부제를 가진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라는 책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유카와의 노벨상 수상까지 40여 년간 일본 과학의 별은 누가 뭐라 해도 노구치 히데요였다. 그러던 것이 1949년부터 유카와 히데키로 교체되었다. 그 후로 다시 60년이 지나 유카와 히데키라는 이름을 모르는 일본인도 늘어났다. 우리의 새로운 별은 대체 어떤 분야에서 출현할까.(353p)



하지만 나는 이 글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유카와 이후 일본의 많은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 책의 띠 지에는 ‘2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배출까지’라는 문구가 있지만,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추가하면서, 과학 분야의 수상자는 22명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 과학의 별은 아마도 북극성처럼 빛나는 하나가 아닌 은하수처럼 일본과학계를 수놓는 별들이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솔직히 부러운 일이다. 일본 혹은 작년의 중국까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으면, 한국은 ‘왜 우리나라는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하는가’라는 자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니 “10년내 노벨상급 과학자 1,000 육성’같은 근시안적인 정책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는, 일본사를 배울 때 교수님이 해주었던 농담이 떠올랐었다. 실험실에 박혀서 실험만 하던 어떤 일본 과학자가 오래간만에 학교를 벗어나서, 일본이 패망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런 천재 혹은 괴짜 과학자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나보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부록으로 ‘일본 근현대 과학사 연표’를 제공해줄 정도로, 일본의 과학사를 살펴보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제 62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 수상작’답게 배경지식이 부족해도 충분히 읽을만하게 구성되었다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다.



러일전쟁인 영양소 결핍으로 큰 피해를 받았던 ‘비타민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양국의 전쟁보다는 일본은 각기병으로 러시아는 괴혈병으로 수많은 병사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때 연구중심이던 독일의학을 신봉했던 모리 오가이가 ‘각기병은 감염병’이라는 신념으로 농민학부 교수였던 스즈키 우메타로의 연구를 무시했다. 세계 최초로 비타민 B1을 추출하면서, 각기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에 성공했던 스즈키는 도쿄대학의 파벌싸움에 희생되어 노벨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니 안타깝다. 노벨상 거부한 ‘최초의 수상자’가 되어 더욱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에 노벨상을 수상한 파인만의 일화가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책에도 있었다.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평소에도 허약한 편이라, 추운 12월에 스톡홀름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상자로 결정되고 축하파티를 하다 뼈가 부러져 시상식에 갈 수 없게 되었다니 다행이었다고 할까? ^^



물론 세균학자 이시카와 다치오마루 같은 인물도 등장한다. 731부대에 자원입대했던 그는 일본이 패망하자 반인륜적인 신체실험을 통해 수집했던 슬라이드 표본을 빼내서 자신의 강의에 활용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기분이 나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화학연구소에 설치되어 있던 사이클로트론으로 원폭을 만들 수 있다며 미군이 없애버린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후 미국에서 고문으로 물리학자를 파견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에 대한 것은 조금 알쏭달쏭했다. 아무래도 731부대에서 가져온 슬라이드 표본을 미국과 거래하여 관계자들이 무죄로 풀려났다는 것에 맞물려서 그런 것 같다.



‘일본 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는 일본인과 서양인의 차이처럼, 혹은 일본인은 과학에 적합하지 않아서, 일본의 과학이 서양의 수준에 이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곤 했다. 거기에 그의 학문의 아버지였던 보어는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다. "학문은 인종의 차이라든가 유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전통뿐이다." 그리고 작가는 150년간의 일본 과학사를 살펴보며, 이제 일본이 배워야 할 서양의 지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이미 일본은 자신의 과학사를 통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과학이라는 학문에서 평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물리학보다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사회의 민주제도, 개인의 독립, 자존’ 같은 것에도 같은 고민을 하며 진지하게 접근하자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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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6-10-1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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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괴짜들의 일본과학사




올해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고 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 가 생리의학상을 타게 되었다.
이로서 일본은 과학 부분에서만 2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아직 한명도 과학 부분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고토 히데키는 “유카와 히데키 박사를 동경해서 이론 물리학을 공부했고 유카와 박사가 생물 물리학을 연구하라고 권해서 원자핵 공학 대학원에서 방사선 생물학을 공부한 후 뇌 신경과학을 전공했다. 이러한 경험이 있어서 필자는 일본의 과학자가 걸어온 발자취를 생명, 의학, 물리, 화학에 걸쳐서 엮어 보고 싶었다. 필자가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이 과학자들의 세계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p382” 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읽어 나갈 수 있다. 마치 교양과학 시간에 노교수가 자신의 은사와 다른 과학자들의 뒷애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일본은 조선보다 일찍 서양학문을 접했다. 1838년 오가타 고안이 네델란드어와 의학, 가학을 가르키는 데키주쿠를 설립했다. 조선은 헌종때였다. 물론 일본에서도 무사의 자녀는 사서오경같은 한학을 배워야 했으니 조선과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신분문제에서 갈등을 겪었던 후쿠자와 유키치 는 물리의 세계에서는 신분의 상하와 관계없이 누구나 공평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물리를 받아 들였다. 그리고 게이오 의숙의 입학생에게 물리를 통해 서양의 사고를 공부하게 했고 물리학을 문과계열의 필수 과목으로 만들었다 (p20)고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체계는 인정하기 싫어도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에 어쩌면 후쿠자와 유치키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 학생들이 물리와 시름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혼자 실소를 하기도 했다.
이 후쿠자와 유치키의 게이오 의숙에 김옥균 이 공부했었고 김옥균이 갑신정변으로 처형된 후 유치키가 충격을 받고 ‘탈아입구’(일본도 제국 열강의 식민지 쟁탈에 나서지 않으면 자신들이 제국의 식민지가 될 것) 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과학도 조금 더 빨라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유치키로부터 일본에 물리학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 독한 일본인들이 혈혈 단신으로 외국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은 과학의 발달이 생각보다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핵물리학의 시조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나 닐스 보어 등 교과서에서 흔히 봤던 이름들을 발견하게 된다. 양자 역학에 도전한 니시나 요시오는 보어 밑에서 공부를 했으나 보어에게 “우리 일본인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어떨지 항상 의심에 왔습니다. 또 마음속으로는 일본의 과학이 서양의 수준에 도달하는 건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뭍는다.
그 질문은 사실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해 보어는
“ 학문은 인종의 차이라든가 유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전통뿐이다” p97

일본과학계의 고속 성장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전쟁의 도울 수 있는 과학 기술의 개발 경쟁에 일급의 과학자들이 내몰리기도 했고, 731 부대의 악행에 동참한 의학자도 있었다.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행정관료의 허수아비로 전락하면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같은 참화가 빚어졌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저자는 서슴없이 비판하며 그것을 화의정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따지는 것을 그만두고 미래를 위해서 모두 힘을 합쳐 개선하도록 하자. 그 때문에 일본은 무책임한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관료의 폭주도 이어진다. 이는 쇼토쿠 태자에 의한 17개조 헌법 이래로 일본인의 몸에 밴 화의 정신이다. p377”

일본이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이유로 저자는 일본 과학계의 이러한 약진이 단기간에 걸친 국책 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150년 이상의 역사를 토대로 한 결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음을 애기한다.

개국 이래 한 세기 반, 분명해진 것이 있다. 사무라이 과학자에게 유형의 문화인 수리학, 요즘 말하는 물리학을 배우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현대의 일본 과학자도 매일 서양과 교류하고 있기 때문에 사고방식을 포함해서 모든것이 서양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서양 과학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일본인이 서양의 사상과 철학, 도덕, 관습, 종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물리학에 비해서 지극히 어려웠다. 일본인이 이제부터 배워야 할 서양의 지혜는 사회의 민주제도라든가 개인의 독립, 자존 등 무형 문화라고 생각한다 p380

우리나라의 인적 재료는 일본의 것과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적인 부분도 비슷한 제약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학을 국가나 공적 기관에서 투자하는 이상으로 민간과 기업에서 적극적으로 과학자를 후원하고 도와주었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 서양학문이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한지 거의 100여년이 지나고 있다. 우리나라 연구소 어딘가, 아니 세계의 어느 연구소에서 노벨상을 수상할 만 한 걸작이 만들어 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국가나 교육기관 이외에 개인 하나하나가 과학발전을 위한 투자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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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용이 2016-10-1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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