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3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박충구*" 서평 장 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지음 2007)을 읽고



jboard




친우
'장기려 그 사람'-책소개








"장 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지음, 홍성사, 2007)을 읽고

글쓴이 : 박충구*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서울에서 지강 유철 선생이 보내준 "장 기려 그 사람"을 읽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온 담백한 신앙을 가진 한사람의 의사가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지나며 살아온 흔적들을 추적하여 담아 놓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장 기려의 삶에는 한반도가 담겨있고, 한국 기독교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분단과 더불어 처자와 생이별하고 평생을 홀로 살아온 장 기려는 분단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과 강대국들의 식민지적 이해관계는 깊이 통찰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정치적 격변과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사회변동은 장 기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그의 환경을 무수히 바꾸어 놓을 수는 있었을지라도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그를 지배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었다. 그의 삶의 가치와 기준은 전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데 주어졌다. 그의 내면세계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을 드러내고 상대화시키는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 기려의 삶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무수하게 논의 된 교파주의적 신앙에 의해 지배받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영적인 긴장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무엇이 참된 신앙의 기준인가" 라는 질문을 가짐으로써 "무엇이 참된 신앙이 아닌가"를 직관한다. 그는 거의 평생을 교회에 몸담고 신실한 신자로서 살아갔지만 그가 나가던 교파주의적 교회에 그의 영혼을 궁극적으로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주류 기독교가 성서적 가르침을 벗어나 신학자들의 교회론에 몸을 맡기기 시작한 것은 4-5세기를 지나면서부터였다. 무엇보다도 정치 경제적 타협의 대가로 현실 정치권력으로부터 호혜적 대우를 받기 시작 하면서였다. 그 결과 서구 기독교는 예수의 평화주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상실한다. 심지어 기독교는 서구 세계를 지배할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세속 정치가들이 엄두도 못 냈던바 상대편을 몰살시키는 십자군 전쟁을 요구했던 경우도 있다. 악한 세력 앞에서 기독교 세계를 지키려면 정당전쟁이론은 불가피하다고 가르쳤던 이들이 바로 우리에게는 고귀한 가르침을 준 사람들로 알려진 암브로시우스와 그 제자격인 어거스틴, 그리고 아퀴나스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그리고 칼빈이다. 이들은 기독교적 사랑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 즉 타자들의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이들에게 있어서 타자란 하나님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된 존재들이다. 그런데 장 기려에게는 이런 논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런 논의가 신학적인 고도의 논리만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사랑의 범주를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 자신에게만 둔다면 그 밖에 모든 존재는 자신이 배타하고 제외시켜야 할 관계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간혹 가정에 충실한 크리스쳔들을 보면 자기 가족 간에는 끔찍한 배려와 사랑을 당연시하면서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매우 냉정한 태도를 가지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내 교회, 혹은 학연, 지연을 따지며 그 호혜성의 농도를 달리하는 크리스쳔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내 집단 이기성의 악의 구조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신앙을 배운 까닭이다. 그러다보니 심지어는 부자간에 목회지를 주고받는 아이러니를 범하면서도 고귀한 사명의 전달 계승이라고 주장한다. 교단 내 파벌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교단장직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목사들이 부지기수인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앙인의 배타성을 오히려 조장하고 키워줌으로써 반평화적 타락을 일상화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오늘의 기독교 사상에서 정작 예수의 평화사상이 증발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게 된다. 그런데 장 기려는 이런 신학이나 기독교인이 범하는 상식적 타락에 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자리를 조용히 떠나는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나는 장 기려의 삶을 처음부터 지배해 온 것은 바로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그리고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순교적 전통에서 배운 평화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사죄함을 받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자기 주관을 그리스도 앞에서 극소화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삶에는 공과 사, 득과 실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깊이 꿰뚫어보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눈이 살아있다. 그는 사람이나 권력자의 마음에 들려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또한 이득이나 특권을 누리려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여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넘어져도 그 순간 깨닫는다. 자신이나 자기 집단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본 까닭이다.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약자들을 향한 깊은 동정이며,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희생과 봉사와 사랑이고 정의로 나타났다. 그가 남들이 하찮게 보고 업신여기는 이들, 간질환자들이나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된 것은 그의 가슴에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누구도 차별받을 수 없다는 깊은 동정(compassion)에서 나온 평등사상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삶의 기준을 소유의 획득이나 특권과 명예를 누리는 데 두지 않는다. 그것은 차별의 논리를 수용할 때만 나타나는 결과인 까닭이다. 그리고 평화는 특권과 명예와 소유를 누리려는 데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살아갔다는 점에서 나는 장기려가 바로 예수의 마음에 근접한 사고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사실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부자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런 예수를 직면하는 것은 높은 십자가 첨탑을 세워두고 스스로 감격해하고, 많은 특권과 소유를 가진 이들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자화자찬하는 이들의 편에서 본다면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감격과 자화자찬을 예수보다 더 사랑한다. 이들은 더 높은 곳을 선택함으로써 이웃들을 낮은 곳에 버려두는 것이다. 배타와 차별의 논리가 형성되는 까닭은 개인적 이기와 가족 간의 이기성이나 혹은 집단의 이기성이 사랑의 가치보다 먼저 긍정되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파고드는 다양한 이기성은 평등과 화해와 나눔을 제한하고 거절함으로써 소수 집단이나 특수한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런 점에서 장 기려는 이기성이 침범할 수 없는 신앙에서 우러난 고귀한 삶의 태도와 품위를 지키고 살아간 사람이다. 그의 삶의 자리가 병원이 되었든, 혹은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교회가 되었든, 그는 집단적 이기성과 타협하는 영적인 타락의 구조를 너무나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수용한 사고, 그것을 그는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멀리 하였다.

나는 장 기려의 삶에 깊이 내재된 기독교적 경건주의의 틀을 보았다. 성적 방종과 합리화가 인간 본성에 근거한 보편적인 쾌락원리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장기려는 지속적인 사랑의 본질은 향유에 있지 않고 신뢰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자기를 축으로 사랑을 하는 이들은 자신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이 가능할 때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랑을 행할 수 없을 때에는 사랑이 식거나 불가능하고, 멈추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된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의 신뢰를 헌신짝처럼 내어 버리고 자기만족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장 기려가 북녘에 두고 온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에게 있어서 아내와 나누어 온 신뢰를 지키는 것이었다. 마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살듯 그는 평생을 자신을 향하여 변함없이 사랑하고 헌신하던,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던 아내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았다. 기독교 신앙의 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런 영원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사랑에 응답하듯이 북녘의 아내도 평생을 자식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장기려 앞에서 살았다. 그가 반세기에 가까운 삶을 홀로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도 산다고 했던 예수를 배운 까닭에, 사람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됨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정신적 합일을 통해서도 사랑할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었으리라.

나는 장 기려의 삶에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집착 없음은 그의 가치가 돈과 명예와 권력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여긴다. 사실상 소유와 권력욕은 인간을 기회주의자가 되게 만들거나 가장 손쉽게 변질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으로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교파주의자들이나 소종파주의자들을 막론하고 가장 경계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교파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그럴듯한 말로 이를 합리화해 주었지만 소종파 전통의 사람들은 청빈한 삶과 단순함의 신앙철학을 살기로 작정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소유와 권력이란 그것이 어떻게 미화되든지 간에 인간의 공동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계층적 차별을 불러오는 까닭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로테 죌레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적인 사랑의 실천이 정말 가능한가"라고 물은 것은 매우 정확한 질문이다. 소유와 권력이 지배하는 곳에서 소유 없는 이들과 권력 없는 이들이 뒤지거나 떨어져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 기려는 소유 없는 이들과 권력 없는 이들 편에서 권력을 이해했으므로 그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승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주어진 결정권들은 배타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인간됨을 위한 봉사에 바쳐졌다.

나는 그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기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사람들은 그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한 아기 같은 "바보," "성자," "한국의 슈바이쳐" 등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그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에게 무수한 상을 주었지만 그는 이 세상의 칭송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산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단순히 "주님만 섬기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주님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다 간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기독교인은 가족이나, 혹은 회사나 사업을 위하여, 혹은 국가를 위하여 살아간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 기려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그는 삶의 의미를 교회에서만 찾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교회 밖에서
주님을 섬기는 길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자, 병든 이들을 찾아 섬기는 일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친다. 거기서 그는 주님을 섬기는 길과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알아 본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바로 이렇게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삶의 궤도를 같이하는 삶을 가르치는 현실 교회들은 매우 적었다. 말년에 그가 섬기던 교회를 떠난 것은 그가 교회를 버린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버렸으므로 그가 새로운 교회, 즉 신앙 공동체인 "종들의 모임"에서 더 깊은 자유를 얻은 까닭이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이 책을 쓴 사람의 눈이다. 누군가의 평전을 쓰다보면 많은 이들이 덧칠하고, 삭제하는 일이 빈번하다. 자기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평가와 비판을 의식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쓰려는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 못하여 의식 무의식적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장 기려의 인간됨과 영성을 만나고 감격하며,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반년가까이 손을 놓고 있기도 했다 한다. 나는 저자로부터 장기려를 읽다가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경험한 고백을 들은 적도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장 기려를 우리에게 소개해 준 저자의 진지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둘째는 장 기려의 적의가 없는 천진난만한 신앙의 눈이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같이 단순하다. 자신의 삶에는 혹독한 해석을 가하지만,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깊은 관용의 눈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누구를 향해서도 차별이 없다. 저자는 장 기려를 살피며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모습"에 감동했다고 한다. 나는 바로 이런 장기려의 눈에서 차별과 배타가 없는 무한한 동정으로 가득한 그리스도의 눈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를 변질시키는 교회 지도자들의 눈이다. 거룩의 이름을 전용하면서 거룩함을 깊이 상실한 한국교회, 온갖 이권싸움에 눈이 어두워진 교회, 예수의 청빈의 정신을 훼손하고 소유와 탐욕에 정신을 뺏긴 교회, 순결한 신앙과 품위를 버리고 세속적 가치와 타협하고 있는 교회, 예수의 평화의 정신을 깊이 훼손하고 경쟁과 적대성을 가르치는 교회,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교회들이 오늘도 장 기려를 내쫒고 있을 것을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며 장 기려가 머물 수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누는 맑은 눈을 가진 이들이 섬기는 교회를 나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쓴이는 감리교 신학대학의 기독교윤리학 교수이며, 현재는 대만에 있는 신학대학(Tainan Theological College and Seminary)에서 방문교수(visiting scholar)로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007-03-18 17:23:17






이름
내용
비밀번호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