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8

알라딘: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알라딘: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은이)돌베개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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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사 주간 28위, 역사 top100 1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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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쪽
152*223mm (A5신)
83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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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근대를 보는 지평을 넓혀 온 고려대 국어국문과 권보드래 교수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와 기록을 한 권에 담았다. 1910년대 전 세계로 무대를 넓히고 당시의 신문 및 잡지, 재판기록, 문학작품, 국내외 선학자들의 연구와 시각자료 등을 재료 삼아 1919년 3월 1일의 한반도를 복원한다.

2000년 초 한 신문조서를 접한 것을 계기로 10년 넘게 변치 않던 3.1 운동에 대한 애정이 방대한 사료를 읽어내는 깊은 눈과 만나 거대한 서사를 일궈낸다. 특히 책을 지탱하는 16개의 기둥(선언, 대표, 깃발, 만세, 침묵, 약육강식, 제1차 세계대전, 혁명, 시위문화, 평화, 노동자, 여성, 난민/코스모폴리탄, 이중어, 낭만, 후일담)은 저자 스스로 3.1 운동을 쉽게 단언하거나 익숙한 틀로 접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다각도로 그날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
3·1 운동 전후 국내외 주요 사건

제1부 3·1 운동 그리고 세계

1장 선언: 현재가 된 미래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앙학교생 채만식/ ‘독립’과 ‘만세’의 선후 관계/ 독립선언서 비교론/「기미독립선언서」의 비밀/ 전염되고 변형되고 증식되는 선언서/ 신문과 격문의 자발적 속전들/ 언어의 힘, 운동의 테크놀로지

2장 대표: 자발성의 기적
강화도 은세공업자, 전 육군 상등병, 34세 유봉진/ “대표로서 소요를 감행하려 하니 사진을 찍으라”/ ‘대표’의 즉흥성과 비체계성/ 우드로우 윌슨의 ‘대표’/ 선교사의 양자 김규식, 조선을 대표하다/ 대표와 인민 사이 ― 유토피아적 직접성의 논리/ 매개 없는 세계 혹은 또 다른 대표

3장 깃발: 군왕과 민족과 대중
경성직뉴주식회사 서기, 24세 이희승/ 3월 1일 서울, 깃발 대신 모자를 휘두르며/ 태극기, 대한제국의 기억/ 왕의 목을 베는 대신 왕을 위해 통곡하고/ ‘공화만세’와 국민주권론/ 독립만세기와 만세 태극기, 대한제국의 비판 혹은 보충/ 공론장으로서의 3·1 운동/ 3·1 만세와 6·10 만세

4장 만세: 새 나라를 향한 천 개의 꿈
천도교구실 소사, 36세 이영철/ 독립했다면 어떤 나라를/ 희망과 요구, 불쾌와 평화의 ‘만세’/ ‘새 나라’, 토지 분배와 생활 개선에의 소망/ “만세 안 부르면 백정촌이 된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일본인들/ 파리평화회의를 논하는 농민들/ 희생의 실체론― “11인 영혼이 씻사오니”

제2부 1910년대와 3·1 운동

1장 침묵: 망국 이후, 작은 개인들
1910년 8월, ‘이상할 만큼 조용한’ 서울/ 뜻밖에 견딜 만한 식민지/ 양민으로서의 생애, 작은 성공과 쾌락/ 운동회와 탐승회, 그리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만세전’의 풍경 ― 증세, 토지조사사업, 공동묘지령/ 물가고, 동맹파업, 1918년의 쌀소동

2장 약육강식: 진화론의 갱생, 인류의 탄생
윤치호,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약육강식이 보편법칙이라면 식민지는 왜/ 경쟁하는 우리, 이 구차한 현실을 넘어서/ 걸인과 낙오자를 바라볼 때/ 문명론에서 인류의식으로/ ‘인류적 양심’과 ‘도의의 시대’/ 일본의 보편주의와 조선의 보편주의/ “이 기회가 어찌하여 체코·폴란드만의 기회이겠습니까”

3장 제1차 세계대전: 파국과 유토피아
1915년 10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스크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조선인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전쟁의 위생학, 죽음이라는 대가/ 전쟁의 도덕화, ‘폐허 이후’의 기대

4장 혁명: 신생하는 세계
메이지대 학생 양주흡, “민중이 회집하여 혁명을”/ 1911년 신해혁명, 중화체제의 종말/ 동아시아 진보 연대/ 『학지광』의 ‘혁명’/ 러시아혁명이라는 새로운 의제/ 3·1 운동과 ‘혁명’

제3부 3·1 운동의 얼굴들

1장 시위문화: 정치, 일상의 재조직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팔각정·가마니더미·고무신수레/ 산상시위와 봉화/ 물동이 준비한 시민들과 한복 입은 학생들/ 선언과 격문의 테크놀로지/ 유생 송준필, 서당 마룻장을 뜯어내 통고문을 인쇄하다/ 등사기 네트워크와 출판의 법리/ 독립의 비밀, 독립의 자금

2장 평화: 비폭력 봉기와 독립전쟁
마사이케 중위 피살 사건/ 식민자의 목숨과 피식민자의 목숨/ 그들은 왜 무기를 탈취하지 않았나/ “때리고 불 지른다고 해서 만세를 불렀다”/ 구타와 파괴, 때로는 축제 같은/ 3·1 운동 이후의 무장투쟁, 잔혹한 반격 그리고

3장 노동자: 도시의 또 다른 주체
서울 봉래동, 3월 22일 노동자대회/ 밤의 노동자, 대안적 봉기 주체/ 3월 말 서울, 투석과 횃불의 게릴라성 시위/ ‘노동의 레짐’의 변화와 8시간 노동제/ “삼베로 머리띠를 두른” 자들, 광산·농업 노동자/ 3·1 운동의 주체와 한국 사회주의

4장 여성: 민족과 자아
아산보통학교 교사, 15세 박경순/ 서울 대정권번 기생, 21세 정금죽/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 39세 어윤희/ ‘미친 누이’, 칼 휘두른 백정 아낙들/ 여성이 정치와 조우할 때 / 3·1 운동기 여학생의 소설적 재현/ 이광수와 심훈의 여성 주인공/ ‘팔 잘린 소녀’, 여성과 희생제의

제4부 3·1 운동과 문화

1장 난민/코스모폴리탄: 국경을 넘는 사람들
3·1 운동과 망명 문학, 강용흘과 이미륵/ 『초당』과 『압록강은 흐른다』, 이주자의 행로/ 헤이그 밀사 이위종과 몽골의 어의 이태준/ 민족주의 너머의 방랑/ 신분 증명과 여행 증명/ 민족국가와 치안의 경계―국민과 난민

2장 이중어: 제국의 언어와 민족의 언어
조선어를 잡아먹는 일본어/ 식민권력의 유학 정책과 한문 정책/ ‘허약한 제국주의’와 매체의 지형/ 신문관과 최남선, 『매일신보』와 이광수/ 한글운동과 문학운동, 그리고 동인지 세대/ 식민지의 이중 언어/ ‘국어를 상용하는’ 조선인들

3장 낭만: 문학청년, 불량의 반시대성
‘3·1 운동 세대’로서의 『백조』 동인/ 배재고보 3년생, 김기진의 봄/ 휘문고보 3년생, 정지현의 문학과 노동자대회/ 3월 1일 이전, 외롭게 죽어갈 때 민족은/ ‘자유’와 ‘문화’의 관계/ “피동적 문명이 무슨 만족이 있을손가”/ 패션의 정치학과 ‘꿈’의 지도/ 1929년 11월 3일 대구, 시인 이장희

4장 후일담: 죽음, 전락, 재생 그리고 다 못한 말
이토록 많은 후일담/ 배반당한 숭고―「피눈물」과 「태형」 사이/ 「민족개조론」, 변신 또는 배신/ 이광수와 신세대, 시간을 둘러싼 경쟁/ ‘만세후’로서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신세대의 기억, 유년 속 3·1 운동

나가는 글
감사의 말
미주/ 장 표제지 인용문 출처/ 시각자료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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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1919년 3월 1일, 당시 중앙학교 2년생이었던 채만식은 2시를 막 넘겨 탑골공원에 도착했다.




3·1 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 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하긴 그토록 많은 이들이 3·1 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역시 식민권력의 인구통계 약 1,600만을 적용하면 전 인구의 3.7퍼센트에서 6.2퍼센트 정도가 된다. 이후의 어떤 사건도, 1960년의 4·19혁명이나 1987년의 6·10 민주화운동도 그만한 참여도에 이르지 못했다. 3·1 운동 때는 교통·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11쪽). 접기 - 묵향
19세기 후반 이래 역사를 지배해온 것이 개별-특수-보편, 나-가족-민족(국가)-인류라는 매개의 변증법이었다면, 3·1 운동은 그 안과 밖을 가로지른 사건이다. 3·1 운동의 그들은 민족(국가)과 탈민족(국가)을 동시에 꿈꾸었고, 대표-의회정치와 자치적 질서를 동시에 지향했으며, 역사-진보와 유토피아적 파국을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13쪽). 접기 - 묵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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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권보드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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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9년 현재 고려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190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 문화의 형성을 추적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주력해왔다. 그동안 쓴 책으로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연애의 시대』,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 『신소설, 언어와 정치』가 있고, 함께 쓴 책으로『1960년대를 묻다』,『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 『미국과 아시아』 등이 있다. 오래 소망했던 ‘3·1 운동의 문화사’를 일단락했으니 앞으로는 좀 더 홀가분하게 공부할 생각이다. 지구문학의 광막한 지평에서 한국문학을 만나고 싶다. 접기


최근작 : <3월 1일의 밤>,<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미국과 아시아> … 총 2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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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3·1 운동에 가닿기 위한 10여 년의 기록
16개의 시선으로 복원한 1919년 3월 1일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근대를 보는 지평을 넓혀 온 고려대 국어국문과 권보드래 교수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와 기록을 한 권에 담았다. 1910년대 전 세계로 무대를 넓히고 당시의 신문 및 잡지, 재판기록, 문학작품, 국내외 선학자들의 연구와 시각자료 등을 재료 삼아 1919년 3월 1일의 한반도를 복원한다. 2000년 초 한 신문조서를 접한 것을 계기로 10년 넘게 변치 않던 3·1 운동에 대한 애정이 방대한 사료를 읽어내는 깊은 눈과 만나 거대한 서사를 일궈낸다. 특히 책을 지탱하는 16개의 기둥(선언, 대표, 깃발, 만세, 침묵, 약육강식, 제1차 세계대전, 혁명, 시위문화, 평화, 노동자, 여성, 난민/코스모폴리탄, 이중어, 낭만, 후일담)은 저자 스스로 3·1 운동을 쉽게 단언하거나 익숙한 틀로 접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다각도로 그날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이다. 당신에게 3·1 운동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충분히 마주한 적 없었을 이 질문에 더 늦기 전 한번은 답해야 하지 않을까? 1919년 봄, 100년 전 봉기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1910년대의 세계 그리고 1919년의 한반도
한 권으로 읽는 3·1 운동의 세계사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전국 일곱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독립선언’을 상징적인 시작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표면적인 사건에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숨어 있다. 10년간의 식민지기, 평양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발표, 고종 사망 등을 비롯해 제1차 세계대전과 파리평화회의 그리고 중국, 이집트, 헝가리 등 세계 곳곳에서 1910년대 내내 앞다퉈 벌어졌던 혁명들. 3월 1일 이후 수개월 동안 한반도 각지에서 불규칙적으로 이어진,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봉기들까지……. 20세기 세계 전반을 가로지르던 정의·인도·평화,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가 조선에도 예외 없었다는 점까지 떠올린다면 이 모든 것은 3·1 운동을 설명케하는 연속되고 중첩된 ‘사건들’이다.
『3월 1일의 밤』은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1919년을 만들어낸 전후 시간이 한 권 안에서 병치·교차되며 서술된다.「기미독립선언서」를 설명하다 미국, 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선언서로 옮겨가 비교하고(제1부 1장), 1910년 침묵으로 가라앉은 식민지기 서울에서 10년 후 역동적인 서울의 가능성을 엿보기도 하며(제2부 1장), 1919년 봄 ‘파리’에 모여든 각국의 대표들과 1919년 ‘한반도’에서 조직도 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대표를 자임하던 이들을 동일선상에 두기도 한다(제1부 2장). 또한 고종 습의와 태극기를, 박경순, 정금죽 등과 같은 실존 여성과 이광수, 심훈의 소설 속 여성 주인공을, 1915년 10월 블라디보스톡의 조선 노동자와 1919년 10월 러시아의 조선 노동자를 종횡무진 연결시키며 3·1 운동의 세계사를 써내려간다.

난폭하면서 고귀하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3월 1일의 낯선 ‘밤’ 속으로

“3·1 운동의 밤은 다채롭다. 3·1 운동 속 그들은 어스름녘 시내에서 전차에 투석하고, 어둠이 짙어질 때 뒷산에서 봉화 올리고, 밤 깊어갈 무렵 모여서 산 너머 주재소를 향하곤 했다. 그들은 잘 알려진 시공간을 벗어날 뿐 아니라 익숙한 인식론도 동요시킨다.”(들어가는 글, 11~12쪽)

100년이 지난 지금도 3·1 운동은 유관순, 태극기, 민족대표 33인, 「기미독립선언서」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표상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련 연구자들이 꾸준히 자료를 발굴하고 논문을 발표해온 것과 별개로 3·1 운동 자체가 대중들에게 역사적 관심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권보드래는 3·1 운동이야말로 영웅화된 동시에 소외된 영역이어서 편견 및 무지와 싸우는 공부였다고 고백한다. 엇갈리는 기록과 기억들, 수면 위로 오르지 못한 사연들을 우열 없이 전달하는 작업이 가장 필요해 보였다. 가령 3월 1일 서울에서는 그 어디에도 태극기가 휘날리지 않았고,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한 남대문역 시위에서야 여러 깃발이 등장했다는 점, 3·1 운동기 사망자수 집계가 553인에서 7,509인까지 자료마다 차이가 적지 않다거나, 독립선언서 인쇄 매수가 2만 1,000매인지 3만 5,000매인지 등에 대해 자신이 어떤 쪽이 맞다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그 간극을 전하고 싶었다.
박제된 이미지가 조금씩 걷어지자, ‘밤’의 시간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실제로 3월 1일 이후 9일, 10일, 23일 등의 제법 큰 봉기가 밤에 이루어진데다 그 주축은 도시의 지식인들이 아닌 노동자들이었다. 한낮의 시내보다는 밤의 산등성이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대개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다가 동이 채 트기 전에 끝나곤 했다(제3부의 1장, 3장, 4장). 그리고 그 속에는 수많은 작은 주체들이 있었다. 친구 따라 만세 한 번 불러본 게 다지만 종생 3·1 운동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그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 누군가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삼촌이자 동생이었을 이들 말이다. 김승신, 유봉진, 양봉식, 주시향, 정재순, 황승흡, 김찬석 등 권보드래는 자신이 읽고 만난 존엄한 생과 그들이 꿈꿨지만 가려져왔던 어둠의 시간으로 이 책을 부지런히 채웠다. 감히 단언하자면 『3월 1일의 밤』을 읽고 난 후, 우리는 3·1 운동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고백하게 될 것이다.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식민지의 공론장과 문화정치
3·1 운동은 대중들이 각성하고 자아를 형성해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유럽의 경우처럼 함께 모여 대화와 토론으로 붐비는 세련된 장은 아니었으나 다채로운 언어를 짓고 말과 행동이 하나 되는 식민지의 공론장을 개척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일부만 떼어내거나 이름만 빌리는 식으로 변주·변형된 선언서들을 만들었고, 몰래 구한 등사기에 인쇄를 하고 자발적으로 배포를 하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며, 홀로 선언서를 쓰고 배포한 1인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만세 선창 시에는 도시에서는 쌀가마니, 고무신수레 등으로, 농촌에서는 산상(山上)으로 높은 곳을 찾아 오르고 올랐다. 1900년대를 소생시켜 전진의 곡조를 만들기도 했고 농촌에서는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3·1 운동을 두고 부재하는 중심, 직접성과 즉각성, 불확실성을 논하는 것은 이러한 시위문화에서 기인하기도 할 터인데 권보드래는 이 현상이 동시대 다른 국가의 혁명에서는 볼 수 없는, 유례없는 사건이라 평한다.
『3월 1일의 밤』을 통해 1910~1920년대 발행된 잡지들과 문학작품들을 다수 접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각성회화보』, 『각성회』, 『자유신보』 그리고 『소년』,『청춘』『백조』, 『금성』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종다양하다. 특히 이 책의 제4부 4장에서는 저자 본연인 국문학으로 돌아가 그간 3·1 운동 이후 1920년대 문학을 ‘퇴폐와 절망’으로 수식하는 데 물음표를 던지며 이광수, 채만식, 심훈, 김동인, 한용운, 임화 등을 다시 읽어낸다.

천 개의 욕망과 평화의 꿈
100년 전 사람들은 독립에 각인각색의 열망을 투영했으나 때로는 자신이 외친 만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뜻도 모른 채 경작할 땅을 되찾고 훈장이 될 수 있는 말을 믿으며 만세를 따라 불렀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어느 순간 옆 마을에서 만세성이 들리면 변소에 다녀오다가도 술 취한 귀갓길에도 습관처럼 외치고, 때로는 식민지도 죽음도 잊은 채 마을 축제를 즐기듯 빙글빙글 춤까지 추며 희열을 느꼈다. 결사대를 자처하고 만국의 공덕을 빌며 바닷가에 뛰어드는 일가 11인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이 누리던 모든 권력과 명예를 버린 채 러시아나 만주로 떠나는 이도 있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욕망과 결심을 제대로 설명하고 해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할지 모른다. 기껏해야 모두 한 마음으로, 더 이상 지배와 폭력이 난무하지 않은 평화로운 새 나라를 꿈꿨다는 정도로 말할 수밖에.
최근 3·1 운동에 대한 활발한 해석이 진행되며 3·1 운동에 혁명성을 주목하는 경향이 짙다. 또한 100주년을 맞아 3월 1일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도 풍부해질 것이다. 권보드래는 이러한 논의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다. 3·1 운동을 10여 년에 품고 완성한 『3월 1일의 밤』이 16개의 병렬적인 키워드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날을 한 문장으로 결론 내릴 수 없음을 진작 알았기 때문 아닐까. 대신 3·1 운동의 빛나는 나날이 그리고 이 책이 지금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가령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폭력의 반대가 비폭력인지 평화인지, 배제와 차별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저마다 다른 욕망을 지닌 채 모여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접기


북플 book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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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Magnificent!
묵향 2019-06-18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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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읽는 3.1
낮에뜬별 2019-04-1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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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길고 잡다한 내용이 첨가되었지만, 3.1운동의 정신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훼손시킨 책.
저자에게 ‘친일인명사전‘과 장호철의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을 권한다
.
미남 2019-06-2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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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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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3월 1일의 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전국 방방곡곡, 여러 해외 거점에서 그토록 오래 지속된 울림이, 단순히 일시에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든 평면적 사건이었을 리 없다.

구체제를 남김없이 애도하면서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아예 선포까지 해버린 이 무매개적 대중봉기는 세계사적, 보편주의적 맥락에서 다시 독해되어야 한다. 18, 9세기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처럼, ‘있어야 할 세계‘를 둘러싼 20세기의 사상과 윤리가, 가장 순도 높게, 전 인류, 전 지구적 규모로 토론되었다는 차원에서...

권보드래 교수께서 귀한 작업을 해주셨다. 어느덧 우리도, 여러 분야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를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역량과 거리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이제 3단계를 함께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 각국 연구자들이 한국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한국 학자들과 경쟁하며 교류하는 단계이다(김두얼, ˝연구의 선진화˝, 매일경제신문, 2019. 6. 8. 자 http://m.mk.co.kr/news/opinion/2019/394933 참조). 이 책도 영어로 번역되면 좋겠다.

책이 워낙 훌륭하고 감동적이지만, 아래 첫 번째 인용 문단 마지막 문장과 관련하여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작년 5월 재정학회 월례세미나에서 명지대 경제학과 김두얼 교수께서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철도‘가 크게 기여하였다는 통계 분석 연구를 발표하신 바 있다. 아직 논문으로 출간되지는 않은 듯하나, 식민지배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건설한 철도가, 저항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면서는, 논리의 빈틈을 상상력과 유려한 글발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에서 숫자로 채워보려는 노력과 분위기가 조금 늘어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여전히 성리학자인 한국의 인문주의자들은, 통계는 기본적으로 조작이요, 거짓말이라는 내심 혹은 무의식적 저항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시행착오는 곧 인민의 고통으로 귀결되는 정책결정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빈틈은 보통, 진영에 터 잡은 선명성이 채우곤 한다... 이도 결국은 성리학주의의 연장 아닐지... 진정성이라는 수사는 가려들어야 하고,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모두가 똑같은 도둑놈에 사기꾼이라 여기는 항간의 시각에 비하면 묵묵히 최선 다하는 담백한 진국이 꽤나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대중에 정의의 사도로 알려진 분 중에도 재선 등 자신의 이해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언제라도 보이지 않게 누군가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을 숱하게 보았다. 대의를 위한 여우의 간계라 정당화하면서... 명분을 강하게 논거 삼을수록 그 명분을 위해 반대증거를 억압하고픈 유혹에도 쉽게 빠진다. 반대진영뿐 아니라 나도 이미지에 속고 있을 수 있고, 내 편이라 해서 무조건 믿을 수 있고 늘 선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익숙함과 사이다에 중독되어 사고를 중지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3·1 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 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하긴 그토록 많은 이들이 3·1 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역시 식민권력의 인구통계 약 1,600만을 적용하면 전 인구의 3.7퍼센트에서 6.2퍼센트 정도가 된다.
이후의 어떤 사건도, 1960년의 4·19혁명이나 1987년의 6·10 민주화운동도 그만한 참여도에 이르지 못했다. 3·1 운동 때는 교통·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 - P11

19세기 후반 이래 역사를 지배해온 것이 개별-특수-보편, 나-가족-민족(국가)-인류라는 매개의 변증법이었다면, 3·1 운동은 그 안과 밖을 가로지른 사건이다. 3·1 운동의 그들은 민족(국가)과 탈민족(국가)을 동시에 꿈꾸었고, 대표-의회정치와 자치적 질서를 동시에 지향했으며, 역사-진보와 유토피아적 파국을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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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19-06-20 공감(1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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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근대’를 사랑하는 법: 『3월 1일의 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진부하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연애소설만큼.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낡은 말에 기꺼이 속아주는 이유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정말로 첫눈에 반해서라기보다는, 그럴 수 있는 상대방이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치 주문처럼 저 말을 되뇌고 또 되뇐다. 하지만 그런 마법 같은 일이 과연 실제로 벌어질까? 설사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서 강렬한 스파크가 튄다 해도,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지라 이런 말 꺼내기 민망하지만, 사랑이란 익숙한 존재가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설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잠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알아보려 아등바등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갈 뿐임에도 이 공부가 전혀 헛되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알아가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이전과는 다른 빛깔로 채워져 간다.

낯설음에 놀라워하고, 알아감에 기뻐하는 이런 사랑은 비단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사람은커녕 생물도 아니고, 심지어는 형체조차 없다 해도 우리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간된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 역시 3.1 운동이라는 사건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권보드래의 오랜 팬으로서, 나는 그가 언제쯤 자신의 숙제라 이야기하던 3.1 운동의 문화사를 퍼낼지 늘 애가 달던 터였다. 책을 읽고 나서야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그가 이런 글을 쓰려고 그토록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 본인도 이야기하듯 『3월 1일의 밤』은 3.1 운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앎”을 더하고자 쓰인 책은 아니다. 학술서가 아니기에 서술은 때때로 중구난방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한껏 실려 있는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감히 이야기하건대,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바로 이러한 두서없음이다. 저자는 기존의 미끈한 내러티브를 답습하는 대신, 3.1을 둘러싼 복잡하고 모순적인 목소리들을 모두 끌어안는다. 고작해야 유관순 ‘누나’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3.1 이해는 불안과 희망, 냉소와 기대, 욕망과 숭고가 뒤엉킨 무수한 꿈들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3.1 운동을 새롭게 알아가기 위해, 그럼으로써 그를 보다 깊게 사랑하기 위해 저자는 렌즈를 돌려가며 줌아웃과 줌인을 반복한다. 세계사의 맥락 속에 3.1을 위치 짓는 동시에, 개개인의 삶 속에서 3.1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파고드는 것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와 이 자리에 펼쳐 보이는 1부 1장 <선언>에서 이미 지나간 과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4부 4장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세계와 개인을 분주히 오고가며 3.1 운동에 너비와 깊이를 부여한다.

저자에 따르면 1910년대는 세계적인 혁명의 시대였다. 1910년 멕시코혁명을 시작으로 1911년 신해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핀란드와 독일, 헝가리혁명에 이르기까지 세계각지에서 기성체제를 타파하려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운동이 잇따라 발생했다. 또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당시 사람들에게 단순한 종전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문명’을 자임하며 전 세계에 오만하게 군림하던 유럽은 누구보다 추하게 자멸했다.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의 제국과 정의의 제국을 자임했다. 체코, 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등 세계 각지의 식민지와 속령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들끓었다.

이처럼 혁명의 에너지가 넘쳐나던 1910년대, 일본의 지배에 놓인 조선만은 유독 고요하고 안온했다. 뜻밖에도 식민통치는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기쁨을 누리는 소박한 양민(良民), 개인과 가족 외에는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착실한 선민(善民) 되기를 요구했다. 게으르고 불결한 조선인이라는 모욕을 받아들인다면, 공적인 일에 목소리를 내려는 욕구를 억누른다면, ‘내지’가 위험에 처할 경우 가장 먼저 내쳐질 신세라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면 충분히 괜찮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침묵은 결코 무기력한 순응을 의미하지 않았고,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쌓여간 저항의 에너지는 결국 1919년 3월 한꺼번에 폭발했다. 조선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과 가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과 연대했고, 비로소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식민권력은 일체의 사회단체를 허용치 않았기에 운동을 지휘할 지도부가 부재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대표자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했다. 바야흐로 너도나도 대표를 자임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대표하는 세계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의 꿈을 그야말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화정을 지지했지만, 독립을 지키고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왕정복고가 불가피하다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공화정이라 해도 그 구체적인 모습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비단 정체(政體)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간 것이 아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근거로 서구문명의 종언을 고하는 거대담론과 공동묘지가 아닌 선산에 부모를 묻겠다는 소박한 요구가 같은 시공간에 나란히 존재했다. 사람들은 ‘일제의 폭력’과 ‘근대의 폭력’ 모두에 저항했고, 양자를 굳이 구분하려 들지 않았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독립(獨立), 개조(改組), 도의(道義), 공존(共存), 균분(均分)과 같은 말들이 희망과 불안을 머금은 채 거리를 부유했다.

물론 가능성은 가능성으로만 남았을 뿐, ‘개벽’은 결코 도래하지 않았다. 조선은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고, 세계 역시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3.1 운동과 함께 터져 나온 무수한 말과 글들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3.1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중심’과는 다른 ‘주변’의 근대를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한 생생한 증언록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주변의 근대는 ‘수탈’과 ‘개발’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이 황폐화되었든 윤택해졌든 간에 이를 실현한 x변수는 결국 중심이라는 점에선 ‘수탈’과 ‘개발’이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주변의 ‘모던함’에 주목하는 문화사나 중심(제국)과 주변(식민지)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제국사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중심의 역사를 그대로 주변에 이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권보드래는 이 x(중심/제국)→y(주변/식민지)라는 도식 자체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보다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중심의 그림자를 애써 걷어내려는 시도는 결국 꼴사나운 자기연민이나 광기에 찬 폭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대신 그는 y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벡터에 주목한다. x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해서 y가 이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아니다. y, 즉 주변이라는 위치 자체로부터 비롯된 힘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변은 거의 언제나 중심에 비해 미숙하고, 중심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위치 덕에 주변은 중심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3.1을 전후해 터져 나온, 설익었지만 생생히 살아 있는 목소리들이야말로 한반도의 근대인 것이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 근대에 거대한 뿌리를 박아야 한다, 제3한강교의 철근기둥도 좀벌레의 솜털로 느껴질 만큼 거대한 뿌리를.

아울러 다른 주변과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단순히 3.1 운동이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x→y의 도식을 그대로 반복할 게 아니라, 세계 각지의 y들이 만들어낸 변화무쌍한 벡터를 넓은 시야로 아울러야 한다. 저자가 3.1에 닿기 위해 프랑스혁명과 아이티혁명,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차이나의 역사를 공부한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친구가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와 함께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친구도 필시 어느 소설이나 영화에서 들었던 것이겠지만, 이제 와서 출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 싶다. 『3월 1일의 밤』을 읽으며 나는 한반도의 근대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말라던 윤치호나 민족개조를 외친 속물교양 이광수뿐 아니라, 일제가 나무를 꺾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무명씨까지 말이다.

잘못 쓴 거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제대로 쓴 게 맞다. 그동안 내가 마음을 주고 관심을 쏟아온 대상은 어디까지나 윤치호나 이광수 같은 사람들이었다. ‘트랜스내셔널’한 코스모폴리탄으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는 내 모습이 이들 식민지 지식인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아, 물론 윤치호와 이광수는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라 나랑 비교하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윤치호와 이광수는 물론이고, 이들을 좌절케 하고 끝내는 ‘흑화’시킨 식민지 조선 역시 사랑하려고 한다. 주변이라는 좌표로부터 비롯된 가능성과 한계를 낯설게 봄으로써 한반도의 근대를, 나아가 한국어 화자로서의 나를 조금 더 좋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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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 2019-04-2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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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읽지 못했으나 새창으로 보기
문학을 경유한 현실 인식에 좀 더 눈이 간다. 궁금하다. 우선 도서관에 책을 신청해야 겠다.
puttyclay 2020-06-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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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
등록 2019-03-05 03:47 수정 2020-05-02 19:29

문학평론가인 권보드래가 역사가의 몫이랄 수 있는 3·1운동 연구에 꽂힌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3·1운동 신문 조서를 보곤 ‘당시 시위에 나섰던 사람들이 과연 누군가’라는 물음표가 커다랗게 찍혔다. “조야하면서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하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

보수적으로 집계하더라도 당시 인구(1600만 명)의 3.7~6.2%(60만~100만 명)가 만세 시위에 나섰다. 우리는 이들이 나선 이유를 조금도 의심 없이 “독립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신문 조서를 보면, 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만세를 부른 게 아니라 “독립이 된 줄 알고” 만세를 부른 이들도 많았다. 관공서 앞에 독립선언서가 나붙자 군수가 “독립됐다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상급 기관에 공식 문서를 보낼 정도였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으나, 만세꾼들의 정서는 한껏 고양됐다. 3·1운동을 배경으로 쓰인 소설들은 100년 전 3월 봄밤의 흥분을 이렇게 전한다. “사면팔방으로 꽃밭처럼 불길이 타오르는데 마치 아우성을 치듯 만세 소리가 그 속에서 들끓는다. 이 근감한(흐뭇하고 보기 좋다는 뜻) 횃불들은 ‘합방’ 전에 성행하던 ‘쥐불놀이’보다도 더한 장관이었다.”

을 쓴 권보드래는 왜 사람들이 이처럼 목 놓아 만세를 불렀는지, 세계사적 맥락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 만세 운동이 이후 세대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사회 변화를 일으켰는지 탐구한다. 1910년 한일병탄 이래 일제는 도로·철도·수도 건설 등 근대화를 서두르는 한편, 떠들썩한 대중 행사를 열어 조선인을 길들이려 했다. 하지만 증세·토지조사사업·공동묘지령·쌀값 폭등·독감 유행·차별 등 일상적 폭력에 조선인들의 분노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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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는 또한 멕시코혁명(1910)·신해혁명(1911)·아일랜드 봉기(1916)·러시아혁명(1917)이 줄을 이었고, 1919년 한 해만 해도 이집트혁명·헝가리혁명·중국 5·4운동 등이 잇따르며 변화의 기운이 만개한 시기였다. 비록 시위를 이끈 청년들이 기대했던 대로 정치조직·사회조직의 근본적 변혁에는 이르지 못했으되, 3·1운동은 새로운 역사의 주체들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웠다.

“삼베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나선” 노동자, 손가락을 베어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나선 아낙, 패물을 팔아 마련한 상복을 입고 거리로 나온 기생, 소 잡을 때 쓰던 칼을 휘두르며 나선 진주의 백정촌 여성…. 시위 참여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기생 정금죽이나 현계옥, 강향란이 3·1운동 직후 유학을 가거나 정치 활동에 투신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몇 년 뒤 진주가 백정해방운동의 발상지가 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3·1운동이 없었다면, 1910년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자유롭게 손발을 휘두르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어쩌면 태극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조차 몰랐을 수 있다.

3·1운동 100돌을 맞은 지금, 지은이는 “당시 대중이 목격했던 세계와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에 대해 발본적으로 논해보자”고 제안한다. 아마도 3·1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다보면, 그 길은 21세기 촛불광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100년 전 사건이 현재진행형인 이유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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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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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돌베개, 2019)를 읽고
            "조야하면서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한"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당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조야하면서도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하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 익숙한 방법으로 이 놀라운 세계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해보였다.”(p.7)

3.1운동의 여러 가지 얼굴

3.1운동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1919년 3월 1일에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우리나라의 민족 독립운동.” 대다수 한국인이 상상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작 누가 어디서 얼마나 무슨 일을 했는지, 그 배경은 무엇인지, 효과는 어땠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일사불란했는지 무질서했는지, 폭력은 없었는지 등등 막상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른다. ‘민족 독립운동’이라지만, ‘독립’의 주체가 집단인지, 개인인지 별로 구분을 하지 않았다. ‘만세’를 외쳤다는데 ‘만세’가 무슨 의미인지 별로 고민해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막상 속으로 들어가면 잘 모르겠는 사건 중의 하나가 3.1운동이다. 바로 이 3.1운동의 속살에 대해 낱낱이, 생생하게, 두루 규명하고 있는 책이 권보드래의 『3월1일의 밤』이다.
이 책은 독립운동의 주체를 그저 민족, 조선, 집단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개인, 학생, 노동자, 나아가 여성 등 다양한 주체들을 발굴해 현장감 있게 해설한다. 그저 ‘독립’이라는 말이면 충분했던 기존의 상상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립 이후’에 무엇을 꿈꾸었는지, 느닷없이 조선에서 유일하게 벌어진 일인지, 세계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보여준다. 3.1운동은 그만큼 다층, 다면, 입체적이라는 뜻이고, 이 책이 그 복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3.1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시간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이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11)
3.1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누군가 만세를 외치는 장면만으로 다 규정할 수 없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숭고하기만 했느냐면 그렇지도 않고, 모두가 목숨을 건 위기상황이었냐면 그렇지만도 않다. 당시 식민권력의 통계로 1600만 중에 60만~100만명, 전 인구의 3.7~6.2퍼센트가 참여했으니, 3.1운동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축제’였고, 때로는 ‘폭동’이기도 했다.(338) 

새로움은 밖에서 온다?
이 책을 읽으며 뜬금없이 떠올랐던 것은 ‘화물숭배’(cargo cult)였다. 화물숭배는 새로운 물건을 싣고 오는 배나 비행기를 기다리는 원시 부족의 종교적 의례이다. 이런 행위는 새로움이 밖에서 온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밖에서 온 새로움이 잠재해있던 기대와 희망을 촉발시키고 재구성시킨다. 이 책을 보며 화물숭배가 떠오른 것은 밖에서 들려온 소식에 안에서 힘을 얻게 되는 구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3.1운동 당시 한반도를 들뜨게 만든 외부의 사건은 ‘민족자결주의’였다. 
민족자결주의는 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의 정치적 운명은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지자, 조선에서도 이미 독립이 된 냥 뛰어나온 이들이 많았고, 느닷없이 쏟아져 나와 이제 일본은 물러가야 한다고 외치는 목소리도 컸다. 일본 경찰조차도 영문을 몰라 방관하기도 할 정도였다. ‘이미 독립’했다는 소문이 ‘곧 독립’한다는 소문과 뒤섞이면서 군중의 환호는 배가되었다. ‘환희’, 이 책을 펴들고 가장 신선하게 와 닿았던 3.1운동의 이미지이다. 저자는 당시 중앙학교 2년생 채만식의 글을 아래처럼 재구성하고 있다. 
3월 3일에 있을 고종의 장례 및 그 습의(習儀)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해 있던 사람들은 이 소동(1919년 3월 1일 학생들의 주동이 되어 만세소리가 막 터져 나오는 상황)을 보며 처음에는 아마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상복 복제가 공포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백립(白笠)을 쓰고 ‘인산(因山) 구경 차’ 상경한 촌로들, 그들 중 하나가 채만식에게 물었다. “여보 학생, 이 웬일이요?” 채만식은 70세도 넘어 뵈는 노인은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는데, 채만식의 말을 듣고는 “당장 표정이 환희”로 바뀌었다. 감정에 복받친 듯 “어? 허어! 그럼..... 그럼” 하며 더듬거리더니 이내 지팡이를 높이 쳐들곤 “나두 만세! 만세!”하고 부르짖었다.(21)
‘선언’으로 앞당긴 가상적 독립
이 장면에서 가장 생생하게 그려지는 장면은 기쁨에 찬 얼굴이다. 탄압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오간 데 없이, 정말 환희의 만세를 불렀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 책은 “독립하고자 만세를 불렀다”는 기존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독립되었으므로 만세를 부른”(28) 당시의 환한 표정들을 독자에게 대번에 각인시킨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첫문장도 ‘선언’으로(“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시작하면서도, 정작 ‘민족대표33인’은 독립을 ‘청원’할 것인가, ‘선언’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은 어느 샌가 한둘씩 모여들어 만세를 부르며 그 ‘선언’을 앞당겨 구체화시켰다. 거대한 시위 행렬을 이루며 이미 이루어진 ‘선언’의 급진성을 최대치로 고양시켰다.(51) 그 배경에 있는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였다. 
당시 조선의 민중은 윌슨에, 아니 미국에 큰 기대를 걸었다. 윌슨을 “아버지처럼 보고 있다”고도 하고, 미주의 한인들은 ‘윌슨을 하나님처럼 우러러보고 있었다’고도 한다. 물론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유럽의 윌슨 지지자들도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65) 그만큼 1차세계대전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윌슨의 역할은 컸다. 
물론 민족자결주의는 1차대전 패전국인 유럽 내 독일과 오스트리아 식민국의 독립을 염두에 둔 제안이었다. 일본의 식민지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한편에서 보면 조선의 순진한 민초가 잘 모른 채 마치 독립이 이미 된 것인 냥 착각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오해와 착각이 3.1운동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민족자결주의가 (유럽) 각국의 독립을 성사시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각 민족의 독립운동에 부응하여 민족자결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온당하다”(220)고 평가하듯이, 3.1운동은 조선 민중의 자발적 주체성을 잘 보여준다. 민중은 이미 만세를 부를 준비가 되어있었던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은 당시 세계적으로 작용하던 ‘양육강식론’, ‘침략주의’, ‘강권주의’가 ‘구시대의 유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볼 줄 알았다. 이런 안목이 있었기에 3.1운동은 식민지 세력의 비도덕성을 강하게 압박하는 민중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자결주의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비폭력, 민중의 성숙함
주지하다시피, “억압자의 폭력과 피억압자의 폭력 사이 비대칭은 어디서나 발견되는 현상이다.”(324) “식민자(일본)과 피식민자(조선)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식민자는 하나의 폭력을 백배의 폭력으로, 한 명의 죽음을 수십·수백·수천의 죽음으로 되갚으려 한다...”(325-326) 
그런데도 3.1운동의 피식민자들은 가능한 한 무력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기미독립선언서」 공약3장에서는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당부하고,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어디까지든 광명정대하게 하”라 당부했다. 이 선언 인쇄물이 각지로 퍼지면서 여러 가지로 각색되어 전해졌다: “정의와 인도에 따라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찾는 것이므로 단연코 어떠한 일에도 난폭한 행동은 일체 해서는 안 된다”든가, “때리는 일과 부수는 일 같은 폭행은 조금이라도 하지 말”자는 다짐으로 변주되었다. 저자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것은 동학농민군의 ‘4대명의’에 담긴 불살생의 윤리에까지 소급되는 정신으로 보인다. 4대명의의 핵심은 가능한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군의 4대기율: “⓵ 매번 적을 상대할 때 우리 동학 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가장 으뜸의 공으로 삼는다. ⓶ 비록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의 목숨만은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⓷ 또한 매번 행진하며 지나갈 때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해치지 않는다. ⓸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 사는 동네 십리 안에는 절대로 주둔하지 않는다.” 박맹수, “전봉준의 평화사상”, 서보혁·이찬수 편, 『한국인의 평화사상1』(인간사랑, 2018), pp,273-274. 
3.1운동도 비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큰 폭동으로 확대될 법도 했지만, 3.1운동의 조선인들은 무기를 탈취하지 않았다.(327) 가끔 “우발적 무기 탈취가 있었으나, 집단적이고 목적의식적인 탈취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에 의한 총기나 화기 사용 기록도 거의 없다”, “진압군의 총격 없이 시위 대중이 먼저 파괴·살해행위를 한 일은 더더구나 드물었으며 조선인에 의한 일본인 민간인 희생은 전무했다”, “3.1운동의 비폭력은 체계적이거나 수미일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그것은 적대성의 철폐를 요청하고 차별과 공포의 통치성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정치적 항의이자 문화적 대안이었다.”(330-333) 동학농민혁명에서처럼 운동의 와중에 굴곡은 있을지언정 가능한 한 비폭력을 추구하고자 했다. 3.1운동에서 조선 민중의 정신적 성숙성을 읽을 수 있다고나 할까. 
앞당긴 독립과 그 주체
저자는 독립의 ‘선언’이 “오지 않은, 그러나 와야 할 미래를 당겨쓰는 언어적 양식”이라고 규정한다. 딱 와 닿는 말이다. 그렇게 선언하려면 미래에 대한 비젼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용기있게 결정해야 한다. 용감한 선언이 미래를 당기는 언어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선언’에도 세계사적 맥락이 있고 실제로 전개되어온 역사가 있다. 저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미국, 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선언서와 비교하고(제1부 1장), 1919년 봄 파리강화회의의 상황과 한반도의 관계도 서술한다.(제1부 2장). 중화체제의 종말을 알린 ‘신해혁명’, ‘제1차세계대전’, ‘러시아혁명’ 등도 다룬다. 선언의 역사를 전환 시대의 특징으로 보며 3.1운동을 세계사와 연계시킨다.(33) 그러면서 세계사를 단순히 3.1운동의 ‘배경’에 두지 않고, 3.1운동의 ‘안’으로 가져온다. 그래서 3.1운동도 세계사적 흐름을 소화한 사건이 된다. 3.1운동은 선언의 내용을 앞당기고 비젼을 구체화한 “일종의 가상적 독립이었다.”(173) 가상이되 강력한... 이렇게 저자는 ‘선언’의 형식으로 독립이라는 미래를 현재의 전국민적 사건이자 세계사적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역사적, 문학적 감각을 결합해 총결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 3.1운동의 주체도 다시 보게 해준다. 운동의 주체를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에서 자발적 참여자인 민중으로 옮아간다. 종교인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 중 상당수가 운동 직전인 2월 말에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그 중 일부는 선언서를 제대로 읽어본 일도 없이 서명하기도 했다. ‘선언’만으로 만족하자거나 ‘청원’의 방식을 취하자던 이들도 있었다. ‘대표성’이라는 것도 그저 쓴 말일 정도로 3.1운동의 시작은 임의적, 즉흥적, 때로는 다소 안이하기까지 했다.(63-64, 300) 그러나 그 선언이 민중의 자발적 봉기로 이어지고, 그 자발적 봉기가 33인을 ‘대표’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3.1운동은 33인의 지도력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중의 자발적 선택의 과정이자 결과였던 것이다.(84) 
그 민중은 단순히 민족주의 집단이 아니었다. 그 구성원은 다양했다. 저자에 의하면, 3.1운동은 ‘도시’를 근거지로 ‘학생’과 ‘노동자’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부각시켰다. ‘노동자’라는 ‘사회·정치적 대중’을 탄생시키면서, 한국 사회주의의 출발을 알린 사건이기도 했다.(371-383) 3.1운동은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 탄생한 사회적 세력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한국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읽어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박경순(387), 정금죽(389), 어윤희(393) 등과 같은 실존 여성을 발굴하고, 이광수, 심훈 등의 소설 속 여성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411) 통계 수치상 운동에서 여성의 몫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418-419) 저자는 3.1운동을 그저 ‘유관순 누나’의 만세운동이 아니라, 다수 용기있는 여성들의 사건으로 읽어낸다. 3.1운동이 한반도의 새로운 상황을 단박에 표출하는 거국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종합하고 의미있게 재구성한다. 
독립 이후와 만세
이 책은 3.1운동과 관련하여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선입견을 교정시켜준다. 그 하나가 3.1운동과 태극기의 관계이다. 흔히 3.1운동을 태극기 흔드는 모습과 연결시키곤 한다. 하지만 3월 1일, 적어도 서울 하늘에는 태극기가 휘날리지 않았고,(88) 군중은 손수건이나 모자를 흔드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3월 1일 오후 1시경 평양의 독립선언식에서 태극기가 처음 사용되었고, 그 뒤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준비되다가 3월 말 경 서울에서도 태극기가 대거 등장했다. 
다른 하나는 민중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칠 때 그들은 ‘대한제국’으로의 복귀를 원했었는지, 새로운 공화제를 바랐었는지의 문제이다. 저자는 “3.1운동 당시 ‘만세’와 ‘독립’은 미정형의 유토피아적 충동”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인지 모를 ‘만세’는 감염되듯 퍼져나갔고, “새로운 자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막연하나 열렬한 동경을 지시하는” ‘발성법’으로 작용했다.(127-131) “3.1운동의 대중이 ‘독립’이라는 말로 꿈꾸고 ‘만세’라는 구호로써 소환하고자 했던 새 나라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신세계였다.”(147) 그들은 “대한제국의 회복을 향하기보다 일찍이 없었던 새 나라의 건설을 겨냥했다.”(131) 새나라는 “모든 층위에서의 개조”(143)이자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현세주의적 기대”이기도 했다.(135) 이것은 자유의 상태이기도 했다. “3.1운동을 통해 가장 흔하게 목격되는 단어 중 하나가 ‘자유’”였는데, 이 때의 자유는 피식민 시대로부터의 독립과 동의어였다. 시위 참여자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도 ‘자유’ 때문이었다.(501) 한국 사회에서 자유는 식민지적 억압을 몸으로 느낀 이들의 투쟁적 언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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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종합적이다. 현대문학자의 작품이라기에는 재료가 다양하고 다루는 범위도 넓고 깊다. 1910년대 당시의 신문, 잡지, 재판기록, 문학작품, 국내외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와 시각 자료 등을 망라했으니, “3.1운동에 대한 세계사적 해석과 문화론적 접근을 표방한다”(555)는 저자의 의도가 결코 무색하지 않다. “3.1운동을 그 세계사적 맥락으로 되돌리고 3.1운동에서 토의된 정치·경제·문화적 쟁점들을 오늘에 되살려” 보고 싶었다(555)는 저자의 희망도 분명히 이루었다. 혼자서 이 다양한 장르를 어떻게 섭렵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을 두고 “혼자 쓴 총서”라 했던 홍종욱의 평가는 실로 와 닿는다. ‘국문학자’다운 유려한 글솜씨와 문학적 감성도 돋보이지만, 한국학의 제 영역을 두루 소화한 진정한 의미의 ‘한국학자’다운 글쓰기라고 하는 편이 더 옳아 보인다. 향후 근현대 문학과 한국사는 물론 한반도 평화사 분야에도 스테디셀러가 될 것 같다.

                 <내일을 여는 역사>(2019년 겨울 통권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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