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누가 진짜 매국노일까요? : 네이버 블로그
을사늑약, 누가 진짜 매국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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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마찰이 일어나면서 국내 여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빨리 복원하기 위해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을 친일파니, 매국노니, 토착 왜구니 하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매도할 만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귀인 이론과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는 과정을 되돌이켜보면서 누가 진짜 매국노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완용보다 더 큰 매국노는 고종, 민비 일족, 대원군이고,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해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게 만든 그 이전의 왕과 고위 관료들도 큰 매국노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매국노의 정의상 보통 사람들은 매국노가 될 수 없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을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통령, 여야 국회의원, 고위 관료들이 매국노가 될 수 있습니다. 국력을 약화시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매국노로 만드는 주체는 유권자입니다.
귀인 이론: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이론
심리학에서 개인의 행동은 그 개인의 특성과 그 행동이 나오는 환경의 특성이 상호작용하면서 결정된다고 봅니다. Behavior = f (Person, Environment)라고 하는 Kurt Lewin의 장 이론(Field Theory)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이한 행동을 했을 때 그 원인이 그 사람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환경의 특성 때문인지를 밝히는 것을 귀인(歸因, Attribution)이라고 합니다. 원인(因)을 돌린다(歸)는 의미입니다. 재판을 하는 판사들이 피고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 늘 하는 일입니다. 살인이라는 특이한 행동을 해도 정당방위를 위해 한 것이라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실행했고 반복적으로 살인했다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예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론을 귀인 이론(Attribution Theory)라고 합니다. Harold Kelley를 비롯한 학자들이 많이 연구했습니다. 기초적인 내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황의 힘이 아주 강해서 모든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속성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만 원을 달라고 할 때 돈을 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때 만 원을 줬다고 해서 적선을 베푸는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특이한 행동의 원인을 개인의 밖에 있는 환경적인 요인에서 찾았다고 해서 외부 귀인(External Attribution)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지하철 역사에서 혼자 가다가 기부를 해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데도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성이 행동으로 표출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행동의 원인을 그 개인의 내부적 속성에서 찾았다고 해서 내부 귀인(Internal Attribution)이라고 합니다.
귀인 이론의 핵심은 특정 행동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는 외부적 상황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국노나 친일 인물인지를 판단하거나, 얼마나 나쁜 매국노인지를 판단할 때도 이 이론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나쁜 매국노는 많은 사람들이 매국노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Environment)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일본에 대한 강력한 맞대응을 반대하는 사람이 토착 왜구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구(倭寇)의 정의를 찾아보니 "13~16세기에 우리나라와 중국 해안을 약탈하던 일본인 해적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Japanese Invaders라고 하네요. 일본인 침략자입니다. 토착 왜구는 전우용이라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가 일제 시대에 사용했던 토왜(土倭)를 현대식으로 풀어쓴 말이라고 합니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서 토왜를 '얼굴은 한국인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분류했답니다.
첫째, 뜬구름 같은 영화를 얻고자 일본과 이런저런 조약을 체결하고 그 틈에서 몰래 사익을 얻는 자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 하는 고위 관료층이 이에 해당합니다. 둘째, 암암리에 흉계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말로 일본을 위해 선동하는 자로서 일본의 침략 행위와 내정 간섭을 지지한 정치인, 언론인이 이에 해당합니다. 셋째, 일본군에 의지하여 각 지방에 출몰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로서 친일단체 일진회 회원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넷째, 저들의 왜구 짓에 대해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면 온갖 거짓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퍼뜨리는 자로서 토왜들을 지지하고 애국자들을 모함하는 가짜 소식을 퍼뜨리는 시정잡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지금은 일본의 조치에 대항해 반일을 하자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토착 왜구라고 한답니다. 맞는 말인지를 따져보겠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만 따진다면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살면서 약탈을 일삼는 일본인을 토착 왜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구가 되려면 먼저 일본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제시하는 것을 토착 왜구라고 할 때 "일본에 맞대응해서 보복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토착 왜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 가지 토착 왜구의 유형에 해당하는지를 모두 따져봐도 토착 왜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방안이 더 좋을지에 대한 의견이 다를 뿐,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우리나라에 손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등 큰 권력이 있는 사람만이 매국노가 될 수 있습니다
매국노(賣國奴)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랍니다. 미국, 일본, 중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국노일까요? 일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면 매국노이자 토착 왜구일까요? 세 나라가 다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친하게 지내야 우리나라에 이익입니다.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우리나라에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매국노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주권이나 이익을 팔아먹을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국노가 되려면 일단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 등 주권이나 이권을 팔아먹을만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이완용을 일본의 앞잡이, 최고의 매국노로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이완용을 최고의 매국노라고 배웠습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을 맺기 전까지는 반일파였습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에서 영어교육을 받고 조선의 미국 주재 공사관에 2번이나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30살이었던 1887년 말부터 5개월 정도, 1888년 말부터 2년 정도 미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조선의 고위 관료 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 했고 고종, 민비와 친분이 높았던 알렌과도 아주 친했던 최고의 친미파였습니다. 독립협회 설립의 핵심 멤버였고 2대 회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했습니다. 민비 시해 이후에는 고종을 러시아 영사관으로 몰래 빼내는 아관파천에 참여하여 친미파 겸 친러파로 변신합니다. 최고의 반일파였습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할 때부터 친일파로 변신합니다.
두 권의 이완용 평전이 을사늑약 체결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1905년 11월 15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 일본군 헌병 사령관, 군사령부 부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으로 들어왔답니다. 대궐 안팎을 중무장한 일본군이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었답니다. 늑약 체결 과정의 핵심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토가 고종에게 외교권을 넘기라고 협박했고, 고종은 8명으로 구성된 대신 회의에서 논의하라고 했답니다. 하야시 공사와 한규설을 재상으로 하는 8명의 대신이 논의했는데 8대신들이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일을 절대 하지 못하겠다고 했답니다. 다시 어전회의를 열리고, 여기서 고종이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어보니 8대신이 모두 불가하다고 답했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일부 대신이 절대 불가이긴 하지만 조약의 체결권자는 황제이니 황제께서 조약을 체결하고자 한다면 이런저런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합니다. 대신들이 고종이 끝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대한제국이라서 고종이 황제였습니다. 8대신은 그래도 여전히 조약 체결은 불가하다고 하고 퇴청을 했답니다. 황제는 다시 대신들에게 협상을 타결하라고 지시하고, 8대신은 또다시 불가하다고 했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이토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을 데리고 나타나서 고종 알현을 다시 요청했답니다. 고종은 몸이 아프니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했답니다. 이토가 대신들을 모아 놓고 한 명 한 명에게 의견을 묻고 초안에 대한 개정 의견을 받아 함께 문안을 수정했답니다. 개정안을 고종에게 올렸더니 "우리가 실력이 회복되면 외교권을 대한제국으로 반환한다"라는 조항을 넣어달라고 요청했고 그것을 이토가 받아들였답니다. 최종적으로 박지순이 관인을 찍음으로써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답니다. 당시 대신 회의는 자문 기구였기 때문에 의결권이 없었지만 찬성한 대신 중에서 5명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었답니다.
이완용 평전에서는 이완용은 고종의 의중을 명확하게 알고, 현실적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았기 때문에 대한제국과 고종에게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조약의 내용을 바꾸려 했다고 합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이완용은 최고의 친일파로 변신합니다. 이토의 총애를 받았고, 일제 시대에는 민영휘에 이어 두 번째로 재산이 많았다고 합니다.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을사 5적이 없었다면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을사 5적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당시의 8대 대신이었다면 을사늑약이 체결되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8대 대신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요? 고종이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외교권을 일본에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대한제국이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전혀 없었고, 조약 체결을 거부하면 성 밖에 있는 일본 군인들이 들어와서 왕과 대신들을 죽일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자신 있게 "나는 절대로 조약 체결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필자는 그런 매국노들이 없었더라도 국권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가 몇 천명의 군인으로 황제를 겁박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우리나라 군인이 4000여 명 밖에 안되었고, 그중에서 반은 궁궐을 지키고 있었답니다. 일본은 1905년에 당시 패권국가였던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영국, 러시아, 미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에 대해 허용 받았습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청나라가 대한제국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1905년의 을사늑약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이 조선 지배에 관심이 없었다면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 볼 때 일본에 빼앗기기 않았다면 러시아에게 빼앗겼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소련의 일부가 되어 스탈린에 의해 온 백성들이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고 나라 자체가 완전히 소멸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식민지를 만들던 제국주의 시대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동쪽에서 부동항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만한 충분한 인센티브가 있었고 육군도 세계 최강 수준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조선 지배 야욕은 아관파천 이후의 행태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권리를 얻고 나서야 조선의 식민지화를 포기했습니다. 러시아 대신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니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아닙니다. 당시 상황이 그럴 정도로 조선이 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매국노, 누가 만들었나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에 3권의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친일반민족행위와 부일협력행위를 한 인물 중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선정한 4,389명을 수록한 사전"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매국노라고 하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매국노로 만든 게 누굴까요?
우리나라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칭송받는 경주 최부자집 사례를 보겠습니다. 최준은 경주 최부자 가문의 12대 당주로 가문의 재산을 털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굉장히 큰 금액의 독립운동자금을 기부해서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동생인 최윤은 조선총독부의 형식적인 자문 기관이었던 중추원 참의를 해서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었답니다. 참의를 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형의 독립운동 지원을 숨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답니다. 그래도 어쨌든 친일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 최윤을 매국노로 만들었을까요?
반일에 앞장섰던 그 많은 동학운동 참여자와 독립협회 참여자들을 친일파로 만들고 제발 일제의 지배를 받게 해 달라고 요청하도록 만든 주체는 누구일까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본이 다스려달라고 그 많은 사람들이 요청했을까요? 1905년부터 해방 때까지 거의 40년인데 최윤처럼 그 시대에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높은 직위에 오르고 자동으로 매국노가 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 초기에는 여러 분야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가 일제 지배 후기에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일제의 지배가 지속되다 보니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 자체를 잃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누가 이들을 매국노를 만들었을까요?
국권을 잃게 한 진짜 책임자는 대원군, 고종, 민씨 일가이다?
필자는 진짜 매국노는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권력 유지와 재산 축적을 우선시한 조선의 왕과 고위 관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나라를 잘 다스려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다면 국권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했다면 매국노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장 이론에 제시하듯 백성이 매국노가 되도록 하는 환경(Environment)을 만든 주체인 조선의 왕과 고위 관료들이 진짜 매국노입니다.
을사오적을 매국노라고 하면 고종과 그 가족은 더 큰 매국노입니다. 그렇게 허약한 나라를 만든 최종 책임이 고종과 그 가족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전제 왕정시대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외교권을 넘겨 준 책임은 고종에게 있습니다. 1910년에 맺어진 한일합병조약 7개 조항 중에서 2개 조항에 걸쳐 고종과 그 가족에게 대대손손 명예와 부를 제공한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종과 그 가족은 한일합방 이후에 일본 황실로부터 천황 가족 다음으로 높은 지위와 일본 정부에서 매년 엄청나게 큰 금액을 세비로 받았습니다. 일본 천황 가문과 귀족 가문의 중간에 위치했습니다. 영친왕은 일본 육군 중장으로 동경의 육군 제4사단의 사단장까지 했답니다. 나라를 빼앗기게 만들고 스스로 일본에 나라를 넘긴 장본인인 고종과 그 가족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아주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들이 매국노가 아니면 누구를 매국노라고 욕할 수 있을까요?
귀인이론으로 보면 1등급 매국노는 변화의 시기에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직접 나라를 팔아먹고 부귀영화를 누린 고종과 대원군 가족, 민비 일족이고, 2등급 매국노는 고종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적극 동조하고 친일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린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정미칠적 등이고, 3등급 매국노는 고종 이전에 국력을 약화시킨 조선 국왕과 고위관료들로 보입니다.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가 근 40년이나 되었으니 일제 지배 후반기에 변절한 친일 인사들은 처음부터 친일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다수가 일제 지배에 순응하면서 살던 시절에 독립 운동을 한 분들은 정말로 훌륭한 애국지사입니다.
고종은 너무 부실화된 국가를 물려받았으니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책임이 고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고종이 왕이 되었을 때 이미 나라를 지킬 군사력과 치안 질서를 유지할 경찰력도 없을 정도로 피폐한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고종은 12살인 1863년에 즉위했지만 대원군이 10년간 섭정을 하고 나서 1873년부터 직접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일본이 1867년에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근대국가로 변모했으니, 1873년부터 국가를 잘 운영했다면 나라를 지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고종이 친정한 이후에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했습니다. 고종 자신이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민비 일가의 세도정치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자행되었습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혁신을 한 흔적이 별로 없습니다. 나라를 지키려면 군사력이 중요하고 강한 군대가 있으려면 국가 재정이 튼튼해야 합니다. 고종이 물려받은 조선의 국가 재정은 형편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국왕이 매관매직을 해서 왕실의 경비를 조달했을까요?
형편없었던 군사력과 경찰력을 보겠습니다. 전체 숫자가 많지도 않은 군인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해 소요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1863년에 금위영 소속 군병들이, 1877년에는 훈국병들이 일으킨 바 있습니다. 조선 정부는 군인들의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자 대규모 군인 구조조정을 했습니다. 정리해고를 당한 군인들이 체불 임금을 받지 못했고, 남아있던 군인들의 처우도 신식 군대라는 별기군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습니다. 이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켜 대원군이 집권하게 됩니다. 난을 일으킨 군인의 수가 얼마나 될까요?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인 3000명이 용산에 머물게 되었고, 이들이 대원군을 붙잡아갔으니 군란을 일으킨 군사의 숫자는 아주 작았을 것입니다. 임오군란으로 폐지된 별기군도 거창한 것 같지만 군인 전체수가 50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도 일본군 200명과 조선 군인 50명으로 일으켜서 성공했습니다.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조선 주둔 군인 1500명을 동원해서 진압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 을미사변에서는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 조선 정부 일본인 고문, 한성신보사 사장과 기자, 영사 경찰, 낭인배들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궁궐을 지키는 병사 8~10명이 희생되었고, 비상소집된 300~400명이 저항했으나 무기의 열세로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적은 숫자로 왕궁을 점령하고 왕비를 시해했으니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일본군과 청나라 군인이 주둔해 있는데도 궁궐과 도성 전체를 지키는 정규 군인 수가 1200명을 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학군은 혁명 초기 10여 일 만에 1만여 명을 동원하여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하고 정읍과 전주성도 점령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전주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동학군이 정부군과 화약을 맺고 해산되었습니다.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정부군이 800명이었고, 추가적으로 800명의 증원 요청이 있었습니다. 전라도를 점령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600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해 청나라와 일본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동학군 해산 후에 전라도 일대의 치안과 행정이 마비되어 정부가 동학군에게 전라도 53개 읍의 관아 아래 집강소를 설치하고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맡아달라고 했답니다. 이미 나라를 지킬 국가 재정이나 국방력, 경찰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국권을 잃게 한 진짜 책임자는 대원군 이전의 조선 국왕들과 고위 관료들이다?
어떤 사학자들은 이미 조선의 경제가 피폐했고 국가 재정이 파탄 나서 나라를 지킬 국방력과 경찰력이 없었기 때문에 고종이 아무리 잘 했어도 나라를 지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서구 열강과 비교해 국력이 형편없었고,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일본과 비교해서도 국력이 형편없었답니다. 고종 이전의 상황을 볼까요?
고종이 즉위하기 1년 전인 1862년에는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진주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경상도 19 개 도읍, 전라도 38개 도읍, 충청도 11개 도읍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경기도,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 등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조선 정부, 관료, 양반들의 수탈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관청이 있는 읍내로 몰려가 관리들을 구타하고 문서를 불태우고 관아를 부수었답니다.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군 단위 정도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도 조선의 지방 정부는 관아를 지킬 치안력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원군 섭정 시기에도 경복궁 중수에 따른 국가 재정의 파탄, 과중한 노역에 따른 민심 이반과 소요, 민생의 피폐 등이 큰 문제였습니다. 한 마디로 고종은 엄청나게 문제가 많은 부실 국가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홍경래는 1811년 12월에 봉기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초기에 1000명의 유랑민으로 시작해서 몇 개의 군을 별 저항 없이 점령하면서 반란자의 수가 5,000명으로 불어났답니다. 정부에서는 1만여 명의 관군을 동원해 다음 해 4월에야 진압했다고 합니다.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는데 1만여 명밖에 동원하지 못했다니 국방력이 형편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이후 초기 몇 대를 빼고는 국가 재정이 계속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왕권 유지를 위해 관료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관료들이 더 많아지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양반과 노비의 비율이 높아지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국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토지와 사람의 수가 줄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후에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지 않는 한 나라를 지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답니다. 그야말로 폐단이 쌓이고 쌓여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고, 그것을 고종이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민생은 피폐해졌지만 정유재란이 끝나는 시점인 1598년 12월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비해 조선의 군사력은 상당히 강해졌습니다. 병자호란이 발생한 1636년에는 다시 군사력이 형편없어졌습니다. 12만 대군이 심양을 출발해 별 저항을 받지 않고 10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답니다. 이리저리 군사를 모았으나 왕이 피난 가 있는 남한산성을 지킬 병사들은 1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이괄의 난 이후 도성 방비를 위해 한양성에 군인을 많이 배치했는데도 그 정도밖에 안되었답니다.
왜 이렇게 군사력이 형편없어졌을까요? 두 차례의 왜란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커서 이를 복구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느라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큰 절에 가 보면 많은 건축물이 임진왜란 이후에 개건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들이 공을 많이 세웠기 때문에 광해군이 국가 재정으로 재건을 도왔다고 합니다. 궁궐, 관아 등을 재건하는데도 엄청난 재정이 투입되었습니다. 왜란으로 인해 생산을 담당할 인구가 많이 줄고 경작지의 66% 정도가 파괴되었다고 하니 국가의 생산력이 떨어져 세금을 많이 거둘 수도 없었습니다. 광해군 때 이미 국고가 바닥이 나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었답니다.
이후에도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과 노비의 증가,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해 정부가 거두어들일 수 있는 세금이 많지 않습니다. 정조 때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고자 수원성을 축조하면서 국고를 바닥냈다고 하지요. 정조가 1800년에 죽었으니 나라의 곳간이 빈 것은 고종이 즉위하기 한참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랍니다. 그 이후에 나라의 곳간이 채워진 적이 없답니다. 정부의 재정 수입이 부족하니 나라를 지킬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조선의 왕과 고위 관료, 세도 정치 가문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많은 사람들을 매국노로 만든 진짜 매국노입니다.
가장 큰 매국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 고위 관료, 여야 정치인들입니다
"사익을 위해 국가의 주권과 이익을 남에게 팔아먹는 자"라는 매국노의 정의를 생각해본다면, 일반인들이 매국노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팔아먹을 만한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익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매국노가 되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주권이나 이익을 팔아먹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여행을 가거나 일본 제품을 사서 쓴다고 해도 매국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 간의 분업으로 일본 제품을 사서 쓰지 않기도 어렵습니다. 일본 기업이 만든 제품이 아니더라도 일본 기업이 생산하는 부품을 사용하는 국산 제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외교를 하는 사람들이 뇌물을 받고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협약을 체결하면 매국노가 될 것입니다. 군 장성이나 관료들이 외국 방산업체에게 뇌물을 받고 무기를 비싸게 사와도 매국노가 될 것입니다. 이들보다 더 큰 매국노는 조선 시대의 왕이나 고위 관료들처럼 엉터리 정책을 펴서 국력을 약화시키고, 나라를 망하게 만들어서 많은 국민들을 매국노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 고위 관료들은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최고의 애국자가 될 수도 있지만, 국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최악의 매국노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권자가 바른 생각을 해야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이 매국노가 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은 생존입니다. 나라를 지켜야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1000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도 나라를 빼앗기면 1000년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됩니다.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노력해서 쌓아 놓았던 것들을 다 빼앗깁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국방력이 필수적이고, 강한 국방력은 강한 경제력에서 나옵니다. 강한 경제력은 국민 각자가 타고난 재능을 개발하고 활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 나옵니다. 다수의 국민이 국가의 보조금을 받고 살겠다는 생각을 가진 나라치고 부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정당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은 집권입니다. 유권자들에게 표를 많이 얻어 권력을 잡는 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집권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미래가 어찌 되건 상관없이 선심성 공약을 대폭 내걸어 집권을 하려 합니다. 국회의원 후보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입니다. 당선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힘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해당 지역 주민에게 표를 얻을 행동을 합니다. 다른 지역구야 어찌 되었던 자신의 지역구에 예산을 많이 따와서 선심성 사업을 벌이려 합니다. 국가의 목적과 정당이 추구하는 목적이 일관될지의 여부는 유권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권자들이 정부의 보호나 지원, 보호로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해야 국가의 목적과 정당의 목적이 일관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매국노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윤덕한. 1999. 이완용 평전: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중심.
김윤희. 2011. 이완용 평전. 한겨레출판
[출처] 을사늑약, 누가 진짜 매국노일까요?|작성자 이경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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